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05/02

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2/16
    루시퍼와 큰 타자 - <콘스탄틴>을 보고...(2)
    김지씨
  2. 2005/02/10
    마리아 니콜라예바, <용의 아이들>
    김지씨

루시퍼와 큰 타자 - <콘스탄틴>을 보고...

시간을 때우기 위해 영화를 보는 것처럼 불쌍한 일도 없지만, 얼마 전 나는 정말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 극장에 들어갔다. 사람으로 북적거렸다면 짜증마저 났을 터이지만, 몇 명 없는 사람으로 인해 모처럼 조용해진 극장을 위안삼아 걸려있는 여러 영화를 죽 훑어보았다. 오직 커다란 스크린에 어울릴 법한 영화를 보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콘스탄틴>이란 영화를 골랐다. 보고 난 뒤의 느낌은? 뭐 나름대로 시간을 보내기에는 나쁘지 않은 영화였다라고 할까. 영화 자체가 매우 훌륭하다거나, 뭐 배우가 멋있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난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위에서 말한 "뭐 나쁘지 않군"이라는 반응보다 더 흐뭇한 기분이 계속 남아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도대체 그 느낌이 뭘까라는 의문이 계속 남아 있었다. 

 

내 생각에 <콘스탄틴>은 기독교적인 선, 악 구도를 나름대로 재해석한 영화인 듯 싶었다. 하느님과 사탄이라는 절대선, 절대악 사이에서 인간은 그들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단, 한 가지 단서가 달려있는데 저승세계의 선과 악은 그리스 신화의 신들이 했던 것처럼 직접 영향력을 행세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반드시 그들은 그들과 인간의 혼혈종을 통해서만 이승의 세계로 개입할 수 있었다. 이렇게 묘한 균형을 이루던 중, 사탄 즉 루시퍼의 아들이 하느님의 충복인 가브리엘과 손잡고 사탄의 눈을 속여 지상에 강림하려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가브리엘이 왜 인간 세계를 모두 지옥으로 만들어 버리려는 루시퍼의 아들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냐고? 인간은 고통이 심해질 수록 선한 본성이 드러나기 때문에 보다 심한 고통 속에 몰아넣어 인간의 선한 본성을 극대화시키겠다는 어이없는 착각을 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주인공인 퇴마사 키아누 리브스는 이 시도를 깨기 위해 자살을 시도해서 자신의 영혼을 호시탐탐 노리는 루시퍼를 불러내고, 그 찰나에 아들의 시도를 알게된 루시퍼는 말썽꾸러기 아들을 데리고 가버린다. 

 

뭐 이러저런 이야기를 다 빼고 대충 이런 이야기인데, 여기서 내가 제일 맘에 들었던 것은 루시퍼의 형상이다. 루시퍼는 배트맨 포에버에 나올 법한 짙은 화장을 하고, 흰색 양복을 쫙 빼입은 제비족처럼 차려입고 등장했던 것이다. 물론 말투는 리마리오를 빰칠 정도로 느끼하고...ㅋㅋㅋ 뿐만 아니라, 주인공이 희생을 통해 지옥에서 천당으로 방향을 급선회하자, 비겁하게 폐렴에 찌든 폐를 주물럭거려 그를 다시 살려낸다. 다시 살면서 나쁜 짓을 더해서 꼭 지옥으로 오라고 말이다. 영화 전체의 대전제를 구성하고 있는 한 축인 절대악, 그 절대악을 상징하는 인물이 이런 식으로 등장했을 때 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영화를 다 보고 난 뒤에 계속 남아 있던 흐뭇함은 바로 이 루시퍼를 처음 보았을 때의 그 즐거움 때문이었을 거다.

 

그런데 오늘 라깡과 지젝에 관련된 글을 읽다가 난 이 루시퍼를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었다. 그 부분은 다음과 같다.

 

 

"상징계에 의해 소외된 주체는 자신의 삶을 결정지은 대타자가 '정답'을 갖고 있다고 믿고 끊임없이 대타자에게서 그것을 찾으려 할 것이 아니라, 대타자도 주체가 찾는 '숨겨진 보물'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경험을 함으로써만 소외를 극복할 수 있다."

 

  홍준기, 지젝의 라캉 읽기 -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을 중심으로

 

 

라깡에 의하면 주체는 상징계에 의해 필연적으로 소외를 겪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상징계는 주체를 이러저한 주체로 미리 규정(호명)한다. 그러나 항상 그 규정은 어긋날 수밖에 없기에 그 결여가 소외로 경험된다. 그 소외를 벗어나려면? 먼저 환상효과를 노린다. 즉 상징계를 구성하는 대타자에 대한 환상을 품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즐거운 해결책은 대타자 또한 결핍 덩어리임을 깨닫는 것이다. 거기서 주체는 집착에서 벗어나 "분리"된다.

