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윌리엄 보이드, <서양교육사>를 읽다

등장인물이 많은 책을 읽는 것은 힘든 일이다. 이번에 <서양교육사>를 읽으면서 그 사실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기껏해서 10명 안쪽의 등장인물들을 가진 소설책이나, 아니면 필자 한 명의 집요한 주장들을 따라가기만 했던 이론서를 아주 가끔 읽던 나로서는 선사시대부터 시작해서 19세기까지 이르는 교육에 관련된 인물들이 거의 한 번씩 얼굴을 내미는 <서양교육사>를 읽는 것이 고역이었다. 도대체 누구에게 초점을 맞춰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페스탈로치가 어떻게 살았지? 아하~.거참 재밌구만. 페스탈로치에 대해 더 볼만 한 건 없나?' 하고 생각하다보면 바로 그다음에 프뢰벨이니, 헤르바르트니 하는 인물들이 교육학의 거장이라는 이름을 달고 연달아 등장하여 날 당혹하게 만들었다. 도대체 거장들은 왜 이렇게 많은 건지. 19세기까지만 나와있기 천만 다행이었다. 

 

 하지만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임용고사를 준비해야겠고, 임용고사를 준비하려면 교육학을 공부하기는 해야하는데, 죽어도 학원강사의 이름이 제목인 교육학 문제집부터 공부하기는 싫어서 든 책이라 끝까지 다 보기는 다봤다. 나 스스로에게 대견하다고 칭찬해주고 싶다. 물론 머리 속에 남은 것은 별로 없지만...

 

아무리 설렁설렁 읽었다고 하더라도 6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읽다보니 중간중간 재미있는 부분들이 많이 있었다. 스파르타 식 교육을 보면서 지금 내가 몸담고 있는 이 군대의 교육과 흡사하다는 점에서 쓴 웃음을 지었고, 페스탈로치의 고생스러운 일대기를 보면서 무슨 한 가지 주장을 현실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설득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달았으며, 듀이의 실험실 학교 사례를 보면서 실제 행위를 통해 교육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걸리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워낙 다루는 내용이 많아 너무 요약적으로 정리되어 간단한 사실 전달에 그치고 말았다는 건 읽기 전부터 예상한 바라 별로 신경쓰진 않았지만, 하도 옛날에 쓴 책이다보니 말도 안되는 한문 어투나 한문을 그대로 실어놓은 것은 나의 설렁설렁한 통독에 가장 큰 방해가 되었다. 또한 20세기 초반에 쓰여진 책이 되어 20세기 교육학의 흐름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이 책을 읽고 나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여기서도 두꺼운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자신감 획득과 함께, 교육사에 대한 관심이, 아니 더 나가서 교육 전반에 관심이 생겼다는 점이다. 사대출신이고, 교육을 고민하는 학회에서 대학생활을 했지만, 겉멋에 취해 제대로 교육에 대해 고민을 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이번 기회를 통해 교육학 전반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과 더불어, 현장 교육 전반에 대한 관심을 높여야겠다는 한 가닥 의욕이 생겼다.

 

근데 생각해보면 억울한 점이 좀 있다. 나도 대학교 다닐 때 교직과목을 이수했다. 한 10과목은 들은 것같다. 물론 <교육사>도 들었다. 그러면 뭐 하나 그때 난 200명 쯤 듣는 수업 뒤에서 엎드려 자는 날라리였다. 사대의 교직 수업하면 떠오르는게 몇 개있다. 먼저 기본적으로 100명이 넘는 수강생 숫자. 장난이 아니었다. 그 덕에 난 매일 뒤에서 잤다. 그다음은 예쁜 필기를 자랑하는 여학생들. 임용고사를 준비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여학생들이 앞에 웅크리고 앉아 전 학교를 통틀어 가장 깔끔한 필기능력을 자랑하며 수업을 경청했던게 떠오른다. 난 그들의 필기를 빌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대비했다. 또 내가 4학년 쯤에 교직 수업에 너무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1, 2학년 수강신청자들을 짤라버린 사건도 떠오른다. 교직과목을 꼭 이수해야 졸업이 되는데, 상대적으로 1,2학년은 기회가 많으니까 나중에 들으라는 거다. 이런 빌어먹을 기억들만 놓고봐도 사대의 교직 수업에 정나미가 떨어진다. 취직이 잘 안돼 임용고사에 목숨을 거는 여학생들의 모습과 졸업을 목표로 교직 과목을 이수하는 그외의 학생들. 교직과목은 교사가 되기 위해 필요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었다. 단지 취직이나 졸업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물론 나도 그 중에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도 하나 기억이 나는 수업이 있었다. 어떤 미친 강사 하나가 <교육과정> 수업을 매일 8시에 하기로 했다. 처음에 100명 쯤 신청했다가 쫙 빠져나갔다. 난 그때 대학원 시험을 준비한답시고 매일 일찍 도서관에 나가는 편이어서 별로 부담없이 그 수업을 수강신청했다. 들어가보니 듣는 학생은 20명 남짓. 그 강사가 나름대로 의욕도 많고 해서 나름대로 재밌게 수업을 들었다. 특히 미국의 교육과정을 우리나라 현장에 적용하는 교육정책의 입안자라 직접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더 재밌는 편이었다. 난 그때 국문학과 대학원을 간다고 생각해서 교육학에 거의 관심이 없었지만, 그 수업 하나만은 교수하고 싸워가며 재밌게 들었다. 그 외의 수업은 영 꽝이었다. 차라리 학회에서 했던 교육이론 세미나가 더 나았다.

