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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구에 대하여

얼마 전 여자 친구로부터 이문구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해듯고 약간 쓸쓸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대학을 막 들어왔을 때 이문구의 <관촌수필>을 접하고 문학이 사람을 이렇게 감동시킬 수도 있구나라고 생각했었다. 의뭉스러운 사투리로 자기 주변의 사람들 이야기를 풀어내는 그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삭막한 공업도시에서 살아온 나에게 입담 좋은 아저씨 한 분이 생긴 것 같아 마음이 푸근해지곤 했었다. 그 이후로 나는 이문구를 언제라도 찾아뵐 수 있는 시골에 계신 아저씨라고 생각했었다. 그렇기에 이문구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는 소식은 나에게 고향이 사라졌다는 느낌을 주었다.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에서 극적으로 나타나 있는 고향상실의 슬픔이 나에게도 간접 체험된 것이다.

물론 동인문학상을 둘러싸고 전개된 최근 그의 행적은 나에게 또 하나의 슬픔을 주긴 하였다. 하지만 나는 그에 대해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실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우리동네>나 <관촌수필>에서 농촌 문제에 대한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발견하기보다는 주변 사람들에 대한 푸근한 관심을 발견하였고, 그것을 그의 세계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단지 그를 시골에 계신 맘씨좋은 아저씨 정도로 판단하고 있었을 뿐이다. 맘씨 좋다는 것과 정치적으로 올바른 판단을 내린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가 아닐까. 그래서 나는 그의 이름 앞에 붙은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이라는 명칭은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그에게는 전근대적 사회가 가지고 있었던 특유의 단어들, 즉 "인심", "후덕", "의리" 등의 단어가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스승인 김동리를 끝까지 저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와 같은 스승을 어찌 버릴 수 있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정치적 상황은 이런 사람들까지 저항세력으로 만들어 버렸던 것 같다. 하지만 그에게 이런 짐은 너무 무거운 것이 아니었을까? 문학하는 사람들은 현실을 바꾸는 실천이 본업이 아니다. 만약 행복하게도 문학하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일치할 수 있다면 그것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 두 가지가 배치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소설가는 소설쓰기로 돌아설 수밖에 없다.

이런 생각들을 하다보면 문학에 과도하게 사회적인 기대를 부여하는 시선들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느끼게 된다. 문학하는 사람들은 결국 문학에 대해서만 날카롭고, 명민하다. 그리고 문학적 실천에만 능동적인 경우가 많다. 문학은 이제 문학이라는 좁은 공간 속으로 숨어들고 있을 뿐이다. 이문구의 죽음을 보며 문학에 대한 사회적인 짐들은 이제 벗겨버려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문학은 이제 문학일 뿐이다.(2003.04.01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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