 

선과 악이라는 절대적 대립 구도에 매달려, 끊임없이 한 쪽 편을 신성화하고 반대쪽 편은 배제하는 식으로 살아간다면 주체는 끊임없이 환상을 재생산하는데 집착할 수밖에 없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방방곡곡 외치고 다니는 전도사들처럼. 하지만 절대악이 위에서 말한 "루시퍼"처럼 결점가득한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신성불변의 대립 구도의 한 축을 어이없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리스의 신들이 결점 투성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에 인간들이 보다 즐겁게 살 수 있었다는 생각도 들고.

 

대타자와 주체의 관계 문제는 비단 종교의 문제에 해당되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나 또한 군대라는 상징계 속에서 이미 군인 혹은 군인을 길러내는 훈육관이라는 위치에 호명되어 있기에 그 역할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군대라는 감시체계에 적응하지 못해, 군대라는 빅브라더 혹은 라깡식으로 말하자면 "대타자"가 끊임없이 나를 감시하고 있을 것이라는 강박관념에 시달렸었고, 군대로부터 소외되지 않기 위해 이상적인 군인을 길러내는 훈육관의 역할이라는 환상과 그것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현실 사이에서 여러 가지 심리적 압박감을 느껴왔었기 때문이다. 이제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그런 심리적 압박감은 교관으로 생활하는데도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환상에서 벗어나 분리될 때 오히려 이곳에서의 일도 잘 풀리는 것 같기고 하고.

    

아무튼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라깡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내가 쉬고 있을 때, 경쟁자의 책장은 넘어가고 있다"가 아니라 "내가 쉬고 있을 때, 경쟁자도 쉬거나 딴 짓을 하고 있다"라는 즐거운 사고방식이 아닐까. 어쨌거나 이런 생각과 더불어 <콘스탄틴>에 등장한 루시퍼는 나에게 즐거운 기억으로 한동안 남을 것 같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마리아 니콜라예바, <용의 아이들>

동화에 대한 기호학적 분석
마리아 니콜라예바,『용의 아이들』, 문학과지성사, 김서정 역, 1998






1. 아동문학에 대한 개인적 편견에 대하여

언젠가 교육 현장에서 독서교육의 문제를 고민하고 있는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때 그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동화"를 읽히는 것도 상당히 좋은 효과를 낳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의아해했었다. 왜냐하면 개인적으로 "동화"라 하면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전래 동화 비슷한 것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래동화들의 그 상투적인 결말이나 주제의식이 학생들에게 어떤 효과를 낳을 지 의심스러웠다. 그뿐 아니라 어렸을 때 읽었던 소파 방정환의 동화들이 거의 대부분 번안 동화임을 알게 된 이후로, 동화라는 것은 전래동화나 번안동화가 대부분이 아닌가하는 생각 정도밖에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 선생님은 우리에게 좋은 창작 동화들이 많이 있으며, 이런 창작 동화들은 단순히 어린이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씀해주셨다. 또한 전래동화라 하더라도, 브루노 베텔하임이나 이링 페처와 같은 사람들은 그런 전래동화들을 깊이 있게 읽어내고 있다고 했다. 이런 저런 의미에서 동화에 대한 개인적인 편견들이 조금은 나아진 기회가 된 듯 싶었다. 그런데 이런 개인적 편견을 교정할 수 있게 된 또 하나의 좋은 계기 중에 하나가 바로 이 마리아 니콜라예바의『용의 아이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원제는 'Children's Literature Comes of Ages'로서, 번역하면 '성숙기의 아동문학' 정도가 된다고 하는 이 책은 아동문학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이론서이다. 정확히 단언할 수는 없지만 이 책으로 짐작컨대, 마리아 니콜라예바의 지적 배경이 되는 북구 유럽의 경우에 안데르센 이후로 동화 창작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그 활발한 창작과 동시에 폭넓은 독서가 이루어진 듯 싶었다. 흔히 생각하기로, 동화라고 하면 교육적 가치에 대한 분석을 쉽사리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그녀는 특이하게도 동화를 둘러싸고 있는 교육적 가치라는 개념을 조금은 무시한다. 왜냐하면 동화에 대해 지나치게 교육적 가치만을 주장하는 것은 동화 창작에 하등 도움이 안 된다고 본다. 그녀는 "성인문학은 교육적이지 않아도 되는데, 왜 유독 아동문학만 교육적이어야 되는가?"라고 반문하면서, 양쪽 다 교육적이면 교육적인 것을 인정할 수 있지만, 아동문학에만 지나치게 부여된 교육적 함의는 동화의 짐 지워진, 버거운 무게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생각들을 바탕으로 해서, 마리아 니콜라예바는 동화들에 대한 기호학적 분석을 보여준다. 그녀 개인적으로도 유리 로트만의 기호학 이론에 상당히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시인하고 있다. 그런데 이 기호학적 분석이 이론의 소개와 그 적용에 초점만이 맞추어져 있다면, 이 책은 좋은 책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용의 아이들』이라는 책은 동화라는 연구 대상이 지닌 독특한 특징을 기호학적 분석이라는 방법론이 잘 밝혀주고 있다는 점에서, 대상과 방법의 행복한 일치를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녀가 보여주는 동화에 걸친 몇 가지 문제들을 살펴보자.