 

안타까운 일이다. 빌어먹을 돈을 한 학기에 200만원씩, 아니 지금도 비슷할테니 400만원씩 들이부으면서 교사를 하겠다는 사람들에게 그따우 교직과목을 이수시키고 있으니... 답답한 일이다. 최근에 읽은 <미국교육과 아메리칸 커피>라는 책에 보니 미국의 대학에서 가르치는 교직과목은 적어도 이 정도는 아닌 것 같더라.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교육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없이 교과에 대한 지식만 가지고 현장으로 뛰어드는 교사들을 보면, 총탄앞에 맨 몸으로 뛰어들다가 처참하게 죽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첫 장면이 생각날 지경이다. 하긴 나도 거기서 예외가 아니라는게 더 비참하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가라타니 고진, <윤리 21>

친일파에게 책임을 묻는다



가라타니 고진의『윤리 21』을 읽고.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가 한국에 비교적 널리 알려진 것은 어떻게 보면 불미스러운 사건에 의해서였다. 이명원이라는 한 신예 비평가가 김윤식이라는 문단의 거목에게 "당신은 표절이야"이라고 비판하면서, 그 표절한 부분을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에서 인용했기 때문이다. 그 사건은 뭐 그 사건이니 그냥 넘어가더라도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사람이『일본 근대문학의 기원』과 같은 책을 썼으니, 그는 문학 비평가가 틀림없을 듯하다. 물론 그는 「나쓰메 소세키론」으로 등단한 문학 비평가가 맞다. 그럼에도 그가 지금까지 걸어온 사상의 궤적을 살펴보면, 그가 단순히 문학에만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는『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이라는 저서에서는 마르크스의 『자본』을 다시 읽어내면서, 잉여가치의 발생을 재조명해보고 있는데, 이런 일을 시시때때로 벌이는 사람을 문학 비평가라고만 규정짓기에는 그에게 상당히 미안한 감이 있다.
이번에도 그는『윤리 21』을 통해서 새로운 문제제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제목에서 보여지듯이 21세기의 새로운 윤리학을 구성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가 새로이 구성하는 윤리학의 중심에는 "인간의 책임"이라는 문제가 놓여 있다.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답하기는 정말 어렵다. 예를 들어 그가 제기한 이런 문제를 생각해보자. 잔인하게 살인을 저지른 아이에 대해 누가 과연 책임을 져야하는가? 그 부모가 책임을 져야하는가? 흔히 자식을 잘 못 교육시킨 부모의 탓을 하며, 부모가 책임을 지고, 사죄해야한다고 말한다. 특히 일본의 경우, 역사적인 맥락과 결부되어 그런 경향은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가라타니 고진은 이러한 사건에 대해 부모의 탓만을 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부모의 탓을 한다는 것, 이것은 바로 한 인간의 책임을 그가 속해있는 구조 속에 돌려버림으로써, 그 인간의 책임을 없애버리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한테 무슨 책임을 지게 하느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부모가 아이를 마음대로 키울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라. "부모가 눌러도 아이는 자란다"고 생각하는게 맞다. 그렇기에 부모와 아이를 다같이 강요하고 있는 어떤 힘에 대해 살펴보는게 더욱 중요하다.



한 인간이 어떠한 행위를 했으며, 그에 대한 책임을 따질 때, 보통은 그 행위의 원인이 무엇인지 찾는다. 그리고 그 원인 때문에 한 인간이 어쩔 수 없이 그런 일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다고 판단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적절한 판단이 아니다. 스피노자의 생각대로 인간은 복잡한 인과관계의 연쇄 속에서 결정론적으로 움직이는 꼭두각시 인형과 같을 지 모르지만, 그 구조의 인과성을 인정한 가운데서, 인간이 자유롭다고 "가정"해야 그 행위의 책임 소재를 가리는 것이 가능하다. 심지어 고진은 결정론적 사고를 보여주는 스피노자마저도 이점을 간과하지는 않았다고 본다. 이것이 바로 가라타니 고진이 '구조주의적인 사고를 유지하면서 어떻게 주체성을 회복할 것인가"를 고민한 결과이다. 그렇다고 그가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자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구조의 문제를 이야기할 때는 개인에 대한 것은 괄호 안에 넣어야 하며, 개인에 대한 책임을 말할 때는 구조의 문제는 일단 괄호 안에 넣어두자는 것이다. 고진은 이 두 가지 다른 차원을 혼란스럽게 겹쳐서 개인의 책임을 무마하려는 태도를 거부한다.



그가 이러한 결론에까지 도달하게 된 것은 칸트에 대한 세밀한 독서가 큰 역할을 한 듯하다. 칸트에 대해서 이전까지 있었던 비판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공동체의 의무"에 종속시켰다는 지점에 집중되었는데, 고진은 이 비판들이 피상적이라고 말한다. 칸트가 "의무"라고 말할 때, 그 "의무"는 "자유로워져라"라는 의미의 "의무"였으며, 그것은 가족이나 국가와 같은 공동체의 도덕과는 완전히 다른 지점에서의 "의무"이다. 고진은 개인이 살면서 어쩔 수 없이 속하게 되는 공동체가 부여하는 규범들을 구조라는 관점에서 "공동체의 도덕"이라고 지칭하고, 그와 반대되는 지점에 "세계시민적인 윤리"를 설정했다. 칸트가 "의무"를 말했을 때는 후자인 "세계시민적인 윤리"를 지칭한다.

