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순간 2009/05/08 21:10

분노하고 싶지만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王宮 대신에 王宮의 음탕 대신에
五十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越南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二十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앞에 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第十四野戰病院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느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을 지고
머리도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二十원 때문에 十원 때문에 一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一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

(시집 {거대한 뿌리}, 1974)

......................................................................................................................................................................................

 

소위 노동운동판에서 껌 좀 씹어댔지만,

먹고사는 현실 앞에선 눈과 귀와 입을 틀어막았다

직원이래야 일곱명뿐인 개인사업장에서

기껏 입사한지 석달째인 나이 많은 막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사실 없다

그러나 허울뿐인 근로계약서에 서명하고

받지도 않은 성평등교육용지에 이름을 적어대며

결국 나 또한 무기력한 노동자일뿐임을 실감하게 된다

'이렇게 하면 안되는 거잖아요'

무심한 듯  작은 목소리로 말하고

최대한 느릿느릿 서류를 읽고 서명을 하며

소극적인 반항 흉내를 내볼 뿐..ㅋ

 

혼자일 때,

노동자는 얼마나 약한 존재인가

인간이란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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