폭력은 왜 지속되는가. 이미 폭력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린 이들에게는 무용한 질문이다. 한 발 빗겨선 채 TV나 스크린 등을 통해 폭력을 감상하는 이들에게는 폭력을 낳는 여러 가지 기제가 뭐냐는 고민들이 의미가 있겠다. 그러나 그런 진단과 해결은 폭력의 고리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사후적이다. 구조적 폭력이니 물리적 폭력이니 하는 식으로 폭력의 층위를 정하고, 구조를 바로 잡으면 폭력은 중단될 수 있다는 언명은 무책임하기 쉽다. 폭력의 내부자들의 눈에 명확히 보이는 것은 그 구조나 원인이 아니라 만인의 만인에 대한 증오다. 저들의 증오, 우리의 증오, 나의 증오.

 

 

앞으로의 폭력과 증오를 방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미 진행 중인 고통은 방기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진정으로 폭력을 없애고 싶은 소망을 가진 사람이라면 가장 먼저 관심을 가지는 것은 폭력 행위가 일어나는 순간의 메커니즘일 것이다. 영화 <증오>가 폭력을 다루는 방식이 바로 그러하다. <증오>는 폭력의 구조 논의 하에서 익명화, 범주화되기 쉬운 당사자들의 경험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영화는 폭력을 해결하기 위한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문명사회가 상식이라고 부르짖는 규칙과 도덕이 현실적으로 무력한 것임을 보여줄 뿐이다. 갖가지 폭력과 증오에 무감각하게 노출된 이들에게,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존엄성 같은 건 저질 농담보다도 못한 소리임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은하수에서 길을 잃어버린 개미들에게 권총이 쥐어졌다. 모두가 처음부터 남을 해치기 위해 총을 드는 건 아니다. 총을 쏠 지 말지는 총을 손에 쥘 때 결정되는 게 아니라,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에 결정된다. 총을 손에 넣은 이상, 총이 만들어진 이상 언젠가 방아쇠는 당겨지게 돼 있다. 빈쯔가 결국 위베르에게 총을 넘겼을 때, 긴장감이 감돌던 그들의 하루는 그렇게 무사히 마무리되는 것 같았다. 위베르는 개중에서는 가장 이성적인 조정자로서 폭력과 증오, 착륙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가는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종국에 방아쇠를 당긴 사람은 위베르였고, 그가 던진 총알은 친구의 머리에 박혔다. 이런 우연이 폭력의 윤리다. 삶이 여러 우연에 좌지우지 되듯 폭력도 마찬가지다. 그 안에서 살아남으려면 진흙탕에 구르더라도 이 악물고 아득바득 달려드는 거고 못하겠으면 깨끗이 포기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손 씻고 조직 폭력배를 나온 사람을 가만 내버려두는 이야기는 본 적이 없다.

 

<증오>는 출구 없는 폭력의 세계를 그린다. 공중화장실에서 세 친구가 만난 노인은 수용소로 끌려갔던 때의 일을 이야기한다. 기차가 정거하는 동안 포로들은 밖으로 나와서 용변을 볼 수 있었다. 그 때 멀리 도망가 버리면 되는 게 아닌가, 왜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 건가 의아했다. 조금 멀리 가서 용변을 보고 온 포로는 결국 기차를 놓쳤다는데, 돌아오지 않는 포로에게 총질을 하는 것도 아닌데 왜 다들 그 틈을 타 탈출을 시도하지 않았던 건가 싶었다. 똥을 싸느라 기차를 못 탄 남자는 얼어 죽었다. 눈앞의 폭력에서 잠깐 벗어났다고 해서 추락을 피할 수는 없다. 도망갈 기회를 포기했던 이들은 폭력에의 굴종을 내면화한 게 아니라, 추락의 종착지ㅡ죽음을 지연하기 위해 애썼던 것이다. 그렇다고 수용소에 끌려가는 거나 벌판에서 얼어 죽는 거나 매한가지는 아니다. 죽음과 함께 살면서도 남에게 엉덩이를 까고 똥오줌을 갈기는 모습을 보일 수 없었던 남자의 수줍음이란. 그 상황에서도 지키고 싶었던 게 있었던 그 남자는 고결한 구석이 있는 인간이었다. 그래도 어쨌든 죽었다.

 

우리는 <증오>의 세 친구를 지켜보는 내내 불안한 기운을 감지하지만 당사자들은 스스로의 삶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자각하지 못한다. 횟감이 될 우락부락한 물고기 두 마리가 수족관 안에서 격렬하게 치고받고 싸우고 있다면, 곧 죽을 텐데 죽도록 싸우는 게 우습다고 할까. 멍하게 있다면, 제 죽을 일도 모른 채 멍하니 있다가 멍하니 죽는 꼴도 우습다고 할까. "추락하는 건 중요한 게 아냐. 어떻게 착륙하느냐지." 이는 추락할 수밖에 없는 이들의 자기위안이다. 어떻게 착륙하든 추락이 시작되는 순간 망가지는 건 정해진 순서다. 증오와 폭력으로 점철된 세계가 세상의 전부는 아니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그러하다.

 

우리도 <증오>의 세 친구들처럼 우리 삶의 귀결 따윈 잘 생각하지 않으며, 우연한 폭력이 인생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갈 거라는 예측은 더더욱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삶이란 모두가 아슬아슬하게 폭력을 감춘 위태로운 기반 위에 서 있음을 <증오>는 거칠게 경고한다. 영화는 끝났다. 그럼에도 16년 전과 지금의 프랑스, 16년 전의 세계와 지금의 세계가 별반 다를 것 없다면, 그것은 한 발 빗겨선 채 폭력을 감상하고서도 '폭력은 왜 지속되는가. 어떻게 막아야 하는가' 열심히 고민하지 않은 이들의 탓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1/08/11 13:28 2011/08/11 13:28

Trackback URL : http://blog.jinbo.net/peel/trackback/337

  1. 모아이
    2013/06/16 18:56 Delete Reply Permalink

    상당히 잘 쓰셨네요^^
    잘 읽고 갑니다.


  2. 2013/09/02 22:53 Delete Reply Permalink

    그렇게 위로할수밖에 없는 추락하는 이들의 현실.
    슬픈 얘기네요.

« Previous : 1 : 2 : 3 : 4 : 5 : 6 : 7 : 8 : 9 : ... 44 : Nex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