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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보고에 시달리다.

어제 당직을 섰다. 당직이 끝나면 당연히 보고를 하게 된다. 내 위로 있는 줄줄이 늘어선 상관들에게 그 전날 일어났던 상황들을 난 꼬치꼬치 보고해야 한다.

 

그들은 나에게 꼼꼼하게 되묻는다. "얘는 어디가 아프지? 그리고 어제 어떤 시설물을 어떻게 고친거야?" 내가 대답을 조금이라고 허술하게 한다치면 대번에 욕이 날아온다. 심지어 난 내가 근무하는 곳의 창문 개수까지도 세어가지고 들어간다.

 

난 오늘도 보고를 마치고 나오면서 생각한다. "왜 이런 일을 해야하지?" 도대체 궁금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아니 간 밤에 일어난 모든 일을 다 알아야 하나? 그냥 제발 내버려두면 안되나? 

 

혼자서 좀 곰곰히 생각해본다. 아마도 이건 상하관계로 구성된 조직의 특성일거라고.가장 위에 서 있는 한 사람의 시선 안에 그의 모든 조직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그 조직은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과 자기가 전혀 관여하지 않은 일임에도 조직을 책임지고 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그 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깨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따위의 감정들로 엉켜진 끝없는 층층구조.

 

그러다 갑자기 무서워진다. 나도 이런 구조에 어느덧 익숙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모든 일을 내가 맡아서 직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고생만 직싸게 했었다. 이제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어느덧 시키는 것이 더욱 편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난 이제 내 아래에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에게 일을 떠맡기고

감시하는데 더 익숙해져 있다. 아니 어쩌면 더 정교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남들이 하지 않는 수많은 장부들을 만들어 떠 넘기고, 엑셀을 이용하여 그 결과들을 통합해서, 관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 또한 "관리"라는 이름의 허울 좋은 떠넘김에 맛을 들이고 말았다.

 

사람들이 모여 새로운 모임을 만들 때, 사람들은 그 전까지 익숙한 방식으로 모임을 구성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나에게 익숙한 방식은 바로 이러한 방식이 되고 말았다. 과거에 학회나 자발적 모임에서 겪었던 경험들은 차츰 사라지게 되었다. 이것은 군대를 겪은 한국 남성들의 비슷한 경험이라는 극단적인 일반화까지도 머릿 속에 떠오른다.

 

언젠가 에릭 홉스봄의 <극단의 시대>를 읽었을 때의 기억이 난다. 자본주의에 대항해서 새로운 사회를 만들려 했던 사람들이 도대체 왜 그 자본주의보다 어쩌면 더 억압스러운 사회를 만들어 버렸냐는 딜레마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었다. 그때 누군지 이름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당시 소련 사회를 만들었던 주역 중의 한 사람이 임종할 때 했던 말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는 그 당시 그것밖에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수 년에 걸친 전쟁끝에 새로운 사회를 만들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들이 알고 있던 방식은 전시동원체제밖에 없었다고...

 

나 또한 그렇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이곳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만들 기회가 주어지더라도 결국엔 익숙한 비극적 방식대로 삶을 꾸릴 수밖에 없는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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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타니 겐지로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

어설픈 낭만주의는 감동보다는 짜증을 주기 마련이다.
세상은 완고한데, 그 완고함을 외면한 채 감동적인 타협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쉽게 말해서 유치하다.

하지만, 그런 유치함을 비웃을 수만은 없다.
어쩌면 우리는 그런 유치함을 희망이라고 믿고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세상에 단단히 뿌리박은 희망과 유치한 희망은 분명히 그 근거가 다르다.
단단한 희망은 단순히 예외적이고 우연적인 가능성에 의지하지 않으며 세상을 인과적으로 혹은 계획적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언제 세상이 내 맘대로 되기만 하던가?
그렇지 않기에 우리는 가끔씩 어떤 특별한 행운이 찾아와 주길 기대한다.
이러한 기대는 어젯밤 꿈 땜에 산 복권이 당첨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소박한 기대이다.


