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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사님과 술 한잔을 할 생각이었다. 예상하지 못했는데 교사 두분 학생 한분이 술자리를 같이 하게 되었다.
애초에 간사님과 이야기할 거리를 구체적으로 생각해가진 못했으나 야학의 방향이나 하반기에 해야할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싶었는데 그냥 즐겁게 술 마시고 노래방을 가는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글쎄.. 어제는 즐거웠지만 앞으로 해야할 일에 대한 부담은 무게를 더해간다. 앞으로 남은 활동 기간은 1년도 안된다. 우리 야학이 부산 장애운동의 거점으로 서도록 만들고싶다. <51.6%의 장애인이 초등학교 졸업 이하의 학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육, 이동, 노동, 생존의 문제에 있어서 장애인들의 삶은 여전히 척박하다.특히 이동의 문제에 있어서.. 서울이 아닌 지역에 살고 있는 장애인 이동의 문제는 심각하다. 부산지하철 1호선에 엘리베이트가 설치된 역은 단 두곳, 콜택시와 저상버스 도입상황도 형편없다.
교육의 문제는 하나의 출발점이었고, 20년전 야학에 있어서는 그것이 모든 것이었다고 본다. 하지만 이제는 삶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의 차별을 철폐하기위한 싸움이 시작되어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만이 아닌 이동,노동,생존의 문제에 대한 포괄적 문제제기와 실천을 통해 지역사회에서의 통합을 실현하고자 하는 나의 욕심은 현제 야학의 상황을 보았을때 <같잖은 짓거리>로 비추어질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학생 다섯명, 교사 여섯명. 친목, 자조모임적인 성격을 오래동안 유지해온 우리 야학이 교육의 전문성을 갖출수 있을까... 차별에 대해 치열하게 저항하고 투쟁하는 야학이 될 수 있을까. 검정고시 합격을 목표로 야학의 문을 두드리는 학생들, 봉사활동을 하러 야학을 찾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삶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칠 정도로 장애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게 만들 수 있을까
다시한번 돌아와 나는
얼마나 치열하게 장애인 그들의 삶에 개입하고 학습하고, 조직의 기반을 다지는 일에 헌신 할 수 있을까...
학생운동으로서의 장애인운동
사회와 장애의 자유와
인권을 위해 함께하는
게르니카
국문과 95 김형수
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
우리들의 궁극적인 소망은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행복하게 사는 것은 잘 사는 것일 것이요, 그것은 삶을 잘 풀어 나가는 것을 말할 것이다. 그리고 삶을 풀어나가야 한다는 것은 삶 이라는 것이 누군가와 함께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삶은 그것을 사는 자, 인간의 주체성 자기 자신에 대한 주인의식을 피해서는 논의될 수 없다. 또한 그러한 삶을 함께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 모인 마당인 사회도 결코 이것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체적일 수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갖지 못할 것이고, 자신의 삶을 가질 수 없는 한 행복해 질 수 없으며 행복해질 가능성이 없는 존재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삶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 모인 사회가 우리의 삶에 대한 주체성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면 그것으로 사회의 존재 의미는 없어진다.
사회가 만들어진 가장 으뜸 되는 이유는 바로 함께 하기 위함일 것이다. 함께 라는 개념 위에서 삶이라는 개념도 그 뜻을 가질 것인데, 그 외로움을 없애기 위해 사람들은 모임을 만들고 함께 어울렸을 것이다.
그렇게 모여서 만들어진 사회는 각각의 개성적이고 주체적인 삶들이 모여 생긴 교집합이어야만 그 있음에 힘을 얻을 것이요, 그 교집합의 확장이 바로 그 사회의 역량과 건강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의 기본원칙이 무시하는 것이 곧 소외를 발생시키고 그 소외가 바로 사회의 모순이며 부조리이다. 아무도 소외당하지 않는 사회는 각자의 삶의 문제를 머리를 맞대고 어깨를 기대며 한 마당 안에서 뜨겁게 풀어나갈 수 있는 사회가 정의가 구현된 사회요,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사회이다. 바로 이 만들고자 하는 실천이 운동이다.
