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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익의 <무성격자>에서

읽다가 섬뜩한 느낌이 들어 옮긴다. 어쩜 요즘 나랑 이렇게 비슷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 정말 놀랄 따름이다. 70년의 시간격차 따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취하였던 이튿날 겨우 일과를 치르고 나서는 혼탁한 머리와 떨리는 다리로 번잡한 거리를 망령과 같이 방황하는 것이었다. 방황하던 길에 혹시 서점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그것은 학생 생활의 습관 중에 오직 남은 한 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 습관은 회구적 감상으로 물들여진 것이다. 연구의 체계와 독서의 플랜을 흩트려버린 지 오랜 지금은 전과 같이 어떤 필요한 책을 찾으러 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망연히 들어선 시선은 높고 넓은 서가에 비즛이 들어찬 책 뒤 등에 클래식한 명조체의 활자와 금시에 먹물이 들을 듯이 새로운 감각의 육필 문자 위를 흘러 지나갈 뿐이다.

 

그같이 막연한 시간에 혹시 그전에 존경하고 사랑하던 반가운 사람이 신장한 전집이 보이면 한때 매혹하였던 계집의 체온 같은 감각적 회상을 느끼기도 하였다. 혹시 전에 본 문헌에서 저자의 이름만을 기억하던 신간을 뽑아들고 목차를 내려보기도 하였으나 자기와 그 책 사이를 이어가기에는 너무나 큰 미싱 링크가 있음을 발견할 뿐이었다. 그 책을 다시 제자리에 채우고 서가를 쳐다볼 때에는 술에 불은 지방 덩어리인 몸으로는 아무리 부딪쳐도 도저히 무너트릴 수 없는 장벽을 대한 듯이 답답함을 느꼈다.

 

그러나 한 걸음 물러서서 다시 바라보는 서가는 땀과 피의 입체인 피라미드나 만리장성의 위관을 보는 듯한 숭엄함과 기쁨을 느끼기도 하였다. 그리고 자기도 이 문화탑에 한 돌을 쌓아보겠다는 야심을 가졌던 것이 먼 옛날 일같이 회상되었다. 그러한 전날의 야심은 한 순간 찬란한 빛으로 밤하늘에 금 그었던 별불같이 사라지고만 듯하였다. 밤하늘에 금빛으로 그려졌던 별의 흐른 자취가 사라지면 우리의 눈은 그 자리에 검은 선을 보게 되고 그 검은 선마저 사라지면 부지중 한숨을 짓게 되는 것이다.

 

 

그저께 동네 서점에 들러 슬라보예 지젝의 신간들이 쏟아져 나온 것을 발견하고 한숨지었을 때 내 심정이 바로 이 느낌이다. 한때 지젝의 책들을 꼼꼼하게 따라 읽어보겠다고 거창하게 맘먹은 적이 있었으나, 지금은 단 한권의 책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다. 이 술에 불은 지방 덩어리인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나... 가끔 들르는 서점 또한 사치스런 습관에 불과한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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