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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8/22
    문학의 새로운 이해
    김지씨
  2. 2005/08/22
    브레스트 오프를 보다(2)
    김지씨
  3. 2005/08/22
    <즐거운 편지>를 읽다.
    김지씨
  4. 2005/08/10
    2005. 8. 10
    김지씨
  5. 2005/08/10
    베르세르크를 다시 읽다.(4)
    김지씨

문학의 새로운 이해

문학의 세속성과 창조성
김인환, 성민엽, 정과리 엮음, 『문학의 새로운 이해』, 문학과지성사






『문학의 새로운 이해』라는 책은 문학이론에 관련된 중요한 비평 혹은 논문들을 모아둔 책이다. 이 책은 네 개의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고, 그 네 개의 부분은 "문학의 존재론", "문학의 안쪽", "문학의 바깥쪽", "오늘의 한국 문학"이라는 이름을 각각 부여받고, 그 속에 그 이름에 걸 맞는 글들을 다섯 개씩 수록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그 글들에 대해 조금씩 설명한다는 것은 별 의미 없는 것으로 보인다. 20개나 되는 글들을 조금씩 요약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래서 이 글에서는 "문학의 존재론"에 해당하는 곳에 논의를 집중시키기로 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문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 품어봄직한 매력적인 질문이며 그 대답의 양상을 살펴보는 것도 상당히 흥미있는 일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기에 실린 다섯 개의 글 중에 현택수의 「문학 생산의 장」과 장경렬의 「작가의 죽음과 독자의 탄생」은 각각 다른 의미에서 충격을 주는 글이었다. 이 두 개의 글은 나에게 문학의 세속성과 무한한 창조성을 동시에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세속성과 창조성의 정체는 무엇일까?


- "문학하기"의 세속성

현택수의「문학 생산의 장」은 문학이 어떻게 생산되는지를 살펴보고 있는 글이다. 이 글은 이전까지 문학사회학이 가지던 거친 통계적 접근방법이 문학을 사회적으로 규정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문학 자체의 미학적 생산 양식이 어떠한 것인가를 밝혀내는 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런데 그 노력의 대부분은 프랑스의 사회학자 부르디외의 이론을 소개하는데 바친다.
부르디외의 이론은 문학을 하나의 제도로 바라본다. 즉 문학 현상을 "일종의 의식(儀式)적 행위의 제도화 과정"(p.45)으로 보는 것이다. 문학을 제도로 바라본다는 것은 문학을 어떤 실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문학작품이다"라고 정한 것을 믿는 사회적 신념에 의해 탄생하는 것으로 본다는 이야기가 된다. 여기서부터 문학에 대한 낭만적 믿음은 깨어지고 만다. 거기에서 덧붙여 문학이 자신의 테두리를 설정하고 난 뒤의 모습, 즉 문학의 장(champ) 내의 모습을 설명한다. 그 장 속의 모습은 압축적으로 "상징재의 시장"(p.49)이라고 요약된다.
"문학의 장"을 "시장"으로 규정한 것은 독특함을 넘어서 놀라움마저 준다. 도대체 어떤 점이 문학과 시장 사이에 유사함을 설정할 수 있게 한 걸까? 부르디외는 문학 형식 변화의 원동력이 작품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통과 이단이라는 대립관계 속에 있다고 본다. "문학의 장"은 크게 '대량 생산의 속장'과 '제한 생산의 속장'으로 구분된다. 대량 생산의 속장은 돈을 벌기 위해 문학을 하는, 즉 베스트 셀러들의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경제적 이익과 같은 세속적 가치가 중요한 목적이 된다. 그런데 그와는 대비되는 제한 생산의 속장은 대량 생산의 속장과는 다른 원리에 의해 운영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운영되는 것일까?