이제 이야기를 좁혀보자.
이 사회에서 우리 장애인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과연 위에서 밝힌대로 각자의 행복한 삶을 위해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가지고 살고 있는가? 우리 장애인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소외당하고 있지 않은가? 소외당하고 있다면 그 원인은 무엇인가? 그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것이 내가 하고자 하는 문제제기이다.
2. 운동은 곧 주체이다.
위 문제제기의 첫번째 대답은 ‘결단코 아니다’이다. 왜냐하면 장애인은 결코 이 사회에서 주체적으로 움직인 적도 인정받은 적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사회에서라는 말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 사회에서 주체적으로 움직인 적이 없다 함은 잘난 장애인 한 명이 이른바 인간승리라고 일컬어 지는 것을 통하여 또는 앨리트적이고 부르조아적인 몇몇의 선택받은 장애인에 의하여 독점적으로 또는 관료적으로 400만 장애인의 삶이 좌지우지된 것을 말한다.1)(그래서 관료적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우리의 현실 속에서 장애인 개개인의 삶은 무참히 무시되었으며 소외되었다. 그에 따라 사회에서도 인정받지 못한 것이다. 같은 계층에서도 공동체의식은 거녕 지배이데올로기만이 팽배하니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운동은 곧 주체이다. 주체라는, 사회에서의 참여와 함께라는 의식이 인정된다면 더 이상 운동은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이 거대한 공룡같은 사회에서 권력이라는, 돈이라는,구조라는 관습이라는 것들로 지배당하고 객체화 되어 있다.
운동은 이러한 것을 바꾸는 것이며 자신의 위치를 객체에서 주체로 바꾸는 활동이다.
소외에서 벗어나 참여로 가는 활동이다.
여기서 장애인운동이 나아갈 방향이 보인다.
장애인 운동으로서 주체로 서고자 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바로 장애인들이다. 그러므로 장애인들이 장애인운동의 주체가 되어야 하며 그 동기이고 에너지이다,. 장애인 운동의 고민은 바로 여기서부터 고민해야 한다.
어떻게 이들을 운동에 참여시킬 것인가? 이것만큼 장애인운동이 나아갈 방향을 말해 주는 것은 없다. 예)여성 장애인 대회 게르니카 활동들
이렇게 글을 맺으면 혹자는 그러면 비장애인의 활동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에 대해 질문을 던질 것이다. 거기에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당신은 정말 당신의 삶에 있어 주체입니까라고 장애인이 소외되는 사회에서 어느 누구도 당당하게 주체적인 삶을 사회에서 누리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장애인 운동은 장애인들끼리 잘먹고 잘사자는 운동이 아니라 바로 자기 삶에 주체되기 운동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 언급하고 싶은 것이 바로 운동과 봉사이다. 장애관련 동아리를 보면 주로 갈등하는 것들이 이 두가지 문제인데 거기에 대해서도 우리는 묻고 싶다. 왜 봉사를 하냐고- 그냥 대학생이니까 해야만 할 것 같아서 하고 싶을 때 하고 안하고 싶을 때 그만 둘 수 있으니까, 간호학과니까 왠지 해야 될 것 같아서, 크리스찬이니까,-자신 삶이 주체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만이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봉사는 운동의 작은 형태일 뿐이다. 봉사를 하는 것과 그 행위를 통해 우리는 서로 주체적일 수 있는 것이다.
운동은 변화를 지향하는 것이고 그 변화가 진보를 향해 있을 때 그 운동은 정당하다고 인정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아주 작은 움직임에서 시작된다. 그런 작은 움직임을 무시하고는 어떠한 변화도 바랄 수 없으며 혁명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몇 십 아름이나 하는 거대한 나무도 잔뿌리, 실 뿌리 없이는 살아나가지 못한다.
곧 운동은 우리가 살고픈 세상을 우리 모두 함께 만들어 나가는 모든 변화의 작업들이며 그래서 참여가 중요하고, 그 사회 구성원 누구도 소외당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까지 이런 작은 움직임에 대해 얼마나 인정해 왔는가?
