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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11/20
    키에슬롭스키 <십계 9>
    김지씨
  2. 2005/08/22
    브레스트 오프를 보다(2)
    김지씨
  3. 2005/08/22
    <즐거운 편지>를 읽다.
    김지씨
  4. 2005/01/30
    갈등이론의 전개(2)
    김지씨
  5. 2005/01/08
    가족이야기(1)
    김지씨
  6. 2005/01/08
    도서관을 독서실로 착각하는 당신에게
    김지씨

키에슬롭스키 <십계 9>

Dekalog 9


한 남자가 성적불능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전에 그 남자는 아내 외에도 많은 여자들과 성관계를 가졌던 남자였다. 그는 의사라는 사회적인 신분과 함께 남성으로서 성적인 자신감 또한 가지고 있었다. 한 순간에 그 모든 성관계들이 불가능한 것이 되었음을 깨달았을 때, 그는 절망감에 빠졌다. 게다가 그의 부인은 너무나 젊고 아름다웠기에 그의 고통은 더욱 컸다. kieslowski는 이와 같은 비정상적인 상황에 빠진 부부의 이야기를 Dekalog(십계)의 아홉 번째 이야기의 소재로 다루었다.


성적 불능자가 된 남자의 고뇌는 영화 속에서 자전거 타는 장면으로 잘 나타난다. 자전거를 타고 울퉁불퉁한 길을 달리는 행위는 불능상태에 빠진 자신의 성기를 자학적으로 자극하는 행위이다. 요철이 심한 길을 달리는 자전거를 그것도 엉덩이가 잘 보이도록 뒤에서 포착한 장면은 그가 느끼고 있는 고통을 더욱 부각시킨다.

 

성적 불능자가 된 주인공 로만은 결국 자신의 상태를 아내에게 고백하게 되는데, 아내인 한야는 로만에게 육체적인 관계만이 사랑의 방법이 아니라고, 즉 사랑은 다리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로만이 과거처럼 정상적으로 성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면, 그런 말에 수긍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도 수많은 여자들과 관계를 가진 바가 있었으며, 그렇다고 해서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그는 성적 장애로 인해 이미 자신의 자존감을 상실해 버렸으며, 그로 인해 아내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다.

 

자존감을 상실한 인간은 타인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의존심에 사로잡히게 마련이다. 스스로 설 수 없는 인간은 타인들에게서 버림받는다는 느낌에 민감하다. 타인이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들이 자기를 버릴 것이라는 생각은 그를 견딜 수 없게 만든다. 이런 상황은 그의 의심을 더욱 부추긴다.

 

'의심'이라는 것을 좋게 말하면 일종의 호기심으로 볼 수도 있다. 한 인간이 타자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것이 호기심이기에 끊임없이 타인의 삶에 대해 상상해보는 의심도 호기심의 일종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의심'이라고 말할 때는 호기심과는 조금 다른 맥락을 가진다. 의심은 타인에 대해 객관적인 인식을 견지하려고 하는 노력이 아니다. 의심은 타인에 대해 비관적인 상상을 거듭하는 것을 의미하며, 결과적으로 의심하는 주체를 절망적인 심리상태로 몰아간다. 

 

결국 의심에 가득 찬 로만은 비극적인 상상에 사로잡히며, 자신의 의심을 끊임없이 확인하고자 한다. 의심을 확인하는 방법은 한야의 삶에 대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개입하는 것이다. 로만은 한야에 대해 끈질기다고 생각될 정도로 의심하며, 의심하면서도 그녀의 내면을 확인하지 못해서 괴로워한다. 그 의심을 실제로 확인하려고 할 때마다 영화는 계속해서 열리는 글러브박스(자동차 계기판에 붙어있는 물건 넣는 장소)를 비춘다. 입을 벌린 채, 컴컴한 공간을 드러내고 있는 글러브박스의 모습은 로만에게 닫혀있는 한야의 내면에 대한 비유가 아닐까.

 

사랑하는 두 연인이 아무리 가깝다고 하더라도, 서로를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자신의 내면조차도 완벽히 알 수 없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내면까지 완전히 알 수 있단 말인가. 연인들의 욕망은 상징계의 그물이 절대로 건져낼 수 없는 상상계의 바닷물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적불능상태에 빠져버린 로만은 의심에 사로잡혀 이전까지의 아내와 자신이 누려오던 적절한 삶의 균형감각을 모두 잃어버렸다. 물론 그의 의심은 외면적으로는 정당하다. 아내인 한야는 젊은 마리우스라는 남자와 불륜의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로만이 도청까지 동원하여 한야의 불륜을 확인하는 순간, 그는 아내가 자신을 버렸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그들의 관계가 명확해지는 것일까? 아니다. 그 순간부터 서로의 관계는 더 복잡해진다. 상식적으로 불륜을 저지른 여자에 대해서 그 여자는 이미 남편에 대한 애정이 식은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냥 상식일 뿐이다. 상식은 개별적인 상황의 이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로만과 한야의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한야의 애정이 이미 식어서, 로만을 버린 것일까? 그것은 한야의 심리상태에 대한 정당한 이해가 아니다. 어설픈 상식에 근거한 섣부른 판단에 불과하며, 의심에 가득 차 있는 로만이 '상상'하는 한야의 반영에 불과하다. 한야는 여전히 로만을 사랑하고 있었다. 단지 한야가 잘못한 것은 로만이 자신의 성기능 장애로 인해 삶에 대한 태도가 변화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점이다.

불륜을 저지른 사람이 아니라, 불륜을 목격하려고 즉, 타인의 삶에 극적으로 개입하려고 한 이에게 잘못이 있다는 인식은 로만이 장롱 속에 숨어서 아내의 불륜을 훔쳐보는 장면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카메라는 장롱 속에 숨어있는 로만의 시점에서 장롱 틈으로 한야와 그의 젊은 애인인 마리우스를 비춘다. 로만은 그 속에서 아내와 젊은 애인의 이별 장면을 확인한다. 그러다가 결국 그는 한야에게 들키게 되는데, 로만이 한야에게 발각되는 장면은 보는 이로 하여금 조마조마함과 공포를 유발한다. 로만의 시점으로 카메라가 비추고 있는 상태에서, 그 시야 안으로 한야가 성큼성큼 다가오면서 점점 커지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있는 사람은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는 한야의 시선에 의해 공포에 사로잡힌다.