그래서 그런지 인과적인 판단으로 쉽사리 해결될 수 없는 갈등들이 어떤 우연한 계기로 해결되는 소설이나 영화들을 보면
어제 산 복권에 당첨된 듯한 기분이 든다.

부끄럽지만 여기서 한 가지 고백하는 것은 내가 본 영화 중에서 가장 감동받았던 영화는 "귀여운 여인"이다.
천한 계급의 창녀가(물론 마음만은 순수하지...) 부유한 남자를 만나 그 남자를 변화시키고, 자기 자신도 변화되면서
결국 행복한 신분상승을 이루는 꿈 같은 이야기에 나는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완고한 계급적 차이를 희석시키는 실현 불가능한 내용에 대한 거부감이 내 머릿 속에 단단히 자리잡고 있었지만
줄리아 로버츠의 귀여운 웃음을 자아내는 행복한 결말은 언제 보아도 몸서리쳐지게 감동적인 것이다.

아직도 이런 식의 낭만적인 감정에 기대어 사는 내 모습이 한심해보일 따름이지만 가끔은 이런 기대를 품고 사는 것도
가끔 복권을 사는 것처럼 나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긴 한다.
하지만 분명히 경계하는 것은 이런 우연적인 계기들에 인생을 맡길 수는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교육을 소재로 한 영화나 만화 혹은 소설들이 쉽게 빠지고 마는 함정이 바로 위에서 내가 지적한 곳이다.
교육이 교사와 학생간의 순간적인 감정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은 교육을 일종의 감동유발의 수단으로 이용한다.

타락한 학생들을 찾아다니며, 학생의 삶으로 뛰어들어서 그 학생을 감화시키고 결국에는 올바른 인간으로 개조시킨다는
틀에 박힌 공식들은 이제는 너무 상투적이어서 더이상 감동을 주지 못한다.
학생은 계속해서 변화하지 않은 틀 속에서 신음하는데 한 학생을 그 속에서 구해내었다고 모든 갈등이 해결된다고 볼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마치 막노동꾼도 복권에 당첨될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우리 사회의 계급적 차이는 없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런 점에서 꼭 한 번 읽어보기를 권하는 책이 바로 제목으로 달아놓은
하야타니 겐지로의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이다.

이 책은 일단 감동적이다. 이 책을 읽고 눈시울이 뜨끈해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인간도 아니라고 말해도 좋다.
뭐 눈물은 아닐지 몰라도, 뭔가 가슴 찌릿한 감동을 분명히 받을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도 위에서 말한 어설픈 감동처럼 개별적인 구원에 기대고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이 소설은 감동을 던져줌과 동시에 그 소설이 바탕하고 있는 현실적 토대에 대한 생각을 환기시킨다.
즉 감동을 줌과 동시에 또한 감동은 쉽게 찾아오지 않음을 말해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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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야기