통일 논의 ,자본주의 논의, 노동에 관한 논의라는 이른바 큰 줄기에서 다른 작고 작은 변화와 진보의 움직임에 대해 그것을 뿌리로 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가? 우리가 주장하는 것이 대부분 민중, 민족 같은 풀뿌리에 의지하고 있는 것에 반해 우리 스스로 그 뿌리로 함께 하는 것에 얼만큼의 노력을 하였던가?
여성운동 장애인 운동 참교육운동, 문화운동 모든 작은 움직임, 운동들은 민족 민중이라는 큰 줄기를 굳건히 버텨주고 그것에 항상 영양분을 공급해 주는 것이다.
지금에 있어 우리 학생 사회는 각각의 삶을 풀어나가는 생각들 곧 사상이나 이념에 대해 그에 따른 방법에 대해 선택할 수는 있지만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제 소수에 의한 투쟁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이제는 어떻게 함께 갈 것인가? 어떻게 하면 아무도 소외당하지 않을 것인가? 에 대해 고민할 때이다.
이제 우리 학생 사회는 그물코 없는 그물 사회가 되어야 한다. 아무도 갇혀있지는 않지만 아무도 소외되어 있지 않는 그런 사회로 손을 맞잡아야 한다.
그리고 그 학생 사회라는 마당에 들어와 있는 학우들 개개인에게 각자의 삶들을 주체적으로 만들어 갈 수 있는 영역들과 그러한 힘들을 지원하여야 한다.
인간은 돌아가는 톱니바퀴가 아니라 살아가는 인격이기 때문이다.
1).우리는 이것을 스티븐 호킹 이데올로기라 명명하였다.
나는 왜 장애운동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여러분은.
장애인이동권연대 정책교육국장 김 도 현
입 풀기, 혹은 횡설수설하기
나의 공식적인 직함은 노들장애인야학 운영위원이 하나이고, 장애인이동권연대 정책교육국장이 또 하나이다. 그리고 나는 비장애인이다. 몇 가지 이유로 인해 이 글을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 조금은 망설였다. 그리고 지금도 조금 머뭇머뭇하며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원고청탁을 해주신 『인물과 사상』편집 팀에서는 나 자신의 이야기를 편하게 쓰라고 한다. 그러니 부담스럽다. 활동을 하며 글이라는 걸 가끔은 쓰게 되지만, 내가 써야 하는 글은 조금은 공식적이고 딱딱한 글들이 대부분이었다. 솔직히 말해 비장애인인 내가 나 자신의 경험과 이야기로 장애인 문제를 이야기 한다는 것이 얼마간 조심스럽다는 거다.
어쨌든 쓰기로 했으니 써야지. 무엇이든 처음이 중요하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고, 처음이 잘 풀리면 조금 어려운 듯이 보이는 일도 의외로 술술 풀리기도 한다. 글을 쓰며 맨 처음 해야 하는 일은 문체를 정하는 거다. 이번 글의 문체는 ‘수다체’, 그냥 친구랑 이야기하는 듯이 편하게 쓰자는 심산이다. 그럼 기대하시라, 이제부터 옹알 종알... 재미없는 수다를 시작하기로 한다.
에바다문제를 통한 장애운동과의 첫 만남, 그리고 노들장애인야학과의 인연
나는 74년생 범띠다. 그런데 동년배들보다는 조금 늦은 96학번이다. 즉 사수생인 셈인데, 3년 동안 입시공부를 한건 아니었고 나름대로 좀 우여곡절이 있었다. 어린 시절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 자랐던 나는 좋은 대학 가서, 돈 많이 벌고 성공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는 재미없는 아이었다. 그런데 중3때 만난 교생선생님의 영향으로 가치관의 변화를 겪으며 구체적인 진로를 특수교사로 정하게 되지만, 부모님의 반대와 집안의 사정으로 인해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는 모든 학비와 생활비가 지원되고 취업이 보장되는 세무대학교에 진학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한 채 결국 한 학기 만에 부모님의 동의도 없이 자퇴를 했고, 그 문제로 아버지와 심각한 갈등을 겪으며 결국 집을 나오게 된다. 그 후 3년여의 기간 동안 학습지 외판원, 환경미화원, 술집 주방장 등 다양한 일들을 하며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고, 96년도에 다시 단국대학교 특수교육과에 입학을 하게 된 것이다.
