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현상학에서 말하는 주체는 곧 듣는 주체가 된다. 소쉬르와 후설의 명제에서 데리다는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비트겐슈타인은 태도를 변경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내가 말하는 것이 타인이게 의미를 ‘만들 수 있는지 자체’를 문제시한다. 이는 후설과 소쉬르가 말하는 동일의미, 문맥적 의미의 구별은 무의미하며, 그런 의미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말하는 주체는 곧 듣는 주체라는 데서는 그 순간의 ‘지연’이 은폐된다. 사람은 생각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저 말한다. ‘말하다’는 자동사다. 그러나 우리는 말한 것을 들을 때 그 말이 무언가를 의미하며, 그 의미는 내적으로 존재했던 것처럼 믿어버린다. 이는 ‘쓰다’와 ‘읽다’에서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글을 쓸 때 우리는 생각지도 않은 방향으로 글이 써진다고 느끼면서도 그것을 자기 의도로 생각한다.
내가 말하고 쓴 것을 듣고 읽는 타자의 역할은 내가 한다. 그러나 나는 나이기 때문에 진정 타자로 존재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말해지고 쓰인 것이 타자에게 무언가를 ‘의미할 수 있는지 자체의 문제’는 의심되지 않는다. 그러나 텍스트 자체에 의미 생산성이 있다는 신비주의를 역설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말하다, 쓰다가 아닌 ‘가르치다’는 말을 택해야 하는 이유다. 그것은 타자를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말 자체가 무언가를 의미할 수는 없으며, 말을 상황에 적용하는 것은 마르크스가 상품의 가치는 그것이 팔리는데 있다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목숨을 건 도약). 타자가 없는 곳에서는 자기 자신일 수가 없다(키에르케고르)는 것은 말의 의미가 만들어질 수 없다는 말과 통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타자가 꼭 신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타자의 극한을 상정하기만 하면 된다.
 
2.
비트겐슈타인의 회의는 불확실성에 이르렀고 수학, 과학의 기초 부재 또는 사회적, 실천적 성격을 분명히 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과정의 태도 변경이다,
소쉬르는 차이, 형식, 규칙이 언어에서 본질적이라고 말하고자 했다. 그가 언어의 형식적, 차이적 체계를 설명하기 위해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듣는 주체’에 의해 체험된 의미다. 여기서 주체가 들은 언어가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확실하게 여겨진다.
비트겐슈타인은 이처럼 ‘동일 의미’, ‘규칙’이 선행한다는 생각에 근거한 사고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꾼다. 외국인으로 예시된 타자와의 커뮤니케이션에서는 동일의미와 규칙은 전제될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은 소쉬르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하나의 랑그(규칙, 코드 체계)를 공유하기 때문에 소통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게임을 부정하기 위한 개념이다. 공놀이를 하기로 하고서 원래의 규칙과 상관없이 자유롭게 공을 가지고 놀 수 있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제까지 공을 갖고 게임을 한 것이고, 규칙에 따랐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게임을 하면서 규칙을 만들고, 규칙을 바꾸기도 한 순간이 분명 존재한다. 이런 변경을 규제하는 규칙은 없다. 규칙이란 우리가 이해하는 순간에야 발견된 결과이며, 규칙은 ‘의미한다’가 성립하자마자 순식간에 ‘만들어진다.’
언어게임은 동일의미의 상정을 계속해서 의심하는 것이다. 말이 의미를 갖는 순간 생활양식은 같아진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0/04/01 13:56 2010/04/01 13:56

Trackback URL : http://blog.jinbo.net/peel/trackback/267

« Previous : 1 :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 44 : Nex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