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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된 논쟁글을 따라가면서 전부 꼼꼼하게 보지는 못했지만... 제 느낌에는 몇몇 분들의 (물론 이것은 여성주의 전반에 걸친 정서겠죠.) 생물학적 본질주의, 결정론, 근본주의 등도 굉장한 폭력이라고 생각해요. 몸 그 자체를 근본적인 성차로 간주하고 거기서 파생된 경험과 정체성에서 근거한 정치와 가치관이야 말로 올바르다는 것은 이미 생물학적 섹스/젠더의 이분법을 타파하고자 하면서도 그러한 이분법을 전제로 하고 있기에 당연히 한계가 있을 수도 있죠.
또한 돕님을 생물학적 여성(바이오우먼)의 경험과 성기의 유무만으로 여성주의적 인식을 갖을 수 없다라고 주리돌림하는 것 역시 또다른 폭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여성주의는 정체성에서 기반한 경험론이 아닌 퀴어적 젠더 수행성을 강조하는 인식론이였구요. 누군가가 생물학적 남성의 상징을 갖고 있다손 치더라도 그/녀는 FTM/MTF 트랜스젠더일 수도, 드랙킹일 수도, 양성구유일 수도 있는 거잖아요? 또한 그/녀의 비가시화된 젠더/섹슈얼리티는 더욱 복잡하여, 동성애자일 수도, 무성애자일 수도, 양성애자일 수도 있는 거잖아요?
물론 그동안의 억압적이고 남성중심적인 역사를 되새겨본다면 많은 분들이 그런 폭력을 동일한 양태로 수행하셨던 돕님의 가시적인 언표만을 보고서 분개하시는 바가 공감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돕님을 일단은 (이성애자) 남성으로 간주하며 생물학적 남성은 영원히 여성주의의 인식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식의 근본주의적 입장은 아무런 정치성을 담보하지 못하는것 같습니다. 또한 이미 돕님이 여성-되기를 통해 여성의 젠더를 수행하고 계셨다면 주디스 버틀러식의 젠더 수행성 이론으로 보면 돕님은 이미 여성이십니다.
여성-되기를 통한 젠더 수행은 남성 권력 성찰에 한계가 있고, 생물학적 여성으로서의 경험이 일천하기 때문에 여성이 아니라고 한다는 것은 젠더 이분법을 공략하기 위해 똑같은 이분법적 논리근거에 빠진 오히려 극도로 탈정치화된 생물학적 근본주의적 여성주의임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또한 돕님이 수행하셨던 여성 젠더를 여성으로 보지 않는 다는 것 또한 여성성을 원본/모방으로 위계화 시키며 해부학적 여성의 근본적 여성성과 그 외 비체화된 (여성-되기를 수행하는 남성 페미니스트, 동성애자, 트랜스젠더, 양성구유.......) 등의 여성성을 비가시화, 부차화 시키며 또다른 몸에 근거한 폭력을 낳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를테면 의료적 시술을 통해 몸을 변형한 하리수의 여성성은 여성성이 아닐까요? 혹은 여성-되기나 혹은 여성주의적 인식에 따라서 자신을 여성이라 느끼는 해부학적 남성 페미니스트의 여성성은 여성성이 아닐까요?
결론은 생물학적 여성의 해부학적 경험에 근거한 여성주의야말로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또한 남성은 이러한 여성주의적 인식에 한계가 있다는 것 또한 위험하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생물학적 여성들의 현실에 처한 상황과 그 역사성, 정치적 유효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물학적 여성들의 여성성도 결국 오이디푸스 가족으로 부터 학습된 것이고, 젠더 이분법 뿐만 아니라 섹스의 이분법조차 버틀러 등의 퀴어 정치학의 구성주의 담론을 더 밀고 나간다면 모든 여성들 또한 여성 젠더를 수행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기에, 누군가에게 또한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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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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돕의 글에 대한 비판은 생물학적 본질주의에 기반한 비판과는 좀 결을 달리 하는 부분이 있다는 판단인데요... 돕이 남성임으로 해서 여성주의를 할 수 없다는 식의 이야기와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물론, (개인적으로는) 돕의-구성된-성 역시 그저 남성으로 명명해버리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있다는 것에도 동감하지만,
그런 판단보다 중요한 것은 블로그라는 공간에서 그것이 공중으로 발화되었을 때의 효과-글을 읽는 모두가 돕의 여성-되기 전략을 이해하고 있어야 하는건 아니니까요-에 대해서 이야기 한 것이지요.