그러나 한 개인에게 "공동체의 도덕"과 "세계시민적인 윤리"가 부딪히는 경우가 발생하는 때에는 어떻게 해야할까? 여기서 그는 미나마타 병을 발생시킨 공장의 간부들의 예를 들고 있다. 수은이 병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 사실을 공표했을 때 공장이 망하고, 자기 집안이 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침묵했다. 공동체의 도덕에 충실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계시민적인 윤리감각으로 보았을 때, 그들에게는 무거운 책임이 있는 셈이다.



이런 논의들을 이끌어 나가면서 그는 전쟁이라는 문제를 다시 거론한다. 그가 결국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전쟁의 책임이 천황에게 있다는 점을 확실하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일억총참회"라는 식으로 책임을 유야무야 시켜버리는 태도가 그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의 입장에서 그의 말들을 듣고 있노라면, 그 침략전쟁에 동조했던 한국인들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아직도 한국인들은 친일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민족행위자에 대한 명단을 공개한 후 나타난 반응들을 생각해 보라. 친일파에 대해 옹호하는 입장은 대부분 일제시대에 친일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얼버무림이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고진이 가장 염려했던 부분이 아닐까? 고진은 개인의 책임을 물을 때, 구조의 문제는 괄호 안에 넣자고 했다. 그러나 친일파들을 옹호하는 이들은 자기가 편한 대로 구조가 개인을 억압하고 있지 않았느냐며 항변한다. 물론 그들의 입장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일파들에 대한 평가는 엄중하게 내려져야 한다. 그 문제가 과거의 문제이기 때문이 아니다. 과거에 대한 평가는 현재의 재확인이기 때문이다. 고진은 키에르케고르를 이렇게 인용한다.



"죽은 자는 어떠한 현실의 대상도 아니다. 죽은 자는 자신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산 자 안에 무엇이 있는가를 끊임없이 밝히는 기회며, 혹은 산 자가 그에게는 이미 현존하지 않는 죽은 자에 대해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되는 기회에 불과하다."



흔히 오십보, 백보라는 말을 쓴다. 맹자에서 나온 말이다. 전쟁에서 오십보를 도망한 병사와 백보를 도망간 병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맹자의 질문에 왕은 둘 다 똑같은 놈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가라타니 고진은 다르게 생각한다. 어떻게 오십보를 도망간 병사와 백보를 도망간 병사가 같을 수가 있냐고 되묻는다. 백보 도망간 병사가 먼저 달아날 때, 오십보 도망간 병사는 그 시간만큼을 적들과 싸우고 있었다. 우리편이 이미 졌다는 절망감과 적들의 검과 창을 맞닥뜨릴 때의 그 죽음의 공포를 그는 그래도 좀 더 견디고 있었다. 그 실존적인 견딤을 무시할 수 있을까? 가라타니 고진은 구조가 우리를 구속하고 있을 때에도 개인의 책임을 다해야 함을 이런 식으로 말하고 있는 듯하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노래를 모으다...

같이 근무하는 한 친구가 차를 샀다. 차에서 들을만한 노래가 없다고 해서 나보고 노래를 CD로 좀 구워달라고 한다. 그래서 이것저것 노래를 골라보았다. MP3로 다운받아 둔 노래가 별로 없어서 가지고 있던 CD를 복사하다보니 시간이 꽤 걸렸다. 이왕 시간이 많이 걸린 김에 그동안 내가 좋아했던 노래들을 한 번 모아보기로 했다. Favorite라는 이름의 폴더를 하나 만들어 그곳에 노래를 모아보니, 모아둔 한곡한곡마다 사연이 있음을 알게되었다.

 

다른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겠지만, 난 어떤 노래를 듣다보면 과거 어느 시절에 묻혀있던 한 순간이 불현듯 떠오르는 경험들을 한다. 예를 들어 난 심신의 <그대 슬픔까지 사랑해>라는 노래를 들으면 그 노래를 줄창 들었던 중학교 수학여행 때의 버스 안이 생각난다. 뿐만 아니라 강산에 <그래도 9월이다>라는 노래를 들으면 암울했던 2000년의 봄 그리고 여름이 생각난다. 실연의 상처로 자기혐오의 늪에 빠져서 매일매일을 술에 쪄들었던 그해 봄과 여름. 난 그래서 그해 9월을 그렇게 기다렸던 것 같다. "생각난다"라는 표현은 그렇게 정확하지 않다. 몸으로 느낀다고 할까. 난 강산에의 그 노래를 들을 때 그 노래를 듣던 과거의 그 시간의 경험이 그대로 되살아남을 느낀다.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어 뒤척거릴 때 느껴지던 자취방의 더러운 이불들의 촉감, 머리 맡에 놓아두고 마시던 이온 음료의 맛 등등.....<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한 장면과 흡사한 경험이랄까.