 

kieslowski가 이 장면에서 이런 식으로 공포감을 유발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한야와 로만 사이의 전도된 관계를 폭로하기 위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공포감을 유발시킨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장면은 로만에 의해 한야의 은밀한 관계가 폭로되는 장면이 아니라, 한야에 의해 로만의 은밀한 관찰이 밝혀지는 장면이다. 전통적인 도덕과 근본적인 윤리의 차원에서 말해본다면, 이 장면에서 도덕적인 우위에 있는 자는 로만일지 모르지만, 윤리적인 우위에 서 있는 자는 한야이다. 즉 로만의 의심으로 인한 무리한 개입은 윤리적인 차원에서는 악에 가깝다.

이처럼 kieslowski가 십계의 아홉 번째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에 대한 상투적인 재확인이 아니다. kieslowski는 타인의 삶에 깊이 개입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경고한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하며,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며, 오류일 가능성이 크다. 대부분의 경우 타인에 대한 지나친 의심은 자신이 주체적으로 서지 못했을 때 발생한다. 이런 의심들은 부정적인 방식으로 해결되기 마련이며, 결국은 자기 자신의 삶을 파괴한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로만이 자전거 사고로 큰 부상을 당하는 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한야는 불륜을 반성하고 있으며, 그들의 관계를 계속해서 의심하고 있는 로만을 위해 양자를 들여서라도 안정을 찾고자 했다. 아이는 그들의 관계를 사회적으로 견고하게 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로만은 의심을 버리지 않고 있었으며, 그 의심은 한야의 불륜상대였던 마리우스의 경솔한 행동으로 인해 또 다시 확신으로 바뀐다. 그래서 그는 또 다시 자신의 불능상태를 학대하며, 자전거를 타고 높은 도로 난간에서 떨어져서 크게 다치게 된다. 즉 로만은 여전히 오해를 하고 있을 뿐이다. 오해는 그렇게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어쩌면 이제 오해만이 그를 지탱하는 힘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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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스트 오프를 보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나도 똑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느니 새로운 영화를 또 한 편 보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아무리 좋은 영화라고 해도, 내용 다 아는 영화를 두 번씩이나 본다는 것은 시간낭비가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얼마나 어이없는 생각인가를 깨달은 것은 소설 비평을 한답시고 소설을 들추어보기 시작하면서부터다. 한 소설을 첫 번째 읽었을 때와 두 번째 읽었을 때의 차이는 엄청났다. 소설의 경우가 그렇다면 영화도 그렇지 않으라는 법이 없다. 그래서 나는 좋은 영화를 보고 나면 으레 나중에 꼭 한 번 더 보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하루가 멀다하고 쉴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영화들의 물결 속에 떠밀려 살아가는 나에게 감동적으로 본 영화를 느긋하게 다시 감상하는 여유 같은 게 저절로 생길 리는 없었다.

그러다가 작년쯤 집에서 비디오를 들고 오고, 우연치 않게 비디오 테입도 몇 개 샀다. 그래놓고 나니 가끔 심심할 때마다 집에 있는 비디오를 보게 되는데, 텔레비전의 유치함에 질릴 때 구비해 둔 비디오 테입은 나에게 작은 활력소가 되었다. 그렇게 가끔 내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영화들이 몇 편 있는데, 몇 개 손꼽아 보자면, <와호장룡>, <블레이드 러너>, <블루> 등이 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이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브래스트 오프>다. 이 영화를 볼 때마다 내용을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텔레토비처럼 똑같은 장면에서 어김없이 감동하고, 분노하고, 낄낄거린다. 정말 좋은 영화라서 그런가 보다. 몇 번이고 다시 보아도 감동적인 것은 감동적이다.


Coal is History

<브래스트 오프 brassed off>(주1)는 말 그대로 "brass band"가 "off"된 상황을 다루고 있는 영화이다. 보수당 대처 정권의 탄광 합리화정책에 의해서 1984년 이후 140개의 탄광이 폐쇄되었고 그 결과 25만 명이 실직되는 상황에서 그림리 탄광 또한 폐광될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 틈바구니에서 그림리 탄광의 브라스 밴드 역시 탄광과 운명을 같이 할 위기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 수 차례의 파업과 대공황의 여파에도 살아남았던 그림리 탄광의 브라스 밴드는 보수당 정권의 악랄한 탄광 합리화정책에 의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영화 속 대사에서도 나오지만 광부 25만 명이 일자리에서 쫓겨났다는 사실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고래나 물개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보다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이러한 무관심 속에서 광부들은 멸종된 공룡들처럼 자본주의의 어두운 그늘로 사라져 가게 된다. 그림리 탄광을 소유하고 있던 자본가의 입에서 나온 "Coal is History"이란 말은 당시의 상황을 압축적으로 증언하는 말이었다. 탄광 소유자들은 아무리 그 탄광에 경제성이 있다 해도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광부들과 임금협상을 매년 벌이기보다는 차라리 그들을 모두 실업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탄광 소유자의 정신 건강의 측면에서나 자본의 전체 운동의 측면에서나 훨씬 유리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광부들의 일과 미래와 산업을 몇 푼의 돈으로 사려했다. 자본가들의 공세를 버텨낼 수 없었던 광부들은 겉으로는 탄광 폐쇄를 결사반대했지만, 결국 자본가들이 제시하는 금액에 혹해서 80%의 찬성으로 폐광을 결정하게 된다. 광부들의 자존심마저 돈에 팔려가는 순간이었다.


