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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스트 오프를 보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나도 똑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느니 새로운 영화를 또 한 편 보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아무리 좋은 영화라고 해도, 내용 다 아는 영화를 두 번씩이나 본다는 것은 시간낭비가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얼마나 어이없는 생각인가를 깨달은 것은 소설 비평을 한답시고 소설을 들추어보기 시작하면서부터다. 한 소설을 첫 번째 읽었을 때와 두 번째 읽었을 때의 차이는 엄청났다. 소설의 경우가 그렇다면 영화도 그렇지 않으라는 법이 없다. 그래서 나는 좋은 영화를 보고 나면 으레 나중에 꼭 한 번 더 보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하루가 멀다하고 쉴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영화들의 물결 속에 떠밀려 살아가는 나에게 감동적으로 본 영화를 느긋하게 다시 감상하는 여유 같은 게 저절로 생길 리는 없었다.

그러다가 작년쯤 집에서 비디오를 들고 오고, 우연치 않게 비디오 테입도 몇 개 샀다. 그래놓고 나니 가끔 심심할 때마다 집에 있는 비디오를 보게 되는데, 텔레비전의 유치함에 질릴 때 구비해 둔 비디오 테입은 나에게 작은 활력소가 되었다. 그렇게 가끔 내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영화들이 몇 편 있는데, 몇 개 손꼽아 보자면, <와호장룡>, <블레이드 러너>, <블루> 등이 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이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브래스트 오프>다. 이 영화를 볼 때마다 내용을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텔레토비처럼 똑같은 장면에서 어김없이 감동하고, 분노하고, 낄낄거린다. 정말 좋은 영화라서 그런가 보다. 몇 번이고 다시 보아도 감동적인 것은 감동적이다.


Coal is History

<브래스트 오프 brassed off>(주1)는 말 그대로 "brass band"가 "off"된 상황을 다루고 있는 영화이다. 보수당 대처 정권의 탄광 합리화정책에 의해서 1984년 이후 140개의 탄광이 폐쇄되었고 그 결과 25만 명이 실직되는 상황에서 그림리 탄광 또한 폐광될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 틈바구니에서 그림리 탄광의 브라스 밴드 역시 탄광과 운명을 같이 할 위기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 수 차례의 파업과 대공황의 여파에도 살아남았던 그림리 탄광의 브라스 밴드는 보수당 정권의 악랄한 탄광 합리화정책에 의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영화 속 대사에서도 나오지만 광부 25만 명이 일자리에서 쫓겨났다는 사실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고래나 물개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보다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이러한 무관심 속에서 광부들은 멸종된 공룡들처럼 자본주의의 어두운 그늘로 사라져 가게 된다. 그림리 탄광을 소유하고 있던 자본가의 입에서 나온 "Coal is History"이란 말은 당시의 상황을 압축적으로 증언하는 말이었다. 탄광 소유자들은 아무리 그 탄광에 경제성이 있다 해도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광부들과 임금협상을 매년 벌이기보다는 차라리 그들을 모두 실업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탄광 소유자의 정신 건강의 측면에서나 자본의 전체 운동의 측면에서나 훨씬 유리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광부들의 일과 미래와 산업을 몇 푼의 돈으로 사려했다. 자본가들의 공세를 버텨낼 수 없었던 광부들은 겉으로는 탄광 폐쇄를 결사반대했지만, 결국 자본가들이 제시하는 금액에 혹해서 80%의 찬성으로 폐광을 결정하게 된다. 광부들의 자존심마저 돈에 팔려가는 순간이었다.


Brass Band is Dream

브라스 밴드 활동을 하는 것보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는 것이 더 중요했던 광부들은 밴드 활동을 더 이상 할 힘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브라스 밴드라는 이름의 꿈을 접으려고 한다. 그런데 현실의 압박에 의해 밴드가 해체되려는 순간 글로리아 멀린즈라는 아름다운 여인이 "토요명화"의 주제가로만 알고 있던 "아랑훼즈 협주곡"과 함께 등장한다. 글로리아는 그림리 탄광 밴드의 전성기를 주도했던 아더 멀린즈의 손녀였으며, 탄광의 경제성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회사의 직원이었다. 그녀의 등장은 탄광의 경제성 조사를 통해 폐광을 막을 수도 있다는 현실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아더 멀린즈의 후광과 함께 밴드의 화려한 전통을 부활시킨다는 차원에서 밴드의 해체를 조금이나마 지연시키는 역할을 담당한다. 그녀로 인해 브라스 밴드 전국대회의 결승전이 열리는 로얄 알버트 홀에까지 가고 싶다는 광부들의 꿈은 조금 더 연장된다.

그들에게 있어서 브라스 밴드는 단순한 취미 생활이 아니었다. 광부들이 길거리로 나앉게 되었다는 냉정한 현실에 대해서 사람들은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었지만, 브라스 밴드의 연주에 대해서만은 귀를 기울여 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그림리 탄광의 브라스 밴드는 노조를 없애고 광부를 쫓아내도 계속 입 다물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광부들의 자존심을 대변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들이 계속해서 꿈꿀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준결승에서 승리하여 알버트 홀이라는 그들의 꿈이 한 발짝 가까워졌을 때, 그들에게는 폐광이라는 절망적인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멀리 보이는 탄광의 기계들을 배경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가던 그림리 탄광밴드의 지휘자이자 정신적 지주인 대니는 탄광의 열악한 노동 상황을 상징하는 "진폐증"으로 쓰러지고 만다. 그들의 꿈이 현실에 의해 결정적으로 꺾이는 순간이었다.


