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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슬롭스키 <십계 9>

Dekalog 9


한 남자가 성적불능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전에 그 남자는 아내 외에도 많은 여자들과 성관계를 가졌던 남자였다. 그는 의사라는 사회적인 신분과 함께 남성으로서 성적인 자신감 또한 가지고 있었다. 한 순간에 그 모든 성관계들이 불가능한 것이 되었음을 깨달았을 때, 그는 절망감에 빠졌다. 게다가 그의 부인은 너무나 젊고 아름다웠기에 그의 고통은 더욱 컸다. kieslowski는 이와 같은 비정상적인 상황에 빠진 부부의 이야기를 Dekalog(십계)의 아홉 번째 이야기의 소재로 다루었다.


성적 불능자가 된 남자의 고뇌는 영화 속에서 자전거 타는 장면으로 잘 나타난다. 자전거를 타고 울퉁불퉁한 길을 달리는 행위는 불능상태에 빠진 자신의 성기를 자학적으로 자극하는 행위이다. 요철이 심한 길을 달리는 자전거를 그것도 엉덩이가 잘 보이도록 뒤에서 포착한 장면은 그가 느끼고 있는 고통을 더욱 부각시킨다.

 

성적 불능자가 된 주인공 로만은 결국 자신의 상태를 아내에게 고백하게 되는데, 아내인 한야는 로만에게 육체적인 관계만이 사랑의 방법이 아니라고, 즉 사랑은 다리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로만이 과거처럼 정상적으로 성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면, 그런 말에 수긍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도 수많은 여자들과 관계를 가진 바가 있었으며, 그렇다고 해서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그는 성적 장애로 인해 이미 자신의 자존감을 상실해 버렸으며, 그로 인해 아내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다.

 

자존감을 상실한 인간은 타인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의존심에 사로잡히게 마련이다. 스스로 설 수 없는 인간은 타인들에게서 버림받는다는 느낌에 민감하다. 타인이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들이 자기를 버릴 것이라는 생각은 그를 견딜 수 없게 만든다. 이런 상황은 그의 의심을 더욱 부추긴다.

 

'의심'이라는 것을 좋게 말하면 일종의 호기심으로 볼 수도 있다. 한 인간이 타자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것이 호기심이기에 끊임없이 타인의 삶에 대해 상상해보는 의심도 호기심의 일종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의심'이라고 말할 때는 호기심과는 조금 다른 맥락을 가진다. 의심은 타인에 대해 객관적인 인식을 견지하려고 하는 노력이 아니다. 의심은 타인에 대해 비관적인 상상을 거듭하는 것을 의미하며, 결과적으로 의심하는 주체를 절망적인 심리상태로 몰아간다. 

 

결국 의심에 가득 찬 로만은 비극적인 상상에 사로잡히며, 자신의 의심을 끊임없이 확인하고자 한다. 의심을 확인하는 방법은 한야의 삶에 대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개입하는 것이다. 로만은 한야에 대해 끈질기다고 생각될 정도로 의심하며, 의심하면서도 그녀의 내면을 확인하지 못해서 괴로워한다. 그 의심을 실제로 확인하려고 할 때마다 영화는 계속해서 열리는 글러브박스(자동차 계기판에 붙어있는 물건 넣는 장소)를 비춘다. 입을 벌린 채, 컴컴한 공간을 드러내고 있는 글러브박스의 모습은 로만에게 닫혀있는 한야의 내면에 대한 비유가 아닐까.