Brass Band is Dream

브라스 밴드 활동을 하는 것보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는 것이 더 중요했던 광부들은 밴드 활동을 더 이상 할 힘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브라스 밴드라는 이름의 꿈을 접으려고 한다. 그런데 현실의 압박에 의해 밴드가 해체되려는 순간 글로리아 멀린즈라는 아름다운 여인이 "토요명화"의 주제가로만 알고 있던 "아랑훼즈 협주곡"과 함께 등장한다. 글로리아는 그림리 탄광 밴드의 전성기를 주도했던 아더 멀린즈의 손녀였으며, 탄광의 경제성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회사의 직원이었다. 그녀의 등장은 탄광의 경제성 조사를 통해 폐광을 막을 수도 있다는 현실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아더 멀린즈의 후광과 함께 밴드의 화려한 전통을 부활시킨다는 차원에서 밴드의 해체를 조금이나마 지연시키는 역할을 담당한다. 그녀로 인해 브라스 밴드 전국대회의 결승전이 열리는 로얄 알버트 홀에까지 가고 싶다는 광부들의 꿈은 조금 더 연장된다.

그들에게 있어서 브라스 밴드는 단순한 취미 생활이 아니었다. 광부들이 길거리로 나앉게 되었다는 냉정한 현실에 대해서 사람들은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었지만, 브라스 밴드의 연주에 대해서만은 귀를 기울여 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그림리 탄광의 브라스 밴드는 노조를 없애고 광부를 쫓아내도 계속 입 다물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광부들의 자존심을 대변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들이 계속해서 꿈꿀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준결승에서 승리하여 알버트 홀이라는 그들의 꿈이 한 발짝 가까워졌을 때, 그들에게는 폐광이라는 절망적인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멀리 보이는 탄광의 기계들을 배경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가던 그림리 탄광밴드의 지휘자이자 정신적 지주인 대니는 탄광의 열악한 노동 상황을 상징하는 "진폐증"으로 쓰러지고 만다. 그들의 꿈이 현실에 의해 결정적으로 꺾이는 순간이었다.


Dannyboy and Pierrot

이 영화를 볼 때마다 내가 어김없이 분노하는 장면이 하나 있다. 대니의 아들인 필이 몇 푼의 돈이라도 벌어보려고 교회에 있는 아이들 앞에서 얼룩덜룩 분장을 한 채 광대짓을 하는 장면이다. 그 때 필은 빚에 쪼들려 가족과도 헤어지고 아버지마저도 쓰러진 자신의 처지가 너무 절망스러워 예수의 상을 보며, 아버지는 데려가려고 하면서 왜 마가렛 대처는 데려가지 않느냐고 울음을 터뜨린다. 그가 입은 광대 옷과 그의 입에서 나온 말들의 부조화는 상황의 비극성을 더욱 고조시킨다. 우스꽝스러운 분장을 한 채, 눈물을 글썽이며 마가렛 대처와 보수당에 대한 저주의 말을 퍼붓는 그의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항상 슬픔과 분노를 동시에 느낄 수밖에 없다. 실직자와 되어 가족과도 떨어져 살아야 하는 최악의 상황속에서 밴드의 꿈마저 사라지게 되었을 때, 삐에로의 복장을 한 채로 탄광의 기계에 목을 매려하는 필의 모습 또한 매번 나를 가슴 아프게 만드는 장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런 슬픔과 분노를 넘어서는 새로운 희망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볼 때마다 내가 어김없이 가슴 뭉클해하는 장면이 하나 있는데, 대니가 진폐증으로 인해 쓰러져서 입원하게 되었을 때, 그 병원 앞마당에 밴드가 다시 모여서 아일랜드 민요인 "대니 보이"를 연주하는 장면이다. 탄광도 문을 닫아 모두가 실직자가 되어 버리고, 대니 또한 탄광의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인해 얻은 병으로 쓰러져버린 최악의 상황에서 그들은 밴드의 유니폼을 입고, 머리에는 랜턴을 단 안전모를 쓰고 하나 둘씩 모여 "대니 보이"를 연주한다. 물론 그 음악 자체도 정말 감동적이지만, 그 "대니 보이"의 가사까지 생각해보면 정말 눈시울이 글썽해질 수밖에 없다. "저 목장에는 여름철이 오고 산골짝마다 눈이 덮혀도 나 항상 오래 여기 살리라 오 대니 보이 오 대니 보이 내 사랑아." 나는 그 장면을 볼 때마다 그들은 비록 현실에서 패배했지만, 브라스 밴드라는 꿈으로 다시 살아나리라는 간절한 희망을 읽어낼 수 있어서 가슴이 뭉클해진다.

내가 감동하는 것은 그 장면 뿐만은 아니다. 폐광이라는 현실 속에서 그들은 쉽게 포기하지 않고, 천 명의 광부와 한 명의 아픈 광부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알버트 홀에서 로시니의 "윌리엄 텔 서곡"을 연주한다. 말을 타고 달리는 듯한 그들의 힘찬 연주를 들을 때 나는 또 바보같이 눈시울을 붉힌다. 물론 이 영화의 여러 가지 사건들이 너무나 우연적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악기를 다시 찾기 위해 내기 당구를 치는 장면에서 매번 지기만 하던 앤디가 완전히 후로끄(주2)로 승리하게 되는 것이나, 알버트 홀에서 그들이 다른 밴드를 제치고 우승자가 되는 것 같은 일들은 현실에서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영화가 우연적인 사건들로 현실의 문제를 덮어버리는 영화는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들이 우승자가 되었을 때, 대니는 당당히 그 우승컵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브라스 밴드보다 더 중요한 것이 탄광의 현실임을 그는 알고 있었고, 우승컵을 거부할 때에 광부들의 비참한 현실이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더 알려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영화가 현실의 문제들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는 점은 영화 곳곳에 등장하는 브라스 밴드의 연주 장면들 속에서 더 잘 나타나 있다. 브라스 밴드가 아름다운 선율로 명곡들을 연주하고 있을 때조차, 영화는 밤샘 협상 중인 노조위원장과 회사 측 사람들의 모습이나 폐광을 막기 위해 노력하는 탄광 사람들의 모습이 병치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brassed on