제한 생산의 장에서 생산자는 생산자만을 고객으로 갖고 있어 외적 수요에 의존하지 않고 권력의 장과 경제의 장의 근본적 원리에 도치되는 '지는 게 곧 이기는 것'이라는 게임의 원리에 지배된다. 그리하여 이익 추구는 배제되며 투자와 금전적 수익의 그 어떤 함수 관계도 보장되지 않으며 일시적 성공은 비난받는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작품 제작의 치열함은 남과 다른 모습을 보이겠다는 의지의 소산에 불과하다. 어떤 세속적 이익에도 초연한 체 문학 자체의 가치에만 충실하겠다는 의지들도 결국에는 "문학의 장" 내에서 인정받기 위한 전략일 뿐이다. 이렇게 되면 문학이 세속적인 가치들과 떨어져 있어서 숭고하다고 말하는 것은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세속적 가치에 초연한 것 역시 "문학의 장" 내에서 우월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자리싸움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문학을 지고지순의 그 무엇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허상에 지나지 않았음을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 문학의 세속성을 느끼는 순간이다.


- "문학읽기"의 창조성

그런데 장경렬의 「작가의 죽음과 독자의 탄생」은 이런 문학의 세속성이 어떤 효과를 불러올 수 있는 지를 검토하고 있는 글이다. 이 글은 문학하기의 세속성이 반드시 세속적인 효과만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드러낸다. 물론 이 글의 중심에는 보르헤스의 작품「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작가」라는 작품을 둘러싼 모방 논란에 대한 답변이 놓여져 있다. 하지만 바스의 평면적인 모방긍정론을 비판해가면서 도착한 논의의 지점은 바로 '작가의 죽음'은 반드시 '독자의 탄생'을 전제로 해야한다는 전제이다.
문제가 된 보르헤스의 작품은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를 시간이 한참 지난 현대에 피에르 메나르라는 작가가 그대로 베껴쓴 것에 대한 비평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것은 얼핏 보면 말장난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 속에는 상당히 재미있는 생각이 개입되어 있다. 즉 완전히 베낀 작품을 모방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그 모방은 독서의 다른 차원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며, 그 독서는 세르반테스의 창작 때와는 시간적으로 차이가 나기 때문에 또 다른 의미를 창출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베토벤의 교향곡이 연주자에 따라 다른 해석에 의해 다른 음악을 창출해낼 수 있는 것에 비유될 만하다. 이것은 문학 작품이 시대를 거쳐가면서 각각의 시대에 맞는 새로운 의미맥락을 창출할 수 있으며, 바로 이것이 문학의 창조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낭만주의적 작가의 죽음이 가져다 주는 창조적 독자의 탄생을 우리는 여기서 지켜볼 수 있다.

요컨대, '전사 행위이면서 동시에 전사 행위가 아닌' 메나르의 창조 행위는 다름아닌 '독서 행위'인 것이다......
말하자면, 보르헤스는 독서행위 자체를 또 하나의 글쓰기 - 음악의 경우, 연주하기 - 로 빗대어 이야기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언급들을 용인하게 되면 많은 문제점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즉 수많은 악의적인 모방들도 하나의 창작물로써 당당한 의의를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바스의 모방긍정론이 바로 악의적인 모방들마저도 긍정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보르헤스가 위의 작품을 쓴 것이 바스의 논의대로 무한정한 모방을 강조해서라기보다는 모방이 결국 작가의 죽음을 통해 독자의 새로운 해석을 불러일으키려는 시도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해보면 지나친 모방을 용인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본다.