대학에 입학한 후, 나는 소위 ‘운동’이란 것에 쉽게 빨려들었다. 그것은 어떤 이론적인 문제가 아니었으며, 23년이란 길지 않은 삶의 경험 속에서 느낀 어떤 동질감이자 유대 의식이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96년 겨울에 접하게 된 에바다 사태는 내 대학생활과 운동에 있어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에바다 투쟁은 평택에 위치한 에바다 복지재단의 끔찍한 인권유린과 비리가 농아원생들의 자발적인 농성으로 세상에 알려지며 시작된 싸움이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온 국민 앞에 생중계 된 ‘국민과의 대화’에서 에바다 문제의 해결을 공언했고, MBC PD수첩 등 각종 시사프로그램과 뉴스에서 여러 차례 보도 되었으니 들어보신 분도 있으리라. 어쨌든 수억 원대에 이르는 공금횡령, 3명에 이르는 아동들의 의문사, 끼니를 굶는 일이 비일비재할 만큼 열악했던 생활환경, 시설 내 작업장에의 강제노동과 임금착취 등 장애인 시설 비리의 전형을 보여주었던 에바다 투쟁은 7년여 간의 끈질긴 투쟁 끝에 지금은 민주적인 이사진들에 의해 모범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97년 당시, 에바다 사태는 농아원장의 구속이라는 표면적인 진전만을 계기로 최씨 일가로 구성된 비리재단이 온존한 상태에서 투쟁단위의 해체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에 대한 문제의식 속에서 단국대 특수교육과 소모임인 ‘반딛불’(반쪽을 딛고 일어서는 불씨의 준말임)과 연세대 장애인권 동아리 ‘게르니카’를 초동 단위로 하여, ‘전국에바다대학생연대회의’를 결성하게 되었고, 97년에는 연대사업팀으로, 2000년에는 정책국장으로 결합하며 함께 활동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에바다투쟁에 지속적으로 결합하는 노들장애인야학 식구들을 접하게 되었다. 장애인계의 속사정을 혹시 좀 아는 분들은 알겠지만 대부분의 커다란 장애인 단체들은 지독하게 관변화?보수화되어 있어, 당시의 에바다 투쟁에 지속적으로 결합했던 장애인 대오는 노들장애인야학 학생 분들이 거의 유일했다. 그러다 보니 나는 자연스럽게 노들장애인야학에 관심을 갖고 친분을 맺게 된다.
그리고 2000년 8월, 대학을 채 졸업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학교에는 야학에 취업을 했노라고 당당히 쌩까버리고 노들장애인야학의 상근교사로서 야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그렇게 시작된 노들과의 인연은 사람과 투쟁, 그리고 술과 함께 이런 저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노들장애인야학과 장애인이동권연대, 그리고 우리의 투쟁
노들장애인야학은 정규교육은 받지 못한 장애인분들이 함께 검정고시 공부도 하고 서로의 생활을 나누며, 장애문제를 고민해가는 공동체이다. ‘노들’은 노란들판의 줄임말이고, 앞에 ‘희망을 일구는 사람들의 터’라는 수식어가 따르며, ‘밑불이 되고 불씨가 되자’를 모토로 하고 있다. 말이 참 좋다. 내가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이 뭐하지만 말만 좋은 게 아니라 치열한 삶이 살아 숨 쉬는 멋진 공간이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에바다 투쟁을 꿋꿋이 지켜냈고, 작은 힘이었지만 야학의 모토처럼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지펴내는 불씨가 되었다.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이 된지 오래 이고 전체 국민의 98%이상이 고등학교까지의 교육을 받는다고 하는데, 장애인들은 51.6%가 초등학교 졸업이하의 학력을 지닌 채 살아가고 있다. 즉 둘 중에 한명은 학교를 아예 안 다녔거나, 초등학교 다니다가 그만두었거나, 겨우 초등학교만 졸업했다는 얘기다. 이 대목에서 일단 여러분들은 열 좀 받거나, 부끄럽거나, 당황스러워해야 한다. 정부의 말로는 우리나가 세계 11위쯤 되는 소위 ‘경제 대국’이라 하고, OECD회원국이 아닌가. 어쨌든 이러한 이유로 노들장애인야학은 특별히 홍보를 하지 않아도 찾아오는 학생 분들이 많고, 또 이렇게 찾아오는 학생분들 중 꽤 다수는 야학에 오기 전까지 집에만 있었던 분들이기도 하다. 그만큼 이 사회가 장애인을 철저하게 배제하며 차별하고 있다는 얘기다.
