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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두 권의 만남

  

1.

뭐였더라...옛날에 읽었던 소설 중에 작중 화자가 자신의 책을 반드시 두 권이상 같이 읽는 습벽이 있다고 고백한 소설이 있었는데...아! 아마도 주인석의 <검은 상처의 블루스>였나보다. 거기 보면 박태원의 구보씨의 맥락을 잇는 소설이 등장하고, 그 소설의 주인공 구보씨가 그런 고백을 했었던 것 같다. 그 부분에 십분 동의했던 것은 나도 그런 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습성은 어느 한 쪽에도 집중을 못하고 두 권 다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하는 결과로 대부분이어지지만, 어떤 경우에는 두 권이 무난하게 잘 겹쳐 행복한 만남을 이룰 때도 있다. 그럴땐 나름 뿌듯한 마음으로 오랜만에 불붙은 독서열을 다른 곳으로 이어가게 된다.


 

근간에 잘 겹친 책을 들어본다면,

제임스 미치너의 <소설>, 열린책들린다 플라워의 <글쓰기 문제해결 전략>, 동문선이 그 한 예가 될 수 있다. 소설이건 작문이건 글을 쓰는 것은 어떤 번쩍이는 영감만으로 쓸 수 없다는 사실을 두 권 다 잘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논술의 광풍이 학교를 몰아치고 있는 지금에 학생들에게 글쓰는 것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를 꺼낼 것인가에 대해 생각할 때 여러 가지로 참고가 될만한 책이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2.

요즘에는 또 무슨 미친 바람이 불었는지, 도시계획에 관련된 책을 붙들고 앉았다. 손정목의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와 <한국 도시 60년의 이야기>, 한울를 읽고 있다. 군대에서 훈련받을 때 편지에 이 책의 일부를 복사해서 넣어준 사람이 있었다. 그때 정말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나서 책을 사서 읽기 시작했는데, 좀처럼 손에서 떼기가 어렵다. 지은이 손정목은 자신이 직접 겪었던 박정희 정권 시기 서울시 행정의 면모를 조금은 과격한 어조로 털어놓고 있는데, 읽으면서 오히려 내가 조심스러워질 정도로 막 말하는 경향이 없지 않으나, 한 점의 거짓도 없다고 자신이 머리말에 이야기했으니 믿고 그냥 재미있게 읽기로 했다. 사실 이 책은 무협지를 방불케할 정도로 속도감있게 읽히기 때문에 손에서 떼기도 어렵고, 좀처럼 다른 책을 겹쳐읽기도 어렵다. 다른 사람들과 책을 같이 읽기로 한 독서모임을 하면서도, 그 모임 관련 책은 제대로 읽지도 못하고 줄곧 손정목 책만 붙들고 있으니 사람들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있다.


 


 

어쨌거나 이 책을 서울의 도시개발 과정이 그랬듯이 미친 듯이 불도저처럼 읽어가다가 지하철 개발 부분을 읽는 순간 생각나는 책이 하나 있었다. 도시계획에 관련해서 내가 읽은 책이 몇 권이나 있겠냐만은 그 중에서 박용남, <꿈의 도시 꾸리찌바>, 이후라는 책이 생각났다. 비슷한 시기에 다른 길을 걸은 두 개의 사례가 겹치는 순간이었다. 브라질의 도시 “꾸리찌바”는 1950년대부터 도시계획을 준비하여 1970년대에 지하철을 포기하고 도시의 사정에 맞는 버스 중심의 도시교통 시스템을 만든다.


 

“돈이 많이 들고 개발을 위한 개발만을 일삼는 도시계획은 바람직한 도시계획이 아니지요. 다른 도시들이 얼마 되지 않는 예산을 도로 건설과 확장에 쏟아 부을 때, 우리는 그 돈을 시민이 살기에 편하고 쾌적한 도시를 만드는 데 써왔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도로를 뚫는 대신에 기존의 도로공간을 재배분하여 경쟁력과 이용 편의도가 낮은 버스교통을 경쟁력도 높이고 이용하기에 편하도록 바꾸어 놓았지요.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하면 선진국의 도시들처럼 지하철을 꾸리지빠 시의 도로 상에 구축할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대중교통의 혁신을 이룩했습니다.

- <꿈의 도시 꾸리찌바>, p.62


 


 

이에 비해 서울은 어땠을까? 사실 단순비교하기는 어렵다. 서울은 그야말로 미친 도시였기 때문이다. 손정목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전후에 서울시의 행정을 담당하기 위해서는 미치지 않고서는 어렵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1966~1980년의 15년 동안 서울에는 정확히 489만 3499명의 인구가 늘었다. 15년 동안 하루 평균 894명의 인구가 새롭게 늘었다는 계산이다. 토요일도 일요일도 없이 매일 894명의 인구가 늘면 매일 224동의 주택을 새로 지어야 하고, 50명씩 타는 버스가 18대씩 늘어나야 하고, 매일 268톤의 수돗물이 더 생산 공급되어야 하고, 매일 1,340kg의 쓰레기가 더 증가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1>, p. 13


 


 

이렇게 미친 듯이 몰려드는 인구를 상대하면서, 도시계획을 고민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전쟁 이후에 아무 것도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상태에서 무언가를 시작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전쟁 이후 폐허가 된 도시 위에 새롭게 이상적인 도시계획을 왜 세우지 못했냐는 힐문에 손정목은 그 당시의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반문한다.


 

폐허가 된 서울을 이상적인 도시로 설계해달라.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예산은 하나도 없다. 시민들이 굶주려 세금을 낼 수 없고 미국을 비롯한 유엔 각국이 우리를 원조해 주고 있지만 그것은 거의가 군사원조이며, 민간원조는 겨우 굶어죽지 않게 식량과 의약품 약간씩을 가져다 줘서 겨우겨우 연명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돈이 거의 안 들고 그러면서 이상적인 도시를 계획해달라. 물론 당신과 당신네 팀에게 지불할 사례비도 없다. 계획기간은 3개월 이내로 해달라...(중략) 이렇게 요구했다가는 그들 모두가 당장에 “미쳤어”라고 벌컥 소리지를 것임은 너무나 당연하다.

 -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1>, p.91


 


 

이런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당연히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해도 모든 것을 상황 탓으로 돌리기에는 웬지 석연찮은 점들이 많이 있었다. 지하철을 개발하는 과정만 봐도 그 당시 군부독재 정권 하의 개발과정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참고로 지금 각 지방도시, 부산, 대구, 인천, 등지의 『지하철 건설지』를 펴보면 거의 예외없이 기본 목표의 첫 번째가 경제성이고 두 번째가 안전성임을 알 수 있다. 경제성이란 말이 대단히 좋게 들리기는 하지만 바로 “값싼 공법을 채택하고 모든 재료는 싼값으로 구입하며, 공기를 단축하고 해서 되도록 더 싼값으로 건설한다”는 것이다.

 - <한국 도시 60년의 이야기 2>, p.63


 


 

이때 당시 왜 지하철을 싸게 만들 수밖에 없었는지는 그 당시 개발독재 시대 경제의 최고 실력자였던 경제 부총리가 지하철 건설을 반대했기 때문에 1호선부터 국고 보조금을 줄였고, 그것이 관행이 되어 지방 지하철 건설에까지 이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는 다들 알고 있는 대구 지하철 참사로 이어진다.


