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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세르크를 다시 읽다.

Berserk 일거다. 나는 독어를 잘 모르지만, 아마도 "미친 전사"라는 뜻으로 알고 있다. 말 그대로 이 만화의 주인공 가츠는 미친 놈이다.

 

그의 주변을 밤만되면 몰려드는, 그것도 짙은 피 냄새를 맡고 달려드는 악령들을 상대로 그는 광기어린 싸움을 벌인다. 자기 키보다 더 큰 무지막지한 칼을 들고 말이다. 악령들과 싸우는 그의 모습은 차라리 악마와 같다고 말하고 싶다. 그 정도로 그는 미친듯이 싸운다. 싸움 앞에서 어설픈 인도주의는 없다. 주위의 모든 것을 적으로 돌리며, 아무런 이해도 바라지 않고 그는 계속해서 싸운다. 그 싸움은 매일 밤 계속된다. 그가 살아 있는 한 그 싸움은 계속될 것이다.

 

그런 싸움을 견딜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두 가지, 악령이 되어버린, 그것도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한 악령이 되어버린 친구, 그리피스에 대한 애증과 그런 악령들에 의해 엄청난 상처를 입어버린 그의 여자친구, 캐스커에 대한 사랑이 그를 겨우 지탱하게 하는 힘이 될 뿐이다.

 

가츠가 친구인 그리피스를 증오하는 것은 권력을 향해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서려던 그리피스의 의지와 열정이, 그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가 파멸되던 순간 거대한 악으로 변질되어 버린 것에 대한 실망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그 변질은 어떤 의미에서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그리피스의 파멸은 철저했다. 온 몸의 모든 껍질을 벗겨내고, 모든 힘줄을 잘리며 혀까지 잘라내는 엄청난 고문을 겪으며 어떻게 그는 생의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그 순간 찾아온 악령을 그는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가츠의 내면에는 일종의 열등감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숨길 수는 없다. 가츠는 언제나 그리피스의 이인자였다. 그 스스로는 이인자로 만족했지만, 캐스커라는 여인을 사이에 두고 그 둘은 갈등을 빚어낸다. 그리피스는 그를 사랑하는 캐스커를 두고 왕의 딸을 사랑하다가 결국, 비참한 고문을 받는다. 캐스커는 그 과정에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겪는다. 그것을 곁에서 지켜본 가츠의 마음은 어떠할까?

 

그런 열등의식은 그리피스에 대한 일종의 애증을 낳게 했다. 그를 흠모하면서도 증오하는 마음, 그 마음은 그리피스의 악령들과 그를 구별짓게 하며 그 끝나지 않을 싸움을 지속시키는 힘이 된다. 어쩌면 가츠의 내면이 싸움 자체에 대한 욕망으로만 가득차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행위 자체를 목적으로 하기에 그는 순수한가?와 같은 질문.

 

이 만화를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우리 마음 속에도 우리 자신을 악령으로 이끌 어떤 증오나 죄악이 자리잡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가츠가 싸우고 있는 수 많은 악령들은 다른 외계에서 온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 발 딛고 있는 이 지구상에서 삶에 견디어 내지 못하고 자신 속의 증오와 욕망에 스스로 파묻힌 사람들이 결국에는 악령이 된다.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파우스트처럼 말이다. 나는 이 만화의 장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수 많은 환타지 만화들이 악마나 유령들을 주어진 것, 다른 어딘가에서 온 괴물로 묘사하고, 그것들을 퇴치하는데에만 목적을 두고 있는 것으로 그린다. 다른 곳에서 온 것이기에 그것은 퇴치가 가능하다.

 

그러나 베르세르크의 악령은 우리 안의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없앨 수 없는 것이다. 끊임없는 내면의 싸움만이 그것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가츠가 사도들과 싸울 때는 언제나 배경과 등장인물들이 엉켜 하나도 분리되지 않은 채로 그려진다. 이와 같은 묘사 방식은 바로 가츠의 내면과 외부의 적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로 혼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싸울 때마다 그는 항상 악마가 되느냐, 그 속에서 벗어날 것인가의 혼란 속에 놓인다.

 

이런 점에서 난 <기생수>도 좋아한다. <기생수> 또한 자신의 몸 속으로 들어온 미지의 생물과 순간순간 대결을 벌이기 때문이다. <기생수>의 주인공은 자기 몸 속에 들어온 외계의 생물에 의해 빚어진 잔혹한 운명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지만 그 생물이 자신에게 준 능력에 조금씩 적응하면서 거기에 동화된다. 거부와 동화의 미묘한 줄다리기로 인해 난 늘 <기생수>에서 긴장감에 빠져들곤 한다.  

 

 <기생수>의 외계 생물에게 있어서 주인공은 기생하기 위한 있는 숙주이기 때문에 주인공의 생존 자체가 외계 생물의 존재근거가 된다. 하지만 <베르세르크>는 자신의 내면 속에 잠들어 있는 악마에게 만약 먹힌다면 자기 자신의 파멸로 직결된다. 그렇기에 매일매일 그는 홀로 운명을 결정짓는 싸움을 벌인다. 둘이서 싸우는 <기생수>와 홀로 싸우는 <베르세르크>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요즘은 이 외로운 싸움을 돕기 위해 인과의 끈으로 맺어진 마녀 시르케가 나타나 덜 외로워졌지만... 

 

이 만화가 중세를 배경으로 하다보니, 맹목적인 신앙에 대한 비판도 읽어낼 수 있다. 마녀 시르케나 화형 속에서 욕망을 보는 기사단장 이야기 속에서 이러한 측면은 두드러진다. 하지만 몇 장 넘기지 않아도 하늘 가득 뒤덮은 악령들을 볼 수 있는 이 만화를 읽다보면 신앙에 대한 의심이 생기는 건 당연하다. 시공간을 지배하는 악령들이 등장인물들 위에 군림하는 장면을 볼 때, 절망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을 상상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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