2. 기호학적 동화 분석

브루노 베텔하임은 정신분석학적으로 동화를 분석하여, 전래동화에 숨어있는 무궁무진한 가치들을 발굴해내었으며, 이링 페처는 페미니즘적인 동화읽기를 시도하여, 종래의 전래동화들의 의미를 전복시켰다. 그런데 마리아 니콜라예바는 동화가 놓여있는 기호학적 상황에 주목한다. 기호학적 상황이라는 것은 동화라는 문학작품이 어떤 식의 코드화를 통해 생성되고 또 어떤 상호텍스트적인 의미공간 속에서 받아들여지는가를 살펴보고 있다는 말이다. 그녀가 제시하고 있는 이 방법론에 대한 하나의 예를 들어 보자. <걸리버 여행기>와 같은 작품은 작품 전체를 놓고 생각해보면, 동화라기보다, 성인들이 읽을 수 있을만한, 일종의 철학적 성찰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대부분 축약 번역되어, 한국의 청소년들에게는 거인국이라는 공간에 대한 환상적인 동화정도로 받아들여진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작품이 놓인 기호학적 공간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의미를 획득하게 됨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동화가 하나의 기호학적 상황에서 다른 기호학적 상황으로 전이될 때 벌어지는 현상들에 대한 기호학적 분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마리아 니콜라예바는 아동문학의 고전이라고 손꼽히는 작품들이 각 나라마다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그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 지를 살펴보고 있으며, 그 결과는 어떤 고정된 동화의 고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부정적인 곳에 가 닿는다. 여기서 흥미 있는 것은 니콜라예바의 생각을 참고로 하면, 디즈니의 애니메이션들이 어떻게 해서 성공할 수 있었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은 기획단계부터 철저하게 세계성에 주목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계 시장이 그들의 주무대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디즈니 애니메이션 중에서도 <뮬란>과 같이 특수한 지역을 연고로 하고 있더라도, 그 인물들은 배경과 의상을 제외하고는 결코 주인공들이 속해있는 지역의 문화적 특수성을 절대로 담아내지 않는다. 그렇게 했다가는 문화의 기호학적 번역 불가능성에 의해 세계 시장 중에 일부를 잠식당할 우려가 발생할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주장 중에서 가장 주목할 수 있었던 것은 동화를 번역함에 있어서, 직역이 과연 필요한 것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한 점이다. 그녀는 '문화 간 풍성한 상호작용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조건은 "창조적으로 오해되는" 상호 번역 불가능성'이라고 본다. 이러한 생각들이 로트만의 생각을 많이 받아들인 곳인데, 상당히 의미심장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만약에 그 나라 아이들만이 이해하고 있는 동요들이 삽입된 동화를 번역한다고 해보자. 그런 경우 동요를 그대로 직역한다는 것은 그 의미의 전달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주석을 단다고 해도, 그런 식의 주석을 과연 동화를 읽는 이들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볼 때, 그것은 별로 효율적이지 못한 방식이다. 따라서 니콜라예바는 그런 번역을 할 때에는 기호학적 의미 상황에서 보았을 때 그 동요와 가장 흡사한 위치에 있는 번역해오는 나라의 동요를 선택해서, 번역 대신에 삽입하는 것이 의미 전달을 위해 더욱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친다. 이것이 바로 "창조적 오해"인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문학교육의 차원에서 상당히 의미 심장한 방법론이다. 예를 들어 고전문학을 가르칠 때 부딪히는 문제들이 바로 이런 것이다. 고전문학이 놓인 기호학적 상황과 현재의 기호학적 상황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 원문을 직역해서, 현대어로 바꾸어 놓는다고 해도, 그것은 학생들에게 버거운 텍스트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아예 고전어 원문으로 실려 있어서, 고전문학이 살아 숨쉬었던 시기와 학생들이 호흡하는 시기 사이의 소통을 단절시키고 있다. 물론 몇 몇의 현장 선생님들은 경험적인 차원에서 그런 단절들을 극복하는 시도들을 보여주고 있기는 하다. 예를 들어 고전문학 작품의 아우라에 대한 경외감을 극복하기 위해, 현대어로 고친 뒤, 자신의 경험과 비교해보는 작업들을 여러 가지 방식 - 패러디 시, 고전문학의 주인공들에게 편지 쓰기 등등 - 으로 시도해왔다. 