 

개발독재라는 것은 그 당시의 한가운데 있었던 지은이 손정목도 뼈저리게 통감하고 있지만, 무조건식 개발이 앞장선다. 시민들에게 물어보고 자시고 할 것 없이 필요하다는 것이 있으면 상부의 몇몇이서 계획을 짜고 독려하고, 아래 사람들은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하라는 식이다. 심지어 담당자들도 모른채 최고위층 몇몇이서 결정하는 방식이었다. 서울의 지하철도 중앙정보부장의 건의로 결정되었다니 말다한 셈이다. 그렇게 해서 지금의 서울이, 그리고 또 다른 도시들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버스를 타고 가는 일이 많았다. 버스를 한참 타고 가다가 책 속에 등장한 건물이나 지명들을 만날 때면 일단 책을 읽는 재미를 느꼈다. 하지만 그와 함께 책 속에 등장한 이 모든 지명과 건물들의 성립 과정을 되새기다보면, 내 삶의 가까이에 있는 것들이 송두리째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발 밑이 흔들리는 듯한 두려움을 느꼈다.


 


 

3.

그런데 이 두 권의 책을 비교하면서 나는 개발 독재를 옹호하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위에서 말했듯이 우리 사정에 잘 살기 위해서는 개발 독재는 어쩔 수가 없었다는 식의 논리를 세운다. 하지만 독재를 한 가운데서 수행했던 사람들의 입에서도 그건 좀 심했던 것이 아니냐는 말을 들을 수 있다. 물론 그들이 열심히 살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 삶을 이루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이 결국에는 근본부터 뿌리채 흔들리게 된다면, 그런 개발이 무슨 소용일까?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나는 오늘 꾸리찌바의 개발기를 다룬 책을 또 다시 꺼내 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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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슬롭스키 <십계 9>

Dekalog 9


한 남자가 성적불능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전에 그 남자는 아내 외에도 많은 여자들과 성관계를 가졌던 남자였다. 그는 의사라는 사회적인 신분과 함께 남성으로서 성적인 자신감 또한 가지고 있었다. 한 순간에 그 모든 성관계들이 불가능한 것이 되었음을 깨달았을 때, 그는 절망감에 빠졌다. 게다가 그의 부인은 너무나 젊고 아름다웠기에 그의 고통은 더욱 컸다. kieslowski는 이와 같은 비정상적인 상황에 빠진 부부의 이야기를 Dekalog(십계)의 아홉 번째 이야기의 소재로 다루었다.


성적 불능자가 된 남자의 고뇌는 영화 속에서 자전거 타는 장면으로 잘 나타난다. 자전거를 타고 울퉁불퉁한 길을 달리는 행위는 불능상태에 빠진 자신의 성기를 자학적으로 자극하는 행위이다. 요철이 심한 길을 달리는 자전거를 그것도 엉덩이가 잘 보이도록 뒤에서 포착한 장면은 그가 느끼고 있는 고통을 더욱 부각시킨다.

 

성적 불능자가 된 주인공 로만은 결국 자신의 상태를 아내에게 고백하게 되는데, 아내인 한야는 로만에게 육체적인 관계만이 사랑의 방법이 아니라고, 즉 사랑은 다리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로만이 과거처럼 정상적으로 성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면, 그런 말에 수긍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도 수많은 여자들과 관계를 가진 바가 있었으며, 그렇다고 해서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그는 성적 장애로 인해 이미 자신의 자존감을 상실해 버렸으며, 그로 인해 아내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다.

 

자존감을 상실한 인간은 타인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의존심에 사로잡히게 마련이다. 스스로 설 수 없는 인간은 타인들에게서 버림받는다는 느낌에 민감하다. 타인이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들이 자기를 버릴 것이라는 생각은 그를 견딜 수 없게 만든다. 이런 상황은 그의 의심을 더욱 부추긴다.

 

'의심'이라는 것을 좋게 말하면 일종의 호기심으로 볼 수도 있다. 한 인간이 타자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것이 호기심이기에 끊임없이 타인의 삶에 대해 상상해보는 의심도 호기심의 일종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의심'이라고 말할 때는 호기심과는 조금 다른 맥락을 가진다. 의심은 타인에 대해 객관적인 인식을 견지하려고 하는 노력이 아니다. 의심은 타인에 대해 비관적인 상상을 거듭하는 것을 의미하며, 결과적으로 의심하는 주체를 절망적인 심리상태로 몰아간다. 

 

결국 의심에 가득 찬 로만은 비극적인 상상에 사로잡히며, 자신의 의심을 끊임없이 확인하고자 한다. 의심을 확인하는 방법은 한야의 삶에 대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개입하는 것이다. 로만은 한야에 대해 끈질기다고 생각될 정도로 의심하며, 의심하면서도 그녀의 내면을 확인하지 못해서 괴로워한다. 그 의심을 실제로 확인하려고 할 때마다 영화는 계속해서 열리는 글러브박스(자동차 계기판에 붙어있는 물건 넣는 장소)를 비춘다. 입을 벌린 채, 컴컴한 공간을 드러내고 있는 글러브박스의 모습은 로만에게 닫혀있는 한야의 내면에 대한 비유가 아닐까.

 

사랑하는 두 연인이 아무리 가깝다고 하더라도, 서로를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자신의 내면조차도 완벽히 알 수 없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내면까지 완전히 알 수 있단 말인가. 연인들의 욕망은 상징계의 그물이 절대로 건져낼 수 없는 상상계의 바닷물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적불능상태에 빠져버린 로만은 의심에 사로잡혀 이전까지의 아내와 자신이 누려오던 적절한 삶의 균형감각을 모두 잃어버렸다. 물론 그의 의심은 외면적으로는 정당하다. 아내인 한야는 젊은 마리우스라는 남자와 불륜의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로만이 도청까지 동원하여 한야의 불륜을 확인하는 순간, 그는 아내가 자신을 버렸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그들의 관계가 명확해지는 것일까? 아니다. 그 순간부터 서로의 관계는 더 복잡해진다. 상식적으로 불륜을 저지른 여자에 대해서 그 여자는 이미 남편에 대한 애정이 식은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냥 상식일 뿐이다. 상식은 개별적인 상황의 이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로만과 한야의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한야의 애정이 이미 식어서, 로만을 버린 것일까? 그것은 한야의 심리상태에 대한 정당한 이해가 아니다. 어설픈 상식에 근거한 섣부른 판단에 불과하며, 의심에 가득 차 있는 로만이 '상상'하는 한야의 반영에 불과하다. 한야는 여전히 로만을 사랑하고 있었다. 단지 한야가 잘못한 것은 로만이 자신의 성기능 장애로 인해 삶에 대한 태도가 변화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점이다.