문학은 문학의 장 속에서 인정받기 위한 치열한 투쟁의 도구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작가의 존재는 뚜렷하다. 그러나 막상 그것이 작품으로 생산되었을 때 그것을 만나는 독자들은 그런 작가의 존재를 꼭 인정할 필요는 없다. 독자는 스스로 새로운 작가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문학하기의 세속성은 문학 읽기의 창조성으로 대치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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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스트 오프를 보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나도 똑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느니 새로운 영화를 또 한 편 보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아무리 좋은 영화라고 해도, 내용 다 아는 영화를 두 번씩이나 본다는 것은 시간낭비가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얼마나 어이없는 생각인가를 깨달은 것은 소설 비평을 한답시고 소설을 들추어보기 시작하면서부터다. 한 소설을 첫 번째 읽었을 때와 두 번째 읽었을 때의 차이는 엄청났다. 소설의 경우가 그렇다면 영화도 그렇지 않으라는 법이 없다. 그래서 나는 좋은 영화를 보고 나면 으레 나중에 꼭 한 번 더 보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하루가 멀다하고 쉴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영화들의 물결 속에 떠밀려 살아가는 나에게 감동적으로 본 영화를 느긋하게 다시 감상하는 여유 같은 게 저절로 생길 리는 없었다.

그러다가 작년쯤 집에서 비디오를 들고 오고, 우연치 않게 비디오 테입도 몇 개 샀다. 그래놓고 나니 가끔 심심할 때마다 집에 있는 비디오를 보게 되는데, 텔레비전의 유치함에 질릴 때 구비해 둔 비디오 테입은 나에게 작은 활력소가 되었다. 그렇게 가끔 내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영화들이 몇 편 있는데, 몇 개 손꼽아 보자면, <와호장룡>, <블레이드 러너>, <블루> 등이 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이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브래스트 오프>다. 이 영화를 볼 때마다 내용을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텔레토비처럼 똑같은 장면에서 어김없이 감동하고, 분노하고, 낄낄거린다. 정말 좋은 영화라서 그런가 보다. 몇 번이고 다시 보아도 감동적인 것은 감동적이다.


Coal is History

<브래스트 오프 brassed off>(주1)는 말 그대로 "brass band"가 "off"된 상황을 다루고 있는 영화이다. 보수당 대처 정권의 탄광 합리화정책에 의해서 1984년 이후 140개의 탄광이 폐쇄되었고 그 결과 25만 명이 실직되는 상황에서 그림리 탄광 또한 폐광될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 틈바구니에서 그림리 탄광의 브라스 밴드 역시 탄광과 운명을 같이 할 위기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 수 차례의 파업과 대공황의 여파에도 살아남았던 그림리 탄광의 브라스 밴드는 보수당 정권의 악랄한 탄광 합리화정책에 의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영화 속 대사에서도 나오지만 광부 25만 명이 일자리에서 쫓겨났다는 사실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고래나 물개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보다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이러한 무관심 속에서 광부들은 멸종된 공룡들처럼 자본주의의 어두운 그늘로 사라져 가게 된다. 그림리 탄광을 소유하고 있던 자본가의 입에서 나온 "Coal is History"이란 말은 당시의 상황을 압축적으로 증언하는 말이었다. 탄광 소유자들은 아무리 그 탄광에 경제성이 있다 해도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광부들과 임금협상을 매년 벌이기보다는 차라리 그들을 모두 실업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탄광 소유자의 정신 건강의 측면에서나 자본의 전체 운동의 측면에서나 훨씬 유리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광부들의 일과 미래와 산업을 몇 푼의 돈으로 사려했다. 자본가들의 공세를 버텨낼 수 없었던 광부들은 겉으로는 탄광 폐쇄를 결사반대했지만, 결국 자본가들이 제시하는 금액에 혹해서 80%의 찬성으로 폐광을 결정하게 된다. 광부들의 자존심마저 돈에 팔려가는 순간이었다.


