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4/09/14 09:44

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

                            - 함석헌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 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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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14 09:44 2004/09/14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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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9/14 09:42

뗏목지기는 조직원이었네

양자강 물가에 뗏목지기 있었네
물 속에 노니는 고기처럼 한가하게
산맥을 빠져나온 구름처럼 유유하게
장기도 두고 낚시질도 하고
혁명의 세월에 한가하게 사는 꼴이
청년들 눈에 차암, 안되 보였네
홍군에 참가하여
전장터에 한목숨 내맡기도 싶었던
젊은 뗏목지기 견디기 힘들었네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5년 6년 7년이 지나도
아무런 전투에도 불려가지 못했네
머리에 하나 둘 흰머리가 나도록
무기력과 낮잠과 권태와 싸웠네
이마에 깊은 주름살이 서도록
초조감과 조급성과 세월과 싸웠네
아무도 그 뜻을 헤아릴 수 없었네
그를 배치한 조직을 빼놓고는
백군에게 쫓겨 파국을 앞두게 된
홍군이 어느 날 그곳을 지났네
뗏목지기 나서 뗏목을 준비했네
5년도 넘게 10년도 넘게
흰머리가 나도록 준비했던 뗏목지기
뗏목 풀어 한꺼번에 대군을 살렸네
무기력과 낮잠과 권태와 싸운 끝에
초조감과 조급성과 세월과 싸운 끝에
대륙의 역사를 10년쯤 앞당겨 낸
조직의 수명을 10년쯤 늘려놓은
뗏목지기 인생을 아는 사람 없었네
그 청춘을 관리한 조직을 빼놓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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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14 09:42 2004/09/14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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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9/13 23:48

이탈한 자가 문득

                                         - 김중식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 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
     양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별
     들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
     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
     함으로써 두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
     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
     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 이탈 자체가 '획'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진실,

  '획'을 긋는 일이야말로

  이탈한 자들의 권리이자 '의무'라는 진리를 깨닫기까지

  한 십년쯤 걸린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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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13 23:48 2004/09/13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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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9/13 23:40

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 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 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에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데서 지금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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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13 23:40 2004/09/13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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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9/13 23:38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 도종환
 
저녁숲에 내리는 황금빛 노을이기보다는
구름 사이에 뜬 별이었음 좋겠어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버드나무 실가지 가볍게 딛으며 오르는 만월이기보다는
동짓달 스무 날 빈 논길을 쓰다듬는 달빛이었음 싶어.

 

꽃분에 가꾼 국화의 우아함보다는
해가 뜨고 지는 일에 고개를 끄덕일 줄 아는 구절초이었음 해.
내 사랑하는 당신이 꽃이라면
꽃 피우는 일이 곧 살아가는 일인
콩꽃 팥꽃이었음 좋겠어.

 

이 세상의 어느 한 계절 화사히 피었다
시들면 자취 없는 사랑 말고
저무는 들녘일수록 더욱 은은히 아름다운
억새풀처럼 늙어갈 순 없을까
바람 많은 가을 강가에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우리 서로 물이 되어 흐른다면
바위를 깎거나 갯벌 허무는 밀물 썰물보다는
물오리떼 쉬어가는 저녁 강물어었음 좋겠어
이렇게 손을 잡고 한 세상을 흐르는 동안
갈대가 하늘로 크고 먼바다에 이르는 강물이었음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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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13 23:38 2004/09/13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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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9/13 23:32

사랑법

                           -강은교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그대 살 속의
오래 전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는 강물과
누워 있는

누워 있는 구름,
결코 잠 깨지 않는 별을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 피지 말고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
떠나고 싶은 자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자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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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13 23:32 2004/09/13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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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9/13 23:29

수선화에게  (정호승)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뱃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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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13 23:29 2004/09/13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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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기장 - 2004/09/13 23:11

플로렌스라는 여자가 1952년,

카탈리나 해협을 수영으로 건너기로 하자,

이 볼거리때문에 세상이 들끓었죠.

매스컴이 난리가 났었어요.

그런데 목표물 500미터 정도를 앞에 두고 그 게임을 포기했습니다.

 

많은 기자들 앞에서 플로렌스는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내 주위를 맴돌았던 상어나

온 몸을 얼어붙게 하는 추위 때문에 포기한게 아니라...

... 안개때문이었습니다.

500미터 앞이 해안이라는 사실만 알았어도...

끝까지 전진했을텐데..."

 

플로렌스는 두 달 뒤에 다시 재도전했는데

이번에도 똑같은 안개때문에 앞을 볼 수 없었지만

플로렌스는 머리 속에 해안을 그리면서 그 목표만을 생각하면서 헤엄쳤고

마침내 성공했다.

 

매스컴 가라사대,

안개 때문에 보이진 않았지만

그 너머 목표물을 확신하는 플로렌스 채드윅의 눈빛은 생동감이 넘쳤다!

 

                                                      - "내 파란 세이버"中 (박흥용 作)

 

노동자들이 싸움을 시작하는 이유도,

싸우다가 포기하는 이유도

대부분의 경우

그놈의 '희망'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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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13 23:11 2004/09/13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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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기장 - 2004/09/13 00:53

얼마전부터 알포인트란 영화를 보고싶었지만

시간도 잘 나지 않고,

같이 보러갈 사람을 찾는 일도 여의치 않아 계속 밍기적대다

일요일 밤 마지막 영화를 보고 왔다.

 

영화가 그닥 인기가 없어서인지,

혹은 끝물이어서인지

함께 관람한 이들은 채 서른명도 되지 않아보였고

나는 사람들과는 좀 멀찍이 떨어져서 앞자리에 앉아서 영활 봤다.

 

흰 아오자이를 입은 귀신이 나와 피눈물을 흘리더군. ㅠㅠ

섬찟...

 

'不歸'

"이곳에서 손에 피를 묻힌 자 돌아가지 못한다!"

실종된 군인들을 찾으러 간 병사들이 R포인트 초입에서 발견한 비문이다.

귀신이나 피범벅이 된 배우들의 영상보다 더욱 섬찟했던 구절.

 

제국주의의 침략전쟁에서 명분없는 살륙에 동참했던 우리는

과연 그곳에서 돌아올 수 있었는가?

눈을 다쳐 빙의되지 않았기에

유일하게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어느 병사처럼

우리 또한 베트남 민중들의 피눈물을 외면하는 것만이

돌아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란 말인가?

 

영화를 보고 돌아오던 길

내내 찜찜하기 그지없는 결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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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13 00:53 2004/09/13 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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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기장 - 2004/09/13 00:18

도대체 뭔지 모르겠지만

뭔가 끄적일 공간이 생긴다는 의미인듯 싶다.

 

끄적이기...

 

글재간도 없고, 생각도 깊지 못할뿐더러

기록을 남겨야할 만큼 의미있는 삶을 살고 있지도 못한데

갑자기 이 무슨 해괴망칙한 짓인지...

 

가을이 오고 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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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13 00:18 2004/09/13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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