내가 야학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2001년 1월, 지하철 4호선 오이도역에서는 장애인을 위해 설치했다는 수직형 리프트가 추락해 장애인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장애인 이동권 투쟁의 깃발이 오르게 된다. 작년만 해도 언론에 보도된 것만 지하철에서 7건의 장애인 추락사고가 발생해 2분이 돌아가셨다. 이미 학생분들 중에서도 수차례 지하철에서의 추락 사고를 경험했던 노들장애인야학은 초기의 대책위원회 구성이후 간사 단체의 역할까지 맞으며 활동의 중심에 서게 된다.
그런데 이동권? 한 4년쯤 열심히 싸우기는 했지만, 많은 분들이 이동하는 게 하나의 권리가 되는가라고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다. 맞다. 원래 권리라는 것은 결핍된 자들이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일반인들에게는 권리로 인식되지 않을 수 있지만, 엘리베이터가 없고 장애인을 고려한 안전시설이 없어 지하철을 타다가 죽고, 버스는 이용조차 할 수 없는 장애인들에게는 절실한 권리인 것이다. 이건 누구나 공기가 있어야 살아갈 수 있지만, 공기를 마시는 것을 하나의 권리로서 이야기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공기가 없으면 죽는다. 이동권이 보장되지 못해도 죽는다. 떨어져서만 죽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사회적으로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한번 생각해 보자. 이동하고 돌아다닐 수 없는데, 어떻게 사람을 만나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고, 학교에 다니며, 일터에 나가 노동을 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사회생활을 하며 살아갈 수 있겠는가 말이다.
어쨌든 오이도역추락참사를 계기로 장애인이동권쟁취를위한연대회의(이하 장애인이동권연대)가 만들어지고 난 후, 장애인도 안전하고 자유롭게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정말 열심히 싸웠다. 대국민 서명운동을 벌여 작년 말까지 55만 명이 넘는 서명을 받고, 계단이 없고 바닥이 낮은 저상버스(Non-Step Bus)의 도입을 요구하며 매달 한번씩 ‘장애인도 버스를 탑시다’ 행사도 하고, 천막농성도 숱하게 했다. 그런데 장애인 동지들은 주로 여기저기를 온 몸으로 점거하며 싸웠다. 지하철 선로를 점거하고, 버스를 점거하고, 사다리를 목에 걸고 쇠사슬로 몸을 감아 도로를 점거하고, 국가인권위원회를 점거하고, 서울시청을 점거하고... 생산의 현장에서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은 생산을 멈추는 파업을 통해 싸우고, 가질 거 다 가진 의사들은 가진 거 못 내놓겠다고 국민의 목숨을 담보로 싸우기도 하드만, 아무것도 가진 거 없이 맨몸뚱이 밖에 없는 장애인 동지들은 그 한 몸 던져 싸운 것이다. 누구는 그러한 우리의 투쟁이 좀 과격한 거 아니냐고 하지만, 우리도 즐겁고 좋아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점거하며 싸우다가 사람들은 밥 먹듯이 경찰서를 들락거리고, 장애인이동권연대는 수십 명에게 부과된 수백만 원의 벌금으로 파산지경에 이르렀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부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자극적인 것에 길들여져 그런가, 언론도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많은 수가 모이지도 못하는 우리의 집회는 그저 우리만의 공허한 외침으로 끝나기 십상이었던 것이다. 작년 말, 국회 앞에서는 수많은 단위들이 천막농성을 벌였는데, 사실 공권력의 폭압을 뚫고 가장 먼저 천막농성을 시작한 것은 장애인이동권연대였다. 그러나 우리가 농성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단 한 줄도 언론에 나가지 못했다. 국회의 파행운영과 4대 개혁입법이라는 큰 문제들에 가려져서. 아니 한번 나가기는 했구나, 마포대교를 1시간쯤 점거하고 시위를 벌일 때 길 많이 막힌다는 내용으로.