이런 논쟁은 사실 이 곳이 진보네 블로그여서 나올 수 있는 논리라고 생각합니다. (돕의 요건을 존중해야 한다. 라는 말은 말이죠.)
이 글이 다른 공간에 쓰여졌어도, 그런식의 대응이 가능했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추가적 논점은 소수자-되기 라는 연대 전략에 대한 논쟁의 지점이 있었다고 생각하는데요.(블로그에서는 소수자-되기에 대한 이론적 정의나 논쟁의 지점과는 다른 맥락으로서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합의나 전제가 워낙 달라서) 돕의 글에서 읽을 수 있는 수행성에 기반한 소수자-되기 전략만으로 과연 사회적 의미로서 작용하는 섹스-젠더-그것이 발휘하는 사회적 효과의 연장을 넘어설 수 있느냐 라는 문제입니다.
이 부분은 수행적 젠더의 형성이라는 측면에 우리가 얼마만한 합의 지점을 가지고 있느냐라는 부분에서도 경합할 수 있겠지요.
아무튼, 이런 부분들이 논쟁을 통해서 제기된 문제들이라고 생각하구요,
성에 기반한 본질주의적 문제제기였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은 아닐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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돕헤드(님 생략)가 여성주의자가 될 수 없다거나 여성주의적인 인식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했다기보다는 그의 발화가 여성주의적이냐를 고민했다고 생각합니다.생물학적 여성의 특징을 여성-되기라고 생각한 것은 제가 아니라 돕헤드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것도 불분명한데 그가 직접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그를 옹호하는 분들이 이렇게 말한 것이니까요.) 여성-되기란 현재의 생물학적인 여성이 되는 것도 아니고 현재 생물학적인 여성이 지니고 있다고 주장되는 여성성을 획득하는 일도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다른 존재, 즉 소수자가 된다는 의미에서의 여성-되기일 텐데 생물학적인 여성의 징표인 '클리토리스'를 가져와서 차용하는 것은 여성-되기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 제 글의 요지였구요. TOWANDA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여성들 역시 여성 젠더를 수행하는 것에 불과한 상황에서 왜 돕헤드가 굳이 여성-되기를 수행해야 하는지도 의문입니다. 소수자와 연대하기 위해 반드시 소수자 정체성을 획득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니까요.
특히 저는 그런 것에 대해서 생각한 것 같아요. 젠더, 섹슈얼리티, 인종 문제처럼 몸에 부착된, 그리고 떼어낼 수 없는 특성이 정치적인 핵심으로 작용할 때, 그런 문제에서의 소수자들은 몸을 통해 일차적으로 상대에게 규정당하지요. 그 조건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사람들(비교적 권력구조에서 차별적으로 규정당하지 않는 사람들)이 그 정체성을 전유해갈 때 그것은 정체성의 페티시를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지금 고민하는 지점이고 원래 글을 쓸 때 이 지점까지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돕헤드의 클리토리스 발화가 여성의 말할 권리를 전유해간 것일 수도 있다는 부분에서는 이 지점을 조금 생각했던 것 같아요.) 저는 이런 지점에서 소수자-되기가 위험할 수도 있다고 봐요. 소수자, 즉 타자 자체가 되어야만 차별을 인지할 수 있다는 논리는 동일성의 논리로 흐를 수 있으니까요. 우리 모두가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가 되어야만 그 차별을 인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모두가 동일한 정체성을 가진다면 그건 파쇼죠. 그런 면에서 저는 돕헤드가 (상상계에서) 클리토리스를 가질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무엇보다 그 글 자체만을 봤을 때 글의 맥락과 전후 상황에서 느껴지는 것은 그가 동성애자든 이성애자든 무성애자든 클리토리스를 대상화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던데 TOWANDA님은 전혀 그런 느낌이 아니셨나 보네요. 서로의 느낌의 차이가 어디에서 왔는지, 또 의미 있는 차이인지를 이야기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페미니스트로서, 레즈비언 정체성을 강하게 느끼는 사람으로서 돕헤드의 글을 여러 가지 면에서 읽어보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했습니다. 클리토리스를 전유하는 여성-되기가 어떤 해방적인 지점이 있는지 알아내는 데에 말이죠.