Brass Band is Dream

브라스 밴드 활동을 하는 것보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는 것이 더 중요했던 광부들은 밴드 활동을 더 이상 할 힘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브라스 밴드라는 이름의 꿈을 접으려고 한다. 그런데 현실의 압박에 의해 밴드가 해체되려는 순간 글로리아 멀린즈라는 아름다운 여인이 "토요명화"의 주제가로만 알고 있던 "아랑훼즈 협주곡"과 함께 등장한다. 글로리아는 그림리 탄광 밴드의 전성기를 주도했던 아더 멀린즈의 손녀였으며, 탄광의 경제성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회사의 직원이었다. 그녀의 등장은 탄광의 경제성 조사를 통해 폐광을 막을 수도 있다는 현실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아더 멀린즈의 후광과 함께 밴드의 화려한 전통을 부활시킨다는 차원에서 밴드의 해체를 조금이나마 지연시키는 역할을 담당한다. 그녀로 인해 브라스 밴드 전국대회의 결승전이 열리는 로얄 알버트 홀에까지 가고 싶다는 광부들의 꿈은 조금 더 연장된다.

그들에게 있어서 브라스 밴드는 단순한 취미 생활이 아니었다. 광부들이 길거리로 나앉게 되었다는 냉정한 현실에 대해서 사람들은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었지만, 브라스 밴드의 연주에 대해서만은 귀를 기울여 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그림리 탄광의 브라스 밴드는 노조를 없애고 광부를 쫓아내도 계속 입 다물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광부들의 자존심을 대변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들이 계속해서 꿈꿀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준결승에서 승리하여 알버트 홀이라는 그들의 꿈이 한 발짝 가까워졌을 때, 그들에게는 폐광이라는 절망적인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멀리 보이는 탄광의 기계들을 배경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가던 그림리 탄광밴드의 지휘자이자 정신적 지주인 대니는 탄광의 열악한 노동 상황을 상징하는 "진폐증"으로 쓰러지고 만다. 그들의 꿈이 현실에 의해 결정적으로 꺾이는 순간이었다.


Dannyboy and Pierrot

이 영화를 볼 때마다 내가 어김없이 분노하는 장면이 하나 있다. 대니의 아들인 필이 몇 푼의 돈이라도 벌어보려고 교회에 있는 아이들 앞에서 얼룩덜룩 분장을 한 채 광대짓을 하는 장면이다. 그 때 필은 빚에 쪼들려 가족과도 헤어지고 아버지마저도 쓰러진 자신의 처지가 너무 절망스러워 예수의 상을 보며, 아버지는 데려가려고 하면서 왜 마가렛 대처는 데려가지 않느냐고 울음을 터뜨린다. 그가 입은 광대 옷과 그의 입에서 나온 말들의 부조화는 상황의 비극성을 더욱 고조시킨다. 우스꽝스러운 분장을 한 채, 눈물을 글썽이며 마가렛 대처와 보수당에 대한 저주의 말을 퍼붓는 그의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항상 슬픔과 분노를 동시에 느낄 수밖에 없다. 실직자와 되어 가족과도 떨어져 살아야 하는 최악의 상황속에서 밴드의 꿈마저 사라지게 되었을 때, 삐에로의 복장을 한 채로 탄광의 기계에 목을 매려하는 필의 모습 또한 매번 나를 가슴 아프게 만드는 장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런 슬픔과 분노를 넘어서는 새로운 희망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볼 때마다 내가 어김없이 가슴 뭉클해하는 장면이 하나 있는데, 대니가 진폐증으로 인해 쓰러져서 입원하게 되었을 때, 그 병원 앞마당에 밴드가 다시 모여서 아일랜드 민요인 "대니 보이"를 연주하는 장면이다. 탄광도 문을 닫아 모두가 실직자가 되어 버리고, 대니 또한 탄광의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인해 얻은 병으로 쓰러져버린 최악의 상황에서 그들은 밴드의 유니폼을 입고, 머리에는 랜턴을 단 안전모를 쓰고 하나 둘씩 모여 "대니 보이"를 연주한다. 물론 그 음악 자체도 정말 감동적이지만, 그 "대니 보이"의 가사까지 생각해보면 정말 눈시울이 글썽해질 수밖에 없다. "저 목장에는 여름철이 오고 산골짝마다 눈이 덮혀도 나 항상 오래 여기 살리라 오 대니 보이 오 대니 보이 내 사랑아." 나는 그 장면을 볼 때마다 그들은 비록 현실에서 패배했지만, 브라스 밴드라는 꿈으로 다시 살아나리라는 간절한 희망을 읽어낼 수 있어서 가슴이 뭉클해진다.