마당 깊은 집」이라는 드라마를 기억할는지 모르겠다. 내가 어렸을 적에 봤으니까 꽤 오래된 드라마이다. 그 드라마는 전쟁이 끝난 후에 아버지 없이 살아가는 한 가족의 삶을 비교적 담담하게 보여주었다. 빡빡 깍은 머리 위로 하얀 가루로 된 DDT(나도 잘 모르지만, 그 시대를 겪으신 아버지 말로는 무슨 살충제라더라. 몸에 무지 안 좋은...)를 마구 뿌리는 어머니의 모습과 전쟁으로 인해 팔 하나를 잃은 상이용사의 비참한 절규가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이 드라마는 전쟁으로 인한 비참한 현실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동시에 "마당이 푹 꺼진" 주인집 뒷채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이들의 훈훈한 인정미를 보여주고 있었기에 보는 이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전쟁 이후의 힘든 삶을 가족과 함께 견디어 내는 감동적인 이야기는 「마당 깊은 집」외에도 상당히 많은 것 같다. 장미희가 나와서 "똑"을 팔던「육 남매」와 같은 TV 드라마뿐만 아니라, 「오발탄」이나 「잉여인간」과 같은 수많은 소설들에서 그런 이야기들은 쉽게 접할 수 있고,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런 이야기들이 드라마, 소설, 영화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변화하면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한국 사회가 겪은 전쟁 체험이 비교적 보편적이었음을 증명하는 게 아닐까한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 한국 사회가 국가 혹은 정부라는 이름으로 과연 개인들의 행복을 보장해줄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았음은 자명하다. 국가는 전쟁으로 인해 경제적인 파멸상태로 떨어져 버렸으며, 이데올로기라는 명목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거대한 억압으로서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 속에서 개인은 어떻게 살아남아야 했던가? 개개인은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우군을 찾아야 했으며, 그 최소한의 단위가 바로 "가족"이었다. 「마당 깊은 집」에서 볼 수 있듯이, 당장 내일의 먹을거리를 찾아야 했으며, 등이라도 붙일 수 있는 조그만 공간이라도 마련해야했으며, 어린 자식들을 이 험한 세상 속에서 키워내야 할 때, 어느 누구도 그들을 돌보아 주지 않았기에 가족들은 똘똘 뭉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 아버지들은 가족들 외에는 그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된다는 "정글의 법칙"을 아이들에게 가르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을 한국 사회의 "가족주의"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이 "가족주의"는 전쟁이라는 비참한 상황을 통과한 한국사회의 병리적 현상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 같다. 그러므로 "따뜻하고 평화로운 가족"의 실상은 생존의 법칙에서 힘겹게 살아남은 배타적인 공동체일 뿐이다.
이런 식의 "가족주의"는 현재에도 여전히 힘을 발휘한다. "정글의 법칙"을 몸으로 깨우치며 살아온 세대들이 지금 이 시대에는 또 다시 자식들의 부모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허황된 짓임을 아들, 딸들에게 아직도 주입하고 있으며, 단지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우리"일 뿐임을 명심하도록 요구한다. 이것은 한국의 사회보장제도가 여전히 미미한 수준임을 보여줌과 동시에, 앞으로의 사회복지 정책의 개선을 가로막는 근원적인 의식으로 자리잡는다. 사람들은 "그런 세금 낸다고 언제 내가 혜택을 받냐고?"라고 항상 되묻는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한국의 "가족주의" 속에 근본적인 이기주의가 뿌리깊게 박혀있음에도 매체들은 "가족"이라는 집단이 "인정과 사랑이 넘치는 곳"이라는 환상을 계속 심는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매체들의 이러한 이데올로기 공세는 사회적 안전망을 불신하고, 가족의 이름으로서만 개인이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계속해서 생산한다. 매체는 끊임없이 가족의 신화를 반복하고, 인정세태의 문제를 끊임없이 지적한다. 전쟁 체험을 다룬 이야기들은 특징을 하나 들어보자면, 국가는 항상 위협으로서 등장하는 대신에, 불행한 가족을 돕는 인정 많은 이웃이 하나쯤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공식이 성립할 수 있는 것도 달리 보면 개인의 시선을 사회적인 것으로 확대시키는 것을 막고, 행복의 범위를 가족과 아는 사람의 수준으로 한정시키는 역할을 할 뿐이다. 아는 사람의 수준? 자 여기서 한국사회의 뿌리깊은 문제가 걸려 나옴을 알 수 있다. 그들을 지켜줄 수 있는 "가족"은 더욱더 확대되어야했는데, 그 확대된 가족 혹은 그 이웃의 이름들이 바로 "혈연"에서 "학연", "지연"이라는 이름이 된다. 요컨대 "학연", "지연"은 폐쇄된 공동체로서 "가족주의"의 다른 이름이다. 다시 한 번 지적하자면 현재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거대한 연줄의 연쇄고리들은 참혹한 전쟁체험에서 비롯된 가족주의를 끊임없이 확대해온 결과이다.