어쨌든 이 영화는 정말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현실의 심각함을 직시함과 동시에 그 현실을 극복할 새로운 희망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영화는 이완 맥그리거가 <트레인스포팅>으로 뜨지 않았다면 우리나라에 들어오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영화다. 이완 맥그리거의 인기에 편승해서 이 영화는 개봉되었고, 주인공도 이완 맥그리거인 것처럼 선전하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에 주인공은 없다. 대니 역할을 맡았던 피트 포슬쓰웨이트의 연기나 필의 역할을 맡았던 스티븐 톰킨슨의 연기가 나에게는 더 인상적이었다. 이완 맥그리거는 그런 광부들 중에 하나로 등장할 뿐이었다. 주인공이 없지만, 모두가 주인공인 이런 멋진 영화를 또 다시 볼 수 있을지 궁금하다. 아무튼 이 영화의 말미에서 브라스 밴드는 다시 꿈꾸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연주하기 시작했다. 힘든 상황 속에서도 다시 연주를 하리라는 꿈을 꾸는 것, 그것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최소한의 것을 보장해 달라는 진지한 요구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아! 아직도 내 귓가에는 "대니 보이"의 처량한 듯 애절한 선율과 "윌리엄 텔 서곡"의 활기찬 선율이 들려오는 듯하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제발 우리 밴드하게 해주세요. 네?"




(주1) brassed off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았더니 "진절머리가 나다"라는 뜻이 있었다. 나는 이 제목을 보수당 정권의 탄광정책으로 인한 피해에 진절머리가 난다는 것으로 내 맘대로 이해했다.

(주2) 실력이 아니라 재수로 공을 맞힐 수 있게 되었을 때 쓰는 당구 전문 용어다. 이럴 땐 다른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 예의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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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편지>를 읽다.

즐거운 편지

< I >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즐거운 편지"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실린 두 편의 시 중에 나는 첫 번째 시를 지금 읽어보려 한다. 언젠가 우연히 이 시를 읽고 느낀 감동 때문에, 나는 시 <Ⅰ>을 여러 사람들 앞에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는 그저 그런 느낌이었을 뿐이지만, 요즈음 들어 다시 이 시를 만났을 때는, 내가 미처 읽어내지 못했던 의미들이 온몸 전체에 소름끼치도록 떠올라 왔다. 내가 과거에는 왜 그런 의미를 읽어내지 못했는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조금 이상하게 느낄 것으로 믿는다. 읽어보다니... 소리내어 읽는다는 것일까? 솔직히 그러고는 싶다. 하지만 우리는 시를 소리내어 읽어주기에 너무 멀리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내가 '읽는다'라고 말한 것은 '해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해서 내가 이 시에서 읽어낸 의미를 전해주고 싶다는 말이다. 해석이란 참고서의 시분석들이 보여주는 딱딱한 주석달기가 아니라,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를 통해 내 체험을 전달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내가 읽어낸 의미들은 어떤 의미에서 나의 분신과도 같다. 내 분신을 남에게 조심스럽게 보여주기. 그것이 '시읽기'이다. 나는 이제 여러분들 앞에서 불안한 마음으로 시를 읽을 것이다.

시<Ⅰ>의 의미는 그냥 읽었을 때 한 남자의 사랑이야기쯤으로 읽힌다. 하지만 '한 남자의 사랑이야기'라고 쉽사리 말하는 그 말 안에는 그 남자의 수많은 조바심과 걱정, 그리고 기다림이 숨겨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이야기건 쉽사리 단정지어서는 안 될 것 같다. 그렇다면 이 남자의 사랑은 어떨까?

그의 사랑은 '사소하다.' 물론 그는 전신의 힘을 모아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겠지만, 그녀에게 그의 사랑은 해가 지고 바람이 불 듯, 항상 거기있는 그런 배경과 같은 것으로 느껴질 따름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그녀가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사랑이 배경과 같다고 그녀가 느끼는지 그는 알 수 없다. 단지 그가 그의 사랑이 그녀에게 그 정도밖에 안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에 그는 정말로 괴로웠을 것이다. 그의 모든 것을 던진 사랑이 그녀에게 별 것 아닌 배경과 같은 것이라고 여겨진다면 깊은 자괴감에 빠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기다리기로 마음먹은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살면서 가끔씩 배경을 둘러보는 경우가 있다. 평소때는 잘 느끼지 못하지만, 사는게 지치고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 가끔 하늘을 올려다보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이 남자는 그녀에게 있어서 자신의 사랑이 이런 식의 배경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그는 언제가 될 지는 모르지만, 그녀가 '한 없이 괴로움 속을 헤메일 때'까지 자신의 사랑을 지켜가기로 마음먹은 것 같다. 그녀에게 있어서 그의 사랑은 단지 '사소한 것'에 불과하지만, 그 사소함은 '오래된 사소함'이기에 그녀가 괴로움 속에서 그를 부를 때 그는 부드러운 미소로 그녀를 맞이할 것 같다. 그간의 오랜 상처를 천천히 삭여온 그 '오래된 사소함'은 그런 종류의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오래된 사소함.'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이 한 구절을 얻었다는 데서 커다란 만족감을 얻는다. 누군가를 사랑함에 있어서, 이런 '오래된 사소함'을 유지하는 것. 그것이 내가 누군가를 기다릴 수 있는 자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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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이론의 전개

1. 보수주의적 혹은 자유주의적 설명


"학교"라는 사회 기관에 대해 사람들은 과연 어떤 시각을 가졌을까? 초기의 학자들은 학교에 대해 중립적인 환상을 지니고 있었다. 즉 학교는 사회에서의 성공을 위해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보다 특수하게 학생들에게 제공해 주도록 고안된 종합적인 기관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Parsons와 같은 사람들이 이러한 생각을 전개했었다. 이렇게 되면 학교의 역할은 단순한 것이 되고 만다. 과연 학교는 일정기간동안 개인이 사회생활을 하는 데 필요로 하는 지식을 얻고, 기간이 되면 나가는 장소에 불과한 것인가? 그런 기능적인 역할만을 학교가 수행하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 대답을 찾던 이들은 학교라는 거대한 실체의 음습한 그림자를 발견하게 된다. 객관적이라는 환상 속에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던 학교의 담론들이 어떤 특정한 권력관계를 구성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이 비판적인 접근들은 우선 재생산 이론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형성하게 된다.