내가 감동하는 것은 그 장면 뿐만은 아니다. 폐광이라는 현실 속에서 그들은 쉽게 포기하지 않고, 천 명의 광부와 한 명의 아픈 광부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알버트 홀에서 로시니의 "윌리엄 텔 서곡"을 연주한다. 말을 타고 달리는 듯한 그들의 힘찬 연주를 들을 때 나는 또 바보같이 눈시울을 붉힌다. 물론 이 영화의 여러 가지 사건들이 너무나 우연적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악기를 다시 찾기 위해 내기 당구를 치는 장면에서 매번 지기만 하던 앤디가 완전히 후로끄(주2)로 승리하게 되는 것이나, 알버트 홀에서 그들이 다른 밴드를 제치고 우승자가 되는 것 같은 일들은 현실에서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영화가 우연적인 사건들로 현실의 문제를 덮어버리는 영화는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들이 우승자가 되었을 때, 대니는 당당히 그 우승컵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브라스 밴드보다 더 중요한 것이 탄광의 현실임을 그는 알고 있었고, 우승컵을 거부할 때에 광부들의 비참한 현실이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더 알려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영화가 현실의 문제들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는 점은 영화 곳곳에 등장하는 브라스 밴드의 연주 장면들 속에서 더 잘 나타나 있다. 브라스 밴드가 아름다운 선율로 명곡들을 연주하고 있을 때조차, 영화는 밤샘 협상 중인 노조위원장과 회사 측 사람들의 모습이나 폐광을 막기 위해 노력하는 탄광 사람들의 모습이 병치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brassed on

어쨌든 이 영화는 정말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현실의 심각함을 직시함과 동시에 그 현실을 극복할 새로운 희망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영화는 이완 맥그리거가 <트레인스포팅>으로 뜨지 않았다면 우리나라에 들어오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영화다. 이완 맥그리거의 인기에 편승해서 이 영화는 개봉되었고, 주인공도 이완 맥그리거인 것처럼 선전하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에 주인공은 없다. 대니 역할을 맡았던 피트 포슬쓰웨이트의 연기나 필의 역할을 맡았던 스티븐 톰킨슨의 연기가 나에게는 더 인상적이었다. 이완 맥그리거는 그런 광부들 중에 하나로 등장할 뿐이었다. 주인공이 없지만, 모두가 주인공인 이런 멋진 영화를 또 다시 볼 수 있을지 궁금하다. 아무튼 이 영화의 말미에서 브라스 밴드는 다시 꿈꾸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연주하기 시작했다. 힘든 상황 속에서도 다시 연주를 하리라는 꿈을 꾸는 것, 그것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최소한의 것을 보장해 달라는 진지한 요구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아! 아직도 내 귓가에는 "대니 보이"의 처량한 듯 애절한 선율과 "윌리엄 텔 서곡"의 활기찬 선율이 들려오는 듯하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제발 우리 밴드하게 해주세요. 네?"




(주1) brassed off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았더니 "진절머리가 나다"라는 뜻이 있었다. 나는 이 제목을 보수당 정권의 탄광정책으로 인한 피해에 진절머리가 난다는 것으로 내 맘대로 이해했다.

(주2) 실력이 아니라 재수로 공을 맞힐 수 있게 되었을 때 쓰는 당구 전문 용어다. 이럴 땐 다른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 예의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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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편지>를 읽다.

