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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편지>를 읽다.

즐거운 편지

< I >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즐거운 편지"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실린 두 편의 시 중에 나는 첫 번째 시를 지금 읽어보려 한다. 언젠가 우연히 이 시를 읽고 느낀 감동 때문에, 나는 시 <Ⅰ>을 여러 사람들 앞에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는 그저 그런 느낌이었을 뿐이지만, 요즈음 들어 다시 이 시를 만났을 때는, 내가 미처 읽어내지 못했던 의미들이 온몸 전체에 소름끼치도록 떠올라 왔다. 내가 과거에는 왜 그런 의미를 읽어내지 못했는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조금 이상하게 느낄 것으로 믿는다. 읽어보다니... 소리내어 읽는다는 것일까? 솔직히 그러고는 싶다. 하지만 우리는 시를 소리내어 읽어주기에 너무 멀리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내가 '읽는다'라고 말한 것은 '해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해서 내가 이 시에서 읽어낸 의미를 전해주고 싶다는 말이다. 해석이란 참고서의 시분석들이 보여주는 딱딱한 주석달기가 아니라,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를 통해 내 체험을 전달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내가 읽어낸 의미들은 어떤 의미에서 나의 분신과도 같다. 내 분신을 남에게 조심스럽게 보여주기. 그것이 '시읽기'이다. 나는 이제 여러분들 앞에서 불안한 마음으로 시를 읽을 것이다.

시<Ⅰ>의 의미는 그냥 읽었을 때 한 남자의 사랑이야기쯤으로 읽힌다. 하지만 '한 남자의 사랑이야기'라고 쉽사리 말하는 그 말 안에는 그 남자의 수많은 조바심과 걱정, 그리고 기다림이 숨겨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이야기건 쉽사리 단정지어서는 안 될 것 같다. 그렇다면 이 남자의 사랑은 어떨까?

그의 사랑은 '사소하다.' 물론 그는 전신의 힘을 모아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겠지만, 그녀에게 그의 사랑은 해가 지고 바람이 불 듯, 항상 거기있는 그런 배경과 같은 것으로 느껴질 따름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그녀가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사랑이 배경과 같다고 그녀가 느끼는지 그는 알 수 없다. 단지 그가 그의 사랑이 그녀에게 그 정도밖에 안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에 그는 정말로 괴로웠을 것이다. 그의 모든 것을 던진 사랑이 그녀에게 별 것 아닌 배경과 같은 것이라고 여겨진다면 깊은 자괴감에 빠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기다리기로 마음먹은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살면서 가끔씩 배경을 둘러보는 경우가 있다. 평소때는 잘 느끼지 못하지만, 사는게 지치고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 가끔 하늘을 올려다보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이 남자는 그녀에게 있어서 자신의 사랑이 이런 식의 배경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그는 언제가 될 지는 모르지만, 그녀가 '한 없이 괴로움 속을 헤메일 때'까지 자신의 사랑을 지켜가기로 마음먹은 것 같다. 그녀에게 있어서 그의 사랑은 단지 '사소한 것'에 불과하지만, 그 사소함은 '오래된 사소함'이기에 그녀가 괴로움 속에서 그를 부를 때 그는 부드러운 미소로 그녀를 맞이할 것 같다. 그간의 오랜 상처를 천천히 삭여온 그 '오래된 사소함'은 그런 종류의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오래된 사소함.'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이 한 구절을 얻었다는 데서 커다란 만족감을 얻는다. 누군가를 사랑함에 있어서, 이런 '오래된 사소함'을 유지하는 것. 그것이 내가 누군가를 기다릴 수 있는 자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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