2. 재생산 이론

 

재생산 이론가들은 학교가 문화적 우수성, 가치 중립적인 지식, 그리고 객관적인 교수양식을 향상시키는 민주적 제도라는 가정을 거부한다. 대신 이 재생산 이론가들은 학교가 자본의 이익을 매개하기 위하여 권력에 의해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재생산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학교가 일정한 생산 관계를 재창출해낸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에 기반한 이론가들은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의 영향 관계 틀에서 학교라는 기관을 바라보려 했다. 상부구조의 일종인 학교의 담론들은 하부구조인 경제적 생산관계에 의해 직접, 간접적으로 결정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즉 교육이론과 실천에서 국가 또는 정치경제의 일차성과 결정적 성격을 강조함으로써, 재생산적 접근은 학교교육에 대한 자유주의적 관점뿐만 아니라 보수주의적 관점이 갖고 있는 중립성과, 사회이동의 역할 이면에 놓여 있는 이데올로기적 전제와 가정을 밝혀 내도록 하는데 의미 있는 역할을 했다. 학교가 일정한 사회관계를 반영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학교라는 기관이 가지는 영향력에 대해서는 상당부분 부각된 셈이다. 이러한 재생산 이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그 하나는 사회재생산이론이며 두 번째는 문화재생산이론이다.


1) 사회재생산 이론
사회재생산이론은, 학교가 자본주의 생산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사회 구성체를 재생산함에 있어서 주된 역할을 담당한다는 개념을 그 핵심적인 주제로 한다.  

① Althusser
상부구조가 하부구조에 의해 결정된다는 마르크스주의의 오랜 명제에 대해 나름대로의 비판점을 제공한 것이 바로 이 Althusser이다. 그는 "상부구조의 상대적 자율성"이라는 말을 하면서 기존의 생산체계와 권력기관의 유지가 단순히 물리력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측면 즉, 강제력의 사용과 이데올로기의 사용에 의존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의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국가기구도 두 가지 종류로 구분된다. 즉 강제력에 의해 통치되는 군대, 경찰, 감옥과 같은 "억압적 국가기구"와 합의를 통해 통치되고 있는 학교, 가정, 법적 구조, 대중 매체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 바로 이것이 그의 이론을 구성하는 주된 두 개의 중심축이다. 따라서 학교의 의미는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라는 맥락 안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는 경제질서의 단순한 반영이라는 마르크스주의적 학교교육 이론이 물러나고, 학교는 경제적 토대와 특정한 관계로 존재하는 그러나 동시에 그들 자신의 특정한 한계와 실천을 갖고 있는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제도"가 되는 것이다. 
그의 이론에서 한 가지 특이할 만한 것은 이 이데올로기의 작용에 관해서다. 우리는 흔히 이데올로기라고 하면 의식적으로 구성되는 신념체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Althusser는 그런 주장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그는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데올로기는 실로 표출체계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 표출체계들은 "의식"과는 관계가 없으며 보통 상상이며 종종 개념들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것은 "의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대다수 사람들에게 부과되는 구조로서이다. 그들은 지각·수용·경험된 문화적 대상물들이며 그것들을 벗어나려는 과정에서 인간에게 기능적으로 작용한다.


번역문이라서 그런지 약간의 어색한 표현이 있기는 하지만 대략의 의미를 짐작해볼 수는 있다. 그가 지금 무어라고 말하고 있는가? 그는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인간을 무의식의 차원에서 구조로서 얽어매고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에게 구조주의자라는 표현이 주어진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학교에 적용된다고 생각해보자. 학생들은 지배 이데올로기의 영향력 하에서 의식을 형성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지배 이데올로기는 수동적으로 동의하게 하지도 않는다. 단지 그것은 학생들의 무의식을 구성하는 의미와 관념의 표출체계로서만 작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학교 현장이 너무나 무서운 곳이 되고 만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아니 아예 모른 채로 지배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어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무언가 그의 이론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너무나 인간을 수동적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다가 그의 이론이 지배 이데올로기에 노예들이 벌이는 지배체제 전복 운동을 설명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이르게 되면 그의 이론에서 뭔가 부족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2) Bowles와 Gintis
Bowles와 Gintis 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학교교육의 역할에 대한 Althusser의 기본개념을 공유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의 과도한 비중 대신에 대응원리(correspondence principle)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사회에서의 관계와 학교의 관계가 서로 대응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 그들의 중심생각이다. 즉 교육에서의 사회관계도 위계적인 노동분업의 형태와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한다. 특히 교육에서의 이러한 구조적인 관계는 단순히 나중에 일하게 될 작업장에서의 규율에만 익숙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작업장에서 필요한 사회적 정체감, 자기 이미지, 인간의 태도 유형들까지 형성시킨다는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이들의 이론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바로 이점인데 그들은 특정한 인성유형을 창출해내는 학교의 역할에 초점을 맞춤으로서 비인지(非認知)적 지배영역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Althusser와 마찬가지로 지배가 어떤 식으로 정교하게 이루어지는 지에 대한 언급만 있을 뿐 저항에 대한 어떠한 단초도 제시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들에 대한 문제제기로 남아 있다.


2) 문화재생산이론
문화재생산이론을 사회재생산이론과 구별하는 이유는 재생산의 대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회재생산이론의 경우 경제적, 물질적 관계를 재생산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비해 이 문화재생산이론가들은 경제적, 물질적 관계가 아니라 "문화"라는 대상의 재생산이 교육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살펴보고자 했다. 즉 학교가 갖는 문화국면의 구조와 전수의 기초가 되는 원리들에 대한 분석, 또는 학교문화가 어떻게 생성되고 선정되며 정당화되는가에 관한 질문에 대한 대답에 그들 연구가 집중되고 있다. 이중에서 Bourdieu와 Bernstein의 연구를 중심으로 살펴볼 수 있다.