 

이런 면에서 Favorite 안에 모아놓은 노래들을 듣는 것은 결국 과거 기억의 한장면, 한장면을 되새기는 경험인 듯 싶다. 재미있는 건 살다보면 그 폴더 안에 새로운 곡들이 추가된다는 거다. 또 새로운 추억들이 생기고 그 추억만큼 노래도 늘어난다. 얼마 전에 임관파티를 준비하기 위해, 군악대에 저녁마다 들러서 후보생들과 함께 밴드 연습을 한 적이 있다. 훈련소라는 삭막한 환경 속에서 매일매일 밴드 연습을 하며, 후보생들과 함께 재미나는 시간을 보냈다. 그때 난 내가 <브레스트 오프> 에서 지휘자 역할을 했던 피트 포슬스웨이트가 된 듯 했다. 날 둘러싸고 있는 주변 환경은 날 슬프게 만들었지만, 밴드 연습을 하러가는 그 시간만은 나에게 행복감을 주었다. 매일매일 조금씩 후보생들의 연주가 그럴 듯해질 때마다 난 내가 직접 연주를 하는 것마냥 기분이 좋았다. 나중에 임관파티를 할 때 그 밴드가 다른 후보생들의 환호를 받을 때 난 나름대로 가슴이 벅찼다. 그때 후보생들과 함께 불렀던 노래가 윤도현의 <잊을께>였다. 

 

한 4년 전만 하더라도 난 윤도현을 열광적으로 좋아했었다. 대학 졸업할 때쯤에 맘 맞는 형들과 함께 자주 가던 라이브 술집을 빌려 졸업기념 공연을 했는데, 그때 불렀던 노래들이 주로 <가을 우체국 앞에서><너를 보내고> 등등의 노래들이었다. 하지만 요즘의 윤도현을 난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왠지 가벼워진듯하고, 말랑말랑해진 듯도 하고... 2집 때의 치열함이 없다고나 할까. 그때는 좋아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지만, 요즘은 개나 소나 좋아하는 가수가 된 데 대한 아쉬움도 있고. 그래서 비교적 최근의 곡인 <잊을께>를 내가 좋아할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후보생들과 호흡을 같이 했던 기억들이 남아서 그런지, 그 노래를 듣고 있으니 왠지 가슴이 아렸다. 이미 임관해서 이곳을 떠나버린 그 녀석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해서.

 

그러고 보면 꼭 좋은 노래라고 해서 기억에 남는 것은 아닌가 보다. 별로 좋지 않은 노래라도 오래 기억이 나기도 한다. 지금 내가 자주 부르고 있는 군가들도 아마 나중에는 오래 기억에 남을 듯 싶다. 땀에 쩌들었던 빨간 모자와 입안을 금방 버석거리게 만드는 연병장에서 피어오르는 먼지들과 그리고 목이 쉴대로 쉬어 금방이라도 죽어갈 듯한 처절한 목소리로 귓청을 때리던 후보생들의 음성과 함께...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나는 왜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요즈음은 새로운 보직을 시작해서 여러모로 심신이 피곤하다. 300명이 가까운 후보생들에게 40여 품목의 보급품을 나누어주는 일은 내 성격과 정확히 반대되는 일이다. 나야 항상 '사는데 뭘 그렇게 다 갖추어놓고 사나, 그냥 뭐 한 두개 없는 채로 살지 뭐...'라는 식의 적당주의로 일관해왔다. 하지만 이번 일은 치약하나 잘 못 세어도 결국 내 책임으로 돌아오는 일이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분명히 정확하게 셌는데, 나누어주고 보면 왜 이렇게 항상 부족한지 알 수가 없다. 내일도 또 부족한 게 뭔지 어디에 숨었는지, 결국 그건 누구 탓인지를 밝히기 위해 동분서주해야한다. 이런 빌어먹을...

 

문제가 발생했다. 결국 몇 가지 보급품이 빵꾸가 났다. 제길... 보급품을 나누어주던 조교하나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 숫자가 안 맞다면서 나에게 그 책임을 다 덮어씌우려 했다. 물론 결국은 내 책임이 되겠지만, 그런 조교의 말투가 기분을 확 상하게 했다. 욱하는 마음에 뭐라고 한마디했다. 기분 더 잡쳤다.

 

군대에 들어와서 이런 빌어먹을 놈의 책임소재를 가리는 일에 진절머리가 난다. 누구의 책임인지를 서로서로 떠넘기려는 분위기. 나 또한 그런 일에 매우 익숙해져 있다. 내 책임은 절대 아니라는 식의 태도들. 그 과정에서 난 사소한 일에만 분개하다가 어리버리하게 책임을 다 뒤집어 쓰기 일쑤다. 이런 일이 반복되니 난 이곳의 일이 맞지 않음을 매번 느낀다.

 

물론 여기만 그렇겠는가. 어디 직장을 취직해도 이런 일은 마찬가지일거다. 그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항상 답답하다. 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게 아니라고 했던가. 군대는 군대에만 있는게 아닌가 보다.

 

답답한 마음에 시집을 펴들었다. 김수영의 시 중에 뭐 '나는 왜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운운하는 시가 있다는게 떠올라 찾아 읽었다.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30원을 받으러 세번씩 세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

가로놓여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 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스들과 스펀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릴 일이 있었다

너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펀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 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있다 절정 위에는 서있지

않고 암만 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장이에게

땅 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장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들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그러니까 나 또한 이렇게 옹졸하게, 별 다른 의미도 없이 반항한다. 결국 나 자신의 피곤함과 귀찮음과 몇 푼의 돈때문에 조그만 일에만 분개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늑대인간>을 읽다가

지젝의 책을 읽다가 지젝을 읽기위해서는 라깡을 기본적으로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라깡의 책을 뒤적거리다가 라깡을 읽기 위해서는 프로이트를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또 프로이트를 읽기위해선... 아차!!! 이게 바로 기표가 끝없이 미끄러지는 것인가?

