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연대기는 누가 다 기록하나

 

                                                                       김경주

 

 

1

 

  이를테면 빙하는 제 속에 바람을 얼리고 수세기를 도도히 흐른다

  극점에 도달한 등반가들이 설산의 눈을 주워먹으며 할 말을 한다 몇백 년 동안 녹지 않았던 눈들을 우리는 지금 먹고 있는 거야 얼음의 세계에 갇힌 수세기 전 바람을 먹는 것이지 이 바람에 도달하려고 사람들은 수세기 동안 거룩한 인생에 지각을 하기 위해 산을 떠돌았어 그리고 이따금 거기서 메아리를 날렸지

 

 

  삶이

       닿지 않는 곳에만

                             가서

                                   메아리는

                                              젖는다

 

 

  메아리는 바람 앞에서 인간이 하는, 유일한 인간의 방식이 아니랄까

  어느 날 거울을 깨자 속에 있던 바람이 푸른 하늘을 향해 만발한다

  그리고 누군가 내 얼굴을 더듬으며 물었다 우선 노래부터 시작하자고.

 

 

2

 

  바람은 살아 있는 화석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사라진 뒤에서 스스로 살아남아서 떠돈다 사람들은 자신의 세계 속에서 운다 그러나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바람의 세계 속에서 울다 간다

 

 

  바람이 불자

                 새들이

                         자신의

                                 꿈속으로 날아간다

 

 

  인간의 눈동자를 가진 새들을 바라보며 자신은 바로 오는 타인의 눈 속을 헤맨다 그것은 바람의 연대기 앞에서 살다 간 사람들의 희미한 웃음일 수도 있다

 

 

  이를테면 바람에게 함부로 반말하지 말라는 농담 정도

 

 

  이 시에서 '바람'은 시 전체에 지속적으로 등장하여 의미를 집중시키는 상징이다. 보통 바람이라고 하면 연상되는 상징적 의미는 '① 인간의 존재성을 일깨워 주는 촉매 ( ← 가변성, 역동성 ) ② 자유와 방황 ③ 수난, 역경, 시련 ④ 이성에 이끌려 들뜬 상태'(『시어사전』, 고려대학교 출판부, 참조.) 등이다. 따지자면 이 시에서의 '바람'은 ①의 의미와 연관된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시인은 기존의 '바람'의 상징과는 차별화된 새로운 상징을 쓰고 있다.

  수세기 동안 흘러온 빙하 속에 수세기 전의 바람이 얼려져 있다는 참신한 생각으로 시는 시작한다.(오늘 본 신문 기사에서 이번 여름에 북극의 빙하가 완전히 녹아버릴 확률이 50%라고 하던데, 쩝.) 시인은 '바람은 살아 있는 화석'이라고 정의내리며, 그에 대해 차근히 서술한다. 화석은 오랜 시간 전에 존재했던 생물의 흔적이다. 바람은 손에 잡히는 물질감은 없으나, 근원을 알 수도 없을 만큼의 오랜 시간 전부터 시간과 역사와 사람들을 품고 흘려보내기를 반복해왔다. 기실 바람은 세계 그 자체와 동일시되는 것으로, 존재했던 모든 것들의 흔적이 그 안에 남아 있는 화석이다. 이 시에서 바람은 순간적인 자연물의 의미를 넘어서 역사성과 초월성을 띤 영속적인 실체가 된다. 거리를 걷다가 내 이마를 때리는 바람이 수백, 수천 년 전 누군가의 속에 들어갔다 나온 날숨일수도, 어느 역사적 순간의 긴장된 공기였을 수도 있다는 상상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한순간으로 응축시킨다. 모든 시간이 바람을 매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그 시간 속의 모든 하찮은 순간과 삶까지도 결국 영원한 것이므로 의미를 지닌다는 깨달음으로 연결된다. '이를테면 바람에게 함부로 반말을 하지 말라는 농담 정도'.

  '바람'의 이미지는 시의 형태로도 나타나 있는데, 이는 그 상징의 작용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삶이/닿지 않는 곳에만/가서/메아리는/젖는다'와 '바람이 불자/새들이/자신의/꿈속으로 날아간다'의 부분은 마치 하나의 시행에 바람을 쏘여 시어들이 날아가는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플러스로 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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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27 12:47 2008/06/27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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