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려온 즐거움이나 안정 같은 게 와장창 깨지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내가 얼마나 위태한 기반 위에 서 있는지 새삼 깨닫는 때. 불안을 감추려는 노력이 그저 억지 부리는 건가 싶기도 하다. 그치만 나중에 보면 그런 순간의 균열들이라는 게 코딱지 때문에 자살을 결심하는 것같은 일일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좀머 씨 이야기의 이 사랑스러운 꼬마, 코딱지를 계기로 부조리를 처음 인식한 그가 겪는 실존의 문제는 굉장히 진지하고 심각하며 백배 공감된다. 근데 왜 볼 때마다 괜찮은 무한도전 보듯 신나게 웃게 되는지 하하. 삶의 필요조건 하나를 꼽으라면 돈보다도 혹은 그와 비슷한 정도로 중요한 게, 언제라도 웃게 하는 텍스트나 사진 영상 혹은 사람을 축적하는 일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좀머 씨 이야기의 코딱지 시퀀스는 가진 소설책 중 유일하게 밑줄 좍 그어 놓고 자주 찾아 보는 부분이다. 지연된 시간의 생생한 묘사와 구체적인 심경변화란 대박. 손톱만하고 영롱한 코딱지라니 으으ㅋㅋㅋ 비분강개를 만들었던 거나,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고 내 무의식에 코딱지에 대한 강한 집착이 있나?ㅋㅋㅋ 따라 적어보다 너무 긴 관계로 임의적으로 막막 잘라 적어둔 게 걸리지만... 뭐 어떠냐. 궁금한 사람은 낯익은 책이라도 책으로 다시 보기 추천.
 

뭔가 위로나 격려나 고마움을 진심으로 전하고 싶은데 속에서 맴도는 말은 '좀 오글거리지만'이라는 단서가 붙는 뻔한 말들이고 실질적으론 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그런 말이라도 하는 게 진일보겠지... 흔한 얘기들을 소용있게 만드는 건 적어도 누군가 지금 이 순간 나를 위해서 해주기 때문이라고 어떤 사람이 그랬었다. 친구한테도 나한테도 뭐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올림 바 건반을 쳐다보던 내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그 건반의 앞쪽 끄트머리에 미스 풍켈 선생님이 재채기를 할 때 콧털에 붙었다가, 그곳을 훔쳐낼 때 둘째손가락으로 옮겨 붙었다가, 둘째손가락에서 올림 바 음 건반으로 옮겨 붙어 크기가 손톱만하고, 굵기는 거의 연필 굵기만 하며, 벌레처럼 휘어진 데다가 녹황색으로 영롱하게 빛나기조차 하는 끈적끈적한 코딱지가 붙어 있었던 것이다.
(중략)

그 순간 이후의 30초는 내 일생에 있어서 가장 고역스러운 시간이었다. 오로지 내 시선은 마리아 루이제 풍켈 선생님의 코딱지가 붙어 있는 사 음의 밑의 가는 검은 건반에만 고정되었다... 이제 일곱 마디만 지나면, 아직 여섯 마디만... 물컹한 코딱지를 누르지 않고는 그 건반을 도저히 누를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오, 하느님 기적을 이루소서! 무슨 말씀이라도 하소서! 무슨 행동이라도 보이소서! 땅을 쩍 갈라지게 만드소서! 올림 바 음을 칠 필요가 없게 시간을 거꾸로 돌려 주소서 (중략) 하지만 하느님은 침묵을 지켰고 아무 행동도 보이지 않았으며 마지막 끔찍스러운 마디의 순간은 도래하였다.
"올림 바!"
옆자리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도 나는 정신이 멀쩡한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줄 뻔히 알면서 죽는 것조차 무섭지 않다는 듯이 바 음을 쳤다. …… 내 옆자리에 있던 미스 풍켈 선생님은 악마처럼 펄펄 날뛰었다.
"고의로 그렇게 한 거야. 이 괘씸한 놈! 버르장머리 없는 쓰레기 같은 놈..."
(중략)

말할 수 없이 참담한 생각들이 내 마음을 짓눌렀다. 나를 그렇게 혼란스럽게 만들고 오한이 날 정도로 몹시 흥분하게 만들었던 것은 미스 풍켈 선생님의 난리법석이 아니었다. ……그런 것들보다는 이 세상 전체가 불공정하고 포악스럽고 비열한 덩어리일 뿐 다른 아무것도 아니라는 분노에 대한 자각 때문이었다. 모든 것이 다 문제였다. …… 푸가 형식으로 나를 괴롭히고 모욕스럽게 만든 작곡가 헤슬러도 그랬다. 말도 안 되는 억지로 내게 누명을 뒤집어씌우고, 올림 바 음 건반 위에 구역질나는 코딱지를 붙여놓은 미스 풍켈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내가 딱 한번 필요로 했을 때 도와줄 것을 간청하였건만 비겁하게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어긋난 운명의 수레바퀴가 돌아가는 모양을 지켜보았을 뿐 다른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세상 사람들이 자비롭다고 하는 하느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그런 모든 것들에게 의리를 지킬 필요가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세상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토록 비열한 세상에서 노력하며 살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이나 그런 못된 악에 질식해 버리도록 두는 편이 더 낫지 않겠는가? 그런 사람들이나 잘먹고 잘해 보라지! 나를 포함시키지는 말고 말이다! 나는 앞으로는 결코 그 사람들이랑 같이 어울리지 않으리라! 이 세상에 작별을 고하리라!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리고 말겠다! 그것도 지금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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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14 17:58 2011/02/14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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