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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 <윤리 21>

친일파에게 책임을 묻는다



가라타니 고진의『윤리 21』을 읽고.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가 한국에 비교적 널리 알려진 것은 어떻게 보면 불미스러운 사건에 의해서였다. 이명원이라는 한 신예 비평가가 김윤식이라는 문단의 거목에게 "당신은 표절이야"이라고 비판하면서, 그 표절한 부분을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에서 인용했기 때문이다. 그 사건은 뭐 그 사건이니 그냥 넘어가더라도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사람이『일본 근대문학의 기원』과 같은 책을 썼으니, 그는 문학 비평가가 틀림없을 듯하다. 물론 그는 「나쓰메 소세키론」으로 등단한 문학 비평가가 맞다. 그럼에도 그가 지금까지 걸어온 사상의 궤적을 살펴보면, 그가 단순히 문학에만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는『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이라는 저서에서는 마르크스의 『자본』을 다시 읽어내면서, 잉여가치의 발생을 재조명해보고 있는데, 이런 일을 시시때때로 벌이는 사람을 문학 비평가라고만 규정짓기에는 그에게 상당히 미안한 감이 있다.
이번에도 그는『윤리 21』을 통해서 새로운 문제제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제목에서 보여지듯이 21세기의 새로운 윤리학을 구성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가 새로이 구성하는 윤리학의 중심에는 "인간의 책임"이라는 문제가 놓여 있다.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답하기는 정말 어렵다. 예를 들어 그가 제기한 이런 문제를 생각해보자. 잔인하게 살인을 저지른 아이에 대해 누가 과연 책임을 져야하는가? 그 부모가 책임을 져야하는가? 흔히 자식을 잘 못 교육시킨 부모의 탓을 하며, 부모가 책임을 지고, 사죄해야한다고 말한다. 특히 일본의 경우, 역사적인 맥락과 결부되어 그런 경향은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가라타니 고진은 이러한 사건에 대해 부모의 탓만을 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부모의 탓을 한다는 것, 이것은 바로 한 인간의 책임을 그가 속해있는 구조 속에 돌려버림으로써, 그 인간의 책임을 없애버리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한테 무슨 책임을 지게 하느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부모가 아이를 마음대로 키울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라. "부모가 눌러도 아이는 자란다"고 생각하는게 맞다. 그렇기에 부모와 아이를 다같이 강요하고 있는 어떤 힘에 대해 살펴보는게 더욱 중요하다.



한 인간이 어떠한 행위를 했으며, 그에 대한 책임을 따질 때, 보통은 그 행위의 원인이 무엇인지 찾는다. 그리고 그 원인 때문에 한 인간이 어쩔 수 없이 그런 일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다고 판단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적절한 판단이 아니다. 스피노자의 생각대로 인간은 복잡한 인과관계의 연쇄 속에서 결정론적으로 움직이는 꼭두각시 인형과 같을 지 모르지만, 그 구조의 인과성을 인정한 가운데서, 인간이 자유롭다고 "가정"해야 그 행위의 책임 소재를 가리는 것이 가능하다. 심지어 고진은 결정론적 사고를 보여주는 스피노자마저도 이점을 간과하지는 않았다고 본다. 이것이 바로 가라타니 고진이 '구조주의적인 사고를 유지하면서 어떻게 주체성을 회복할 것인가"를 고민한 결과이다. 그렇다고 그가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자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구조의 문제를 이야기할 때는 개인에 대한 것은 괄호 안에 넣어야 하며, 개인에 대한 책임을 말할 때는 구조의 문제는 일단 괄호 안에 넣어두자는 것이다. 고진은 이 두 가지 다른 차원을 혼란스럽게 겹쳐서 개인의 책임을 무마하려는 태도를 거부한다.



그가 이러한 결론에까지 도달하게 된 것은 칸트에 대한 세밀한 독서가 큰 역할을 한 듯하다. 칸트에 대해서 이전까지 있었던 비판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공동체의 의무"에 종속시켰다는 지점에 집중되었는데, 고진은 이 비판들이 피상적이라고 말한다. 칸트가 "의무"라고 말할 때, 그 "의무"는 "자유로워져라"라는 의미의 "의무"였으며, 그것은 가족이나 국가와 같은 공동체의 도덕과는 완전히 다른 지점에서의 "의무"이다. 고진은 개인이 살면서 어쩔 수 없이 속하게 되는 공동체가 부여하는 규범들을 구조라는 관점에서 "공동체의 도덕"이라고 지칭하고, 그와 반대되는 지점에 "세계시민적인 윤리"를 설정했다. 칸트가 "의무"를 말했을 때는 후자인 "세계시민적인 윤리"를 지칭한다.

그러나 한 개인에게 "공동체의 도덕"과 "세계시민적인 윤리"가 부딪히는 경우가 발생하는 때에는 어떻게 해야할까? 여기서 그는 미나마타 병을 발생시킨 공장의 간부들의 예를 들고 있다. 수은이 병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 사실을 공표했을 때 공장이 망하고, 자기 집안이 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침묵했다. 공동체의 도덕에 충실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계시민적인 윤리감각으로 보았을 때, 그들에게는 무거운 책임이 있는 셈이다.



이런 논의들을 이끌어 나가면서 그는 전쟁이라는 문제를 다시 거론한다. 그가 결국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전쟁의 책임이 천황에게 있다는 점을 확실하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일억총참회"라는 식으로 책임을 유야무야 시켜버리는 태도가 그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의 입장에서 그의 말들을 듣고 있노라면, 그 침략전쟁에 동조했던 한국인들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아직도 한국인들은 친일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민족행위자에 대한 명단을 공개한 후 나타난 반응들을 생각해 보라. 친일파에 대해 옹호하는 입장은 대부분 일제시대에 친일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얼버무림이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고진이 가장 염려했던 부분이 아닐까? 고진은 개인의 책임을 물을 때, 구조의 문제는 괄호 안에 넣자고 했다. 그러나 친일파들을 옹호하는 이들은 자기가 편한 대로 구조가 개인을 억압하고 있지 않았느냐며 항변한다. 물론 그들의 입장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일파들에 대한 평가는 엄중하게 내려져야 한다. 그 문제가 과거의 문제이기 때문이 아니다. 과거에 대한 평가는 현재의 재확인이기 때문이다. 고진은 키에르케고르를 이렇게 인용한다.



"죽은 자는 어떠한 현실의 대상도 아니다. 죽은 자는 자신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산 자 안에 무엇이 있는가를 끊임없이 밝히는 기회며, 혹은 산 자가 그에게는 이미 현존하지 않는 죽은 자에 대해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되는 기회에 불과하다."



흔히 오십보, 백보라는 말을 쓴다. 맹자에서 나온 말이다. 전쟁에서 오십보를 도망한 병사와 백보를 도망간 병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맹자의 질문에 왕은 둘 다 똑같은 놈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가라타니 고진은 다르게 생각한다. 어떻게 오십보를 도망간 병사와 백보를 도망간 병사가 같을 수가 있냐고 되묻는다. 백보 도망간 병사가 먼저 달아날 때, 오십보 도망간 병사는 그 시간만큼을 적들과 싸우고 있었다. 우리편이 이미 졌다는 절망감과 적들의 검과 창을 맞닥뜨릴 때의 그 죽음의 공포를 그는 그래도 좀 더 견디고 있었다. 그 실존적인 견딤을 무시할 수 있을까? 가라타니 고진은 구조가 우리를 구속하고 있을 때에도 개인의 책임을 다해야 함을 이런 식으로 말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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