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로 수출되는 한국 기업의 손배소?(시사인)

해외로 수출되는 한국 기업의 손배소?

 
김영미 국제문제 전문 편집위원

1970년대 서울 청계천 봉제공장에는 환풍기도 없이 미싱을 돌리는 파리한 얼굴의 여공들이 있었다. 너나 할 것 없이 가난했던 그 시절, 15세가량의 소녀들이 집안에 보탬이 되고자 어두컴컴한 청계천 봉제공장으로 흘러들어갔다. 여공들은 좁은 방에서 잔업수당도 휴가도 없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12시간 이상 허리도 못 펴며 일했다.

우리에겐 아련한 과거의 한 장면이 현재 캄보디아에서 재연되고 있다. 캄보디아 정부는 봉제 섬유업을 사실상의 국책산업으로 육성하고 있다. 한국 기업들에게는 캄보디아의 저임금이 매력적이다. 그래서 청계천의 봉제공장들이 캄보디아로 옮아갔다. 현재 캄보디아의 한국인 소유 봉제공장은 50여 개로 노동자 35만여 명을 고용하고 있다.


이 노동자들은 주로 캄보디아 곳곳의 농촌에서 올라온 가난한 소녀들이다. 집세를 아끼기 위해 고향 친구, 친척 등과 함께 보통 6~8명이 방 하나에 모여 산다. 하루 10시간 정도 일하고 45~80달러의 월급을 받아 농촌의 고향으로 송금하는 것이다. 일을 마친 뒤 한류 스타들이 등장하는 한국 드라마 시청이 이들에게는 유일한 오락거리다. 이 소녀들 덕분에 캄보디아의 수출용 의류산업 매출 규모는 연간 50억 달러(약 5조3000억원)를 넘어섰다. 이 나라 전체 수출액의 80%나 된다.

“월급을 160달러로 올려달라”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임금인상 및 노동조건 개선 요구가 늘면서 노사분규가 치열해지고 있다. 지난해 12월23일부터 캄보디아 의류 노동자들은 현 75~80달러인 최저임금을 두 배로 높여달라는 요구를 걸고 싸우는 중이다.

지난 1월2일에는 프놈펜 푸르센체이에 있는 한국 의류업체 약진통상 앞에서 인금인상 시위를 벌였다. 평소와 비슷한 평화로운 파업 시위였다. 그런데 갑자기 인근 부대에 있던 911 공수여단이 쳐들어왔다. 군대는 쇠파이프·칼, AK-47 소총·새총과 곤봉 등을 이용해 봉제공장 노동자들의 평화 시위를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약진통상의 노동자 10여 명과 승려들이 심각한 부상을 입은 채 연행됐다.


다음 날, 노동자들은 군대의 폭력 진압에 항의하며 도로 점거에 나섰다. 이들이 연행 노동자 석방을 요구하자, 다시 무장경찰 및 공수여단이 동원되었다. 노동자들이 달아나자 실탄을 발사했다. 시위대 중 최소 5명이 사망하고 23명은 크게 다쳤다.

캄보디아 노동계는 사태의 중심에 한국 기업이 연루됐다고 확신한다. 캄보디아 식품노조 위원장인 모라 사르 씨는 “이번 유혈사태는 일부 한국 기업이 캄보디아 정부 고위층에게 군대를 요청하는 바람에 벌어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한국 기업에 근무하는 노동자는 “내가 일하는 공장의 한국인 매니저는 ‘맥주 값만 쥐여주면 공수부대 출동시키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다’라고 공공연히 말한다. 항간에는 한국 기업과 정부가 공수부대 동원은 물론 실탄 발포까지 요구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라고 말했다.

이런 ‘소문’을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다. 그러나 한국 기업과 주 캄보디아 한국 대사관이 ‘캄보디아군의 시위 진압’에 어느 정도 연루된 것은 사실로 보인다. 지난 1월6일 주 캄보디아 한국 대사관 측이 공식 페이스북에 올린 ‘치안정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현지 수경사령부와도 접촉해 필요한 조치를 취했다.” “주 캄보디아 한국 대사관이 캄보디아 국가대테러위원장과 접촉하고 내무부·법무부·경찰청 등 정부 주요 기관에 우리 기업의 안전과 피해를 막아달라는 취지의 협조공문을 발송했다.”

교민들 반응은 엇갈린다. 현지의 한 교민은 “안 그래도 캄보디아 현지 상황이 뒤숭숭한데 여기에 군대를 요청했다면 유혈사태가 일어날 것을 미리 예상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다른 교민은 “한국 측은 ‘보호’ 차원의 요청을 보냈는데 캄보디아 정부가 ‘과잉’으로 응답한 것 같다. 애초 이런 유혈사태를 원한 한국 기업은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1월 중순 현재까지도 캄보디아 파업의 불씨는 꺼지지 않고 있다. 봉제 노동자뿐 아니라 다른 직종의 노동자들도 연대해 이번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다. 또한 부정선거 시비로 캄보디아 시민들이 분개하고 있는 가운데 노동자들의 시위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정치적 파국의 도화선 구실을 하게 되었다.

한국 기업인 “손배소로 보상받겠다”

이런 가운데 한국 기업들이 포함된 ‘캄보디아 봉제협회(GMAC)’가 노조를 상대로 이번 파업에 따른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나섰다. 현재 개별 회원사들을 대상으로 정확한 피해 산정 작업을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GMAC에는 한국섬유협회 소속의 50여 개 회사 외에 중국과 싱가포르 업체 등 약 600곳이 회원사로 참여하고 있다.

GMAC 소속 한국 기업 관계자는 “노조가 주도한 시위 때문에 공장 가동률이 떨어진 것은 물론 업체 소유 차량들이 파손되거나 공장 창문이 깨졌고, 근로자들의 이탈로 수출 납기를 지키지 못했다”라고 손해배상 소송 이유를 밝혔다. 또한 현지에서 봉제공장을 운영 중인 한 한국 기업인은 “이번 사태 이후 섬유업계의 공식적 손해 규모만 2억 달러다. 왜 우리만 그 손해를 감당해야 하는가. 반드시 손배소를 통해 보상받겠다”라고 말했다.

손배소 소식이 알려지자 캄보디아 노동계와 야당 측은 즉각 반발했다. 캄보디아 봉제 노동자 노조의 한 간부는 “그렇지 않아도 이번 사태로 한국 봉제공장에 대한 이미지가 악화됐는데 이제 우리처럼 가난한 나라의 노동자들에게 손해배상을 하라고 한다면 너무 비인간적이다. 우리에게 실탄을 쏘았던 공수부대 군인들과 다를 바가 없다”라며 흥분했다.

캄보디아에서 봉제공장의 매니저로 1년간 일하고 있는 한 한국인은 “나는 1970년대 14~21세 시절을 청계천 봉제공장에서 보냈다. 캄보디아 노동자들의 근무시간·임금·복지 등은 한국의 1970년대와 거의 같다고 보면 된다. 80달러 받아 시골에 60달러 보내고 나머지 남은 돈으로 겨우 차비나 하는 수준이다. 사람들이 죽어가는 가운데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거액의 손해배상을 받아낼 생각만 하고 있다니, 이는 국제적인 망신이다”라고 못 박았다.

그 옛날 청계천의 가난한 봉제 노동자였던 우리의 누이들처럼 캄보디아 봉제 노동자들의 고통과 이번 5명의 희생은 잊히지 않을 것이다. 이들을 대상으로 제기된 손해배상 소송도 이후 오래토록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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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22 06:33 2014/01/22 0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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