① Bourdieu와 그의 동료들
Bourdieu와 그의 동료 Passeron은 학교를 사회의 단순한 반영으로 보는 환원주의적 설명을 거부한다. 학교는 보다 강력한 경제적, 정치적 제도들에 의해 간접적으로 영향받는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제도라고 주장한다. 얼핏 보면 위의 논의들과의 차이를 구별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에게 특별한 것은 학교가 경제적 제도의 단순한 반영이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상징적 제도 안에 포함되는 제도라고 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중요한 개념 중에서"문화자본"이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이 단어를 자세히 살펴보면 지금까지와는 무언가 조금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자본이라는 것이 경제적 관계뿐만 아니라 "문화"라는 관계에서도 창출될 수 있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이론에 의하게 되면 학교라는 곳은 이러한 문화자본들, 즉 상징재를 학생들에게 불평등하게 분배하는 성격을 지니게 된다. 문화자본이라는 것은 그들 가정의 계급적 배경에 의해 상속받는 상이한 언어적·문화적 능력체계이다. 각각의 학생들이 그들의 가정으로부터 상속받은 문화자본들, 혹은 상징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는 다양한 것이 있을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옷을 얼마나 잘입는가"도 하나의 문화자본이 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Bourdieu는 학교와 가정을 연결했다는 공로가 있다. 다음 인용하는 부분은 언어라는 상징재가 학교에서 어떻게 분배되는가에 대해서이다.


사회언어학의 법칙 가운데 하나는, 특정한 상황에서 사용되는 언어가 내재적 언어학이 생각하듯이 촘스키적 의미의 발화자의 언어 능력(competence)뿐만 아니라 내가 언어 시장이라고 명명하는 것에도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내가 제안한 모델에 의하면, 우리가 생산하는 담론은 발화자의 언어 능력과 그 담론이 유통되는 시장의 '결과'이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말하기는 단순히 발화 능력을 향상시키는 게 아니다. 교양 있는 자들을 위한 말하기 교육은 하류 계층 학생들에게는 결정적으로 불리할 것이 뻔하다. 이렇게 되면 "언어"라는 상징재는 학교 내에서 불평등한 방식으로 분배되고 있는 것이 된다. 이처럼 Bourdieu는 경제적 생산 관계뿐만 아니라 문화적 생산 관계에까지 그 재생산이론의 영역을 넓히고 있다. 또한 Bourdieu는 이 문화적 생산 관계들, 즉 사고의 구성틀에 새겨져 있는 계급에 기초된 기호·지식·행동의 사회적 문법을 아비투스(habitus)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Bourdieu에게도 재생산 이론 전반에 걸친 문제점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문화자본이나 아비투스라는 특수한 개념으로 지배 계급의 종속을 좀 더 세밀하게 포착하고 있을 뿐 그 저항성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학교에서 과연 일방적인 문화자본 전달만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그렇지는 않다. 학생들이 스스로 형성시켜 가는 대항문화자본들의 존재는 어떻게 볼 것인가? 그리고 학생들과 교사들의 문화가 충돌할 때 생기는 문제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요즘 학생들은 학교가 요구하는 문화자본과는 다른 척도들을 가지고 있다. 교양 있는 말 따위는 그들에게 먹혀들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그들만이 가지는 다른 문화자본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학교는 여러 수준의 문화자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충돌이 이루어지는 장소라고 볼 수 있게 된다. 학교가 일방적인 문화자본 재분배 공간은 아닌 것이다. 학교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들이 밝혀낸 바에 의하면 학교 내의 특권적인 입장과 교육혜택은 지역사회의 오랜 투쟁에서 얻어진 결과물이다.
그뿐만 아니라 문화자본 외에도 물적 조건이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음을 Bourdieu는 무시하고 있는 듯하다. 문화자본의 영향력이 상당한 것만은 사실이지만 실제적으로 경제적 조건이 미치는 영향력도 거의 결정적이라고 할만큼 중요하다. 그럼에도 그의 이론에는 이 점이 간과되고 있는 듯 하다.


② Basil Bernstein
Bernstein의 경우 교육은 경험을 구성하는 주된 힘이라고 설명하면서 교육과정, 교수법, 그리고 평가가 어떻게 메시지 체계를 구성하는 지를 설명하려한다. 그는 교육의 구조가 정체성과 경험을 어떻게 형성하는가에 관한 질문을 탐색함으로써, 학교는 교육코드를 구체화한다고 주장하게 된다. 코드라는 것은 권위와 권력이 학교경험의 모든 국면에서 매개되는 방식을 뜻하며, 이것은 다시 집합코드(collective code)와 통합코드(integrated code)로 나뉜다. 이 둘은 교사와 학생들의 교수관계에서 전수하고 전달받는 지식의 선정·조직·속도·시간조절에 대해 통제력을 갖는 정도에 의해 분류한 것이다. 집합코드는 교과의 엄격한 경계와 교사-학생 간의 강한 위계적인 관계에 의해 특성화되는 전통적인 교육과정 형태를 취하며, 통합코드는 교과목과 범주들이 보다 통합되고 교사-학생 간의 권위관계는 보다 협상적이며 변화에 대해 개방적인 교육과정을 표출한다. 물론 통합코드가 진보적인 교육학의 가능성을 더 많이 내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두 가지 코드 모두 사회재생산 양식과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서 Bernstein은 계급관계를 재생산하는 것으로서 학교와 생산양식을 연결하는 구조적 특성을 개념화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그의 연구는 사회통제의 원리들이 학교와 다른 사회제도들에 깊이 박혀 있는 메시지들을 형성하는 구조적 장치에 어떻게 부호화되어 있는가를 확인하는 데 특히 유용하다.


