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그램, 사랑

                                                 배용제

 

 

  사랑이여, 내 정신의 화면에 스캔되는 애욕이여. 컬러로 입력된 슬픔들이여. 있으되 없고 없으되 있는 너 굴절된 빛의 애인이여. 평화로운 알몸이여, 착란의 장갑 밖으로만 만져지는 밋밋한 감촉의 꿈이여.

  해적판으로 들어온 너는 내 정신의 금지된 프로그램. 은밀하게 간직되는 소장품이다. 은밀하게 실행시킬 때마다 불꽃이 된다. 춤이 된다. 애무를 받다가 기절한다. 수음 속으로 들어온다. 아이를 낳는다. 샤워를 하다가 오줌을 누다가 울다가 웃다가 늙다가 다시 젊어지다가

  스위치를 탁, 내리면 홀연히 없는.

 

 

  몸부림치며 불빛을 지펴온

  내 정체는 바람이었을까?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쳐본다

  너를 향해 쿵쿵 소리내어 걸어가고 싶다고

  목쉰 바람 소리를 낸다

  다시 이 별의 허공을 한 바퀴 돌아와

  벌판에 서서 황량한 얼굴로

  너를 기다린다

  아직 아무런 형체도 없는 반짝거림으로.

 

 

 

 

  홀로그램라는 말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것은 물리적 실체가 없이 허공에 나타나는 시청각적 영상이다. 화자는 이러한 홀로그램에 자신을 대입시키고, 애욕, 슬픔, 스킨십 등 사랑과 관련된 행위들을 홀로그램에 입력되는 프로그램으로 묘사한다. 그 프로그램, 사랑은 해적판이란다. 해적판은 불법 복제된 판본으로 유통이 금지되어 있지만, 화자는 프로그램을 받아들인다. 금지된 것만큼 매혹적인 것도 없다. 은밀하게 실행된 프로그램 속에서 화자는 '불꽃이 되고, 춤이 되고, 애무를 받고, 수음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삶을 진행하지만 이 모든 것은 스위치를 내리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화면, 스캔, 컬러, 입력, 굴절, 해적판, 프로그램, 소장품, 스위치' 등은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있었기에 쓰일 수 있는 시어들이다. 단지 (아날로그적인) 사랑이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메커니즘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디지털을 일치시키는 기발한 세부적인 묘사 자체를 통해 사랑의 새로운 의미와 느낌이 생산되고 있다.

  '스위치가 탁, 내려'진 후에 화자는 '몸부림치며 불빛을 지펴온' 자신의 정체란 결국 보이지 않는 바람이었나, 자문한다. 프로그램이 입력되지 않은 홀로그램에게는 형체가 없다. 너에게로 다가가고 싶다고 있는 힘껏 소리치고, 이 별의 허공을 한 바퀴 돌아와도, 너는 나를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다. 금지된 네가 없으면 나는 존재할 수 없는데, 네가 떠나버린 순간부터 나는 너에게 다가갈 수조차 없다는 비극적인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너에 대한 갈구는 더 깊어지고 나는 기다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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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27 12:47 2008/06/27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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