불륜을 저지른 사람이 아니라, 불륜을 목격하려고 즉, 타인의 삶에 극적으로 개입하려고 한 이에게 잘못이 있다는 인식은 로만이 장롱 속에 숨어서 아내의 불륜을 훔쳐보는 장면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카메라는 장롱 속에 숨어있는 로만의 시점에서 장롱 틈으로 한야와 그의 젊은 애인인 마리우스를 비춘다. 로만은 그 속에서 아내와 젊은 애인의 이별 장면을 확인한다. 그러다가 결국 그는 한야에게 들키게 되는데, 로만이 한야에게 발각되는 장면은 보는 이로 하여금 조마조마함과 공포를 유발한다. 로만의 시점으로 카메라가 비추고 있는 상태에서, 그 시야 안으로 한야가 성큼성큼 다가오면서 점점 커지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있는 사람은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는 한야의 시선에 의해 공포에 사로잡힌다.

 

kieslowski가 이 장면에서 이런 식으로 공포감을 유발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한야와 로만 사이의 전도된 관계를 폭로하기 위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공포감을 유발시킨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장면은 로만에 의해 한야의 은밀한 관계가 폭로되는 장면이 아니라, 한야에 의해 로만의 은밀한 관찰이 밝혀지는 장면이다. 전통적인 도덕과 근본적인 윤리의 차원에서 말해본다면, 이 장면에서 도덕적인 우위에 있는 자는 로만일지 모르지만, 윤리적인 우위에 서 있는 자는 한야이다. 즉 로만의 의심으로 인한 무리한 개입은 윤리적인 차원에서는 악에 가깝다.

이처럼 kieslowski가 십계의 아홉 번째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에 대한 상투적인 재확인이 아니다. kieslowski는 타인의 삶에 깊이 개입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경고한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하며,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며, 오류일 가능성이 크다. 대부분의 경우 타인에 대한 지나친 의심은 자신이 주체적으로 서지 못했을 때 발생한다. 이런 의심들은 부정적인 방식으로 해결되기 마련이며, 결국은 자기 자신의 삶을 파괴한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로만이 자전거 사고로 큰 부상을 당하는 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한야는 불륜을 반성하고 있으며, 그들의 관계를 계속해서 의심하고 있는 로만을 위해 양자를 들여서라도 안정을 찾고자 했다. 아이는 그들의 관계를 사회적으로 견고하게 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로만은 의심을 버리지 않고 있었으며, 그 의심은 한야의 불륜상대였던 마리우스의 경솔한 행동으로 인해 또 다시 확신으로 바뀐다. 그래서 그는 또 다시 자신의 불능상태를 학대하며, 자전거를 타고 높은 도로 난간에서 떨어져서 크게 다치게 된다. 즉 로만은 여전히 오해를 하고 있을 뿐이다. 오해는 그렇게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어쩌면 이제 오해만이 그를 지탱하는 힘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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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새로운 이해

문학의 세속성과 창조성
김인환, 성민엽, 정과리 엮음, 『문학의 새로운 이해』, 문학과지성사






『문학의 새로운 이해』라는 책은 문학이론에 관련된 중요한 비평 혹은 논문들을 모아둔 책이다. 이 책은 네 개의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고, 그 네 개의 부분은 "문학의 존재론", "문학의 안쪽", "문학의 바깥쪽", "오늘의 한국 문학"이라는 이름을 각각 부여받고, 그 속에 그 이름에 걸 맞는 글들을 다섯 개씩 수록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그 글들에 대해 조금씩 설명한다는 것은 별 의미 없는 것으로 보인다. 20개나 되는 글들을 조금씩 요약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래서 이 글에서는 "문학의 존재론"에 해당하는 곳에 논의를 집중시키기로 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문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 품어봄직한 매력적인 질문이며 그 대답의 양상을 살펴보는 것도 상당히 흥미있는 일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기에 실린 다섯 개의 글 중에 현택수의 「문학 생산의 장」과 장경렬의 「작가의 죽음과 독자의 탄생」은 각각 다른 의미에서 충격을 주는 글이었다. 이 두 개의 글은 나에게 문학의 세속성과 무한한 창조성을 동시에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세속성과 창조성의 정체는 무엇일까?


- "문학하기"의 세속성

현택수의「문학 생산의 장」은 문학이 어떻게 생산되는지를 살펴보고 있는 글이다. 이 글은 이전까지 문학사회학이 가지던 거친 통계적 접근방법이 문학을 사회적으로 규정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문학 자체의 미학적 생산 양식이 어떠한 것인가를 밝혀내는 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런데 그 노력의 대부분은 프랑스의 사회학자 부르디외의 이론을 소개하는데 바친다.
부르디외의 이론은 문학을 하나의 제도로 바라본다. 즉 문학 현상을 "일종의 의식(儀式)적 행위의 제도화 과정"(p.45)으로 보는 것이다. 문학을 제도로 바라본다는 것은 문학을 어떤 실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문학작품이다"라고 정한 것을 믿는 사회적 신념에 의해 탄생하는 것으로 본다는 이야기가 된다. 여기서부터 문학에 대한 낭만적 믿음은 깨어지고 만다. 거기에서 덧붙여 문학이 자신의 테두리를 설정하고 난 뒤의 모습, 즉 문학의 장(champ) 내의 모습을 설명한다. 그 장 속의 모습은 압축적으로 "상징재의 시장"(p.49)이라고 요약된다.
"문학의 장"을 "시장"으로 규정한 것은 독특함을 넘어서 놀라움마저 준다. 도대체 어떤 점이 문학과 시장 사이에 유사함을 설정할 수 있게 한 걸까? 부르디외는 문학 형식 변화의 원동력이 작품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통과 이단이라는 대립관계 속에 있다고 본다. "문학의 장"은 크게 '대량 생산의 속장'과 '제한 생산의 속장'으로 구분된다. 대량 생산의 속장은 돈을 벌기 위해 문학을 하는, 즉 베스트 셀러들의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경제적 이익과 같은 세속적 가치가 중요한 목적이 된다. 그런데 그와는 대비되는 제한 생산의 속장은 대량 생산의 속장과는 다른 원리에 의해 운영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운영되는 것일까?

제한 생산의 장에서 생산자는 생산자만을 고객으로 갖고 있어 외적 수요에 의존하지 않고 권력의 장과 경제의 장의 근본적 원리에 도치되는 '지는 게 곧 이기는 것'이라는 게임의 원리에 지배된다. 그리하여 이익 추구는 배제되며 투자와 금전적 수익의 그 어떤 함수 관계도 보장되지 않으며 일시적 성공은 비난받는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작품 제작의 치열함은 남과 다른 모습을 보이겠다는 의지의 소산에 불과하다. 어떤 세속적 이익에도 초연한 체 문학 자체의 가치에만 충실하겠다는 의지들도 결국에는 "문학의 장" 내에서 인정받기 위한 전략일 뿐이다. 이렇게 되면 문학이 세속적인 가치들과 떨어져 있어서 숭고하다고 말하는 것은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세속적 가치에 초연한 것 역시 "문학의 장" 내에서 우월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자리싸움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문학을 지고지순의 그 무엇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허상에 지나지 않았음을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 문학의 세속성을 느끼는 순간이다.


