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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새로운 이해

문학의 세속성과 창조성
김인환, 성민엽, 정과리 엮음, 『문학의 새로운 이해』, 문학과지성사






『문학의 새로운 이해』라는 책은 문학이론에 관련된 중요한 비평 혹은 논문들을 모아둔 책이다. 이 책은 네 개의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고, 그 네 개의 부분은 "문학의 존재론", "문학의 안쪽", "문학의 바깥쪽", "오늘의 한국 문학"이라는 이름을 각각 부여받고, 그 속에 그 이름에 걸 맞는 글들을 다섯 개씩 수록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그 글들에 대해 조금씩 설명한다는 것은 별 의미 없는 것으로 보인다. 20개나 되는 글들을 조금씩 요약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래서 이 글에서는 "문학의 존재론"에 해당하는 곳에 논의를 집중시키기로 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문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 품어봄직한 매력적인 질문이며 그 대답의 양상을 살펴보는 것도 상당히 흥미있는 일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기에 실린 다섯 개의 글 중에 현택수의 「문학 생산의 장」과 장경렬의 「작가의 죽음과 독자의 탄생」은 각각 다른 의미에서 충격을 주는 글이었다. 이 두 개의 글은 나에게 문학의 세속성과 무한한 창조성을 동시에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세속성과 창조성의 정체는 무엇일까?


- "문학하기"의 세속성

현택수의「문학 생산의 장」은 문학이 어떻게 생산되는지를 살펴보고 있는 글이다. 이 글은 이전까지 문학사회학이 가지던 거친 통계적 접근방법이 문학을 사회적으로 규정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문학 자체의 미학적 생산 양식이 어떠한 것인가를 밝혀내는 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런데 그 노력의 대부분은 프랑스의 사회학자 부르디외의 이론을 소개하는데 바친다.
부르디외의 이론은 문학을 하나의 제도로 바라본다. 즉 문학 현상을 "일종의 의식(儀式)적 행위의 제도화 과정"(p.45)으로 보는 것이다. 문학을 제도로 바라본다는 것은 문학을 어떤 실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문학작품이다"라고 정한 것을 믿는 사회적 신념에 의해 탄생하는 것으로 본다는 이야기가 된다. 여기서부터 문학에 대한 낭만적 믿음은 깨어지고 만다. 거기에서 덧붙여 문학이 자신의 테두리를 설정하고 난 뒤의 모습, 즉 문학의 장(champ) 내의 모습을 설명한다. 그 장 속의 모습은 압축적으로 "상징재의 시장"(p.49)이라고 요약된다.
"문학의 장"을 "시장"으로 규정한 것은 독특함을 넘어서 놀라움마저 준다. 도대체 어떤 점이 문학과 시장 사이에 유사함을 설정할 수 있게 한 걸까? 부르디외는 문학 형식 변화의 원동력이 작품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통과 이단이라는 대립관계 속에 있다고 본다. "문학의 장"은 크게 '대량 생산의 속장'과 '제한 생산의 속장'으로 구분된다. 대량 생산의 속장은 돈을 벌기 위해 문학을 하는, 즉 베스트 셀러들의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경제적 이익과 같은 세속적 가치가 중요한 목적이 된다. 그런데 그와는 대비되는 제한 생산의 속장은 대량 생산의 속장과는 다른 원리에 의해 운영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운영되는 것일까?

제한 생산의 장에서 생산자는 생산자만을 고객으로 갖고 있어 외적 수요에 의존하지 않고 권력의 장과 경제의 장의 근본적 원리에 도치되는 '지는 게 곧 이기는 것'이라는 게임의 원리에 지배된다. 그리하여 이익 추구는 배제되며 투자와 금전적 수익의 그 어떤 함수 관계도 보장되지 않으며 일시적 성공은 비난받는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작품 제작의 치열함은 남과 다른 모습을 보이겠다는 의지의 소산에 불과하다. 어떤 세속적 이익에도 초연한 체 문학 자체의 가치에만 충실하겠다는 의지들도 결국에는 "문학의 장" 내에서 인정받기 위한 전략일 뿐이다. 이렇게 되면 문학이 세속적인 가치들과 떨어져 있어서 숭고하다고 말하는 것은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세속적 가치에 초연한 것 역시 "문학의 장" 내에서 우월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자리싸움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문학을 지고지순의 그 무엇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허상에 지나지 않았음을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 문학의 세속성을 느끼는 순간이다.


- "문학읽기"의 창조성

그런데 장경렬의 「작가의 죽음과 독자의 탄생」은 이런 문학의 세속성이 어떤 효과를 불러올 수 있는 지를 검토하고 있는 글이다. 이 글은 문학하기의 세속성이 반드시 세속적인 효과만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드러낸다. 물론 이 글의 중심에는 보르헤스의 작품「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작가」라는 작품을 둘러싼 모방 논란에 대한 답변이 놓여져 있다. 하지만 바스의 평면적인 모방긍정론을 비판해가면서 도착한 논의의 지점은 바로 '작가의 죽음'은 반드시 '독자의 탄생'을 전제로 해야한다는 전제이다.
문제가 된 보르헤스의 작품은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를 시간이 한참 지난 현대에 피에르 메나르라는 작가가 그대로 베껴쓴 것에 대한 비평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것은 얼핏 보면 말장난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 속에는 상당히 재미있는 생각이 개입되어 있다. 즉 완전히 베낀 작품을 모방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그 모방은 독서의 다른 차원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며, 그 독서는 세르반테스의 창작 때와는 시간적으로 차이가 나기 때문에 또 다른 의미를 창출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베토벤의 교향곡이 연주자에 따라 다른 해석에 의해 다른 음악을 창출해낼 수 있는 것에 비유될 만하다. 이것은 문학 작품이 시대를 거쳐가면서 각각의 시대에 맞는 새로운 의미맥락을 창출할 수 있으며, 바로 이것이 문학의 창조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낭만주의적 작가의 죽음이 가져다 주는 창조적 독자의 탄생을 우리는 여기서 지켜볼 수 있다.

요컨대, '전사 행위이면서 동시에 전사 행위가 아닌' 메나르의 창조 행위는 다름아닌 '독서 행위'인 것이다......
말하자면, 보르헤스는 독서행위 자체를 또 하나의 글쓰기 - 음악의 경우, 연주하기 - 로 빗대어 이야기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언급들을 용인하게 되면 많은 문제점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즉 수많은 악의적인 모방들도 하나의 창작물로써 당당한 의의를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바스의 모방긍정론이 바로 악의적인 모방들마저도 긍정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보르헤스가 위의 작품을 쓴 것이 바스의 논의대로 무한정한 모방을 강조해서라기보다는 모방이 결국 작가의 죽음을 통해 독자의 새로운 해석을 불러일으키려는 시도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해보면 지나친 모방을 용인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본다.

문학은 문학의 장 속에서 인정받기 위한 치열한 투쟁의 도구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작가의 존재는 뚜렷하다. 그러나 막상 그것이 작품으로 생산되었을 때 그것을 만나는 독자들은 그런 작가의 존재를 꼭 인정할 필요는 없다. 독자는 스스로 새로운 작가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문학하기의 세속성은 문학 읽기의 창조성으로 대치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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