이것을 어찌해야 할꼬? 이런 사고방식들은 일종의 "집단적 무의식"처럼 한국사회에 팽배해있는 듯 하다. 무의식을 치료할 수 있는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아!「마당 깊은 집」을 볼 때 아버지의 표정이 생각난다. 아버지 없는 가족이 힘든 삶을 겨우겨우 지탱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는 현재의 삶이 얼마나 혜택을 받은 것인지를 나에게 자꾸자꾸 말씀하셨다. 저렇게 살고 싶지 않으면, 똑바로 살아라고 말하시던 아버지를 생각해보면 갑갑해진다. 똑바로 사는게 가족을 위해 사는 것일 뿐임을 알고 있지만, 그것이 똑바른 길이라고 믿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나는 "가족주의"의 뿌리를 확인한다.
(2003.03.31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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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을 독서실로 착각하는 당신에게

도서관을 독서실로 착각하는 당신에게


도서관에서 여러분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는가? 잘라 말해서 단 두 가지 일만을 하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한 가지는 시험공부(여기서 시험공부는 고시준비, 취직준비를 모두 포함한다)이고, 또 한 가지는 레포트 쓸 때 베낄 책 찾기. 굳어버린 당신들의 머리는 이런 일들 외에 도서관의 다른 용도를 상상하기 어렵다. 아~~~ 좀 더 생각해보면 몇 가지 더 있기는 하다. 중도관 일층에서 복사를 할 때 가끔 필요하고(그건 복사집에서도 할 수 있다), 돈 찾으러 갈때도 가끔 필요하며, 스포츠 신문을 볼 때도 가끔 필요하다.

2백만권이라는 장서를 갖추고 있는 고대 도서관이 이런 역할만을 하고 있다면 그건 너무나 한심스러운 일이 아닌가? 도서관은 본래 문화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 다양한 문화를 향유하고,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공간이 도서관인 것이다. 2백만권이나 되는 장서에 담겨있는 지식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많이있다. 2만 고대생이 도서관을 사설 독서실로 만들고 있을 때, 학교 밖의 누군가는 그 지식을 갈구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고대생에게 중도관은 여전히 시험공부를 위한 독서실이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기간만 되면 도서관의 열람실은 자리가 없어서 난리가 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않는가. 왜 거기서만 공부해야 하는가? 차라리 강의실을 열어달라고 하라!!! 거기서 공부하면 엉덩이에 가시가 돋히는가? 그리고 그냥 독서실도 아니라, 돈 내고 들어오는 사설 독서실이다. 내 돈 내고 독서실에 들어와 있으니, 돈 안낸 다른 사람들은 절대로 들어오지 말라고 중도관 정문에는 출입통제기까지 설치되어 있고, 밖에서 누가 조금만 떠들면 시끄럽다고 난리다.

그들은 아침만 되면 어김없이 일찍 일어나 도서관에 자리를 맡는다. 그리고는 거기서 열심히 공부를 한다. 물론 그 공부는 CPA준비나 고시 준비, 혹은 토익, 토플 책 등 각자 자기가 가져온 책을 놓고, 밑줄 쳐가며 하는 공부이다. 그런데 당신이 앉아있는 곳의 이름을 보라. 그곳은 "열람실"이다. 열람실은 도서관에서 빌린 책들을 열람하는 곳이다. 하지만 당신이 하고 있는 행동은 열람실이 아니라, 독서실에서 할 법한 행동이다.

이에 우리는 '도서관의 제 모습 찾기'에 나서고자 한다. 앞서 대자보와 소자보를 통해 도서관을 지역주민에게 개방하라고 요구했던 것도 '도서관 제 모습 찾기'라는 커다란 맥락 속에 놓여있다. 이번에 도서관이 전면 개가제로 바뀐다는 결정 또한 100% 지지한다. 도서관이 전면 개가제로 바뀌어 자기 공부하는데 방해된다고 불평하지말라!!! 그게 바로 도서관의 참모습이다. 정말 독서실이 필요하다면 각 단대마다 말 그대로 독서실을 만들어 달라고 하라!!! 문대에 있는 문도관(이걸 도서관으로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처럼 말이다.

(2003.03.31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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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지키면 복을 준다고? 누가?