- "문학읽기"의 창조성

그런데 장경렬의 「작가의 죽음과 독자의 탄생」은 이런 문학의 세속성이 어떤 효과를 불러올 수 있는 지를 검토하고 있는 글이다. 이 글은 문학하기의 세속성이 반드시 세속적인 효과만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드러낸다. 물론 이 글의 중심에는 보르헤스의 작품「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작가」라는 작품을 둘러싼 모방 논란에 대한 답변이 놓여져 있다. 하지만 바스의 평면적인 모방긍정론을 비판해가면서 도착한 논의의 지점은 바로 '작가의 죽음'은 반드시 '독자의 탄생'을 전제로 해야한다는 전제이다.
문제가 된 보르헤스의 작품은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를 시간이 한참 지난 현대에 피에르 메나르라는 작가가 그대로 베껴쓴 것에 대한 비평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것은 얼핏 보면 말장난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 속에는 상당히 재미있는 생각이 개입되어 있다. 즉 완전히 베낀 작품을 모방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그 모방은 독서의 다른 차원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며, 그 독서는 세르반테스의 창작 때와는 시간적으로 차이가 나기 때문에 또 다른 의미를 창출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베토벤의 교향곡이 연주자에 따라 다른 해석에 의해 다른 음악을 창출해낼 수 있는 것에 비유될 만하다. 이것은 문학 작품이 시대를 거쳐가면서 각각의 시대에 맞는 새로운 의미맥락을 창출할 수 있으며, 바로 이것이 문학의 창조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낭만주의적 작가의 죽음이 가져다 주는 창조적 독자의 탄생을 우리는 여기서 지켜볼 수 있다.

요컨대, '전사 행위이면서 동시에 전사 행위가 아닌' 메나르의 창조 행위는 다름아닌 '독서 행위'인 것이다......
말하자면, 보르헤스는 독서행위 자체를 또 하나의 글쓰기 - 음악의 경우, 연주하기 - 로 빗대어 이야기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언급들을 용인하게 되면 많은 문제점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즉 수많은 악의적인 모방들도 하나의 창작물로써 당당한 의의를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바스의 모방긍정론이 바로 악의적인 모방들마저도 긍정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보르헤스가 위의 작품을 쓴 것이 바스의 논의대로 무한정한 모방을 강조해서라기보다는 모방이 결국 작가의 죽음을 통해 독자의 새로운 해석을 불러일으키려는 시도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해보면 지나친 모방을 용인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본다.

문학은 문학의 장 속에서 인정받기 위한 치열한 투쟁의 도구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작가의 존재는 뚜렷하다. 그러나 막상 그것이 작품으로 생산되었을 때 그것을 만나는 독자들은 그런 작가의 존재를 꼭 인정할 필요는 없다. 독자는 스스로 새로운 작가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문학하기의 세속성은 문학 읽기의 창조성으로 대치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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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스트 오프를 보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나도 똑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느니 새로운 영화를 또 한 편 보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아무리 좋은 영화라고 해도, 내용 다 아는 영화를 두 번씩이나 본다는 것은 시간낭비가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얼마나 어이없는 생각인가를 깨달은 것은 소설 비평을 한답시고 소설을 들추어보기 시작하면서부터다. 한 소설을 첫 번째 읽었을 때와 두 번째 읽었을 때의 차이는 엄청났다. 소설의 경우가 그렇다면 영화도 그렇지 않으라는 법이 없다. 그래서 나는 좋은 영화를 보고 나면 으레 나중에 꼭 한 번 더 보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하루가 멀다하고 쉴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영화들의 물결 속에 떠밀려 살아가는 나에게 감동적으로 본 영화를 느긋하게 다시 감상하는 여유 같은 게 저절로 생길 리는 없었다.

그러다가 작년쯤 집에서 비디오를 들고 오고, 우연치 않게 비디오 테입도 몇 개 샀다. 그래놓고 나니 가끔 심심할 때마다 집에 있는 비디오를 보게 되는데, 텔레비전의 유치함에 질릴 때 구비해 둔 비디오 테입은 나에게 작은 활력소가 되었다. 그렇게 가끔 내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영화들이 몇 편 있는데, 몇 개 손꼽아 보자면, <와호장룡>, <블레이드 러너>, <블루> 등이 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이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브래스트 오프>다. 이 영화를 볼 때마다 내용을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텔레토비처럼 똑같은 장면에서 어김없이 감동하고, 분노하고, 낄낄거린다. 정말 좋은 영화라서 그런가 보다. 몇 번이고 다시 보아도 감동적인 것은 감동적이다.


Coal is History

<브래스트 오프 brassed off>(주1)는 말 그대로 "brass band"가 "off"된 상황을 다루고 있는 영화이다. 보수당 대처 정권의 탄광 합리화정책에 의해서 1984년 이후 140개의 탄광이 폐쇄되었고 그 결과 25만 명이 실직되는 상황에서 그림리 탄광 또한 폐광될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 틈바구니에서 그림리 탄광의 브라스 밴드 역시 탄광과 운명을 같이 할 위기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 수 차례의 파업과 대공황의 여파에도 살아남았던 그림리 탄광의 브라스 밴드는 보수당 정권의 악랄한 탄광 합리화정책에 의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영화 속 대사에서도 나오지만 광부 25만 명이 일자리에서 쫓겨났다는 사실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고래나 물개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보다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이러한 무관심 속에서 광부들은 멸종된 공룡들처럼 자본주의의 어두운 그늘로 사라져 가게 된다. 그림리 탄광을 소유하고 있던 자본가의 입에서 나온 "Coal is History"이란 말은 당시의 상황을 압축적으로 증언하는 말이었다. 탄광 소유자들은 아무리 그 탄광에 경제성이 있다 해도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광부들과 임금협상을 매년 벌이기보다는 차라리 그들을 모두 실업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탄광 소유자의 정신 건강의 측면에서나 자본의 전체 운동의 측면에서나 훨씬 유리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광부들의 일과 미래와 산업을 몇 푼의 돈으로 사려했다. 자본가들의 공세를 버텨낼 수 없었던 광부들은 겉으로는 탄광 폐쇄를 결사반대했지만, 결국 자본가들이 제시하는 금액에 혹해서 80%의 찬성으로 폐광을 결정하게 된다. 광부들의 자존심마저 돈에 팔려가는 순간이었다.


Brass Band is Dream

브라스 밴드 활동을 하는 것보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는 것이 더 중요했던 광부들은 밴드 활동을 더 이상 할 힘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브라스 밴드라는 이름의 꿈을 접으려고 한다. 그런데 현실의 압박에 의해 밴드가 해체되려는 순간 글로리아 멀린즈라는 아름다운 여인이 "토요명화"의 주제가로만 알고 있던 "아랑훼즈 협주곡"과 함께 등장한다. 글로리아는 그림리 탄광 밴드의 전성기를 주도했던 아더 멀린즈의 손녀였으며, 탄광의 경제성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회사의 직원이었다. 그녀의 등장은 탄광의 경제성 조사를 통해 폐광을 막을 수도 있다는 현실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아더 멀린즈의 후광과 함께 밴드의 화려한 전통을 부활시킨다는 차원에서 밴드의 해체를 조금이나마 지연시키는 역할을 담당한다. 그녀로 인해 브라스 밴드 전국대회의 결승전이 열리는 로얄 알버트 홀에까지 가고 싶다는 광부들의 꿈은 조금 더 연장된다.