Dannyboy and Pierrot

이 영화를 볼 때마다 내가 어김없이 분노하는 장면이 하나 있다. 대니의 아들인 필이 몇 푼의 돈이라도 벌어보려고 교회에 있는 아이들 앞에서 얼룩덜룩 분장을 한 채 광대짓을 하는 장면이다. 그 때 필은 빚에 쪼들려 가족과도 헤어지고 아버지마저도 쓰러진 자신의 처지가 너무 절망스러워 예수의 상을 보며, 아버지는 데려가려고 하면서 왜 마가렛 대처는 데려가지 않느냐고 울음을 터뜨린다. 그가 입은 광대 옷과 그의 입에서 나온 말들의 부조화는 상황의 비극성을 더욱 고조시킨다. 우스꽝스러운 분장을 한 채, 눈물을 글썽이며 마가렛 대처와 보수당에 대한 저주의 말을 퍼붓는 그의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항상 슬픔과 분노를 동시에 느낄 수밖에 없다. 실직자와 되어 가족과도 떨어져 살아야 하는 최악의 상황속에서 밴드의 꿈마저 사라지게 되었을 때, 삐에로의 복장을 한 채로 탄광의 기계에 목을 매려하는 필의 모습 또한 매번 나를 가슴 아프게 만드는 장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런 슬픔과 분노를 넘어서는 새로운 희망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볼 때마다 내가 어김없이 가슴 뭉클해하는 장면이 하나 있는데, 대니가 진폐증으로 인해 쓰러져서 입원하게 되었을 때, 그 병원 앞마당에 밴드가 다시 모여서 아일랜드 민요인 "대니 보이"를 연주하는 장면이다. 탄광도 문을 닫아 모두가 실직자가 되어 버리고, 대니 또한 탄광의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인해 얻은 병으로 쓰러져버린 최악의 상황에서 그들은 밴드의 유니폼을 입고, 머리에는 랜턴을 단 안전모를 쓰고 하나 둘씩 모여 "대니 보이"를 연주한다. 물론 그 음악 자체도 정말 감동적이지만, 그 "대니 보이"의 가사까지 생각해보면 정말 눈시울이 글썽해질 수밖에 없다. "저 목장에는 여름철이 오고 산골짝마다 눈이 덮혀도 나 항상 오래 여기 살리라 오 대니 보이 오 대니 보이 내 사랑아." 나는 그 장면을 볼 때마다 그들은 비록 현실에서 패배했지만, 브라스 밴드라는 꿈으로 다시 살아나리라는 간절한 희망을 읽어낼 수 있어서 가슴이 뭉클해진다.

내가 감동하는 것은 그 장면 뿐만은 아니다. 폐광이라는 현실 속에서 그들은 쉽게 포기하지 않고, 천 명의 광부와 한 명의 아픈 광부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알버트 홀에서 로시니의 "윌리엄 텔 서곡"을 연주한다. 말을 타고 달리는 듯한 그들의 힘찬 연주를 들을 때 나는 또 바보같이 눈시울을 붉힌다. 물론 이 영화의 여러 가지 사건들이 너무나 우연적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악기를 다시 찾기 위해 내기 당구를 치는 장면에서 매번 지기만 하던 앤디가 완전히 후로끄(주2)로 승리하게 되는 것이나, 알버트 홀에서 그들이 다른 밴드를 제치고 우승자가 되는 것 같은 일들은 현실에서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영화가 우연적인 사건들로 현실의 문제를 덮어버리는 영화는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들이 우승자가 되었을 때, 대니는 당당히 그 우승컵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브라스 밴드보다 더 중요한 것이 탄광의 현실임을 그는 알고 있었고, 우승컵을 거부할 때에 광부들의 비참한 현실이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더 알려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영화가 현실의 문제들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는 점은 영화 곳곳에 등장하는 브라스 밴드의 연주 장면들 속에서 더 잘 나타나 있다. 브라스 밴드가 아름다운 선율로 명곡들을 연주하고 있을 때조차, 영화는 밤샘 협상 중인 노조위원장과 회사 측 사람들의 모습이나 폐광을 막기 위해 노력하는 탄광 사람들의 모습이 병치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brassed on

어쨌든 이 영화는 정말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현실의 심각함을 직시함과 동시에 그 현실을 극복할 새로운 희망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영화는 이완 맥그리거가 <트레인스포팅>으로 뜨지 않았다면 우리나라에 들어오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영화다. 이완 맥그리거의 인기에 편승해서 이 영화는 개봉되었고, 주인공도 이완 맥그리거인 것처럼 선전하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에 주인공은 없다. 대니 역할을 맡았던 피트 포슬쓰웨이트의 연기나 필의 역할을 맡았던 스티븐 톰킨슨의 연기가 나에게는 더 인상적이었다. 이완 맥그리거는 그런 광부들 중에 하나로 등장할 뿐이었다. 주인공이 없지만, 모두가 주인공인 이런 멋진 영화를 또 다시 볼 수 있을지 궁금하다. 아무튼 이 영화의 말미에서 브라스 밴드는 다시 꿈꾸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연주하기 시작했다. 힘든 상황 속에서도 다시 연주를 하리라는 꿈을 꾸는 것, 그것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최소한의 것을 보장해 달라는 진지한 요구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아! 아직도 내 귓가에는 "대니 보이"의 처량한 듯 애절한 선율과 "윌리엄 텔 서곡"의 활기찬 선율이 들려오는 듯하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제발 우리 밴드하게 해주세요. 네?"




(주1) brassed off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았더니 "진절머리가 나다"라는 뜻이 있었다. 나는 이 제목을 보수당 정권의 탄광정책으로 인한 피해에 진절머리가 난다는 것으로 내 맘대로 이해했다.

(주2) 실력이 아니라 재수로 공을 맞힐 수 있게 되었을 때 쓰는 당구 전문 용어다. 이럴 땐 다른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 예의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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