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더듬는다는것  2009/03/10 09:21

불안

'나 몸이 안 좋아. 아무래도 안 되겠어. 일주일만 쉴께.. 좀 봐줘...'라고 나름 공표(?)를 하고 쉬었다.

상의도, 요청도, 부탁도 아니고 거의 통보 수준으로...

그렇게 회의도 빠지고, 공부방도 안 가고, 선배와의 약속도 째고,

세미나도 건너뛰고, 새로 들어오는 일도 일주일 뒤로 다 미루고...

쉬겠다는 말(통보)은 '... 정말 미안하고 그리고 고마워'로 마무리함으로써

듣는 사람이 거절할 수 없도록, 그러면서도 다른 선택의 수는 없음을 분명히 하는 방식이었다.

 

일주일. 병원을 다녀오고 처방 받은 약을 먹으면서 내내 집에서 지냈다.

잘 먹고 잘 쉬면 되는 거여서 그렇게 지냈다.

처음 며칠은 내내 잠만 잤는데 나중에는 잠도 안 와서 영화 보고, TV 보고, 책 읽고 그렇게 일주일.

끼적끼적 방 안에서라면 움직일만도 했지만 일과 관련된 건 손도 안 댔다.

불안하기도 했지만 일주일 쉬겠다고 맘 먹었을 때

이로 인해 생길 민폐(?!),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과 자책감,

이들이 나에게 실망하면 어쩌지라는 걱정, 일에서의 차질 등등

감수하겠다고 맘 먹었기 때문에 불안한 마음도 그 마음대로 그냥 두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그냥 그런 시간이었다.

 

주말에 얼마 전 선배한테 선물 받은 루이 알튀세르의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를 읽었다.

알튀세르는 자신이 정신착란 상태에서 아내를 죽인 그 사건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의 출생, 성장과정, 영향을 주고 받은 사상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평생을 우울증으로 고통 받았던 그는 자신의 병적 상태와 회복 상태의 반복에 대해

그것의 의식적 테마를 세 가지로 이야기한다. 이 책에서 가장 '찌르르...' 했던 부분이다.

쉬었던 일주일 동안 가장 '찌르르...' 했던 순간이었다.

 

자신에게 의미 있는(필요한) 사람들에게 버림받는다는 두려움.

누군가가 나에 대해 나 자신의 의도가 아닌 어떤 의도를 갖지 않을까라는 위협과

동일시되는 사랑의 요구를 받게 되지 않을까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상 사람들 앞에 자신이 인위적 술수와 속임수의 존재일 뿐

아무것도 아닌 모습이 드러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이로 인해 모든 사람이 자신의 참모습을 단죄하게 될 거라는 두려움.

그는 이런 두려움으로 인해 강박증을 갖게 되고 고통 받지만

동시에 그는 자신의 두려움의 이유를 분석하고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철학과 정치활동으로 이어지게 되는 궤적들을 짚어낸다.  

 



 

책을 읽고 나서 '나에 대해' 든 생각들.

 

그 무엇/누구에게도 내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요구하거나 요청하지 않는 것.

그 무엇/누구에게도 내가 욕망하는 모든 것을 드러내지 않는 것.

그럼으로써 그 무엇/누구에게도 내가 온전히 기댈 수 있는 역할을 부여하길 거부하는 것.

 

이것이 나의 강박증 또는 이제까지 살아온(나를 방어해온) 나의 처세술이구나 싶은...

그리고 내가 가장 두려워 하는 건 '이런 나'를 '내'가 통제할 수 없게 되는 순간이라는 거.

 

나는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감정적으로 인색한 편이다.

이 사람은 이래서 좋고, 저 사람은 저래서 좋고 그 정도다.

이 사람은 이래서 좋은데 이러기도 했으면 좋겠어라고 생각하거나

상대에게 그것을 요구하는 건 아주 제한적이다.

혹여 이 사람은 이래서 좋다고 여기다가 더불어 이러했으면 좋을텐데 여겨지면,

궁리하고 관찰하고 맴돌다가 아 그런건 안 되는 사람이겠구나라고  보이면

나는 조용히 선을 긋고 물러서고 그 사람을 잊는다.