즐거운 편지

< I >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즐거운 편지"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실린 두 편의 시 중에 나는 첫 번째 시를 지금 읽어보려 한다. 언젠가 우연히 이 시를 읽고 느낀 감동 때문에, 나는 시 <Ⅰ>을 여러 사람들 앞에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는 그저 그런 느낌이었을 뿐이지만, 요즈음 들어 다시 이 시를 만났을 때는, 내가 미처 읽어내지 못했던 의미들이 온몸 전체에 소름끼치도록 떠올라 왔다. 내가 과거에는 왜 그런 의미를 읽어내지 못했는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조금 이상하게 느낄 것으로 믿는다. 읽어보다니... 소리내어 읽는다는 것일까? 솔직히 그러고는 싶다. 하지만 우리는 시를 소리내어 읽어주기에 너무 멀리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내가 '읽는다'라고 말한 것은 '해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해서 내가 이 시에서 읽어낸 의미를 전해주고 싶다는 말이다. 해석이란 참고서의 시분석들이 보여주는 딱딱한 주석달기가 아니라,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를 통해 내 체험을 전달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내가 읽어낸 의미들은 어떤 의미에서 나의 분신과도 같다. 내 분신을 남에게 조심스럽게 보여주기. 그것이 '시읽기'이다. 나는 이제 여러분들 앞에서 불안한 마음으로 시를 읽을 것이다.

시<Ⅰ>의 의미는 그냥 읽었을 때 한 남자의 사랑이야기쯤으로 읽힌다. 하지만 '한 남자의 사랑이야기'라고 쉽사리 말하는 그 말 안에는 그 남자의 수많은 조바심과 걱정, 그리고 기다림이 숨겨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이야기건 쉽사리 단정지어서는 안 될 것 같다. 그렇다면 이 남자의 사랑은 어떨까?

그의 사랑은 '사소하다.' 물론 그는 전신의 힘을 모아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겠지만, 그녀에게 그의 사랑은 해가 지고 바람이 불 듯, 항상 거기있는 그런 배경과 같은 것으로 느껴질 따름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그녀가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사랑이 배경과 같다고 그녀가 느끼는지 그는 알 수 없다. 단지 그가 그의 사랑이 그녀에게 그 정도밖에 안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에 그는 정말로 괴로웠을 것이다. 그의 모든 것을 던진 사랑이 그녀에게 별 것 아닌 배경과 같은 것이라고 여겨진다면 깊은 자괴감에 빠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기다리기로 마음먹은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살면서 가끔씩 배경을 둘러보는 경우가 있다. 평소때는 잘 느끼지 못하지만, 사는게 지치고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 가끔 하늘을 올려다보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이 남자는 그녀에게 있어서 자신의 사랑이 이런 식의 배경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그는 언제가 될 지는 모르지만, 그녀가 '한 없이 괴로움 속을 헤메일 때'까지 자신의 사랑을 지켜가기로 마음먹은 것 같다. 그녀에게 있어서 그의 사랑은 단지 '사소한 것'에 불과하지만, 그 사소함은 '오래된 사소함'이기에 그녀가 괴로움 속에서 그를 부를 때 그는 부드러운 미소로 그녀를 맞이할 것 같다. 그간의 오랜 상처를 천천히 삭여온 그 '오래된 사소함'은 그런 종류의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오래된 사소함.'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이 한 구절을 얻었다는 데서 커다란 만족감을 얻는다. 누군가를 사랑함에 있어서, 이런 '오래된 사소함'을 유지하는 것. 그것이 내가 누군가를 기다릴 수 있는 자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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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8. 10

 

