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붕괴 _ 최승호

 

  만약 내가 담쟁이덩굴이었다면 담장 아래 캄캄한 뿌리를 박고 벽을 기어올라가야 했을 것이다. 천 개의 손으로 담장 벽을 짚으며 나는 올라가도 올라가도 벽뿐인 벽을 더듬거려야 하지 않았을까. 만약 내가 담쟁이덩굴이었다면 벽을 기어오른 다음에는 수많은 손들로 허공을 더듬거렸을 것이다. 그리고 더듬거리던 여름이 지나 아무것도 거머쥐지 못한 가을이 오면 바람 속으로 우수수 떨어지는 붉은 손들을 너그럽게 받아주는 커다란 손ㅡ무한으로 펼쳐진 손ㅡ이 있다고 믿었을까.

 

 

   담쟁이덩굴의 불안과 외로움을 자주 떠올린다. 남의 고행을 내 자양분 삼는 것은 좀 그렇지만, 위로가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덩굴류의 식물을 마주칠 때마다 안쓰럽고 대견스럽고 정겹다. 봄 초입에 주먹만했던 새끼였던 게 어느새 새끼 밴 배가 볼록하니 다니는 동네 고양이를 봐도 그렇다. 청춘을 지나 붉은 여름을 거쳐 백추를 눈앞에 둔 것들.. 다 나보다 어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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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1 21:10 2011/06/11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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