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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우라 켄타로의 만화를 안 읽는 이유...

아마 만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베르세르크의 이름은 알 것이다. 박력 넘치는 그림, 치밀함과 스케일을 고루 갖춘 스토리,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 더구나 그 처절하기까지 한 리얼함까지... 그야말로 최고의 만화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는 작품이 바로 이 베르세르크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이 만화를 읽지 않는다. 해적판으로 우리나라에서도 꽤나 일찍 이 만화를 발견한 사람 가운데 한 명임에도 말이다. 이유는 이 작가의 다른 만화들 때문이다.

 

청랑이라는 만화가 있다. 두 권짜리이던가? 소꿉친구인 남녀 고등학생 둘이 삼국지 시대로 타임슬립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만화 용랑전과 비슷한 컨셉으로, 역시 비행기를 타고 가다 12세기 몽골로 떨어지는 소꿉친구 남녀 고등학생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물론 이 정도야 다른 만화나 소설, 영화 등에서도 많이 단골로 사용하는 설정이니 표절이라 할 수도 없고, 특별히 그러한 점이 문제가 될 이유는 없다. 내가 문제시 여기는 것은 다른 부분이다. 바로 주인공 남녀가 12세기 몽골에서 만나는 인물. 칭기즈칸이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일본인 가운데는 이 칭기즈칸이 일본인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 모델은 12세기 일본의 역사를 크게 뒤바꾼 겐페이 합전의 영웅 미나모토노 요시츠네. 겐지의 토료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의 아홉번째 아들로써 배다른 형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도와 당시 일본을 지배하고 있는 헤이케를 무너뜨리고 가마쿠라 막부를 세우는 데 크나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그는 단순히 능력만 뛰어난 것이 아니었다. 인품도 훌륭해서 배다른 형이자 가마쿠라 막부를 연 첫번째 쇼군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그 능력과 인망을 경계하고 두려워해서 그를 배척하고 공격했을 때에도 형제끼리 다툴 수 없다 하여 후지와라의 후원과 많은 무사들의 지지를 업고 있었음에도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죽음을 맞이했을 정도로 정의가 깊고 인정이 많은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이다 보니 사람들은 자연히 그의 죽음에 대해 깊은 아쉬움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가 죽지 않고 살아 도망쳤다고 하는 이야기가 어느샌가 모르게 인구에 회자되게 되었다. 지금도 생존설이 끊이지 않고 있는 엘비스 프레슬리처럼. 이미 죽은 지 오래인 사람을 보았다고 하는 목격자가 아직도 나오고 있는 현실이고 보면 그보다 더 정보의 정확성이나 전달속도가 뒤떨어진 시대에 죽었던 사람을 살리는 정도야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렇게 미나모토 요시츠네의 생존설이 민간에 퍼지던 어느 날 갑자기 일본인들은 그들이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기마전술로 무장한 침략자를 맞이하게 된다. 일본인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말을 타고 칼을 휘두르고, 창을 찌르며, 활을 쏘는 기술을 선보인 그들은 일본인들에게 크나큰 충격이었다. 심지어 몽골의 침략 이전의 일본과 이후가 다르다 할 정도로 일본은 그로 인해 큰 변화를 겪게 된다. 그리고 그때 일본인들은 칭기즈칸의 이름도 함께 전해듣는다. 미나모토 요시츠네가 죽을 무렵 대륙에서 세계의 정복자가 되었던 전설적인 영웅의 이름을.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는 어딘가 살아 있을 것이다라는 소박한 믿음은 그렇게 그의 죽음과 비슷한 무렵 대륙에서 세계의 정복자가 되었던 칭기즈칸에게로 이어지고, 칭기즈칸이 이끌던 몽골군의 공포스럽기까지 한 힘은 요시츠네의 전설로 덧붙여졌다. 지금도 정설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요시츠네의 신기에 가까운 기마전술이라는 것은 그때에 비로소 완성된 것이었던 것이다.

