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약국의 추억

2008/05/05 21:58

내 고향 중앙시장 입구에는 시장에 오는 사람이 한 번씩 들리게 되는 약국이 있다. 주인 약사 아저씨 이름이 김모였다. 아마도 그 소도시에서 장사가 제일 잘되는 약국이었을 것이다. 장사가 제일 잘되는 시장의 장사가 제일 잘될만한 목에 위치해 있었으니까.

 

내가 언젠가 집에 내려가서 할 일 없어서 시간때우려고 시립도서관에서 빌려다 본 소설 <<김약국의 딸들>>을 처음 서가에서 보았을 때 시장통의 그 약국을 떠올렸다. 아니, 전국에 무수히 존재할 약사 김모씨들의 약국을 떠올렸던 건지도 모른다. 소도시에서 가장 부유하고, 게다가 주유소 사장과는 달리 저명하기까지 하였던 김모 약사 아저씨, 선거바람이 불 때 국회의원 나갔다가 기성 정치인의 텃세에 눌려 여당 공천도 못받고 무소속 출마하고, 떨어진 일로 재산만 축내었을 테지. 그러나 여전히 한동안 지역사회에서 명성은 유지하고 있었다. 있다가, 시간이 지나면 약국과 함께 약사 아저씨도 세월의 저편으로 퇴장하시겠지. 나는 한동안 김모 약사 아저씨와 그의 약국을 떠올릴 때마다 쇠락해 가는 내 고향 소도시 전체의 모습을 함께 떠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박경리 선생의 이 소설 <<김약국의 딸들>>에 등장하는 김약국은 양약을 파는 약국이 아니라 한약을 파는 약국이다. 또 김약국이란 약사 이름이 김씨라서 사람들이 그 약사를 일상적으로 부를 때 쓰는 호칭이기도 하다. 김약국, 김약국 어른, 김약국 나리, 김약국 나리 계신가 여쭙게... 이런 식으로.

 

파는 물건이 양약이냐 한약이냐를 차치하고 보면 김약국과 내 고향 시장통의 그 약국은 꽤나 닮아 있다. 할아버지한테 약국을 물려받은 김약국은 통영지방의 지주이자 유지이다. 대부의 말론브란도가 그러듯 주변 사람들이 그에게 약만 사러 오는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일어날 각종 문제들에 대해 상담을 요청하러 오고, 돈을 뜯어가기도 한다. 김약국은 약만 팔지 않고 상담을 해주고, 돈을 주고, 대신에 위신(prestige)을 받는다. 지역사회에서 사람들의 삶은 이와 같이 경제적, 상징적 교환의 그물망으로 빈틈없이 연결되어 있다. 소설은 이런 그물망이 기계적으로 평등한 것만도 아니요, 중심에 현저히 많은 역할을 하는 존재가 있음을 숨기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중심이 곧 인생에 있어 좋은 것은 다 차지하는 절대권력은 아니다. 그물의 연결된 올이 더 많을 수록 신경써야할 인생의 프로젝트가 더 많아서 피곤에 쩔어 있을 수밖에 없는 보스의 모습을 소설은 그리고 있다.

 

이런 촘촘한 공동체, 그러나 쇠락해 가는 그물망을 그리기에 일제시대 통영이라는 소도시가 제격이었을 것이다. 통영이 바닷가를 끼고 있는 소도시였단 점도 읽는 내내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이미지에 내 고향을 대입했던 것에 한몫했다.

 

저자 박경리 선생이 오늘 돌아가셨다고 한다. 내일 강의 가서는 토지문화관에 꼭 한번 들러보아야겠다. 벌써 몇주째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 내 삶은 곧 사소한 번뇌들의 그물망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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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05 21:58 2008/05/05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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