특히, 특별한 친밀감을 나누는 그런 특별한 관계에서 나의 이런 성향은 극명하게 드러난다.

난 그 누구에게도 내가 필요로 하는, 욕망하는 모든 것을 드러내지 않고

난 그 누구에게도 내가 온전히 기댈 수 있는 역할을 부여하길 거부한다.

 

난 보호 받고, 돌봄 받고 싶다는 욕망이 아주 강한데,

그만큼 돌봄 받지 못하는 상태에 대한 두려움이 강하다.

그래서 난 내가 (이성적으로, 감정적으로, 물질적으로)

독립적이고 자유로와야한다는 부분에 대해 강박적이다.

누군가에게도 보호 받고 돌봄 받지 못할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기 위해.

혹은 아무렇게나 보호나 돌봄을 요청하지 않을 수 있기 위해.  거절 당하지 않기 위해.

그래서 사람, 관계에서 미리 포기함으로써 실망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미리 체념함으로써 만족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잘 안다. 잘 훈련되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관계 맺고, 살아가는 게 편안하다.  

 

 

그런데 요즘 이런 나의 성향이 나를 다른 방식으로 불편/불안하게 한다.

이제는 내 필요/욕구에 스스로 무감 또는 무지해지는 거 같다고나 할까...

난 내가 정말 필요로 하는 게 무엇인지,

내가 무엇을 간절히 바라는지에 대해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주위의 사람들에게

그것을 무리 없이 요청하는 방법을. 그것을. 나는 나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을 단지 그럴 필요가 없어서 (상대에게, 타인에게) 드러내지 않을 뿐이라고만 여겼는데

이제는 잘 모르겠다.

그것을 (상대에게, 타인에게) 드러낼 필요가 생겼고, 간절해졌다.

그래서 그것을 드러내고 요청하고 함께하기 위해

우선 내 필요와 욕구를 명쾌하게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근데 안 되는 거다. 점점 조급해진다.

 

나라는 사람과, 나라는 사람이 맺고 있는 관계와

나라는 사람이 내가 관계맺고 있는 사람들과, 그들과 함께 하고자 하는 일에

닥친 벽 같다.

당황스럽고, 조급해진다.

 

나에게 의미 있는(필요한) 사람들에게 버림받을까봐,

아무것도 아닌 내 모습이 드러나지 않을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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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0 09:21 2009/03/10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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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들풀  | 2010/07/11 10:39
일튀세르... 나도 그 사람을 넘기가 너무 힘들었는데.. 그냥 옆으로 돌아가면 되더라는ㅋㅋㅋ 우리 혜린이 알튀세르한테 깜냥이 안 된다는 말에 울컥해서 그냥 한마디.. 아참 새벽이 다시 블러그 시작했다는...
긴 호흡  | 2010/08/05 06:30
음음음... 옆으로 돌아가면 된다! 오오오!!!
그렇잖아도 새벽 블로그 다시 시작한 거 보고 와와와!!하고 들렸다 오는 길인데 ㅋ
낼 정동진에서 보겠다~ ㅎㅎㅎ 좋아라!!!
설영  | 2010/08/05 09:18
정동진영화제 혹시 가시나요?
긴 호흡  | 2010/08/05 09:22
네~! ^^ 설영도? ㅋ
나비  | 2010/08/05 09:43
앗 쌤 저는 토요일에 정동진 가는데. 토요일까지 계셔서 얼굴 볼 수 있었으면...ㅎㅎ
긴 호흡  | 2010/08/16 15:06
어머? 정동진 왔었어요? ㅠ 으앙~ 우리 월요일까지 있었는데;;; 못 보다니... 아쉽다 ㅠ
설영  | 2010/08/05 11:11
전 진안에 일요일까지 짱박혀 있어야해요..후후...동해는 한번도 안가봤는데...
멋진 해변에서 보는 영화...꽤나 낭만적이네염...ㅋㅋ
긴 호흡  | 2010/08/16 15:08
에궁~ 일하느라 꼼짝도 못했군요;;; 진안에선 제가 막차 시간 때문에 빠듯해서 제대로 얘기도 못 나누고... 다음에~ 다음에 또 봐요!!! 헤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