 

사랑하는 두 연인이 아무리 가깝다고 하더라도, 서로를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자신의 내면조차도 완벽히 알 수 없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내면까지 완전히 알 수 있단 말인가. 연인들의 욕망은 상징계의 그물이 절대로 건져낼 수 없는 상상계의 바닷물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적불능상태에 빠져버린 로만은 의심에 사로잡혀 이전까지의 아내와 자신이 누려오던 적절한 삶의 균형감각을 모두 잃어버렸다. 물론 그의 의심은 외면적으로는 정당하다. 아내인 한야는 젊은 마리우스라는 남자와 불륜의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로만이 도청까지 동원하여 한야의 불륜을 확인하는 순간, 그는 아내가 자신을 버렸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그들의 관계가 명확해지는 것일까? 아니다. 그 순간부터 서로의 관계는 더 복잡해진다. 상식적으로 불륜을 저지른 여자에 대해서 그 여자는 이미 남편에 대한 애정이 식은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냥 상식일 뿐이다. 상식은 개별적인 상황의 이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로만과 한야의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한야의 애정이 이미 식어서, 로만을 버린 것일까? 그것은 한야의 심리상태에 대한 정당한 이해가 아니다. 어설픈 상식에 근거한 섣부른 판단에 불과하며, 의심에 가득 차 있는 로만이 '상상'하는 한야의 반영에 불과하다. 한야는 여전히 로만을 사랑하고 있었다. 단지 한야가 잘못한 것은 로만이 자신의 성기능 장애로 인해 삶에 대한 태도가 변화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점이다.

불륜을 저지른 사람이 아니라, 불륜을 목격하려고 즉, 타인의 삶에 극적으로 개입하려고 한 이에게 잘못이 있다는 인식은 로만이 장롱 속에 숨어서 아내의 불륜을 훔쳐보는 장면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카메라는 장롱 속에 숨어있는 로만의 시점에서 장롱 틈으로 한야와 그의 젊은 애인인 마리우스를 비춘다. 로만은 그 속에서 아내와 젊은 애인의 이별 장면을 확인한다. 그러다가 결국 그는 한야에게 들키게 되는데, 로만이 한야에게 발각되는 장면은 보는 이로 하여금 조마조마함과 공포를 유발한다. 로만의 시점으로 카메라가 비추고 있는 상태에서, 그 시야 안으로 한야가 성큼성큼 다가오면서 점점 커지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있는 사람은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는 한야의 시선에 의해 공포에 사로잡힌다.

 

kieslowski가 이 장면에서 이런 식으로 공포감을 유발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한야와 로만 사이의 전도된 관계를 폭로하기 위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공포감을 유발시킨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장면은 로만에 의해 한야의 은밀한 관계가 폭로되는 장면이 아니라, 한야에 의해 로만의 은밀한 관찰이 밝혀지는 장면이다. 전통적인 도덕과 근본적인 윤리의 차원에서 말해본다면, 이 장면에서 도덕적인 우위에 있는 자는 로만일지 모르지만, 윤리적인 우위에 서 있는 자는 한야이다. 즉 로만의 의심으로 인한 무리한 개입은 윤리적인 차원에서는 악에 가깝다.

이처럼 kieslowski가 십계의 아홉 번째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에 대한 상투적인 재확인이 아니다. kieslowski는 타인의 삶에 깊이 개입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경고한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하며,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며, 오류일 가능성이 크다. 대부분의 경우 타인에 대한 지나친 의심은 자신이 주체적으로 서지 못했을 때 발생한다. 이런 의심들은 부정적인 방식으로 해결되기 마련이며, 결국은 자기 자신의 삶을 파괴한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로만이 자전거 사고로 큰 부상을 당하는 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한야는 불륜을 반성하고 있으며, 그들의 관계를 계속해서 의심하고 있는 로만을 위해 양자를 들여서라도 안정을 찾고자 했다. 아이는 그들의 관계를 사회적으로 견고하게 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로만은 의심을 버리지 않고 있었으며, 그 의심은 한야의 불륜상대였던 마리우스의 경솔한 행동으로 인해 또 다시 확신으로 바뀐다. 그래서 그는 또 다시 자신의 불능상태를 학대하며, 자전거를 타고 높은 도로 난간에서 떨어져서 크게 다치게 된다. 즉 로만은 여전히 오해를 하고 있을 뿐이다. 오해는 그렇게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어쩌면 이제 오해만이 그를 지탱하는 힘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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