어쨌든 맨몸뚱이 하나로 이리 들이박고 저리 들이박으며 치열하게 이어져 오던 장애인이동권연대의 투쟁은 2002년 말부터 직접적인 운동의 과제로서 장애인의 이동권을 보장할 수 있는 법률 제정을 상정하고, 2004년 여름 17대 국회에 ‘장애인?노인?임산부등의 교통수단 이용 및 이동보장에 관한 법률(이하 장애인등의 이동보장법률)’입법 발의하게 된다. 그러나 그동안 장애인의 이동권을 철저히 무시해 왔던 정부는 ‘장애인등의 이동보장법률’의 핵심조항인 저상버스 도입의 의무화를 단지 권고조항으로 처리한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을 마련하여 17대 국회에 함께 제출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만다. 이 대목에서 난 다시 조금 열 받는다. 대부분의 언론은 관심이 없었고, 그래도 가장 진보적이라는 한겨례 신문조차 정부의 법률안이 발표되었을 때, ‘장애인 이동권 쟁취되다’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내보냈다.
‘장애인등의 이동보장법률’은 장애인의 이동권을 명확하게 인권이라는 관점에서 명시하고 있으며, 저상버스 등 핵심적인 조항을 의무사항으로 규정하고, 장애인 당사자의 참여를 보장 할 뿐만 아니라, 법률의 실질적 이행을 강제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제재수단을 포함하고 있다. 이에 반해 건설교통부의 ‘교통약자의 이동편의증진법’은 시혜와 배려라는 관점에서 장애인 이동권의 문제를 접근하며, 재정의 문제를 이유로 저상버스 도입을 권고조항으로 처리하고, 실질적인 제재조항도 결여한 법률이었다. 장애인이동권연대는 작년 10월 25일부터 국회 앞에서 68일간 천막농성을 진행하며, 다시금 국회에서 노숙 농성을 벌이고, 한나라당 당사를 점거하고, 도로를 점거하는 등 투쟁을 굳건히 이어 나갔고, 결국 이동권이 명시되고 저상버스 도입의 의무화 조항이 포함된 법률이 2004년 12월 2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는 성과를 만들어 내었다.
지치고 힘들지만... 계속 전진, 그리고 계속 투쟁!
치열하고 쉴 틈 없이 지난 4년여 간의 투쟁을 이어오는 동안 나는 잠시 구치소에 다녀온 적이 있다. 발산역에서의 장애인 추락사망 사고에 대해 공개사과와 안전대책 마련을 요구하며 투쟁하던 중, 송내역에서 또 다시 시각장애인이 추락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였고 나와 몇몇의 동지들은 광화문역 선로 점거 투쟁을 진행하였다. 에바다 투쟁 때 선고받은 3년의 집행유예 기간이 끝나지 않아 얼마간 부담스러웠지만 마땅한 사람이 없었던 게다. 결국 나는 구속되었고 8개월의 실형을 살았다. 그 때 노들장애인야학의 교장이기도 한 장애인이동권연대 박경석 공동대표가 집회 때마다 이야기를 해서 한동안 유행했던 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운동의 열악함’ 이었다. 맞다. 장애운동은 열악하다. 많이 배우고 말빨 있는 교수들이 장애문제를 연구해 과학적인 이론이나 사회적 담론을 형성해 주지도 않고, 집회를 해봐야 100명이 모이기가 어려우며, 활동가들도 태부족이다. 재정도 열악해서 아르바이트조차 하기 어려운 장애인활동가들의 생계는 늘 기로에 서 있다. 그래도 우리는 싸워야 하고 전진해야 한다. 장애인이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우리 앞에 너무나 많은 과제가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저상버스 도입이 의무화 되었다고는 하나 ‘예산의 범위 내에서’라는 단서 조항이 달렸기에,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를 상대로 한 지속적인 예산확보 투쟁이 이루어져야 한다. 기본적인 교육시설이 없어서 학령기 장애아동 4명 중 3명이 집이나 시설에 방치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장애인 교육예산을 대폭 확대하고 장애인교육권을 보장할 수 있는 장애인교육지원법 을 제정하기 위한 투쟁 또한 준비되고 있다. 작년 장애인고용장려금이 대폭 축소되면서 홍역을 앓았던 장애인 노동권 문제도 올해는 어떻게든 반격을 개시해야만 한다. 이윤을 만들어 내는 일을 하지 않으면 굶어 죽거나, 딱 굶어죽지 않을 만큼만 살라는 것이 우리사회의 논리가 아닌가. 중증장애인의 자립생활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핵심적인 제도인 활동보조인(PAS : Personal Assistance Service)의 제도화, 장애인의 기초생활을 보장하기위한 장애인연금법 제정, 노들장애인야학이 둥지를 틀고 있는 공간이기도 한 장애인이용시설인 정립회관의 민주화 투쟁,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 투쟁도 장애인의 차별 철폐를 위해 우리가 받아 안아 함께 싸워나가야 할 과제들이다.