3) 재생산이론을 넘어서
재생산이론의 전반적인 문제로 지적되는 것은 바로 저항의 문제다. 심하게 말해서 재생산이론은 학교 내에서 벌어지는 생산관계 재생산에 대해 좀 더 정치(精緻)한 해석을 덧붙여 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따라서 그 재생산의 고리가 치밀하면 치밀할수록 그 재생산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모습으로 비춰지게 된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들이 그 이후에 많이 이루어 졌다. 특히 신마르크스주의의 사회이론과 민속지 연구와 같은 실증적 접근을 통합하는 시도들이 대표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Willis와 같은 사람들은 학교의 내적 작용에 대해 단지 서술적인 설명만을 제공하는 온순한 방법을 따르지 않는다. 대신에 이들의 관점은 지배사회에 깊이 박혀 있는 결정적인 사회경제 구조들이 일상적 삶의 수준에서 학생들의 대항적인 삶의 경험을 형성할 때 계급과 문화라는 매개체를 통해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분석하려고 노력한다. 즉 교육과정을 지배관계에 기여하는 것으로서 뿐만 아니라 해방적 가능성에 관련된 관심들도 내포하는 복합적인 논의양식으로 분석하였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해방적 관심에 우선적인 지위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3. 실천의 이론

 

이론은 이론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이론이 현실과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그 이론의 가치는 결정된다. 그런데 교육에 대한 진보적인 이론들의 전개를 살펴보다 보면 그 방향이 현실 쪽으로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현실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한다.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의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들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현실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그들은 실천적인 교육사회학을 위한 진보적인 궤적을 그리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이런 탐색의 저변에는 그들 공통이 가진 인식이 있다. 그것은 이 교육현실이 단순히 합의에 의해 형성되어 있지는 않다는 믿음이다. 교육현장은 언제나 여러 계층의 갈등이 존재하며 그 갈등에 대한 대결의식을 견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입장은 우리의 무반성적인 인식에 대해 따끔한 일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전교조가 탄생하고 난 이후 교육현장에 불어닥친 진보적인 흐름은 면면히 이어져 현재에 이르러서는 현장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 우리의 교육 현실을 진보적이라고 말하기에는 여전히 너무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다. 다른 여러 가지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학교 안, 즉 교사들 간의, 혹은 교사와 학생간의 권위적인 관계는 우리 교육의 문제를 대변하는 아주 단적인 예이다. 이런 권위적인 관계는 우리 사회 전반의 권위성을 반영하는 것이면서도 그 권위성을 재생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권위적인 사회 구조를 바꾸어 나가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물론 교육사회학만의 역할은 아니겠지만 이 재생산의 사슬을 끊을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심각한 노력이 필요함을 물론이다.

 


참고문헌 :
헨리 지루, 『교육이론과 저항』, 성원사 (1990)
피에르 부르디외「말하기의 의미」, 『혼돈을 일으키는 과학』, 솔 (1994)
루이 알튀세르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아미엥에서의 주장』, 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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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야기

마당 깊은 집」이라는 드라마를 기억할는지 모르겠다. 내가 어렸을 적에 봤으니까 꽤 오래된 드라마이다. 그 드라마는 전쟁이 끝난 후에 아버지 없이 살아가는 한 가족의 삶을 비교적 담담하게 보여주었다. 빡빡 깍은 머리 위로 하얀 가루로 된 DDT(나도 잘 모르지만, 그 시대를 겪으신 아버지 말로는 무슨 살충제라더라. 몸에 무지 안 좋은...)를 마구 뿌리는 어머니의 모습과 전쟁으로 인해 팔 하나를 잃은 상이용사의 비참한 절규가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이 드라마는 전쟁으로 인한 비참한 현실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동시에 "마당이 푹 꺼진" 주인집 뒷채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이들의 훈훈한 인정미를 보여주고 있었기에 보는 이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전쟁 이후의 힘든 삶을 가족과 함께 견디어 내는 감동적인 이야기는 「마당 깊은 집」외에도 상당히 많은 것 같다. 장미희가 나와서 "똑"을 팔던「육 남매」와 같은 TV 드라마뿐만 아니라, 「오발탄」이나 「잉여인간」과 같은 수많은 소설들에서 그런 이야기들은 쉽게 접할 수 있고,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런 이야기들이 드라마, 소설, 영화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변화하면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한국 사회가 겪은 전쟁 체험이 비교적 보편적이었음을 증명하는 게 아닐까한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 한국 사회가 국가 혹은 정부라는 이름으로 과연 개인들의 행복을 보장해줄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았음은 자명하다. 국가는 전쟁으로 인해 경제적인 파멸상태로 떨어져 버렸으며, 이데올로기라는 명목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거대한 억압으로서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 속에서 개인은 어떻게 살아남아야 했던가? 개개인은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우군을 찾아야 했으며, 그 최소한의 단위가 바로 "가족"이었다. 「마당 깊은 집」에서 볼 수 있듯이, 당장 내일의 먹을거리를 찾아야 했으며, 등이라도 붙일 수 있는 조그만 공간이라도 마련해야했으며, 어린 자식들을 이 험한 세상 속에서 키워내야 할 때, 어느 누구도 그들을 돌보아 주지 않았기에 가족들은 똘똘 뭉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 아버지들은 가족들 외에는 그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된다는 "정글의 법칙"을 아이들에게 가르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을 한국 사회의 "가족주의"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이 "가족주의"는 전쟁이라는 비참한 상황을 통과한 한국사회의 병리적 현상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 같다. 그러므로 "따뜻하고 평화로운 가족"의 실상은 생존의 법칙에서 힘겹게 살아남은 배타적인 공동체일 뿐이다.
이런 식의 "가족주의"는 현재에도 여전히 힘을 발휘한다. "정글의 법칙"을 몸으로 깨우치며 살아온 세대들이 지금 이 시대에는 또 다시 자식들의 부모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허황된 짓임을 아들, 딸들에게 아직도 주입하고 있으며, 단지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우리"일 뿐임을 명심하도록 요구한다. 이것은 한국의 사회보장제도가 여전히 미미한 수준임을 보여줌과 동시에, 앞으로의 사회복지 정책의 개선을 가로막는 근원적인 의식으로 자리잡는다. 사람들은 "그런 세금 낸다고 언제 내가 혜택을 받냐고?"라고 항상 되묻는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한국의 "가족주의" 속에 근본적인 이기주의가 뿌리깊게 박혀있음에도 매체들은 "가족"이라는 집단이 "인정과 사랑이 넘치는 곳"이라는 환상을 계속 심는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매체들의 이러한 이데올로기 공세는 사회적 안전망을 불신하고, 가족의 이름으로서만 개인이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계속해서 생산한다. 매체는 끊임없이 가족의 신화를 반복하고, 인정세태의 문제를 끊임없이 지적한다. 전쟁 체험을 다룬 이야기들은 특징을 하나 들어보자면, 국가는 항상 위협으로서 등장하는 대신에, 불행한 가족을 돕는 인정 많은 이웃이 하나쯤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공식이 성립할 수 있는 것도 달리 보면 개인의 시선을 사회적인 것으로 확대시키는 것을 막고, 행복의 범위를 가족과 아는 사람의 수준으로 한정시키는 역할을 할 뿐이다. 아는 사람의 수준? 자 여기서 한국사회의 뿌리깊은 문제가 걸려 나옴을 알 수 있다. 그들을 지켜줄 수 있는 "가족"은 더욱더 확대되어야했는데, 그 확대된 가족 혹은 그 이웃의 이름들이 바로 "혈연"에서 "학연", "지연"이라는 이름이 된다. 요컨대 "학연", "지연"은 폐쇄된 공동체로서 "가족주의"의 다른 이름이다. 다시 한 번 지적하자면 현재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거대한 연줄의 연쇄고리들은 참혹한 전쟁체험에서 비롯된 가족주의를 끊임없이 확대해온 결과이다.