그들에게 있어서 브라스 밴드는 단순한 취미 생활이 아니었다. 광부들이 길거리로 나앉게 되었다는 냉정한 현실에 대해서 사람들은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었지만, 브라스 밴드의 연주에 대해서만은 귀를 기울여 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그림리 탄광의 브라스 밴드는 노조를 없애고 광부를 쫓아내도 계속 입 다물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광부들의 자존심을 대변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들이 계속해서 꿈꿀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준결승에서 승리하여 알버트 홀이라는 그들의 꿈이 한 발짝 가까워졌을 때, 그들에게는 폐광이라는 절망적인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멀리 보이는 탄광의 기계들을 배경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가던 그림리 탄광밴드의 지휘자이자 정신적 지주인 대니는 탄광의 열악한 노동 상황을 상징하는 "진폐증"으로 쓰러지고 만다. 그들의 꿈이 현실에 의해 결정적으로 꺾이는 순간이었다.


Dannyboy and Pierrot

이 영화를 볼 때마다 내가 어김없이 분노하는 장면이 하나 있다. 대니의 아들인 필이 몇 푼의 돈이라도 벌어보려고 교회에 있는 아이들 앞에서 얼룩덜룩 분장을 한 채 광대짓을 하는 장면이다. 그 때 필은 빚에 쪼들려 가족과도 헤어지고 아버지마저도 쓰러진 자신의 처지가 너무 절망스러워 예수의 상을 보며, 아버지는 데려가려고 하면서 왜 마가렛 대처는 데려가지 않느냐고 울음을 터뜨린다. 그가 입은 광대 옷과 그의 입에서 나온 말들의 부조화는 상황의 비극성을 더욱 고조시킨다. 우스꽝스러운 분장을 한 채, 눈물을 글썽이며 마가렛 대처와 보수당에 대한 저주의 말을 퍼붓는 그의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항상 슬픔과 분노를 동시에 느낄 수밖에 없다. 실직자와 되어 가족과도 떨어져 살아야 하는 최악의 상황속에서 밴드의 꿈마저 사라지게 되었을 때, 삐에로의 복장을 한 채로 탄광의 기계에 목을 매려하는 필의 모습 또한 매번 나를 가슴 아프게 만드는 장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런 슬픔과 분노를 넘어서는 새로운 희망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볼 때마다 내가 어김없이 가슴 뭉클해하는 장면이 하나 있는데, 대니가 진폐증으로 인해 쓰러져서 입원하게 되었을 때, 그 병원 앞마당에 밴드가 다시 모여서 아일랜드 민요인 "대니 보이"를 연주하는 장면이다. 탄광도 문을 닫아 모두가 실직자가 되어 버리고, 대니 또한 탄광의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인해 얻은 병으로 쓰러져버린 최악의 상황에서 그들은 밴드의 유니폼을 입고, 머리에는 랜턴을 단 안전모를 쓰고 하나 둘씩 모여 "대니 보이"를 연주한다. 물론 그 음악 자체도 정말 감동적이지만, 그 "대니 보이"의 가사까지 생각해보면 정말 눈시울이 글썽해질 수밖에 없다. "저 목장에는 여름철이 오고 산골짝마다 눈이 덮혀도 나 항상 오래 여기 살리라 오 대니 보이 오 대니 보이 내 사랑아." 나는 그 장면을 볼 때마다 그들은 비록 현실에서 패배했지만, 브라스 밴드라는 꿈으로 다시 살아나리라는 간절한 희망을 읽어낼 수 있어서 가슴이 뭉클해진다.

내가 감동하는 것은 그 장면 뿐만은 아니다. 폐광이라는 현실 속에서 그들은 쉽게 포기하지 않고, 천 명의 광부와 한 명의 아픈 광부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알버트 홀에서 로시니의 "윌리엄 텔 서곡"을 연주한다. 말을 타고 달리는 듯한 그들의 힘찬 연주를 들을 때 나는 또 바보같이 눈시울을 붉힌다. 물론 이 영화의 여러 가지 사건들이 너무나 우연적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악기를 다시 찾기 위해 내기 당구를 치는 장면에서 매번 지기만 하던 앤디가 완전히 후로끄(주2)로 승리하게 되는 것이나, 알버트 홀에서 그들이 다른 밴드를 제치고 우승자가 되는 것 같은 일들은 현실에서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영화가 우연적인 사건들로 현실의 문제를 덮어버리는 영화는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들이 우승자가 되었을 때, 대니는 당당히 그 우승컵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브라스 밴드보다 더 중요한 것이 탄광의 현실임을 그는 알고 있었고, 우승컵을 거부할 때에 광부들의 비참한 현실이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더 알려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영화가 현실의 문제들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는 점은 영화 곳곳에 등장하는 브라스 밴드의 연주 장면들 속에서 더 잘 나타나 있다. 브라스 밴드가 아름다운 선율로 명곡들을 연주하고 있을 때조차, 영화는 밤샘 협상 중인 노조위원장과 회사 측 사람들의 모습이나 폐광을 막기 위해 노력하는 탄광 사람들의 모습이 병치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brassed on

어쨌든 이 영화는 정말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현실의 심각함을 직시함과 동시에 그 현실을 극복할 새로운 희망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영화는 이완 맥그리거가 <트레인스포팅>으로 뜨지 않았다면 우리나라에 들어오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영화다. 이완 맥그리거의 인기에 편승해서 이 영화는 개봉되었고, 주인공도 이완 맥그리거인 것처럼 선전하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에 주인공은 없다. 대니 역할을 맡았던 피트 포슬쓰웨이트의 연기나 필의 역할을 맡았던 스티븐 톰킨슨의 연기가 나에게는 더 인상적이었다. 이완 맥그리거는 그런 광부들 중에 하나로 등장할 뿐이었다. 주인공이 없지만, 모두가 주인공인 이런 멋진 영화를 또 다시 볼 수 있을지 궁금하다. 아무튼 이 영화의 말미에서 브라스 밴드는 다시 꿈꾸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연주하기 시작했다. 힘든 상황 속에서도 다시 연주를 하리라는 꿈을 꾸는 것, 그것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최소한의 것을 보장해 달라는 진지한 요구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아! 아직도 내 귓가에는 "대니 보이"의 처량한 듯 애절한 선율과 "윌리엄 텔 서곡"의 활기찬 선율이 들려오는 듯하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제발 우리 밴드하게 해주세요. 네?"




(주1) brassed off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았더니 "진절머리가 나다"라는 뜻이 있었다. 나는 이 제목을 보수당 정권의 탄광정책으로 인한 피해에 진절머리가 난다는 것으로 내 맘대로 이해했다.

(주2) 실력이 아니라 재수로 공을 맞힐 수 있게 되었을 때 쓰는 당구 전문 용어다. 이럴 땐 다른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 예의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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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편지>를 읽다.