 

물론 최소한의 상식을 갖춘 사람이라면야 이러한 설을 진실이라고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일본 밖의 세계에 대한 정보에 어두웠던 에도 이전의 시대라면 모를까, 메이지유신 이후 동아시아의 역사와 철학, 과학 등 거의 모든 학문에 선구적 발자취를 남겼던 근대의 일본인이 단순히 전설에 불과한 이야기를 사실로 믿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그러나 아주 일부, 극히 특이한 사고를 갖는 사람들은 아직도 그러한 사실을 믿고 있다. 칭기즈칸의 무덤을 찾기 위한 작업에 막대한 돈을 아낌없이 투자할 수 있었던 그들. 누구일까? 바로 일본의 극우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검도도 우리나라에서 건너갔다. 종이접기도 우리가 전해준 것이다. 꽃꽃이도 원래 우리의 것이었다. 유도도 고려의 유술이 건너간 것이다. 다도도 고려의 것이 일본에 전해져 정착된 것이다. 등등등... 모든 것의 원류는 한국이며 한국이야 말로 모든 문화의 종주국이라 주장하는 이들. 심지어 일본의 천황까지도 한국인이었다 고집하고 싶어하는 그들. 일본에도 그러한 무리들이 있어, 세계에서 가장 광대한 제국을 일구었던 칭기즈칸을 자신들의 영웅으로 만들고 싶어했던 것이다.

 

미우라 켄타로의 만화 청랑은 바로 그러한 무리들의 역사관과 세계관을 그대로 담은 만화였다.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가 몽골고원으로 건너가 칭기즈칸이 되고, 무사시보 벤케이는 그를 보좌하는 제베가 되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주인공 남녀의 아들이 칭기즈칸의 양자가 되어 이후 쿠빌라이칸이 되는 데에는 미치지 못한다. 쿠빌라이의 일본원정을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노력으로 만들어 버렸으니. 우리나라 국수주의자들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역사딸딸이의 궁극이라 할 것이다.

 

 

물론 이것 하나만 가지고 미우라 켄타로의 정치적 성향을 미루어 짐작한다는 것은 너무 성급할 수 있다. 나 또한 이것 하나만 가지고 문제 삼을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일본 만화라는 게 작화를 담당하는 만화가와 스토리를 담당하는 스토리작가의 분업화가 확실히 정착되어 있고, 그나마도 편집자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는 체제인 터라 미우라 켄타로 개인의 문제는 아니라 좋게 생각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뒤에 나온 미우라 켄타로의 단편집에 있었다. 제목이 "지팡구"였던가? 만화의 내용은 아주 단순하다. 핵전쟁이 있었다. 그래서 모든 것이 파괴되고 세계는, 아니 일본은 무정부의 혼란에 빠져든다. 모든 인간들이 절망과 공포로 어쩔 줄 몰라 하는 상황에서 한 사람 구세주가 나탄잔다. 혼란을 질서로 바꾸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줄 영웅. 바로 야쿠자다. 믿기는가? 야쿠자게 세계를 구한다.

 

더구나 그 야쿠자가 세계를 구하는 방식이라는 것도 지극히 야쿠자스럽다. 강제된 질서와 그 질서에 복종하는 개인. 일본 만화나 영화, 드라마에서 많이 나오는 와和. 박정희로 인해 우리에게도 많이 익숙한 그것. 초등학교 어린아이들에게조차 제식훈련을 시켜가며 강요하던 바로 그것. 대동아공영권을 외치며 귀축미영을 몰아내기 위해 전선으로 나아가는 병사들에게 일본 대본영이 부르짖었던 그것은 일본이 자랑하는 일본의 혼 야마토 타마시大和魂다.

 

아다시피 일본의 극우는 필연적으로 야쿠자와 맞닿아 있다. 일본 총리 고이즈미의 할아버지도 야쿠자 출신이었다. 야쿠자로서 쌓아 놓은 지역에서의 연고를 바탕으로 중앙 정계와 연줄이 닿아 정치에 입문했던 것이 고이즈미 총리의 할아버지였고, 그것이 고이즈미의 아머지와 고이즈미에게로 삼대에 걸쳐 세습되었던 것이다. 고이즈미 뿐만이 아니다. 뒤져보면 야쿠자와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지 않은 정치인이 없다고 할 정도다.

