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찍기지만 그래두 첫 연출을 했을 때 느낀 걸 정리해보고 싶었는데 마침 그럴 기회가 생겨서 반성문을 썼다. 딴소리지만 무슨 일이든 첫경험이 생각만큼 설레고 멋졌던 적은 드문 것 같다. 생각만큼 별 거 없고 정신없고 후회가 남고...

  무튼 따라찍었던 것도 그렇고 5컷 영화도 그렇고, 촬영 때까진 영상 클립을 올려서 사람들 보여줘야지~ 싶다가 상영이 끝나고 나면 그럴 마음이 싹 사라지는 건 왜지. ㅋㅋㅋ

 

  이닥 씨네 꼴라주 세미나

-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 (女が階段を上る時, 1960) -

<연출, 이렇게 했다>

   따라찍은 씬은 준코와 고마츠가 잠자리를 함께 한 후의 풍경이다. 그 전까지 고마츠는 훈남이었지만 이 씬에서 그가 별 볼일 없는 남자였음이 까발려진다. 고마츠가 여성에 대한 뚜렷한 이중 잣대를 보여줬기 때문은 아니다. 관계마다 권력 흐름에 따라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다만 여성에겐 남자를 차별할 기회가 남성보다 훨씬 적게 주어지는 상황이라는 게 문제지. 마마를 흉내 낸 것일 뿐인 제스처를 원칙이라며 떠벌리고 다닌 건 우습지만, 여기서 고마츠에게 가부장제의 책임까지 묻기는 애매하다. 이런 상황에서 권력관계에 대응하는 방식은 오롯이 당사자의 몫과 상처로만 남겨지는 경우가 대다수다. 준코의 방식은 꽤 멋졌다.

 

  '난 프로잖아요, 잊었나요?' 찌릿찌릿한 대사다. 준코는 잘 안다. 고마츠와 마마, 고마츠와 자신. 이 두 관계 속에 존재하는 고마츠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그 사실만으로도 자존심 상하는데 이 뻔뻔한 남자는 대놓고 그렇다고 말한다. 나를 물로 본 거다. 이에 준코는 공사를 확실히 구분하는 탁월한 프로의 위엄을 선보인다.(그녀가 삭였을 응어리는 못 본 척 넘어가 주자.) 이와 대비되는 고마츠의 찌질함은 더욱 빛을 발한다. 그냥 여자랑 자고 싶어서 잤으면서 상대더러는 '날 좋아한다고 했잖아'라니. 그래서 자 준거라는 건가, 돈 주기가 아깝다는 건가.

 

  영화를 보자마자 이렇게 생각해서 씬을 결정한 건 아니고, 그냥 이 씬이 퍽 끌렸는데 이제 생각해보니 이런 이유였던 듯하다는 이야기다. 다시 봐도 씬은 참 잘 골랐는데 연출 과정에서는 아쉬운 점도 문제도 많았다. 그 문제점들은 위처럼 내가 이 씬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명확하게 정리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했던 것 같다.

 

  당시 나는 준코 캐릭터에 대한 판단을 완전히 종결하지 못한 채로 촬영에 임했다. 그런 사실 자체도 몰랐다. 캐릭터에 대한 이해를 끝마치지 못했으니, 리딩 때나 현장에서나 배우에게 명확한 요구를 하지 못했다. 특히 배우의 연기가 관건인 씬이었는데 배우를 대하는 데도 서툴렀다. 아직은 데면한 사이인 이들과 나의 관계, 배우들과 연출자의 관계. 둘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던 것 같다. 촬영 시에도 어려운 일을 시키는 것 같아서 내가 바라는 만큼의 디렉션을 하지 못했고, 배우 뿐 아니라 다른 스탭들에게도 계속 미안한 마음이 들었었다.

 

  만들고 싶은 화면을 위한 카메라 위치를 촬영 전에 미리 파악해야 한다는 것도 촬영하면서야 알았다. 연기 외의 미장센, 샷 사이즈 등에 대해서 원작에서 왜 이런 방식을 취했을까, 하는 물음을 정리하고서 촬영에 들어가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이 씬의 촬영의도는 드라마를 편히 따라가게 해 주면 되는 거였는데, 드라마를 내 것으로 소화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이 원본과 같든 다르든 내 미장센을 만들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촬영 때 소품이 프레임에 잡히는 크기 등까지 원본과 비슷하게 하려고 했는데 아무 의미 없는 연출이었다.

 

  편집 때도 좀 대강했던 기억이 난다. 사운드는 별 신경도 안 썼고 한 두 프레임 단위로 볼 생각도 못 했다. 타이틀 글씨체, 크기 등도 대충 정했다. 내 작품이라기보다는 연습용 촬영이라는 생각을 더 했던 것 같다. 그치만 더 치밀하게 준비하고 고민하고 촬영에 임하는 태도였어야 했을 테다. 따라찍기 이후로 가끔 그 때 이랬어야 했는데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라서, 그때마다 주먹을 치면서 후회했다. 그치만 모르는 걸 알 수야 없었던 거고 즐거운 촬영이었다. 연출을 첫 경험할 시간을 만들어 주고 반성문 쓸 기회까지 줘서 감사하다.

- C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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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1 23:41 2010/01/21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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