 

어쨌거나 기표의 끝없는 미끄러짐에 몸을 맡겼다간 죽도밥도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프로이트의 책에서 멈추기로 했다. 옛날에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샀었다는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휴가기간 동안 시골 집에 간 김에 집 안 창고에 고이 처박아 두었던 책들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뒤지기를 30분 여, 난 나에게 정신분석학에 관련된 서적이 이렇게 많았는지 처음 알았다. 무턱대고 사다가 쌓아놓기만 한 책이 10여 권 되었다.    

 

십 여권의 책을 꺼내놓고 어느 것을 먼저 읽을 지 고민했다. 끝없이 미끄러지는 기표연쇄 속에서 한 군데 누빔점에 기표를 정박시키듯이 난 프로이트의 <늑대인간>을 꺼내 들었다. 대학 다닐 적에 빠지지 않고 강의를 꼬박꼬박 챙겨들었던 김선생님의 추천서적이기에 선뜻 손이 갔다. 결국 난 학교라는 제도에 의해 누벼지고 만 것일까...

 

아무튼 집어든 책이니 그래도 읽어보자는 생각으로 <늑대인간>에 펼쳐진 사례들을 읽기 시작했다. 시골 집의 유난히 어두운 밤을 배경으로 흐릿한 불빛 아래, 보일러도 들어오지 않는 싸늘한 방의 냉기를 느끼며 혼자 <늑대인간>을 읽자니 소름이 돋아 견딜 수가 없었다. <늑대인간>을 읽고 있으면 꼭 X-file이나 믿거나 말거나의 한 장면이 연상되었다. 세상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하고 그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차근차근 설명하다보면 상상치도 못했던 이유들을 찾아내는데, 그 이유들 또한 만만치가 않았다. 그래서 난 밝은 날 다 시 꺼내 보기로 마음 먹고 책을 덮었다. 성격 상 무서운 영화도 잘 못보는데, 그런 상황을 견뎌낼 만할 배짱이 있을 리가 없었다...^^

 

밝은 날 다시 꺼내 읽어보니 상당히 인상깊은 구절들이 있었다. 세상 일이 다 그렇겠지만 겁만 먹지 않는다면 항상 의미있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들은 그들의 성애(性愛)의 생활에서 그토록 멋지고 중요한 순간들을 어떻게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갈 수 있는지 놀랍다. 그리고 어떤 때는 사실 그런 순간이 있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혹은 그런 순간을 알아차린다 하더라도 자신을 완전히 기만하여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지나갈 수가 있는지 놀랍다...

 

 

우리가 심한 우울증에 걸린 소녀나 여자에게 우울증에 빠지게 된 원인이 될 만한 일이 있었나 물어보면 어떤 사람에게 감정을 조금 느꼈었지만 포기해야 되었기 때문에 곧 잊어버렸던 일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쉽게 견디어 낸 것처럼 보였지만, 그렇게 포기한 것이 심각한 정신장애를 일으킨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순간순간 우리에게 벌어지는 일들을 우리는 다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들은 어느 틈엔가 우리의 몸과 마음 어느 곳에든 새겨진다. 내 몸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난 이성이라는 도구를 가지고 충분히 통제하고 있다고 판단하지만 그것은 오만에 불과하다. 항상 난 무엇인가 잊어버리고, 잊어버린 그 무엇인가로 인해 매번 놀라움에 빠질 뿐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루시퍼와 큰 타자 - <콘스탄틴>을 보고...

시간을 때우기 위해 영화를 보는 것처럼 불쌍한 일도 없지만, 얼마 전 나는 정말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 극장에 들어갔다. 사람으로 북적거렸다면 짜증마저 났을 터이지만, 몇 명 없는 사람으로 인해 모처럼 조용해진 극장을 위안삼아 걸려있는 여러 영화를 죽 훑어보았다. 오직 커다란 스크린에 어울릴 법한 영화를 보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콘스탄틴>이란 영화를 골랐다. 보고 난 뒤의 느낌은? 뭐 나름대로 시간을 보내기에는 나쁘지 않은 영화였다라고 할까. 영화 자체가 매우 훌륭하다거나, 뭐 배우가 멋있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난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위에서 말한 "뭐 나쁘지 않군"이라는 반응보다 더 흐뭇한 기분이 계속 남아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도대체 그 느낌이 뭘까라는 의문이 계속 남아 있었다. 

 

내 생각에 <콘스탄틴>은 기독교적인 선, 악 구도를 나름대로 재해석한 영화인 듯 싶었다. 하느님과 사탄이라는 절대선, 절대악 사이에서 인간은 그들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단, 한 가지 단서가 달려있는데 저승세계의 선과 악은 그리스 신화의 신들이 했던 것처럼 직접 영향력을 행세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반드시 그들은 그들과 인간의 혼혈종을 통해서만 이승의 세계로 개입할 수 있었다. 이렇게 묘한 균형을 이루던 중, 사탄 즉 루시퍼의 아들이 하느님의 충복인 가브리엘과 손잡고 사탄의 눈을 속여 지상에 강림하려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가브리엘이 왜 인간 세계를 모두 지옥으로 만들어 버리려는 루시퍼의 아들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냐고? 인간은 고통이 심해질 수록 선한 본성이 드러나기 때문에 보다 심한 고통 속에 몰아넣어 인간의 선한 본성을 극대화시키겠다는 어이없는 착각을 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주인공인 퇴마사 키아누 리브스는 이 시도를 깨기 위해 자살을 시도해서 자신의 영혼을 호시탐탐 노리는 루시퍼를 불러내고, 그 찰나에 아들의 시도를 알게된 루시퍼는 말썽꾸러기 아들을 데리고 가버린다. 

