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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원,<학교의 탄생>, 휴머니스트
    김지씨
  3. 2005/07/11
    최명익의 <무성격자>에서
    김지씨

2005. 7. 14

 

2005. 7. 14


최명익, 「심문(心紋)」


전향소설이라는 분류를 난 썩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과거의 정열이 사그라든 자리에서 음험하게 피어난 소설들이 포함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과거에 피어오르던 그 정열이 자기의 것이 아니라 해바라기처럼 현해탄만을 바라보던 자들이 들고 온 ‘타인의 정열’이었다는 점에서, 또한 현해탄 해바라기들의 참담한 현실 투항기를 묶은 ‘전향소설’이라는 개념 역시 현해탄을 건너온 것이라는 점에서 그러한 분류를 좋아할 수가 없다. 물론 1930년대 말의 상황은 군사정권과도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잔혹했기에 쉽게 그들의 좌절감을 폄하하기는 어렵지만, 그 시기에 쏟아져 나온 이러한 소설들을 굳이 분류해가며 주목한다는 것이 썩 내키는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러한 소설들이 가진 미덕이 없지는 않다.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겉멋에 죽고 살던 글쟁이들이, 이제는 아무도 지켜봐주는 사람이 없을 지도 모른다는 암울한 전망 속에서 조용히 자신의 이야기들을 비교적 진솔하게 털어놓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전에 읽었던 김남천의 「녹성당」도 그런 느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제 세계가 아니라 자기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했다고 할까?


최명익의 「심문」또한 위의 분류에 포함될 수도 있는 소설이라고 생각된다. 과거에는 급진적인 사상을 선도적으로 이끌어 갔지만, 결국에는 아편중독자로 타락해버린 현혁이라는 인물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현혁, 여옥과 같은 인물들에 대한 세밀한 내면 묘사를 통해 전향소설의 장점들을 잘 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소설의 커다란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얼핏 들어 최명익의 소설들이 비교적 치밀한 내면 묘사가 소설가적 특징이자 장점이라 알고 있다. 이것은 아마 이 소설을 두고 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p.s 1) 이 소설에서 재밌게 보았던 부분이 있다. 가장 첫 부분에 시속 50km로 달리는 기차 안에서 맹렬한 속도 감각을 느꼈다는 부분이다. 모던한 감각의 소유자인 최명익이 당시에는 가장 모던한 사물인 기차를 경험하고, 그 느낌을 서술한 이 부분은 바로 그를 모더니스트라 불리게 한다. 하지만 지금 시속 50km의 속력을 가진 기차는 더 이상 모던한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복고적 향수의 대상이 되고만다. 이 부분을 보면서 모던한 감각을 추구한다는 것은 동시대적인 감각을 추구한다는 것이며, 이것은 곧 그 빛을 쉽게 잃어버리는 숙명을 타고 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p.s 2) 그 당시 만주에서는 아편을 쉽게 구할 수 있었나 보다. 돈만 있으면 구할 수 있었던 것 같아 보인다. 아편 전쟁의 나라인 중국이나 아편이 상용화되어 있을 법 한가? 그런데 어두침침한 여옥의 방에서 담배에 아편가루를 찍어 피우는 한 남자의 고백을 듣고 있는 장면은 영화로 따지면 느와르에 속할 법하다. 이건 지금도 충분히 모던한 장면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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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원,<학교의 탄생>, 휴머니스트

 

이승원, 『학교의 탄생』, 휴머니스트, 2005


쉽게 쓰여진 책. 물론 이 책에 담긴 수많은 문헌을 읽어내고, 그 의미를 “학교”라는 테두리 안에 묶어낸 것은 인정할 만한 노력이다. 하지만 개별 사건들의 나열로 개화기를 묘사하는데 그치고 있다는 점에서 별다른 새로운 인식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학교에 가는 길부터 시작해서 졸업식까지를 하나의 큰 틀로 삼아 학교 안팎으로 벌어지는 사건들을 엮어보려한 시도는 인정할만 하지만, 결국 개화기의 여러 가지 현상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기만 하고 수렴된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 넓게 조사하긴했지만 깊이 탐구하는 자세가 부족하다고나 할까? 참신성이나 책 전체를 응집성으로만 따지자면 김진송,『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현실문화연구)가 훨씬 낫다고 하겠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부분이 그러했다.