하지만, 고전문학이나 외국문학에 대한 전반적인 번역 불가능성을 이해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학생들은 고전문학의 텍스트 자체에 허덕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든다. 이런 의미에서 마리아 니콜라예바의 주장은 중요한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니콜라예바의 분석 중에서 의미있게 와 닿았던 것은, 아동문학이 놓여있는 의사소통의 구조에 대한 분석이다. 아동문학이란 언제나 "발신자와 수신자가 언제나 다른 두 사회에 속해있는 아주 드문 텍스트 타입"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쓰는 사람은 성인이지만, 읽는 사람은 대부분 어린이들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동화를 창작하는 성인은 크게 두 가지 내포 독자를 설정하게 된다. 즉 일단 독자의 대부분이 될 어린이들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창작하지만, 그 한 편에는 자신과 같은 성인이 이 작품을 읽었을 때 어떻게 볼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점은 동화의 독자 범위를 넓힐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하지만, 또 한 편으로 볼 때 동화 창작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주목할 수 있게 만드는 점이 아닐 수 없다.
마지막으로 동화를 바라보는 방식 중에서 니콜라예바의 특이한 생각을 하나 소개하고 마치겠다. 그녀는 동화를 "규범적 텍스트"라고 본다. "규범적 텍스트"란 유리 로트만의 기호학 이론을 차용한 개념이다. 로트만은 텍스트를 두 가지 종류로 구분한다. 첫 번째는 규범적 시스템에 기초를 두어서, 제의적이고 규범적이며, 전통적인 예술 형태를 띤다. 이러한 작품들은 작품 하나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작품 창작의 유형이 정해져 있으며, 그 룰에 의해서 작품을 창작한다. 따라서 개별적 작품 사이의 차이는 각각 다른 경험의 소개로 가능하지, 새로운 형식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이것이 "규범적 텍스트"이다. 이와 반대에 있는 작품들은 규범 즉 일반적 규칙의 파괴에 목적을 둔다.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과 같은 것이 바로 이에 속하는데, 흔히 순수문학이라고 말하는 것이 여기에 속한다. 동화는 전자, 즉 "규범적 텍스트"에 속한다고 보는데(특히 전래동화의 경우), 동화의 특징이 비슷한 형식에서 무한한 재창조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일면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창작동화의 경우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해보면, 그녀의 생각에 조금은 불만스러운 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조금은 생각을 바꾸어서, 학생들이 열심히 읽고 있는 만화에 생각이 미친다면, 그녀가 말한 규범적 텍스트라는 개념은 상당히 중요한 지적이 된다. 학생들이 즐겨보는 만화들의 대부분은 같은 형식 구조를 지니면서 다만 조금씩의 경험차이를 보여주는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만화에도 만화 자체의 형식을 극복하려 노력하는 작품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이른바 대중적인 만화에 매달리고 있다. 그뿐 아니라 학생들이 즐겨 보는 TV 드라마나 영화들의 경우도 이 "규범적 텍스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그녀의 지적은 곱씹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3. 나가며

최근에 해리포터 시리즈가 서점계를 장악했다. 영화까지 만들어져서 인기몰이에 나서고 있다. 이 해리포터 시리즈는 바로 팬터지 형식의 동화이다. 그런데 이 팬터지 동화들이 이렇게 많은 인기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보면 동화의 위력을 새삼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에서 동화는 비교적 낮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제 동화를 다시 한 번 살펴보아야 할 시기라고 생각된다. 주위를 둘러보면 우리에게도 좋은 동화 작품들이 많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청소년의 독서교육의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성인들을 위한 훌륭한 독서물로서 동화는 다시 한 번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노르웨이의 동화 작가 토르모트 하우젠의「하얀성」이라는 작품이 시작하는 곳은 기존의 동화가 끝나는 지점임을 생각해보자.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다는 게 무슨 뜻일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