 

뭐 이러저런 이야기를 다 빼고 대충 이런 이야기인데, 여기서 내가 제일 맘에 들었던 것은 루시퍼의 형상이다. 루시퍼는 배트맨 포에버에 나올 법한 짙은 화장을 하고, 흰색 양복을 쫙 빼입은 제비족처럼 차려입고 등장했던 것이다. 물론 말투는 리마리오를 빰칠 정도로 느끼하고...ㅋㅋㅋ 뿐만 아니라, 주인공이 희생을 통해 지옥에서 천당으로 방향을 급선회하자, 비겁하게 폐렴에 찌든 폐를 주물럭거려 그를 다시 살려낸다. 다시 살면서 나쁜 짓을 더해서 꼭 지옥으로 오라고 말이다. 영화 전체의 대전제를 구성하고 있는 한 축인 절대악, 그 절대악을 상징하는 인물이 이런 식으로 등장했을 때 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영화를 다 보고 난 뒤에 계속 남아 있던 흐뭇함은 바로 이 루시퍼를 처음 보았을 때의 그 즐거움 때문이었을 거다.

 

그런데 오늘 라깡과 지젝에 관련된 글을 읽다가 난 이 루시퍼를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었다. 그 부분은 다음과 같다.

 

 

"상징계에 의해 소외된 주체는 자신의 삶을 결정지은 대타자가 '정답'을 갖고 있다고 믿고 끊임없이 대타자에게서 그것을 찾으려 할 것이 아니라, 대타자도 주체가 찾는 '숨겨진 보물'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경험을 함으로써만 소외를 극복할 수 있다."

 

  홍준기, 지젝의 라캉 읽기 -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을 중심으로

 

 

라깡에 의하면 주체는 상징계에 의해 필연적으로 소외를 겪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상징계는 주체를 이러저한 주체로 미리 규정(호명)한다. 그러나 항상 그 규정은 어긋날 수밖에 없기에 그 결여가 소외로 경험된다. 그 소외를 벗어나려면? 먼저 환상효과를 노린다. 즉 상징계를 구성하는 대타자에 대한 환상을 품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즐거운 해결책은 대타자 또한 결핍 덩어리임을 깨닫는 것이다. 거기서 주체는 집착에서 벗어나 "분리"된다.

 

선과 악이라는 절대적 대립 구도에 매달려, 끊임없이 한 쪽 편을 신성화하고 반대쪽 편은 배제하는 식으로 살아간다면 주체는 끊임없이 환상을 재생산하는데 집착할 수밖에 없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방방곡곡 외치고 다니는 전도사들처럼. 하지만 절대악이 위에서 말한 "루시퍼"처럼 결점가득한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신성불변의 대립 구도의 한 축을 어이없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리스의 신들이 결점 투성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에 인간들이 보다 즐겁게 살 수 있었다는 생각도 들고.

 

대타자와 주체의 관계 문제는 비단 종교의 문제에 해당되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나 또한 군대라는 상징계 속에서 이미 군인 혹은 군인을 길러내는 훈육관이라는 위치에 호명되어 있기에 그 역할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군대라는 감시체계에 적응하지 못해, 군대라는 빅브라더 혹은 라깡식으로 말하자면 "대타자"가 끊임없이 나를 감시하고 있을 것이라는 강박관념에 시달렸었고, 군대로부터 소외되지 않기 위해 이상적인 군인을 길러내는 훈육관의 역할이라는 환상과 그것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현실 사이에서 여러 가지 심리적 압박감을 느껴왔었기 때문이다. 이제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그런 심리적 압박감은 교관으로 생활하는데도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환상에서 벗어나 분리될 때 오히려 이곳에서의 일도 잘 풀리는 것 같기고 하고.

    

아무튼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라깡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내가 쉬고 있을 때, 경쟁자의 책장은 넘어가고 있다"가 아니라 "내가 쉬고 있을 때, 경쟁자도 쉬거나 딴 짓을 하고 있다"라는 즐거운 사고방식이 아닐까. 어쨌거나 이런 생각과 더불어 <콘스탄틴>에 등장한 루시퍼는 나에게 즐거운 기억으로 한동안 남을 것 같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마리아 니콜라예바, <용의 아이들>

