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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하다. <불멸의 이순신>...

말도 많고 탈도 많던 KBS의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이 지난주 마침내 1년간의 장정을 마치고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말았다. 참 비판도 많았다. 처음 원균명장론을 들고 나와서 사람 황당하게 만들더니, 이후로는 역사무시 고증무시 개연성무시의 삼무시주의로 보는 이로 하여금 도대체 어디까지 갈 것인가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고 말았다. 그래서 한 때 나 또한 공식홈페이지에서 꽤나 비판도 하고 했었다. 나중에야 귀찮고 짜증나서 다 때려치기는 했지만.

비판이 있으면 그 비판에 대한 반론도 당연히 있는 법이라 <불멸의 이순신>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도 나름대로의 비판 논리 또한 물론 없지는 않다. 그런데 이 비판에 내한 반론이라는 게 참 궁색하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는 것. "드라마는 드라마로서만 보라."는 것. 그것이 <불멸의 이순신>에서 내내 보여 왔던 역사와 고증, 개연성상의 문제에 대한 비판에 대한 거의 유일한 반론의 논리다. 아주 애처롭게도.

애처롭다. 진짜 애처롭다. "드라마일 뿐"이라? "허구로서 보아" 달라? 역사드라마다. 그것도 대하역사드라마다. 역사드라마란 무엇인가? 역사를 소재로 한 드라마다. 역사를 주제로 한 드라마다. 드라마이면서 역사다. 역사이면서 드라마다. 그래서 역사드라마다. 물론 드라마라는 부분이 더 강하기는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역사라고 하는 부분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역사라는 것을 부정하고 "드라마로만" 볼 수 없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역사드라마가 아닌 판타지가 되어 버릴 테니까.

물론 드라마인 이상 허구를 배제할 수는 없다. 작가와 제작진의 제작의도에 따라 어느정도 창의력이 개입될 여지 또한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역사적인 사건 혹은 인물에 대한 엄격하고 냉정한 깊이 있는 분석과 치밀한 고증 위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역사적 사실이야 어찌되었든, 그에 대한 고증이야 어찌되었든 좋은, 아무래도 좋은 그런 것이 아닌 것이다.

예를 들어 이순신의 내면을 제대로 재구성해냈다고 하는데, 명량해전 당시 이순신은 12척의 조선 수군 함대가 뒤로 물러나 있는 사이, 대장선 한 척만 이끌고 133척의 적선과 홀로 맞서 싸웠었다. 철쇄설의 근거가 되는 행장의 주인공인 김억추가 한참 뒤에서 벌벌 떨고 있는 동안, 겁먹은 조선수군의 앞에서 홀로 적선에 둘러싸여가며 싸움을 독려했다. <불멸의 이순신>에 그러한 이순신의 모습이 있는가? 오로지 홀로 배 한 척으로 적과 맞서는 고독하고 치열한 용기가 <불멸의 이순신>에 있던가?

칼을 비껴 들고 적선으로 뛰어 올라가 적장과 칼을 맞대는 것도 그렇다. 조선 수군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함대의 지휘관이다. 고작 12척. 임진년에서 정유년까지 그를 도와 함께 싸워 왔던 이억기도 원균도 없다. 오로지 그 하나다. 그 상황에서 조선수군을 이끌 지휘관은 이순신 단 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이가 칼 한 자루를 들고 적선으로 뛰어 올라가 적장과 칼을 맞대고 싸운다? 그것도 단병접전을 피하기 위해 개발한 판옥선을 이끌고? 그렇게 무모한 인간이었나? 이순신이?

"내 저들을 베고 도성을 치리라."라는 대사도 그렇다. 이순신을 박정희로 만들고 싶었던 것인가? 아니면 이순신을 전두환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인가? 시원했을 것이다. 통쾌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이라는 인간이 과연 그러한 말을 했을 인간이던가? 난중일기에서,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에서, 징비록에서, 온갖 역사상의 기록에서 등장하는 이순신이라는 인간이 과연 그러한 말을 했을 정도로 경솔하고 경우 없는 인간이었던가?

자살설도 그렇다. 아직 전투가 치열한 와중이다. 더구나 노량해전은 철저하게 조명연합수군에 불리한 상황에서 진행되었다. 사천에서 구원하려 오는 시마즈 요시히로의 함대와 왜교성의 고니시 유키나가 함대 사이에 끼인 채 양면으로 적을 상대해야 할 수도 있는 그런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런 중요하고 위험한 전투에서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았는데 지휘관이 죽자고 작정한 듯 갑옷을 벗고 함대의 앞으로 나아가 지휘를 한다? 이순신이 그렇게 무책임한 지휘관이었던가?

따지자면 한도 끝도 없다. 인간 이순신의 내면을 그려내겠다고 하면서 정작 드라마 어디에도 역사에 실존했던 "인간 이순신"은 없다. 당연하다. 역사가 우리에게 인간 이순신을 보여주는 방법은 역사적 사실과 그 사실에 대한 이순신의 대응을 통해서다. 133척의 적선을 맞아 아군이 뒤로 물러서는 상황에서 끝까지 자신의 자리를 지켜 싸우는 모습에서 우리는 그 고독한 용기와 치열한 의기를 읽는다. 억울한 죄를 뒤집어쓰고 파직되어 온갖 고문을 겪다가, 모친의 임종조차 보지 못하고 백의종군을 하게 된 상황에서도 수군통제사로서 자신의 맡은 바 본분을 다 하는 모습에서 그 올곧음과 그 강인함을 읽는다.