좀 오래된 영화이기는 하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영화 중에 하나는 <귀여운 여인>이다. 그 영화를 보고 있으면, 행운이라고 하나도 없을 것 같은 세상에서 복권이나 하나 당첨된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왕자건 공주건 누군가가 다가와 나에게 행복을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는 사람들의 기분을 잠시나마 즐겁게 해준다. 그런데 같은 이유로 나는 그 영화를 좋아하는 것만큼이나 또 싫어한다. 모든 사람에게 복권에 당첨될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세상에 가난한 사람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현실의 완강함을 에둘러서 무마시켜 버리는 영화의 술책이 얄밉다.
"신동엽의 러브하우스"를 볼 때에도 <귀여운 여인>을 볼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든다.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뜻밖의 행운에 감동하는 모습을 볼 때, 나의 눈시울은 뜨끈해진다. '아! 착하게 살면 복을 받는구나...'라는 뒤늦은 깨달음도 함께한다. 그런데 말이다. 눈시울이 뜨끈해지는 것까지는 좋지만, 보고 난 뒤에 찝찝한 맛이 남는 것도 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착한 사람들이 복을 받는다'는 만고불변의 진리에 무슨 찝찝함이 있는가 하고 자문해본다. 내가 나쁜 놈이라서 그런가?
일단은 내가 떨떠름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떤 사람들이 "러브하우스"의 혜택을 얻느냐를 생각해보기 때문이다. 가만히 살펴보면 선택되는 집은 대부분의 경우 아주 집안 식구가 많거나, 장애우가 있거나 해서 정상적인 가정을 이루기가 힘든 상황을 가진 가족이 대부분이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가족의 따뜻한 사랑으로 힘들지만 행복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신동엽이 찾아가 복을 주게 된다. 물론 집의 구조가 형편없는 곳이 선택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전 집의 열악한 상황은 바뀐 집의 삐까뻔쩍함에 대비되어 그들에게 주어진 행복을 더욱 빛나게 하는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건 말이다. 한 마디로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가족을 지키면 복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가족을 지키기만 하면 복을 줄까? 과연 누가 줄까? "러브하우스"에 따르면 이 땅 수백만의 가족들 중에 이렇게 복을 받는 이들은 일주일에 하나다. 가족으로 인해 벌어지는 모든 문제들은 일주일에 한 번 보여지는 그들의 행복한 웃음 속으로 묻혀버리고 만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을 더 짜증나게 하는 것이 있다. 이른바 소년 소녀 가장들이 주로 많이 나오는 프로그램, 즉 불행한 사람들의 삶을 다큐멘터리 식으로 엮은 프로그램과 이 "러브하우스"를 비교해볼 때다.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볼 때 시청자들은 불행한 그들을 동정한다. 하지만 그 속에는 '휴∼ 나보다 더 못한 사람들도 있구만' 하는 안도의 한숨이 배어있음을 무시할 수 없다. 이건 또 무슨 얘긴가? "러브하우스"가 보여주는 행복한 웃음은 가족을 유지한 자들에 대한 행복한 보상으로, 소년, 소녀 가장들의 불행은 결여된 가족의 비극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서로서로 잘 엮어져 있다.
내 생각이 이러하니 신동엽이 곱게 보일리 없다. 대마초 사건도 있고 해서 그런지 모른다. 대마초를 피웠으면 피웠지, 왜 이런 프로그램으로 이미지 쇄신을 하려하는지 짜증스럽기도 하다. 얼마 전에 구속된 모 대학 미대교수처럼 당당히 대마초할 권리를 달라고 하면 안되나? 내가 신동엽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거다. "니가 무슨 권리로 행복을 주니? 응?"