장애인 문제에 여러분들도 관심을 갖고 함께 해야만 하는 이유(?)
어라, 글의 제목을 ‘나는 왜 장애운동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여러분은.’이라고 달아놓고 정말 수다만 떨고 말았다. 그런데 사실 내가 장애운동을 하는 이유가 딱히 이거라고 할 만한 것도 없다. 그저 앞에서부터 얘기해왔던 삶의 과정 속에서 이러저러한 계기들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고 온 것뿐이다. 어차피 운동이라는 것이 목적 그 자체일 수 없고, 모든 사람이 골고루 평등하게 잘 먹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니, 뭐 더 이상 거창한 것이 있을 턱도 없지 않은가.
어쨌든 글을 마무리하는 시점이니 그 이야기를 조금 정리해보자. 장애인문제에 대해 비장애인이, 그리고 우리사회 전체가 함께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대개는 이런 말들을 한다. 전체 장애인 중 89.4%는 사고나 재해, 질병 등으로 인한 후천적 장애인이다. 그러니 비장애인도 언제든지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분명히 합리적이고 맞는 말이다. 틀린 얘기는 아니다. 근데 나는 이게 별로 맘에 들지는 않는다. 꼭 무슨 보험 들자는 얘기 같지 않은가. 나의 ‘이익’과 무관하지 않으니, 혹은 무관하지 않을 수 있으니 해야 하지 않느냐는, 자본주의 사회가 부추기고 강화하는 이기심에 부박하게 편승하는 것 같다.
나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고, 이것이 내가 장애운동을 하는 이유기기도 한 것 같다. 먼저 조금 뜬금없는 질문 하나. 여러분은 살만하신지 궁금하다. 한국 사회의 빈곤인구가 1000만을 넘었다고 하고, IMF이후 장기적인 경제 불황이 지속되면서 대다수 서민들의 삶이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고 모두들 한 목소리를 내며 걱정을 하니, 많이들 퍽퍽하시리라 생각된다. 그런데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소위 80:20의 사회가 형성되며, 빈익빈 부익부의 현상은 오히려 강화되고 있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월드컵 경기 때 그토록 목 놓아 불렀던 ‘대한~민국’이 하나의 울타리 안에 있는 공동체라면, 어려울수록 나눠 쓸 수 있는 사회가 정상이 아닌가? 나는 우리 사회가 운영됨에 있어 기본 원칙인 경쟁과 효율성, 그리고 적자생존의 논리가 결국 대다수 사람들의 삶에 있어 결코 도움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장애인의 인권을 확장시켜 나가는 활동은 바로 이러한 경쟁과 효율성의 원칙에 대척점에 서 있다. 그리하여 장애인의 차별을 철폐하고 권리를 확장하는 투쟁은 장애인의 이익을 위한 투쟁으로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이러한 사회의 논리와 가치를 바꾸어 나가는 활동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즉 평등과 유대, 공동체성의 논리를 확장시켜 나가는 활동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단지 장애인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평등하고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의 건설은 보다 앞당겨 질 수 있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 아닌가?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어쨌든 단 몇 분이라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면, 손을 내밀어 주시라. 당신이, 아니 우리가 함께 할 일이 있을 것이다.