즐거운 편지

< I >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즐거운 편지"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실린 두 편의 시 중에 나는 첫 번째 시를 지금 읽어보려 한다. 언젠가 우연히 이 시를 읽고 느낀 감동 때문에, 나는 시 <Ⅰ>을 여러 사람들 앞에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는 그저 그런 느낌이었을 뿐이지만, 요즈음 들어 다시 이 시를 만났을 때는, 내가 미처 읽어내지 못했던 의미들이 온몸 전체에 소름끼치도록 떠올라 왔다. 내가 과거에는 왜 그런 의미를 읽어내지 못했는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조금 이상하게 느낄 것으로 믿는다. 읽어보다니... 소리내어 읽는다는 것일까? 솔직히 그러고는 싶다. 하지만 우리는 시를 소리내어 읽어주기에 너무 멀리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내가 '읽는다'라고 말한 것은 '해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해서 내가 이 시에서 읽어낸 의미를 전해주고 싶다는 말이다. 해석이란 참고서의 시분석들이 보여주는 딱딱한 주석달기가 아니라,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를 통해 내 체험을 전달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내가 읽어낸 의미들은 어떤 의미에서 나의 분신과도 같다. 내 분신을 남에게 조심스럽게 보여주기. 그것이 '시읽기'이다. 나는 이제 여러분들 앞에서 불안한 마음으로 시를 읽을 것이다.

시<Ⅰ>의 의미는 그냥 읽었을 때 한 남자의 사랑이야기쯤으로 읽힌다. 하지만 '한 남자의 사랑이야기'라고 쉽사리 말하는 그 말 안에는 그 남자의 수많은 조바심과 걱정, 그리고 기다림이 숨겨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이야기건 쉽사리 단정지어서는 안 될 것 같다. 그렇다면 이 남자의 사랑은 어떨까?

그의 사랑은 '사소하다.' 물론 그는 전신의 힘을 모아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겠지만, 그녀에게 그의 사랑은 해가 지고 바람이 불 듯, 항상 거기있는 그런 배경과 같은 것으로 느껴질 따름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그녀가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사랑이 배경과 같다고 그녀가 느끼는지 그는 알 수 없다. 단지 그가 그의 사랑이 그녀에게 그 정도밖에 안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에 그는 정말로 괴로웠을 것이다. 그의 모든 것을 던진 사랑이 그녀에게 별 것 아닌 배경과 같은 것이라고 여겨진다면 깊은 자괴감에 빠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기다리기로 마음먹은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살면서 가끔씩 배경을 둘러보는 경우가 있다. 평소때는 잘 느끼지 못하지만, 사는게 지치고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 가끔 하늘을 올려다보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이 남자는 그녀에게 있어서 자신의 사랑이 이런 식의 배경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그는 언제가 될 지는 모르지만, 그녀가 '한 없이 괴로움 속을 헤메일 때'까지 자신의 사랑을 지켜가기로 마음먹은 것 같다. 그녀에게 있어서 그의 사랑은 단지 '사소한 것'에 불과하지만, 그 사소함은 '오래된 사소함'이기에 그녀가 괴로움 속에서 그를 부를 때 그는 부드러운 미소로 그녀를 맞이할 것 같다. 그간의 오랜 상처를 천천히 삭여온 그 '오래된 사소함'은 그런 종류의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오래된 사소함.'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이 한 구절을 얻었다는 데서 커다란 만족감을 얻는다. 누군가를 사랑함에 있어서, 이런 '오래된 사소함'을 유지하는 것. 그것이 내가 누군가를 기다릴 수 있는 자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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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8. 10

 

김현, 『김현문학전집3 - 상상력과 인간/시인을 찾아서』中에서


내공이 쌓이면 문학사를 이와 같이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대학 다닐 때 김인환 선생의 현대문학사를 들으면서 느꼈던 감탄을 바로 김현의 이 글에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에게 김수영씨에 대해 물었다. 그것은 그가 시작(詩作)에 있어서 그의 의식을 가장 강하게 억압한 사람 중의 하나로 김수영씨를 들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다. 사실 그와 김수영씨의 대립과 갈등이 없었다면 한국시는 아직도 『청록집』수준에서 맴돌고 있었을지 모른다. 김춘수씨의 무의미의 시론과 김수영씨의 새로움 혹은 저항의 시론은 60년대 시단이 거둔 값진 수확이다. 그들은 실제로 김주연의 시론에 촉발되어 서로 격렬하게 싸웠을 뿐만 아니라, 직접 상대방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 경우에도 상대방을 의식하며 제작한 희귀한 예를 이룬다. 그 두 시인이 그처럼 극단화될 수 있었던 것도 서로를 의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김춘수씨의 시가 감추려고 한다면, 김수영씨의 시는 벗기려고 한다. 김수영씨가 인용하고 있는 이오네스코의 표현을 빌면, 전자는 감추려고 한다는 사실까지를 감추려고 하며, 후자는 벗기려고 한다는 사실까지를 벗기려 한다. 김춘수씨가 침묵을 지향한다면 김수영씨는 요설(饒舌)을 지향한다.


1960년대 새로운 시적풍토를 열어가려는 시인들이 있었다. 신동엽, 서정주, 김수영, 김춘수. 이들은 전통적인 정서, 정치적 태도, 표현의 방법 등의 기준으로 볼 때 각자의 영역을 충분히 개척해 나간 시인들이었다. 이들의 개척은 자신들의 공이기도 하지만, 서로의 영역을 끊임없이 의식한 데서 나온 결과물이기도 했다. 이들이 개척한 영토에서 황동규, 정현종, 오규원 등이 피어난 것이 아닐까? 김현은 이와 같은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으며, 같은 세대의 사람이라는 약점을 안고서도 동시대 시인들의 통시적 의미를 읽어낼 수 있다는 특출난 재주를 보여준다. 특히 인용도 재주라는 생각이 밑줄 친 부분을 보면서 든다. 김수영과 김춘수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한 줄의 인용구는 주옥같다는 말이 어울릴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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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세르크를 다시 읽다.

Berserk 일거다. 나는 독어를 잘 모르지만, 아마도 "미친 전사"라는 뜻으로 알고 있다. 말 그대로 이 만화의 주인공 가츠는 미친 놈이다.

 

그의 주변을 밤만되면 몰려드는, 그것도 짙은 피 냄새를 맡고 달려드는 악령들을 상대로 그는 광기어린 싸움을 벌인다. 자기 키보다 더 큰 무지막지한 칼을 들고 말이다. 악령들과 싸우는 그의 모습은 차라리 악마와 같다고 말하고 싶다. 그 정도로 그는 미친듯이 싸운다. 싸움 앞에서 어설픈 인도주의는 없다. 주위의 모든 것을 적으로 돌리며, 아무런 이해도 바라지 않고 그는 계속해서 싸운다. 그 싸움은 매일 밤 계속된다. 그가 살아 있는 한 그 싸움은 계속될 것이다.

 

그런 싸움을 견딜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두 가지, 악령이 되어버린, 그것도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한 악령이 되어버린 친구, 그리피스에 대한 애증과 그런 악령들에 의해 엄청난 상처를 입어버린 그의 여자친구, 캐스커에 대한 사랑이 그를 겨우 지탱하게 하는 힘이 될 뿐이다.

