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를 놓쳐 시간 때우러 들어간 서점에서 올해 이상문학상 수상집을 봤다. 작년 이맘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일년이 지났구나 잠깐 씁쓸한 후에, 표지를 장식한 대상 수상자의 이름에 살짝 놀랐다. 책을 펴 읽기도 전에 수상의 의미가 먼저 마음에 다가와 시큰했다.

공지영 별로다, 싫다, 라고 말하는 이들을 종종 봐왔다. 대다수가 책 좀 읽었거나 글을 쓰고 싶어했던 그들(그들의 앎과 열정에 대한 조롱은 전혀 섞지 않은 표현이다)의 공지영에 대한 평가에 물론 나름의 이유는 있을 테다. 수많은 곳에서 별 내용도 없이 지겹게 반복되는 이야기는 생략하자. 어쨌든 내가 보기에 내키지 않는 말투로 공지영을 논하는 이들 심리의 근저에는 문학에 대해서든 일상 관계에서든 솔직한 인간에 대해 사람들이 종종 갖는 경멸 섞인 시기가 있다. 그리고 다른 것에 대한 부정으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갖추려는 어리숙함과, 순수문학의 비인기 근성에 너무 물든 탓인지 대중의 관심을 과하게 받는 공지영의 작품에 대해 거리를 두려는 일말의 의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태도는 무언가에 대해 나 역시,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으로 비난할 일은 아니다.

다행히 버스 시간까지 시간이 많아 나는 서점에 서서 아주 천천히 그녀의 소설을 읽었다. 그녀가 써내던 장편소설들을 떠올리며 이번엔 어떤 이야기일까 궁금했던 기대는 배신당했다. 가끔 소설을 통해 언뜻 비춰 보였던 작가의 삶, 내가 안다고 할 수 없는 옹이진 삶이 짧은 글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그것은 오롯이 그녀 자신을 위한 소설이었다. 진실된 마음으로 스스로를 위해 쓰는 일은 남을 위해 쓰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며, 그런 것을 해낸 글을 저절로 남을 위한 게 된다. 부산 바다에서 잡아올린 생선을 산채로 발라 게걸스럽게 먹고 마신 술기운이 전라도를 건너 오는 동안까지 흩어지지 않았던지 청승스레 눈물이 몇 방울 떨어졌다.

 

  또한 이 소설은 글쓰기와 문학이 무엇인가 라는 수많은 훌륭한 이들이 길고 어려운 말로 답해온 질문에 대한 한 중견 작가의 간결한 답이기도 했다. 투박한 수상집 표지에 박힌 '맨발로 글목을 돌다'라는 활자가 뼈아프고 서글펐다. 자유로운 자의 것인 그러한 언명 앞에서 좋은 상의 권위와 후광은 약간 힘 빠져 보였다. 나 말고도 축하해줄 이들이 많은 수상자들에 마음으로라도 굳이 축하를 건네볼 생각이 들어본 적도 없었는데, 정말 축하한다.

"이제 작가의 꿈은 접은 거야?" 얼마 전 한 사람이 물었다.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는데 몇 년 전 드라마 제작수업을 함께 듣던 기억에서 내게 구성작가 비슷한 일을 부탁하면서 그런 말을 했다. 그 당시에는 내가 작가가 되고 싶어했나 갸우뚱하다 그냥 원래 작가의 꿈 같은 건 없었다, 대답하고 말았다. 대답하고 나서 슬퍼졌다. 공지영의 소설을 읽고 나서 정말 글쓰기를 다시 시작할 때라고 생각했다. 지난할 길이 귀찮고, 젊은 작가들처럼 성공하지 못할까봐 무서워서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내버려뒀던 게 사실이다. 


"어떻게 살았느냐? 희망을 버리니까 살았죠.…… 아니 희망을 버린 것이 아니라 운명이 내 맘대로 내가 원래 계획했던 대로 돼야 한다는 집착을 버린 거죠…… 그래서 살 수 있었어요."

"희망이 절망적인 유혹이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희망을 버리는 것이라는 것을 나는 그때는 몰랐다. 풍랑을 만난 배가 물결을 헤치고 그저 앞으로 갈 수밖에 없듯이 온몸으로, 온몸으로 물결을 받아들이는 수밖에는 아무 방법이 없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세련되고 상궤를 벗어난 것, 악마적인 것을 궁극적 목표로 삼고 그것에 깊이 열중하는 자는 아직 예술가라 할 수 없습니다. 악의 없고 단순하며 생동하는 것에 대한 동경을 모르는 자, 약간의 우정, 헌신, 친밀감 그리고 인간적인 행복에 대한 동경을 모르는 자는 아직 예술가가 아닙니다. 평범성이 주는 온갖 열락을 향한 은밀하고 애타는 동경을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토니오 크뢰거를 떠올리게 해준 건 참 고마운 일이었다. 최근 나는 내가 일상의 안온함, 사람에게서 오는 사소한 기쁨들을 정말로 '알면서' 가까워지고 있다는 데 즐거워하면서도 동시에 상처나 환멸의 샘이 건조해지면 내가 가진 어떤 에너지를 잃게 되는 게 아닐까 불안했다. 재밌게도 그런 생각에는 토니오 크뢰거를 떠올리는 일이 종종 동반되곤 했다. 오래 전에 읽은 그 소설에서 핵심을 잊고 피상만 기억하고 있던 거다. 마침 파우스트 박사를 보던 중이었는데, 이미 죽은 토마스 만이 내 삶에 우연처럼 개입해주는 것 같아 괜히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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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31 00:46 2011/01/31 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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