100년 전만 해도 일정한 나이가 되면 누구나 술과 담배를 즐겼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한 금기인 ‘19세 이하 금지’ 혹은 ‘미성년자 금지’ 또는 ‘청소년보호법’이 당시에는 없었다. 단지 과하게 하지 말라는 정도였다. 왜 19세 이상을 성인이라고 하고, 그 이하를 미성년자라고 하여 이해할 수도 없는 금기사항을 만들어놓았는지는 ‘일부’ 도덕적․윤리적으로 투명한 어르신들만이 알 일이다. 그분들이 보기에 19세 이하는 계몽되지 않은 ‘미성년’, 계몽해야 할 ‘미성년’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경쾌한 필치가 글 읽기를 수월케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경쾌한 필치 뒤에 숨는 탁 쏘는 맛이 별로 없다. 어쩌면 억지로 발랄을 가장하는 아저씨를 보는 느낌이랄까. 위의 부분만 하더라도 ‘19세’라는 경계선에 얽힌 더 많은 이야기들이 나와야 할 법한데, ‘일부 도덕적, 윤리적으로 투명한 어르신’이라는 표현에서 보이는 거리두기에 가까운 빈정댐으로 넘어가고 만다. 과거에 읽었던 닐 포스트만, 『유년기의 종말』(분도) 만 하더라도 유년기에 관련된 문헌들을 살피면서 미디어의 변천으로 인한 유년기의 종말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를 진지하게 전달하고 있다. 반면에 『학교의 탄생』은 제목에서 느낄 수 있는 계보학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개념적인 설명으로 여러 사건들을 종합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감시와 처벌』에서 따온 규율된 신체라는 개념만으로 개화기의 사건들을 뭉뚱그려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약 3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을 읽는데 단 3시간이 걸렸다면 내 독법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읽고도 이 책의 흐름을 읽어낼 수 있었기에 이 책 자체가 가진 문제도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와 비슷한 구성의 책을 몇 권 읽은 체험으로 인해, 그리고 일제시대 소설을 비교적 많이 읽었던 체험으로 인해 이 책이 평이하게 다가왔을 수도 있지만...책을 읽고나서 받은 무언가 허전한 느낌으로 인해 이름도 비슷한 필립 아리에스,『아동의 탄생』(새물결)을 주문하고 말았다. 요즘 돈도 없는데 월급 탓다는 배짱으로 책에 돈을 너무 많이 쓰나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쉽게 개화기의 상황들을 이해할 수 있었던 이유가 단지 개인적 독서체험에서만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도 그때 발생되었던 여러 가지 제도와 습속에 익숙하기 때문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그때 난 말할 수 없는 씁쓸함을 느꼈다. 책을 읽고 있을 때 같이 일하는 조교가 책의 표지를 보며 표지에 나와있는 체조의 동작이 도수체조와 똑같다며 신기해할 때 내 기분은 어땠겠는가. 이 책의 의미를 최대한 부여해본다면 나에게 이 정도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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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익의 <무성격자>에서

읽다가 섬뜩한 느낌이 들어 옮긴다. 어쩜 요즘 나랑 이렇게 비슷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 정말 놀랄 따름이다. 70년의 시간격차 따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취하였던 이튿날 겨우 일과를 치르고 나서는 혼탁한 머리와 떨리는 다리로 번잡한 거리를 망령과 같이 방황하는 것이었다. 방황하던 길에 혹시 서점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그것은 학생 생활의 습관 중에 오직 남은 한 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 습관은 회구적 감상으로 물들여진 것이다. 연구의 체계와 독서의 플랜을 흩트려버린 지 오랜 지금은 전과 같이 어떤 필요한 책을 찾으러 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망연히 들어선 시선은 높고 넓은 서가에 비즛이 들어찬 책 뒤 등에 클래식한 명조체의 활자와 금시에 먹물이 들을 듯이 새로운 감각의 육필 문자 위를 흘러 지나갈 뿐이다.

 

그같이 막연한 시간에 혹시 그전에 존경하고 사랑하던 반가운 사람이 신장한 전집이 보이면 한때 매혹하였던 계집의 체온 같은 감각적 회상을 느끼기도 하였다. 혹시 전에 본 문헌에서 저자의 이름만을 기억하던 신간을 뽑아들고 목차를 내려보기도 하였으나 자기와 그 책 사이를 이어가기에는 너무나 큰 미싱 링크가 있음을 발견할 뿐이었다. 그 책을 다시 제자리에 채우고 서가를 쳐다볼 때에는 술에 불은 지방 덩어리인 몸으로는 아무리 부딪쳐도 도저히 무너트릴 수 없는 장벽을 대한 듯이 답답함을 느꼈다.

 

그러나 한 걸음 물러서서 다시 바라보는 서가는 땀과 피의 입체인 피라미드나 만리장성의 위관을 보는 듯한 숭엄함과 기쁨을 느끼기도 하였다. 그리고 자기도 이 문화탑에 한 돌을 쌓아보겠다는 야심을 가졌던 것이 먼 옛날 일같이 회상되었다. 그러한 전날의 야심은 한 순간 찬란한 빛으로 밤하늘에 금 그었던 별불같이 사라지고만 듯하였다. 밤하늘에 금빛으로 그려졌던 별의 흐른 자취가 사라지면 우리의 눈은 그 자리에 검은 선을 보게 되고 그 검은 선마저 사라지면 부지중 한숨을 짓게 되는 것이다.

 

 

그저께 동네 서점에 들러 슬라보예 지젝의 신간들이 쏟아져 나온 것을 발견하고 한숨지었을 때 내 심정이 바로 이 느낌이다. 한때 지젝의 책들을 꼼꼼하게 따라 읽어보겠다고 거창하게 맘먹은 적이 있었으나, 지금은 단 한권의 책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다. 이 술에 불은 지방 덩어리인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나... 가끔 들르는 서점 또한 사치스런 습관에 불과한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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