또 그 논의를 폭력적이라고 생각하신 것 같은데 저는 이것도 폭력, 저것도 폭력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문제적일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미 여러 사람이 돕헤드의 발화를 폭력적이라고 느낀 상황에서 대화를 통해 서로가 가진 가치가 경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누군가는 폭력적으로 느낀 상황에서 또다른 폭력적일 수 있는 상황을 막기 위해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할까요? 이 논쟁에 대해 폭력적이다, 몰아세우기다, 라는 말을 많이 들어서 정말 고민이 됩니다. 저는 솔직히 그 글을 쓸 때 많은 고민을 했고 돕헤드는 처음 자신의 글을 생산할 때 얼마나 고민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돕헤드의 글이 말씀하신 대로 여성-되기라고 해도 좀더 많은 각주와 해석이 필요했다고 생각합니다. 맥락에 대한 적절한 설명 없이 그런 발화가 자유롭게 가능했다는 것 역시 고민이 부족한 지점이었다고 저는 감히 말하고 싶어요.
길게 썼네요. 저는 TOWANDA님이 저에게 트랙백을 보내셔서 좀 당황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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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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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틀러의 젠더 수행성 이론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그것이 실질적으로 페니스의 유무로 인해 사회적 차이를 지속적으로 재생산 해왔던 역사 속에서 과연 '지금, 현재' 완벽하게 수행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한 번 따져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돕이 자전거에 클리토리스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에 대해 그의 여성-되기를 위한 노력과 그의 개인적 역사성에 대해 개인적인 부정을 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가장 문제는 돕이 일종의 정치적 영역으로 기능하는 블로그에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공개적으로 발화함으로서 논쟁의 여지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블로그에 올라가는 모든 글들은 실상 블로그가 갖는 트랙백, 댓글 기능들과 한 페이지에 보이는 편집 상태들을 고려해 볼 때 그냥 잡기장 처럼 쓰는 미니홈피와는 분명히 다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누가 누구에게 폭력을 가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한 사람이 어떤 주제에 대해 발화 했다면 그것에 대한 적극적인 논쟁을 하는 것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 갑자기 뛰어들어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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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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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된 글을 전부, 꼼꼼하게 보셨으면 좋겠습니다아직 다 읽지 못해서 이렇게 규정한 듯 합니다만
토완다님이 지적하신 문제는, 지금 상황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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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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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된 글을 전부, 꼼꼼하게 보셨으면 좋겠습니다Ⅹ2 그럴 의도는 없었더라도 비판받는다는 것 자체가 괴로운 일이니 폭력으로 다가갈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를 비판하고자함보다 왜 그런 식의 발화가 나올 수 있는지를 대화하고자 했던 사람들에 대해 폭력적이었다는 건.. 모두들 다들 입다물고 있어라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게다가 이 논쟁의 근거는 '넌 생물학적 여성이 아니니 가능하지도 않은 일에 언감생심 욕심내지마' 라는 게 아니었답니다. 님의 글은 논의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가장 경계하고 있던 것을 거꾸로 알아들으신 것 같아 안타깝군요.. 이 논쟁은 오히려 생물학적 이분법에 갖혀 생기는 오류들을 되짚어 보고 한발 더 나아갈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는 생각인데요.. 그래서 다들 끈기를 갖고 다음 돕님의 글을 기다리고 있고.. 성급한 사과나 선언이 아닌.. 오히려 이 글이 지리해보이지만 끈질기게 참고 기다리면서 작은 매듭이라도 짓고 하나의 공감대를 더 형성하고 나아가려는 노력들을 폄하하고 있다는 생각에 참 불편해집니다..(뭐 인정받으려고 시작한 논의도 아니지만..)그럼에도 지나친 신문 찢어읽기로 고뇌 속에 논의에 참여한 이들이 도매금에 넘어가고 그 논의의 본질이 흐려지는 것이 안타까워 글을 남깁니다;;
논의에 참여하고 싶다면 다시 모든 관련 글들을 꼼꼼히 되새김질 하실 것을 권유합니다.. 그것이 일방적 주장에 머물지 않고 서로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인식의 폭을 계속 확장시키고 수정하기도 하면서 토론해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의 기본적 예의가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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