 

가츠가 친구인 그리피스를 증오하는 것은 권력을 향해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서려던 그리피스의 의지와 열정이, 그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가 파멸되던 순간 거대한 악으로 변질되어 버린 것에 대한 실망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그 변질은 어떤 의미에서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그리피스의 파멸은 철저했다. 온 몸의 모든 껍질을 벗겨내고, 모든 힘줄을 잘리며 혀까지 잘라내는 엄청난 고문을 겪으며 어떻게 그는 생의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그 순간 찾아온 악령을 그는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가츠의 내면에는 일종의 열등감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숨길 수는 없다. 가츠는 언제나 그리피스의 이인자였다. 그 스스로는 이인자로 만족했지만, 캐스커라는 여인을 사이에 두고 그 둘은 갈등을 빚어낸다. 그리피스는 그를 사랑하는 캐스커를 두고 왕의 딸을 사랑하다가 결국, 비참한 고문을 받는다. 캐스커는 그 과정에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겪는다. 그것을 곁에서 지켜본 가츠의 마음은 어떠할까?

 

그런 열등의식은 그리피스에 대한 일종의 애증을 낳게 했다. 그를 흠모하면서도 증오하는 마음, 그 마음은 그리피스의 악령들과 그를 구별짓게 하며 그 끝나지 않을 싸움을 지속시키는 힘이 된다. 어쩌면 가츠의 내면이 싸움 자체에 대한 욕망으로만 가득차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행위 자체를 목적으로 하기에 그는 순수한가?와 같은 질문.

 

이 만화를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우리 마음 속에도 우리 자신을 악령으로 이끌 어떤 증오나 죄악이 자리잡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가츠가 싸우고 있는 수 많은 악령들은 다른 외계에서 온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 발 딛고 있는 이 지구상에서 삶에 견디어 내지 못하고 자신 속의 증오와 욕망에 스스로 파묻힌 사람들이 결국에는 악령이 된다.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파우스트처럼 말이다. 나는 이 만화의 장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수 많은 환타지 만화들이 악마나 유령들을 주어진 것, 다른 어딘가에서 온 괴물로 묘사하고, 그것들을 퇴치하는데에만 목적을 두고 있는 것으로 그린다. 다른 곳에서 온 것이기에 그것은 퇴치가 가능하다.

 

그러나 베르세르크의 악령은 우리 안의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없앨 수 없는 것이다. 끊임없는 내면의 싸움만이 그것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가츠가 사도들과 싸울 때는 언제나 배경과 등장인물들이 엉켜 하나도 분리되지 않은 채로 그려진다. 이와 같은 묘사 방식은 바로 가츠의 내면과 외부의 적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로 혼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싸울 때마다 그는 항상 악마가 되느냐, 그 속에서 벗어날 것인가의 혼란 속에 놓인다.

 

이런 점에서 난 <기생수>도 좋아한다. <기생수> 또한 자신의 몸 속으로 들어온 미지의 생물과 순간순간 대결을 벌이기 때문이다. <기생수>의 주인공은 자기 몸 속에 들어온 외계의 생물에 의해 빚어진 잔혹한 운명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지만 그 생물이 자신에게 준 능력에 조금씩 적응하면서 거기에 동화된다. 거부와 동화의 미묘한 줄다리기로 인해 난 늘 <기생수>에서 긴장감에 빠져들곤 한다.  

 

 <기생수>의 외계 생물에게 있어서 주인공은 기생하기 위한 있는 숙주이기 때문에 주인공의 생존 자체가 외계 생물의 존재근거가 된다. 하지만 <베르세르크>는 자신의 내면 속에 잠들어 있는 악마에게 만약 먹힌다면 자기 자신의 파멸로 직결된다. 그렇기에 매일매일 그는 홀로 운명을 결정짓는 싸움을 벌인다. 둘이서 싸우는 <기생수>와 홀로 싸우는 <베르세르크>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요즘은 이 외로운 싸움을 돕기 위해 인과의 끈으로 맺어진 마녀 시르케가 나타나 덜 외로워졌지만... 

 

이 만화가 중세를 배경으로 하다보니, 맹목적인 신앙에 대한 비판도 읽어낼 수 있다. 마녀 시르케나 화형 속에서 욕망을 보는 기사단장 이야기 속에서 이러한 측면은 두드러진다. 하지만 몇 장 넘기지 않아도 하늘 가득 뒤덮은 악령들을 볼 수 있는 이 만화를 읽다보면 신앙에 대한 의심이 생기는 건 당연하다. 시공간을 지배하는 악령들이 등장인물들 위에 군림하는 장면을 볼 때, 절망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을 상상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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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7. 14

 

2005. 7. 14


최명익, 「심문(心紋)」


전향소설이라는 분류를 난 썩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과거의 정열이 사그라든 자리에서 음험하게 피어난 소설들이 포함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과거에 피어오르던 그 정열이 자기의 것이 아니라 해바라기처럼 현해탄만을 바라보던 자들이 들고 온 ‘타인의 정열’이었다는 점에서, 또한 현해탄 해바라기들의 참담한 현실 투항기를 묶은 ‘전향소설’이라는 개념 역시 현해탄을 건너온 것이라는 점에서 그러한 분류를 좋아할 수가 없다. 물론 1930년대 말의 상황은 군사정권과도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잔혹했기에 쉽게 그들의 좌절감을 폄하하기는 어렵지만, 그 시기에 쏟아져 나온 이러한 소설들을 굳이 분류해가며 주목한다는 것이 썩 내키는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러한 소설들이 가진 미덕이 없지는 않다.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겉멋에 죽고 살던 글쟁이들이, 이제는 아무도 지켜봐주는 사람이 없을 지도 모른다는 암울한 전망 속에서 조용히 자신의 이야기들을 비교적 진솔하게 털어놓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전에 읽었던 김남천의 「녹성당」도 그런 느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제 세계가 아니라 자기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했다고 할까?


최명익의 「심문」또한 위의 분류에 포함될 수도 있는 소설이라고 생각된다. 과거에는 급진적인 사상을 선도적으로 이끌어 갔지만, 결국에는 아편중독자로 타락해버린 현혁이라는 인물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현혁, 여옥과 같은 인물들에 대한 세밀한 내면 묘사를 통해 전향소설의 장점들을 잘 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소설의 커다란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얼핏 들어 최명익의 소설들이 비교적 치밀한 내면 묘사가 소설가적 특징이자 장점이라 알고 있다. 이것은 아마 이 소설을 두고 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p.s 1) 이 소설에서 재밌게 보았던 부분이 있다. 가장 첫 부분에 시속 50km로 달리는 기차 안에서 맹렬한 속도 감각을 느꼈다는 부분이다. 모던한 감각의 소유자인 최명익이 당시에는 가장 모던한 사물인 기차를 경험하고, 그 느낌을 서술한 이 부분은 바로 그를 모더니스트라 불리게 한다. 하지만 지금 시속 50km의 속력을 가진 기차는 더 이상 모던한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복고적 향수의 대상이 되고만다. 이 부분을 보면서 모던한 감각을 추구한다는 것은 동시대적인 감각을 추구한다는 것이며, 이것은 곧 그 빛을 쉽게 잃어버리는 숙명을 타고 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p.s 2) 그 당시 만주에서는 아편을 쉽게 구할 수 있었나 보다. 돈만 있으면 구할 수 있었던 것 같아 보인다. 아편 전쟁의 나라인 중국이나 아편이 상용화되어 있을 법 한가? 그런데 어두침침한 여옥의 방에서 담배에 아편가루를 찍어 피우는 한 남자의 고백을 듣고 있는 장면은 영화로 따지면 느와르에 속할 법하다. 이건 지금도 충분히 모던한 장면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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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원,<학교의 탄생>, 휴머니스트