김현, 『김현문학전집3 - 상상력과 인간/시인을 찾아서』中에서


내공이 쌓이면 문학사를 이와 같이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대학 다닐 때 김인환 선생의 현대문학사를 들으면서 느꼈던 감탄을 바로 김현의 이 글에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에게 김수영씨에 대해 물었다. 그것은 그가 시작(詩作)에 있어서 그의 의식을 가장 강하게 억압한 사람 중의 하나로 김수영씨를 들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다. 사실 그와 김수영씨의 대립과 갈등이 없었다면 한국시는 아직도 『청록집』수준에서 맴돌고 있었을지 모른다. 김춘수씨의 무의미의 시론과 김수영씨의 새로움 혹은 저항의 시론은 60년대 시단이 거둔 값진 수확이다. 그들은 실제로 김주연의 시론에 촉발되어 서로 격렬하게 싸웠을 뿐만 아니라, 직접 상대방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 경우에도 상대방을 의식하며 제작한 희귀한 예를 이룬다. 그 두 시인이 그처럼 극단화될 수 있었던 것도 서로를 의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김춘수씨의 시가 감추려고 한다면, 김수영씨의 시는 벗기려고 한다. 김수영씨가 인용하고 있는 이오네스코의 표현을 빌면, 전자는 감추려고 한다는 사실까지를 감추려고 하며, 후자는 벗기려고 한다는 사실까지를 벗기려 한다. 김춘수씨가 침묵을 지향한다면 김수영씨는 요설(饒舌)을 지향한다.


1960년대 새로운 시적풍토를 열어가려는 시인들이 있었다. 신동엽, 서정주, 김수영, 김춘수. 이들은 전통적인 정서, 정치적 태도, 표현의 방법 등의 기준으로 볼 때 각자의 영역을 충분히 개척해 나간 시인들이었다. 이들의 개척은 자신들의 공이기도 하지만, 서로의 영역을 끊임없이 의식한 데서 나온 결과물이기도 했다. 이들이 개척한 영토에서 황동규, 정현종, 오규원 등이 피어난 것이 아닐까? 김현은 이와 같은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으며, 같은 세대의 사람이라는 약점을 안고서도 동시대 시인들의 통시적 의미를 읽어낼 수 있다는 특출난 재주를 보여준다. 특히 인용도 재주라는 생각이 밑줄 친 부분을 보면서 든다. 김수영과 김춘수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한 줄의 인용구는 주옥같다는 말이 어울릴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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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세르크를 다시 읽다.

Berserk 일거다. 나는 독어를 잘 모르지만, 아마도 "미친 전사"라는 뜻으로 알고 있다. 말 그대로 이 만화의 주인공 가츠는 미친 놈이다.

 

그의 주변을 밤만되면 몰려드는, 그것도 짙은 피 냄새를 맡고 달려드는 악령들을 상대로 그는 광기어린 싸움을 벌인다. 자기 키보다 더 큰 무지막지한 칼을 들고 말이다. 악령들과 싸우는 그의 모습은 차라리 악마와 같다고 말하고 싶다. 그 정도로 그는 미친듯이 싸운다. 싸움 앞에서 어설픈 인도주의는 없다. 주위의 모든 것을 적으로 돌리며, 아무런 이해도 바라지 않고 그는 계속해서 싸운다. 그 싸움은 매일 밤 계속된다. 그가 살아 있는 한 그 싸움은 계속될 것이다.

 

그런 싸움을 견딜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두 가지, 악령이 되어버린, 그것도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한 악령이 되어버린 친구, 그리피스에 대한 애증과 그런 악령들에 의해 엄청난 상처를 입어버린 그의 여자친구, 캐스커에 대한 사랑이 그를 겨우 지탱하게 하는 힘이 될 뿐이다.

 

가츠가 친구인 그리피스를 증오하는 것은 권력을 향해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서려던 그리피스의 의지와 열정이, 그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가 파멸되던 순간 거대한 악으로 변질되어 버린 것에 대한 실망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그 변질은 어떤 의미에서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그리피스의 파멸은 철저했다. 온 몸의 모든 껍질을 벗겨내고, 모든 힘줄을 잘리며 혀까지 잘라내는 엄청난 고문을 겪으며 어떻게 그는 생의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그 순간 찾아온 악령을 그는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가츠의 내면에는 일종의 열등감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숨길 수는 없다. 가츠는 언제나 그리피스의 이인자였다. 그 스스로는 이인자로 만족했지만, 캐스커라는 여인을 사이에 두고 그 둘은 갈등을 빚어낸다. 그리피스는 그를 사랑하는 캐스커를 두고 왕의 딸을 사랑하다가 결국, 비참한 고문을 받는다. 캐스커는 그 과정에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겪는다. 그것을 곁에서 지켜본 가츠의 마음은 어떠할까?