동화에 대한 기호학적 분석
마리아 니콜라예바,『용의 아이들』, 문학과지성사, 김서정 역, 1998






1. 아동문학에 대한 개인적 편견에 대하여

언젠가 교육 현장에서 독서교육의 문제를 고민하고 있는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때 그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동화"를 읽히는 것도 상당히 좋은 효과를 낳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의아해했었다. 왜냐하면 개인적으로 "동화"라 하면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전래 동화 비슷한 것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래동화들의 그 상투적인 결말이나 주제의식이 학생들에게 어떤 효과를 낳을 지 의심스러웠다. 그뿐 아니라 어렸을 때 읽었던 소파 방정환의 동화들이 거의 대부분 번안 동화임을 알게 된 이후로, 동화라는 것은 전래동화나 번안동화가 대부분이 아닌가하는 생각 정도밖에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 선생님은 우리에게 좋은 창작 동화들이 많이 있으며, 이런 창작 동화들은 단순히 어린이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씀해주셨다. 또한 전래동화라 하더라도, 브루노 베텔하임이나 이링 페처와 같은 사람들은 그런 전래동화들을 깊이 있게 읽어내고 있다고 했다. 이런 저런 의미에서 동화에 대한 개인적인 편견들이 조금은 나아진 기회가 된 듯 싶었다. 그런데 이런 개인적 편견을 교정할 수 있게 된 또 하나의 좋은 계기 중에 하나가 바로 이 마리아 니콜라예바의『용의 아이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원제는 'Children's Literature Comes of Ages'로서, 번역하면 '성숙기의 아동문학' 정도가 된다고 하는 이 책은 아동문학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이론서이다. 정확히 단언할 수는 없지만 이 책으로 짐작컨대, 마리아 니콜라예바의 지적 배경이 되는 북구 유럽의 경우에 안데르센 이후로 동화 창작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그 활발한 창작과 동시에 폭넓은 독서가 이루어진 듯 싶었다. 흔히 생각하기로, 동화라고 하면 교육적 가치에 대한 분석을 쉽사리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그녀는 특이하게도 동화를 둘러싸고 있는 교육적 가치라는 개념을 조금은 무시한다. 왜냐하면 동화에 대해 지나치게 교육적 가치만을 주장하는 것은 동화 창작에 하등 도움이 안 된다고 본다. 그녀는 "성인문학은 교육적이지 않아도 되는데, 왜 유독 아동문학만 교육적이어야 되는가?"라고 반문하면서, 양쪽 다 교육적이면 교육적인 것을 인정할 수 있지만, 아동문학에만 지나치게 부여된 교육적 함의는 동화의 짐 지워진, 버거운 무게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생각들을 바탕으로 해서, 마리아 니콜라예바는 동화들에 대한 기호학적 분석을 보여준다. 그녀 개인적으로도 유리 로트만의 기호학 이론에 상당히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시인하고 있다. 그런데 이 기호학적 분석이 이론의 소개와 그 적용에 초점만이 맞추어져 있다면, 이 책은 좋은 책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용의 아이들』이라는 책은 동화라는 연구 대상이 지닌 독특한 특징을 기호학적 분석이라는 방법론이 잘 밝혀주고 있다는 점에서, 대상과 방법의 행복한 일치를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녀가 보여주는 동화에 걸친 몇 가지 문제들을 살펴보자.