(2003.03.31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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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구에 대하여

얼마 전 여자 친구로부터 이문구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해듯고 약간 쓸쓸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대학을 막 들어왔을 때 이문구의 <관촌수필>을 접하고 문학이 사람을 이렇게 감동시킬 수도 있구나라고 생각했었다. 의뭉스러운 사투리로 자기 주변의 사람들 이야기를 풀어내는 그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삭막한 공업도시에서 살아온 나에게 입담 좋은 아저씨 한 분이 생긴 것 같아 마음이 푸근해지곤 했었다. 그 이후로 나는 이문구를 언제라도 찾아뵐 수 있는 시골에 계신 아저씨라고 생각했었다. 그렇기에 이문구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는 소식은 나에게 고향이 사라졌다는 느낌을 주었다.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에서 극적으로 나타나 있는 고향상실의 슬픔이 나에게도 간접 체험된 것이다.

물론 동인문학상을 둘러싸고 전개된 최근 그의 행적은 나에게 또 하나의 슬픔을 주긴 하였다. 하지만 나는 그에 대해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실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우리동네>나 <관촌수필>에서 농촌 문제에 대한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발견하기보다는 주변 사람들에 대한 푸근한 관심을 발견하였고, 그것을 그의 세계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단지 그를 시골에 계신 맘씨좋은 아저씨 정도로 판단하고 있었을 뿐이다. 맘씨 좋다는 것과 정치적으로 올바른 판단을 내린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가 아닐까. 그래서 나는 그의 이름 앞에 붙은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이라는 명칭은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그에게는 전근대적 사회가 가지고 있었던 특유의 단어들, 즉 "인심", "후덕", "의리" 등의 단어가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스승인 김동리를 끝까지 저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와 같은 스승을 어찌 버릴 수 있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정치적 상황은 이런 사람들까지 저항세력으로 만들어 버렸던 것 같다. 하지만 그에게 이런 짐은 너무 무거운 것이 아니었을까? 문학하는 사람들은 현실을 바꾸는 실천이 본업이 아니다. 만약 행복하게도 문학하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일치할 수 있다면 그것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 두 가지가 배치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소설가는 소설쓰기로 돌아설 수밖에 없다.

이런 생각들을 하다보면 문학에 과도하게 사회적인 기대를 부여하는 시선들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느끼게 된다. 문학하는 사람들은 결국 문학에 대해서만 날카롭고, 명민하다. 그리고 문학적 실천에만 능동적인 경우가 많다. 문학은 이제 문학이라는 좁은 공간 속으로 숨어들고 있을 뿐이다. 이문구의 죽음을 보며 문학에 대한 사회적인 짐들은 이제 벗겨버려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문학은 이제 문학일 뿐이다.(2003.04.01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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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무교육지침서라...

내가 근무하는 곳은 군인을 만드는 곳이다.

빨간 모자가 땀에 절을 때까지 뛰어다니고,

그 빨간 모자가 땀에 절었다고 욕을 먹는 곳에서 난 매일매일 근무하고 있다.

군대갔다 온 사람들은 잘 알거다. 빨간 모자들이 어떤 인간들인지.

 

요즘 내가 주로 하고 있는 일은 "내무교육지침서"라는 책을 가르치는 일이다.

그 책을 난 농담삼아 "'감시와 처벌'의 부록"이라고 부른다.

그 책은 신체를 어떻게 규율해야하는가를 세세하게 잘 써놓은 책이다.

내무실에 들어와서부터 나갈때까지의 모든 행위를 센티미터까지 규정한 책.

그런 책을 매일 난 가르치고 있다. 시범까지 보여가면서...

 

거리를 자연스럽게 걷고 있을 때도 

내 팔은 앞으로 45도, 뒤로 15도 이상 뻗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매일매일 내 몸은 규율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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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시작이다.

그렇게 많은 구박을 받고서 나도 이런걸 하나 만들었다.

진주라는 컴컴한 곰굴 속에서 한 줄기 광명을 보았다고나 할까?

그래도 난 인간이 되기 위해서 더 많은 쑥과 마늘을 먹어야 한다.

매일매일 날 곰으로 만드는,

아니 곰보다 더 무서운 마귀로 만들어 가는 일과를 견디기 위해,

그리고 인간답게 살기 위해

난 이 곰굴 속에서 웹 상의 여러 사람들의 생각을 씹어 삼키며

그 쓰디씀을 감내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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