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성, 창의성, 프로페셔널.

  요새 들어 부쩍 더 많이 듣는 이런 말들이 왠지 모르게 껄끄럽게 느껴지던 차였다. 때마침 우연찮게 읽은 책에서 그 껄끄러움의 이유를 찾았다.   

 

"가치의 유일한 척도는 얼마나 이목을 끄는가 또는 얼마나 포장을 잘하는가에 달려 있다."

-누군가의 창작물 혹은 어떤 사람을 두고 진정성이 있다 없다 논하는 건 폭력적인 일일 수도 있다. 게다가 그건 신이 아니고서 확인할 수 없는 문제다. 어떤 식으로 말하고 행동해야 사람들이 진정성 있다고 느끼는지를 간파해내는 이들도 있다. 진정성이 있어야 성공한다가 아니라 성공한 작품들에는 진정성이 있더라는 게 훨씬 쉽고 정직한 이야기가 아닐까.

 

"문화 산업이 오직 '효과'에만 매달리게 됨으로 말미암아, 마음대로 주물러지지 않는 것이라는 '효과'의 고유한 특성이 무시되고 '작품'이라는 관념을 대체해버린 상투화된 형식에 효과는 종속된다."

-프로정신의 핵심을 꿰뚫는 문장이 아닐까 싶다. 나 역시 그 '문화 산업'에 종사하고 싶은 사람이고 이미 그 안에서 생업을 위해 일하는 수많은 선배들의 작업을 폄하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선택받기 위해 만들어진 수많은 양식화된 콘텐츠들도 나는 좋아한다. 다만 프로라는 말 속에 엄청나게 엄밀하고 치열한 정신이 깃든 것처럼 그것을 명분으로 여러가지 자유를 실은 억압하면서도 그 사실을 당당하게 여겨도 된다는 식의 태도와, '프로정신'을 진지함을 넘어 성스럽게까지  다루는 언사들이 조금 민망하게 느껴질 뿐이다. 

 

"대중문화의 단계에서 새로운 것은 '새로움'을 배제하는 것이다. -모두에게 친숙한 것이지만 아직 존재해본 적이 없는 무엇인가를 머릿속에 떠올리게 만드는 말인 '참신한 아이디어' '신선한 무엇' '경이스러운 것'이라는 단어가 끊임없이 들먹여진다."

-창의성과 자유 사이에는 큰 연관이 없어졌음을, 혹은 원래 없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창의성을 위한 창의성에 거의 돌 지경이다.  

 

 

 

 * 청중이 문화 산업의 체계를 선호하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체계의 일부이지 체계를 변명하기 위한 구실은 아니다. 어떤 예술 분야가 소재나 전달 수단에 있어 전혀 다른 분야들과 똑같은 처리 방식을 따르면서, 청중의 자발적인 소망들에 호응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억지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문화 산업의 물샐틈없는 통일성- 차이란 사실 자체로부터 나오는 본질적 차이라기보다는 소비자들을 분류하고 조직하고 장악하기 위한 차이

 

*소비자가 직접 분류할 무엇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생산자들이 소비자를 위해 그러한 분류를 다 끝내놓았기 때문이다. 

 

*익살이나 농담, 효과도 사전에 치밀하게 계산된 것이다.-예전에 어떤 이념에 의해 지탱되던 작품이란 관념은 그 이념과 함께 해체되어 버린다.

 

*발자크나 빅토르 위고의 원작을 가공하여 최종적으로 유통시키기 위해 대단히 위계화된 구조를 지닌 스튜디오가 이들 소재들을 검토하는 치밀성-대형 영화의 제작 책임자가 주인공으로 하여금 어느 정도의 고문을 받게 할지 또는 여주인공의 치마를 어느 높이까지 끌어올릴 것인지를 결정하는 데 있어 보여주는 치밀성-

 

*양식은 불화가 있는 곳 또는 동일성을 향한 열정적 노력이 어쩔 수 없이 좌절하는 곳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위대한 예술 작품의 양식이 옛날부터 자기 부정에까지 이르는 좌절에 스스로를 노출시킨다면 열등한 예술 작품은 동일성에 대한 대용물로서 다른 작품과의 유사성에 매달린다.

