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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7. 14

 

2005. 7. 14


최명익, 「심문(心紋)」


전향소설이라는 분류를 난 썩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과거의 정열이 사그라든 자리에서 음험하게 피어난 소설들이 포함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과거에 피어오르던 그 정열이 자기의 것이 아니라 해바라기처럼 현해탄만을 바라보던 자들이 들고 온 ‘타인의 정열’이었다는 점에서, 또한 현해탄 해바라기들의 참담한 현실 투항기를 묶은 ‘전향소설’이라는 개념 역시 현해탄을 건너온 것이라는 점에서 그러한 분류를 좋아할 수가 없다. 물론 1930년대 말의 상황은 군사정권과도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잔혹했기에 쉽게 그들의 좌절감을 폄하하기는 어렵지만, 그 시기에 쏟아져 나온 이러한 소설들을 굳이 분류해가며 주목한다는 것이 썩 내키는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러한 소설들이 가진 미덕이 없지는 않다.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겉멋에 죽고 살던 글쟁이들이, 이제는 아무도 지켜봐주는 사람이 없을 지도 모른다는 암울한 전망 속에서 조용히 자신의 이야기들을 비교적 진솔하게 털어놓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전에 읽었던 김남천의 「녹성당」도 그런 느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제 세계가 아니라 자기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했다고 할까?


최명익의 「심문」또한 위의 분류에 포함될 수도 있는 소설이라고 생각된다. 과거에는 급진적인 사상을 선도적으로 이끌어 갔지만, 결국에는 아편중독자로 타락해버린 현혁이라는 인물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현혁, 여옥과 같은 인물들에 대한 세밀한 내면 묘사를 통해 전향소설의 장점들을 잘 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소설의 커다란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얼핏 들어 최명익의 소설들이 비교적 치밀한 내면 묘사가 소설가적 특징이자 장점이라 알고 있다. 이것은 아마 이 소설을 두고 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p.s 1) 이 소설에서 재밌게 보았던 부분이 있다. 가장 첫 부분에 시속 50km로 달리는 기차 안에서 맹렬한 속도 감각을 느꼈다는 부분이다. 모던한 감각의 소유자인 최명익이 당시에는 가장 모던한 사물인 기차를 경험하고, 그 느낌을 서술한 이 부분은 바로 그를 모더니스트라 불리게 한다. 하지만 지금 시속 50km의 속력을 가진 기차는 더 이상 모던한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복고적 향수의 대상이 되고만다. 이 부분을 보면서 모던한 감각을 추구한다는 것은 동시대적인 감각을 추구한다는 것이며, 이것은 곧 그 빛을 쉽게 잃어버리는 숙명을 타고 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p.s 2) 그 당시 만주에서는 아편을 쉽게 구할 수 있었나 보다. 돈만 있으면 구할 수 있었던 것 같아 보인다. 아편 전쟁의 나라인 중국이나 아편이 상용화되어 있을 법 한가? 그런데 어두침침한 여옥의 방에서 담배에 아편가루를 찍어 피우는 한 남자의 고백을 듣고 있는 장면은 영화로 따지면 느와르에 속할 법하다. 이건 지금도 충분히 모던한 장면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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