그런데 드라마는 그러한 역사상의 이순신을 작가와 제작진이 자의적으로 재구성한 사건들을 통해 엉떵한 모습으로 바꾸어 버린다. 인간 이순신의 내면을 그려낸다면서 정작 실재했던 이순신이 아닌 그들이 믿고 싶어하는 "나약한 인간 이순신"을 그려내고 있다. <불멸의 이순신>을 비판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인간 이순신의 모습을 그려내려 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믿고 싶어하는 이순신을 역사상의 이순신인 양 드라마라는 수단을 통해 꾸며내려 했기 때문이다.

<해신>의 장보고처럼 아예 역사기록 자체가 부실한 경우라면 어쩔 수 없다. 기록조차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 장보고의 일대기를 재구성하려면 역사기록 이상의 창작이 없어서는 안 될 테니까. 그러나 이순신은 다르다. 이순신에 대한 사료는 너무 많아서 오히려 드라마로 제작하는 데 있어 상상력을 발휘할 여지가 없다고 할 정도다. 그런데 그런 사료를 모조리 무시해 버리고 그들 멋대로 역사를 조작해내고 있다.

더 화가 나는 것은 그런 주제에 이순신에 대한 일반의 숭배에 가까운 존경심에 영합하기 위해 조선의 조정을 보다 더 악질적으로 그려냈다는 점이다. 역사의 기록 어디에도 없는 이순신을 죽이기 위해 담합하는 조정이라는 모습을 의도적으로 창작해냄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침략자인 일본군보다 조선의 조정을 더 증오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 조선의 조정을 위해서 싸웠던 이순신을 위해 "조선따위 망해버리는 게 당연하다."라는 말을 하게 만들어 버렸다.

어떻게 된 게 침략한 쪽은 일본이고 침략당한 쪽은 조선인데, 사람들은 조선을 더 증오하고 혐오한다. 이순신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조선이고, 조선의 조정이고, 조선의 왕실이었을 것인데, 오히려 이순신이 지키고자 했던 것을 모욕함으로써 덩달아 이순신까지 모욕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사실을 모른다. 이순신과 조선을 철저히 분리해서 사고하고 있으니까. 그 또한 드라마가 의도한 바이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면사첩이라니. 면사첩이라니. 그 면사첩이라는 건 한 마디로 찌라시 같은 거다. 이거 갖고 있으면 왜군에 부역했다 하더라도 죽이지 않는다는 일종의 면죄부 같은 거다. 대상은 당연히 일본에 협력하거나 일본에 의해 동원되어 부역했던 일반 백성이다. 그런데 그 면사첩을 이순신에게 전해줌으로써 드라마는 철저히 이순신과 조선 조정을 분리해 버린다. 당연히 이순신을 위해 이순신이 지키고자 했던 나라를 경멸하게 되는 것이다. 어이없게도.


좋은 역사 드라마는 역사에 대한 다양하고 풍부한 여러가지 생각과 가능성을 보여준다. 역사를 보다 깊이 이해하게 만들고, 역사를 보다 디테일하게 보게 만들며, 역사의 무한한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도록 해준다. 역사로부터 유리된 오로지 허구로서의 드라마가 아니라, 역사를 소재와 주제로 삼은 드라마로서, 드라마를 통해 사람들에게 올바른 역사를 보여주려 한다. 그래서 역사드라마다.

그런데 <불멸의 이순신>에는 그것이 없다. 그래서 오죽하면 그 비판에 대한 반론이라는 것도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들 스스로가 <불멸의 이순신>이 역사드라마라고 하는 것을 포기한 것이다. 역사 드라마가 역사적 고증을 포기한다는 것은 역사를 보여주기를 포기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역사를 소재로 삼고 역사를 주제로 삼는 역사 드라마로서의 본연의 역할을 포기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것을 어찌 역사드라마라 할 수 있을까? 그냥 드라마로서 역사적인 요소를 조금 삽입한 정도에 불과한 정도다.

그래서 불쌍하다는 거다. 역사드라마. 그것도 대하역사드라마로서 만들어진 드라마가 스스로 "역사성"을 거세한다는 것이. <불멸의 이순신>을 좋아하기에 오히려 역사드라마로서의 "역사성"을 부정해야 한다는 것이 불쌍하고 또 불쌍하다는 거다. 그럴 거라면 차라리 역사드라마라 하지나 말지. <다모>처럼 퓨전사극을 지향했다면 누구도 역사적 고증문제를 가지고 시비를 걸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말이다. 역사드라마로 만들어 놓고서 역사성을 배제해 버렸으니 결국은 이렇게 역사드라마도, 역사드라마가 아니지도 않은 드라마가 되어 버렸지 않은가?

역사드라마라고 만들었다. 그런데 그 역사적 고증의 문제로 비판자들은 그 역사성을 비판한다. 그리고 그 비판자들로부터 드라마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역사성을 배제한 드라마를 강조함으로써 그들의 비판을 반박한다. 그래서 대하역사드라마인 <불멸의 이순신>은 비판자와 옹호자 양쪽에 의해서 역사드라마가 아니게 되어 버렸다. 작가와 제작진만이 역사드라마임을 꾸준히 주장하고 있을 뿐. 이보다 불쌍한 드라마가 어디 있을까? 불쌍해서 눈물이 다 난다. 찔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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