 

범죄조직이 무슨 극우냐고 할 지 모르지만 원래 범죄조직처럼 극우와 가까운 것이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2000년 새역모의 교과서 왜곡 파동 때 손가락을 자르는 퍼포먼스를 벌인 인간들은 바로 그 지역 조폭들이었다. 아니 그 전에 해방공간에 파업 노동자와 사회주의자들을 상대로 백색테러를 저지르던 인간들도 조폭이었다. 왜? 극우의 논리란 바로 조폭의 논리니까.

 

송강호가 그러지 않던가? "내... 내가 그러... 그렇다면 그런 거야! 아... 안 그러면... 배... 배... 배신이야!" 라고. 이게 바로 조폭의 논리다. 의심도 저항도 이탈도 허락되지 않는, 이른바 묻지마 의리, 묻지마 단결, 묻지마 복종이야 말로 조폭이 지향하며 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극우주의자들의 - 이라고 쓰고 꼴통이라 읽는다. - 묻지마 민족, 묻지마 국가와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다.

 

감히 보스에게 반항하면 안 되듯 국가에게 반항하면 결코 안된다. 강도강간살인마약밀매를 밥먹듯 저지르는 같은 조직원을 형제애로서 감싸주듯, 학살과 약탈을 자행하는 국가와 민족에 대해서도 무한한 애정을 보여야 한다. 국가는 선이며 민족은 진리다. 그것은 결코 의심해서는 안되는 절대가치이며,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배신이며 죽음으로 갚아야 할 죄이다. 그래서 지금도 거리에서 마이크로 떠들어대는 인간들은 깍두기머리들이다. 군대라고는 가본 적 없는, 그저 어깨에 힘이나 주고 평범한 사람들을 위협할 줄이나 아는 무리들이 군대를 이야기하고 전쟁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미우라 켄타로의 "지팡구"는 이러한 야쿠자의 속성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었다. 매우 긍정적으로. 아마 기억할 것이다. 아놀드 슈왈츠제네거가 주연했던 "유치원으로 간 사나이"라는 영화를. 군대식의 억압과 통제에 길들여지는 아이들의 모습을 미화해 보여주던 끔찍하도록 혐오스럽고 공포스런 영화를. 여기서 아놀드 슈왈츠제네거를 야쿠자에, 유치원 아이들을 혼란에 빠진 인간들에 대입하면 바로 지팡구라는 영화가 된다. 보는 내내 한없이 불쾌하고 끔찍한 만화였다.

 

이 두 편의 만화는 미우라 켄타로라는 만화가에 대한 나의 인상을 결정지었다. 그리고 이들 작품들을 통해 형성된 미우라 켄타로에 대한 인식은 베르세르크에 대한 해석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베르세르크 역시 내게는 무척이나 끔찍한 만화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전혀 다른 시대, 전혀 다른 세계, 전혀 다른 캐릭터의, 전혀 다른 만화임에도 같은 작가의 작품이라고 하는 고리는 결코 다르지 않은 느낌으로 여겨지게 했던 것이다.

 

지금도 미우라 켄타로라는 이름을 들으면 청랑이 생각난다. 지팡구도 생각나고. 베르세르크의 주인공 카츠의 압도적인 폭력과 광기에서 "지팡구"의 야쿠자를 떠올린다. 결국에는 폭력과 파괴로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밖에 없는 만화의 내용은 지팡구가 추구하던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그래서 그의 만화를 읽는 것은 내게 무척이나 큰 고통이다. 즐거워야 할 만화가 고통이라는 것만으로도 읽어서는 안 될 이유는 충분한 것이고.

 

이것이 내가 미우라 켄타로라는 만화가를 싫어하고, 그의 만화를 읽지 않는 별 대단찮은 허접한 이유다. 진짜 싫다. 미우라 켄타로나 그의 만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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