* 덧붙이는 말 : 글을 마무리하고 있는데, 옆에 앉아 있는 사무차장 친구가 장애인이동권연대 재정이 3만원밖에 안 남았다고 한숨을 푹 내쉰다. 저번 달에 이어 이번 달도 50만원씩 지급되는 3명 상근자들은 활동비는 나가지 못할 것 같다. 음... 좀 뻔뻔스러운 것 같지만 마음의 여유가 있으시거든 060-700-1420을 한번 씩 눌러주시라. 한 통화에 2000원이 후원되는, 장애인 이동권과 교육권 투쟁기금을 마련하기위한 ARS번호이다. 그리고 조금 더 여유가 있으시거든 장애인이동권연대 홈페이지(access.jinbo.net)도 한 번씩 방문해 주시길.
장애인차별금지및권리구제등에관한법률에 관한 우리의 입장
장애인 차별금지법제정추진연대 임소연
1. 독립적인 장애인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
2. 독립적인 차별시정기구가 필요하다.
3. 차별가해자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입증을 해야한다.
4. 시정명령제도와 징벌적손해배상제도가 필요하다.
지난 25-26일 인권캠프에 가서 들고온 자료집에 있는 내용을 몇번 읽어서 외웠다.정작 임소연님의 강의는 못듣고 돌아왔지만 더 자세히 알아두어야겠다. 오늘 나의 연애자를 만나 외운내용을 말해주었는데 내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못했다... 3번 책임입증제도에 대한 설명을 그녀에게 들었다.
어제 캠프도 다녀왔고, 야학학생 수업도 하고. 나름 주말을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하며 놀러가는길에 차가 막혔다. 십분을 기다려도 버스가 움직이지도 않았다. 버스아저씨 曰 화물자동차들이 파업을 해서 차가 안나가네.. 차 탈꺼면 서면 가서 타야겠는데.. 지하철 타고가던가.
부산역으로 걸어가는길에 깃발과 노래소리, 구호소리를 듣고 아차 싶었다. ILO.. 노대회..으으.. 적어도 오늘이란걸 알고는 있었어야지..멍청아..
야학 엠티 평가를 했다. 지난 8월 11일에서 13일 거제도 엠티를 다녀왔다.
회의에서 비장애인들 위주로 식사준비와 설겆이가 행해졌다는 비판이 나왔다.
밥준비를 빠르고 간편하게 끝내고 장애인들은 식사를 받았다.
다음 엠티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오지 않으려면 엠티일정 전체를 조정해야한다.
사실 엠티중에도 문제라고 느끼고 있었지만, 누군가 이야기를 꺼내기전까지는 별로 고민하지 않았다.
효율적인 사고, 빠른 일처리에 대한 감정적 선호..
이런 문제제기를 해준 누나에게 감사하고, 마땅히 장애인, 비장애인이 어우러져사는 사회를 지향하는 야학의 이념에 맞게, 일도 함께해야한다.
그런데도 나는 왜 문제제기를 하지 못했을까.
어제 회의를 마치고 밥을 먹고
회의가 길어진터라 막차시간이 얼마남지 않았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밥그릇을 씻고, 정리를 하고 문을 닫고 함께 지하철역까지 가는동안 그래도 "책상정리는 좀 해줬으면 좋았잖아?!"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런건 이야기하면된다. 제가 설겆이 할테니깐 책상 좀 닦아줘요.
그럼에도 마음에 떠오른 생각 "내가 하는게 더 빠르니깐, 그냥 내가 해버리지.."
함께 걸어가는게 답답한 마음, 1년동안 나는 무엇을 배웠는가.
차에서 내려 집에 걸어가는길에 드는 꿀꿀한 기분..쩜쩜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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