  

*새롭게 하기는 대량 복제의 개선 이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체계의 핵심적 요소다.

 

*기껏 제공되는 것은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싶어하는 우울한 일상 생활의 찬양이다.

 

*최고의 계율은 사람들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이며, 그 대신에 사람들은 이러한 불가능성을 웃어넘겨야 하고 이러한 웃음으로서 자족해야 한다는 것이다.

 

-TH.W.아도르노&M.호르크하이머, 김유동 역, 『계몽의 변증법』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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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11 13:28 2010/07/11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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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0
    2010/07/18 00:40 Delete Reply Permalink

    무소유는 베스터셀러 였지만 "버리고 떠나기"는 베스터셀러가 아닙니다.
    소비자로서 책의 선택에 있어서 8천5백원은 문학적 가치보다는 "최고의 계율" 지혜를 찾는 것임에도 그래도 책 페이지수는 저자의 수행의 삶과 대중의 삶과 소통하는 지혜이기에 가격은 최고 계율의 "*" 대안적 고민의 현실입니다.
    산방한담,버리고 떠나기,바람소리 물소리등 이런것을 1권의 책으로 만들수 있음에도 3권으로 나누어 인쇄하는 것은 글세요? 문학과 불학(佛學-반야를 일상에서 배운다)의 가치의 진정성도 있겠지만 문화산업의 효과도 있겠지요

    여하튼 최고의 계율은 욕망의 최고,數에서 최고의 수는 없겠죠 욕망을 비우는 것이 욕망이라면 최고의 수가 0이라면 그것은 순환하는 관계와 질서에 대한 지혜의 욕망이라고 말할수 있겠죠

    위 책 3권에서 인용하고 싶은 진정성의 진실의 문장은 있습니다.
    만약 그 분의 깨달음 대로 본다면 지혜의 참고는 할지라도 문자반야에 얽메이지는 않는 겁니다.그 분의 수행의 깨달음의 도구를 버리고 깨달음만 참고하는 것이죠

    문화산업의 진정성,창의성,프로페셔널의 부정에 대한 부정은 자족은 아니라는 겁니다.자족을 소극적으로 보면 이렇게 말할수 있을 겁니다.
    결국 삶은 자신이죠 마음밖의 세계와 마음 안의 세계는 어느것만 소중하다고 말할수는 없습니다.

    *문화산업의 프로페셔널의 강령은 "창의를 위한 창의성"이죠
    인간이 인간을 위한 소통은 문화 이겠지요 또한 강령이 있을수 있고 있었죠
    부처를 죽여야 부처가 보이며 베스터셀러를 버리면 저자의 삶의 진실이 보입니다.인간을 위한 인간의 문화는 부정의 부정이 0이라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그것들을 추종 하였기에 동일성이라는 레이스와 그 과정의 비동일성의 주체적 모순들이 나타나는 거죠 이것을 극복하는 대안이 있겠죠 그것이 오늘 역사적 대응 창의성 이겠죠 창의성은 소극적 자족을 넘어서는 적극적 창조 입니다.

    "창조가 무엇이냐고 물어 신다면"
    ...........................

    제가 처음에 바람 이었는데
    "어느바람" 때문에 같은 레이스는 문화적 대안 이지도 않고
    ....
    역사의 짱돌이 되고 싶기도 하고

    책 2권은 다 보았기에 이제 그 문자반야는 비워야 합니다.
    읽겠다면 (산중한담,버리고 떠나기) 보내 드리죠

    1. Re: 어느바람
      2010/07/18 11:30 Delete Permalink

      댓글을 길게 달아주셨는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무슨 말씀이신 줄 모르겠네요 허허ㅠㅠ 제가 이해력이 딸리네요. 짧게 생각하고 짧게 읽은 걸 끄적인 것 뿐인데, 저보다 훨씬 깊은 생각을 하시고 글을 적어주신 것 같아요. 무튼 감사합니다.

  2. 해당화
    2010/07/21 15:39 Delete Reply Permalink

    "우산하나에 사람넷"
    이해가 안되죠
    비맞기로 보면 이해가 되죠

    0->해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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