이것을 어찌해야 할꼬? 이런 사고방식들은 일종의 "집단적 무의식"처럼 한국사회에 팽배해있는 듯 하다. 무의식을 치료할 수 있는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아!「마당 깊은 집」을 볼 때 아버지의 표정이 생각난다. 아버지 없는 가족이 힘든 삶을 겨우겨우 지탱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는 현재의 삶이 얼마나 혜택을 받은 것인지를 나에게 자꾸자꾸 말씀하셨다. 저렇게 살고 싶지 않으면, 똑바로 살아라고 말하시던 아버지를 생각해보면 갑갑해진다. 똑바로 사는게 가족을 위해 사는 것일 뿐임을 알고 있지만, 그것이 똑바른 길이라고 믿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나는 "가족주의"의 뿌리를 확인한다.
(2003.03.31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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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을 독서실로 착각하는 당신에게

도서관을 독서실로 착각하는 당신에게


도서관에서 여러분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는가? 잘라 말해서 단 두 가지 일만을 하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한 가지는 시험공부(여기서 시험공부는 고시준비, 취직준비를 모두 포함한다)이고, 또 한 가지는 레포트 쓸 때 베낄 책 찾기. 굳어버린 당신들의 머리는 이런 일들 외에 도서관의 다른 용도를 상상하기 어렵다. 아~~~ 좀 더 생각해보면 몇 가지 더 있기는 하다. 중도관 일층에서 복사를 할 때 가끔 필요하고(그건 복사집에서도 할 수 있다), 돈 찾으러 갈때도 가끔 필요하며, 스포츠 신문을 볼 때도 가끔 필요하다.

2백만권이라는 장서를 갖추고 있는 고대 도서관이 이런 역할만을 하고 있다면 그건 너무나 한심스러운 일이 아닌가? 도서관은 본래 문화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 다양한 문화를 향유하고,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공간이 도서관인 것이다. 2백만권이나 되는 장서에 담겨있는 지식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많이있다. 2만 고대생이 도서관을 사설 독서실로 만들고 있을 때, 학교 밖의 누군가는 그 지식을 갈구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고대생에게 중도관은 여전히 시험공부를 위한 독서실이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기간만 되면 도서관의 열람실은 자리가 없어서 난리가 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않는가. 왜 거기서만 공부해야 하는가? 차라리 강의실을 열어달라고 하라!!! 거기서 공부하면 엉덩이에 가시가 돋히는가? 그리고 그냥 독서실도 아니라, 돈 내고 들어오는 사설 독서실이다. 내 돈 내고 독서실에 들어와 있으니, 돈 안낸 다른 사람들은 절대로 들어오지 말라고 중도관 정문에는 출입통제기까지 설치되어 있고, 밖에서 누가 조금만 떠들면 시끄럽다고 난리다.

그들은 아침만 되면 어김없이 일찍 일어나 도서관에 자리를 맡는다. 그리고는 거기서 열심히 공부를 한다. 물론 그 공부는 CPA준비나 고시 준비, 혹은 토익, 토플 책 등 각자 자기가 가져온 책을 놓고, 밑줄 쳐가며 하는 공부이다. 그런데 당신이 앉아있는 곳의 이름을 보라. 그곳은 "열람실"이다. 열람실은 도서관에서 빌린 책들을 열람하는 곳이다. 하지만 당신이 하고 있는 행동은 열람실이 아니라, 독서실에서 할 법한 행동이다.

이에 우리는 '도서관의 제 모습 찾기'에 나서고자 한다. 앞서 대자보와 소자보를 통해 도서관을 지역주민에게 개방하라고 요구했던 것도 '도서관 제 모습 찾기'라는 커다란 맥락 속에 놓여있다. 이번에 도서관이 전면 개가제로 바뀐다는 결정 또한 100% 지지한다. 도서관이 전면 개가제로 바뀌어 자기 공부하는데 방해된다고 불평하지말라!!! 그게 바로 도서관의 참모습이다. 정말 독서실이 필요하다면 각 단대마다 말 그대로 독서실을 만들어 달라고 하라!!! 문대에 있는 문도관(이걸 도서관으로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처럼 말이다.

(2003.03.31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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