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이승원,<학교의 탄생>, 휴머니스트

 

이승원, 『학교의 탄생』, 휴머니스트, 2005


쉽게 쓰여진 책. 물론 이 책에 담긴 수많은 문헌을 읽어내고, 그 의미를 “학교”라는 테두리 안에 묶어낸 것은 인정할 만한 노력이다. 하지만 개별 사건들의 나열로 개화기를 묘사하는데 그치고 있다는 점에서 별다른 새로운 인식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학교에 가는 길부터 시작해서 졸업식까지를 하나의 큰 틀로 삼아 학교 안팎으로 벌어지는 사건들을 엮어보려한 시도는 인정할만 하지만, 결국 개화기의 여러 가지 현상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기만 하고 수렴된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 넓게 조사하긴했지만 깊이 탐구하는 자세가 부족하다고나 할까? 참신성이나 책 전체를 응집성으로만 따지자면 김진송,『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현실문화연구)가 훨씬 낫다고 하겠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부분이 그러했다.


100년 전만 해도 일정한 나이가 되면 누구나 술과 담배를 즐겼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한 금기인 ‘19세 이하 금지’ 혹은 ‘미성년자 금지’ 또는 ‘청소년보호법’이 당시에는 없었다. 단지 과하게 하지 말라는 정도였다. 왜 19세 이상을 성인이라고 하고, 그 이하를 미성년자라고 하여 이해할 수도 없는 금기사항을 만들어놓았는지는 ‘일부’ 도덕적․윤리적으로 투명한 어르신들만이 알 일이다. 그분들이 보기에 19세 이하는 계몽되지 않은 ‘미성년’, 계몽해야 할 ‘미성년’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경쾌한 필치가 글 읽기를 수월케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경쾌한 필치 뒤에 숨는 탁 쏘는 맛이 별로 없다. 어쩌면 억지로 발랄을 가장하는 아저씨를 보는 느낌이랄까. 위의 부분만 하더라도 ‘19세’라는 경계선에 얽힌 더 많은 이야기들이 나와야 할 법한데, ‘일부 도덕적, 윤리적으로 투명한 어르신’이라는 표현에서 보이는 거리두기에 가까운 빈정댐으로 넘어가고 만다. 과거에 읽었던 닐 포스트만, 『유년기의 종말』(분도) 만 하더라도 유년기에 관련된 문헌들을 살피면서 미디어의 변천으로 인한 유년기의 종말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를 진지하게 전달하고 있다. 반면에 『학교의 탄생』은 제목에서 느낄 수 있는 계보학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개념적인 설명으로 여러 사건들을 종합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감시와 처벌』에서 따온 규율된 신체라는 개념만으로 개화기의 사건들을 뭉뚱그려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약 3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을 읽는데 단 3시간이 걸렸다면 내 독법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읽고도 이 책의 흐름을 읽어낼 수 있었기에 이 책 자체가 가진 문제도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와 비슷한 구성의 책을 몇 권 읽은 체험으로 인해, 그리고 일제시대 소설을 비교적 많이 읽었던 체험으로 인해 이 책이 평이하게 다가왔을 수도 있지만...책을 읽고나서 받은 무언가 허전한 느낌으로 인해 이름도 비슷한 필립 아리에스,『아동의 탄생』(새물결)을 주문하고 말았다. 요즘 돈도 없는데 월급 탓다는 배짱으로 책에 돈을 너무 많이 쓰나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쉽게 개화기의 상황들을 이해할 수 있었던 이유가 단지 개인적 독서체험에서만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도 그때 발생되었던 여러 가지 제도와 습속에 익숙하기 때문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그때 난 말할 수 없는 씁쓸함을 느꼈다. 책을 읽고 있을 때 같이 일하는 조교가 책의 표지를 보며 표지에 나와있는 체조의 동작이 도수체조와 똑같다며 신기해할 때 내 기분은 어땠겠는가. 이 책의 의미를 최대한 부여해본다면 나에게 이 정도였을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