 

이승원, 『학교의 탄생』, 휴머니스트, 2005


쉽게 쓰여진 책. 물론 이 책에 담긴 수많은 문헌을 읽어내고, 그 의미를 “학교”라는 테두리 안에 묶어낸 것은 인정할 만한 노력이다. 하지만 개별 사건들의 나열로 개화기를 묘사하는데 그치고 있다는 점에서 별다른 새로운 인식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학교에 가는 길부터 시작해서 졸업식까지를 하나의 큰 틀로 삼아 학교 안팎으로 벌어지는 사건들을 엮어보려한 시도는 인정할만 하지만, 결국 개화기의 여러 가지 현상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기만 하고 수렴된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 넓게 조사하긴했지만 깊이 탐구하는 자세가 부족하다고나 할까? 참신성이나 책 전체를 응집성으로만 따지자면 김진송,『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현실문화연구)가 훨씬 낫다고 하겠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부분이 그러했다.


100년 전만 해도 일정한 나이가 되면 누구나 술과 담배를 즐겼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한 금기인 ‘19세 이하 금지’ 혹은 ‘미성년자 금지’ 또는 ‘청소년보호법’이 당시에는 없었다. 단지 과하게 하지 말라는 정도였다. 왜 19세 이상을 성인이라고 하고, 그 이하를 미성년자라고 하여 이해할 수도 없는 금기사항을 만들어놓았는지는 ‘일부’ 도덕적․윤리적으로 투명한 어르신들만이 알 일이다. 그분들이 보기에 19세 이하는 계몽되지 않은 ‘미성년’, 계몽해야 할 ‘미성년’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경쾌한 필치가 글 읽기를 수월케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경쾌한 필치 뒤에 숨는 탁 쏘는 맛이 별로 없다. 어쩌면 억지로 발랄을 가장하는 아저씨를 보는 느낌이랄까. 위의 부분만 하더라도 ‘19세’라는 경계선에 얽힌 더 많은 이야기들이 나와야 할 법한데, ‘일부 도덕적, 윤리적으로 투명한 어르신’이라는 표현에서 보이는 거리두기에 가까운 빈정댐으로 넘어가고 만다. 과거에 읽었던 닐 포스트만, 『유년기의 종말』(분도) 만 하더라도 유년기에 관련된 문헌들을 살피면서 미디어의 변천으로 인한 유년기의 종말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를 진지하게 전달하고 있다. 반면에 『학교의 탄생』은 제목에서 느낄 수 있는 계보학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개념적인 설명으로 여러 사건들을 종합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감시와 처벌』에서 따온 규율된 신체라는 개념만으로 개화기의 사건들을 뭉뚱그려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약 3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을 읽는데 단 3시간이 걸렸다면 내 독법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읽고도 이 책의 흐름을 읽어낼 수 있었기에 이 책 자체가 가진 문제도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와 비슷한 구성의 책을 몇 권 읽은 체험으로 인해, 그리고 일제시대 소설을 비교적 많이 읽었던 체험으로 인해 이 책이 평이하게 다가왔을 수도 있지만...책을 읽고나서 받은 무언가 허전한 느낌으로 인해 이름도 비슷한 필립 아리에스,『아동의 탄생』(새물결)을 주문하고 말았다. 요즘 돈도 없는데 월급 탓다는 배짱으로 책에 돈을 너무 많이 쓰나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쉽게 개화기의 상황들을 이해할 수 있었던 이유가 단지 개인적 독서체험에서만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도 그때 발생되었던 여러 가지 제도와 습속에 익숙하기 때문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그때 난 말할 수 없는 씁쓸함을 느꼈다. 책을 읽고 있을 때 같이 일하는 조교가 책의 표지를 보며 표지에 나와있는 체조의 동작이 도수체조와 똑같다며 신기해할 때 내 기분은 어땠겠는가. 이 책의 의미를 최대한 부여해본다면 나에게 이 정도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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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익의 <무성격자>에서

읽다가 섬뜩한 느낌이 들어 옮긴다. 어쩜 요즘 나랑 이렇게 비슷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 정말 놀랄 따름이다. 70년의 시간격차 따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취하였던 이튿날 겨우 일과를 치르고 나서는 혼탁한 머리와 떨리는 다리로 번잡한 거리를 망령과 같이 방황하는 것이었다. 방황하던 길에 혹시 서점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그것은 학생 생활의 습관 중에 오직 남은 한 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 습관은 회구적 감상으로 물들여진 것이다. 연구의 체계와 독서의 플랜을 흩트려버린 지 오랜 지금은 전과 같이 어떤 필요한 책을 찾으러 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망연히 들어선 시선은 높고 넓은 서가에 비즛이 들어찬 책 뒤 등에 클래식한 명조체의 활자와 금시에 먹물이 들을 듯이 새로운 감각의 육필 문자 위를 흘러 지나갈 뿐이다.

 

그같이 막연한 시간에 혹시 그전에 존경하고 사랑하던 반가운 사람이 신장한 전집이 보이면 한때 매혹하였던 계집의 체온 같은 감각적 회상을 느끼기도 하였다. 혹시 전에 본 문헌에서 저자의 이름만을 기억하던 신간을 뽑아들고 목차를 내려보기도 하였으나 자기와 그 책 사이를 이어가기에는 너무나 큰 미싱 링크가 있음을 발견할 뿐이었다. 그 책을 다시 제자리에 채우고 서가를 쳐다볼 때에는 술에 불은 지방 덩어리인 몸으로는 아무리 부딪쳐도 도저히 무너트릴 수 없는 장벽을 대한 듯이 답답함을 느꼈다.

 

그러나 한 걸음 물러서서 다시 바라보는 서가는 땀과 피의 입체인 피라미드나 만리장성의 위관을 보는 듯한 숭엄함과 기쁨을 느끼기도 하였다. 그리고 자기도 이 문화탑에 한 돌을 쌓아보겠다는 야심을 가졌던 것이 먼 옛날 일같이 회상되었다. 그러한 전날의 야심은 한 순간 찬란한 빛으로 밤하늘에 금 그었던 별불같이 사라지고만 듯하였다. 밤하늘에 금빛으로 그려졌던 별의 흐른 자취가 사라지면 우리의 눈은 그 자리에 검은 선을 보게 되고 그 검은 선마저 사라지면 부지중 한숨을 짓게 되는 것이다.

 

 

그저께 동네 서점에 들러 슬라보예 지젝의 신간들이 쏟아져 나온 것을 발견하고 한숨지었을 때 내 심정이 바로 이 느낌이다. 한때 지젝의 책들을 꼼꼼하게 따라 읽어보겠다고 거창하게 맘먹은 적이 있었으나, 지금은 단 한권의 책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다. 이 술에 불은 지방 덩어리인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나... 가끔 들르는 서점 또한 사치스런 습관에 불과한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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