 

그런 열등의식은 그리피스에 대한 일종의 애증을 낳게 했다. 그를 흠모하면서도 증오하는 마음, 그 마음은 그리피스의 악령들과 그를 구별짓게 하며 그 끝나지 않을 싸움을 지속시키는 힘이 된다. 어쩌면 가츠의 내면이 싸움 자체에 대한 욕망으로만 가득차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행위 자체를 목적으로 하기에 그는 순수한가?와 같은 질문.

 

이 만화를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우리 마음 속에도 우리 자신을 악령으로 이끌 어떤 증오나 죄악이 자리잡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가츠가 싸우고 있는 수 많은 악령들은 다른 외계에서 온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 발 딛고 있는 이 지구상에서 삶에 견디어 내지 못하고 자신 속의 증오와 욕망에 스스로 파묻힌 사람들이 결국에는 악령이 된다.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파우스트처럼 말이다. 나는 이 만화의 장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수 많은 환타지 만화들이 악마나 유령들을 주어진 것, 다른 어딘가에서 온 괴물로 묘사하고, 그것들을 퇴치하는데에만 목적을 두고 있는 것으로 그린다. 다른 곳에서 온 것이기에 그것은 퇴치가 가능하다.

 

그러나 베르세르크의 악령은 우리 안의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없앨 수 없는 것이다. 끊임없는 내면의 싸움만이 그것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가츠가 사도들과 싸울 때는 언제나 배경과 등장인물들이 엉켜 하나도 분리되지 않은 채로 그려진다. 이와 같은 묘사 방식은 바로 가츠의 내면과 외부의 적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로 혼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싸울 때마다 그는 항상 악마가 되느냐, 그 속에서 벗어날 것인가의 혼란 속에 놓인다.

 

이런 점에서 난 <기생수>도 좋아한다. <기생수> 또한 자신의 몸 속으로 들어온 미지의 생물과 순간순간 대결을 벌이기 때문이다. <기생수>의 주인공은 자기 몸 속에 들어온 외계의 생물에 의해 빚어진 잔혹한 운명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지만 그 생물이 자신에게 준 능력에 조금씩 적응하면서 거기에 동화된다. 거부와 동화의 미묘한 줄다리기로 인해 난 늘 <기생수>에서 긴장감에 빠져들곤 한다.  

 

 <기생수>의 외계 생물에게 있어서 주인공은 기생하기 위한 있는 숙주이기 때문에 주인공의 생존 자체가 외계 생물의 존재근거가 된다. 하지만 <베르세르크>는 자신의 내면 속에 잠들어 있는 악마에게 만약 먹힌다면 자기 자신의 파멸로 직결된다. 그렇기에 매일매일 그는 홀로 운명을 결정짓는 싸움을 벌인다. 둘이서 싸우는 <기생수>와 홀로 싸우는 <베르세르크>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요즘은 이 외로운 싸움을 돕기 위해 인과의 끈으로 맺어진 마녀 시르케가 나타나 덜 외로워졌지만... 

 

이 만화가 중세를 배경으로 하다보니, 맹목적인 신앙에 대한 비판도 읽어낼 수 있다. 마녀 시르케나 화형 속에서 욕망을 보는 기사단장 이야기 속에서 이러한 측면은 두드러진다. 하지만 몇 장 넘기지 않아도 하늘 가득 뒤덮은 악령들을 볼 수 있는 이 만화를 읽다보면 신앙에 대한 의심이 생기는 건 당연하다. 시공간을 지배하는 악령들이 등장인물들 위에 군림하는 장면을 볼 때, 절망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을 상상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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