2. 기호학적 동화 분석

브루노 베텔하임은 정신분석학적으로 동화를 분석하여, 전래동화에 숨어있는 무궁무진한 가치들을 발굴해내었으며, 이링 페처는 페미니즘적인 동화읽기를 시도하여, 종래의 전래동화들의 의미를 전복시켰다. 그런데 마리아 니콜라예바는 동화가 놓여있는 기호학적 상황에 주목한다. 기호학적 상황이라는 것은 동화라는 문학작품이 어떤 식의 코드화를 통해 생성되고 또 어떤 상호텍스트적인 의미공간 속에서 받아들여지는가를 살펴보고 있다는 말이다. 그녀가 제시하고 있는 이 방법론에 대한 하나의 예를 들어 보자. <걸리버 여행기>와 같은 작품은 작품 전체를 놓고 생각해보면, 동화라기보다, 성인들이 읽을 수 있을만한, 일종의 철학적 성찰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대부분 축약 번역되어, 한국의 청소년들에게는 거인국이라는 공간에 대한 환상적인 동화정도로 받아들여진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작품이 놓인 기호학적 공간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의미를 획득하게 됨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동화가 하나의 기호학적 상황에서 다른 기호학적 상황으로 전이될 때 벌어지는 현상들에 대한 기호학적 분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마리아 니콜라예바는 아동문학의 고전이라고 손꼽히는 작품들이 각 나라마다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그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 지를 살펴보고 있으며, 그 결과는 어떤 고정된 동화의 고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부정적인 곳에 가 닿는다. 여기서 흥미 있는 것은 니콜라예바의 생각을 참고로 하면, 디즈니의 애니메이션들이 어떻게 해서 성공할 수 있었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은 기획단계부터 철저하게 세계성에 주목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계 시장이 그들의 주무대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디즈니 애니메이션 중에서도 <뮬란>과 같이 특수한 지역을 연고로 하고 있더라도, 그 인물들은 배경과 의상을 제외하고는 결코 주인공들이 속해있는 지역의 문화적 특수성을 절대로 담아내지 않는다. 그렇게 했다가는 문화의 기호학적 번역 불가능성에 의해 세계 시장 중에 일부를 잠식당할 우려가 발생할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주장 중에서 가장 주목할 수 있었던 것은 동화를 번역함에 있어서, 직역이 과연 필요한 것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한 점이다. 그녀는 '문화 간 풍성한 상호작용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조건은 "창조적으로 오해되는" 상호 번역 불가능성'이라고 본다. 이러한 생각들이 로트만의 생각을 많이 받아들인 곳인데, 상당히 의미심장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만약에 그 나라 아이들만이 이해하고 있는 동요들이 삽입된 동화를 번역한다고 해보자. 그런 경우 동요를 그대로 직역한다는 것은 그 의미의 전달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주석을 단다고 해도, 그런 식의 주석을 과연 동화를 읽는 이들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볼 때, 그것은 별로 효율적이지 못한 방식이다. 따라서 니콜라예바는 그런 번역을 할 때에는 기호학적 의미 상황에서 보았을 때 그 동요와 가장 흡사한 위치에 있는 번역해오는 나라의 동요를 선택해서, 번역 대신에 삽입하는 것이 의미 전달을 위해 더욱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친다. 이것이 바로 "창조적 오해"인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문학교육의 차원에서 상당히 의미 심장한 방법론이다. 예를 들어 고전문학을 가르칠 때 부딪히는 문제들이 바로 이런 것이다. 고전문학이 놓인 기호학적 상황과 현재의 기호학적 상황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 원문을 직역해서, 현대어로 바꾸어 놓는다고 해도, 그것은 학생들에게 버거운 텍스트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아예 고전어 원문으로 실려 있어서, 고전문학이 살아 숨쉬었던 시기와 학생들이 호흡하는 시기 사이의 소통을 단절시키고 있다. 물론 몇 몇의 현장 선생님들은 경험적인 차원에서 그런 단절들을 극복하는 시도들을 보여주고 있기는 하다. 예를 들어 고전문학 작품의 아우라에 대한 경외감을 극복하기 위해, 현대어로 고친 뒤, 자신의 경험과 비교해보는 작업들을 여러 가지 방식 - 패러디 시, 고전문학의 주인공들에게 편지 쓰기 등등 - 으로 시도해왔다. 하지만, 고전문학이나 외국문학에 대한 전반적인 번역 불가능성을 이해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학생들은 고전문학의 텍스트 자체에 허덕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든다. 이런 의미에서 마리아 니콜라예바의 주장은 중요한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니콜라예바의 분석 중에서 의미있게 와 닿았던 것은, 아동문학이 놓여있는 의사소통의 구조에 대한 분석이다. 아동문학이란 언제나 "발신자와 수신자가 언제나 다른 두 사회에 속해있는 아주 드문 텍스트 타입"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쓰는 사람은 성인이지만, 읽는 사람은 대부분 어린이들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동화를 창작하는 성인은 크게 두 가지 내포 독자를 설정하게 된다. 즉 일단 독자의 대부분이 될 어린이들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창작하지만, 그 한 편에는 자신과 같은 성인이 이 작품을 읽었을 때 어떻게 볼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점은 동화의 독자 범위를 넓힐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하지만, 또 한 편으로 볼 때 동화 창작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주목할 수 있게 만드는 점이 아닐 수 없다.
마지막으로 동화를 바라보는 방식 중에서 니콜라예바의 특이한 생각을 하나 소개하고 마치겠다. 그녀는 동화를 "규범적 텍스트"라고 본다. "규범적 텍스트"란 유리 로트만의 기호학 이론을 차용한 개념이다. 로트만은 텍스트를 두 가지 종류로 구분한다. 첫 번째는 규범적 시스템에 기초를 두어서, 제의적이고 규범적이며, 전통적인 예술 형태를 띤다. 이러한 작품들은 작품 하나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작품 창작의 유형이 정해져 있으며, 그 룰에 의해서 작품을 창작한다. 따라서 개별적 작품 사이의 차이는 각각 다른 경험의 소개로 가능하지, 새로운 형식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이것이 "규범적 텍스트"이다. 이와 반대에 있는 작품들은 규범 즉 일반적 규칙의 파괴에 목적을 둔다.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과 같은 것이 바로 이에 속하는데, 흔히 순수문학이라고 말하는 것이 여기에 속한다. 동화는 전자, 즉 "규범적 텍스트"에 속한다고 보는데(특히 전래동화의 경우), 동화의 특징이 비슷한 형식에서 무한한 재창조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일면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창작동화의 경우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해보면, 그녀의 생각에 조금은 불만스러운 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조금은 생각을 바꾸어서, 학생들이 열심히 읽고 있는 만화에 생각이 미친다면, 그녀가 말한 규범적 텍스트라는 개념은 상당히 중요한 지적이 된다. 학생들이 즐겨보는 만화들의 대부분은 같은 형식 구조를 지니면서 다만 조금씩의 경험차이를 보여주는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만화에도 만화 자체의 형식을 극복하려 노력하는 작품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이른바 대중적인 만화에 매달리고 있다. 그뿐 아니라 학생들이 즐겨 보는 TV 드라마나 영화들의 경우도 이 "규범적 텍스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그녀의 지적은 곱씹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3. 나가며

최근에 해리포터 시리즈가 서점계를 장악했다. 영화까지 만들어져서 인기몰이에 나서고 있다. 이 해리포터 시리즈는 바로 팬터지 형식의 동화이다. 그런데 이 팬터지 동화들이 이렇게 많은 인기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보면 동화의 위력을 새삼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에서 동화는 비교적 낮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제 동화를 다시 한 번 살펴보아야 할 시기라고 생각된다. 주위를 둘러보면 우리에게도 좋은 동화 작품들이 많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청소년의 독서교육의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성인들을 위한 훌륭한 독서물로서 동화는 다시 한 번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노르웨이의 동화 작가 토르모트 하우젠의「하얀성」이라는 작품이 시작하는 곳은 기존의 동화가 끝나는 지점임을 생각해보자.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다는 게 무슨 뜻일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갈등이론의 전개

1. 보수주의적 혹은 자유주의적 설명


"학교"라는 사회 기관에 대해 사람들은 과연 어떤 시각을 가졌을까? 초기의 학자들은 학교에 대해 중립적인 환상을 지니고 있었다. 즉 학교는 사회에서의 성공을 위해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보다 특수하게 학생들에게 제공해 주도록 고안된 종합적인 기관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Parsons와 같은 사람들이 이러한 생각을 전개했었다. 이렇게 되면 학교의 역할은 단순한 것이 되고 만다. 과연 학교는 일정기간동안 개인이 사회생활을 하는 데 필요로 하는 지식을 얻고, 기간이 되면 나가는 장소에 불과한 것인가? 그런 기능적인 역할만을 학교가 수행하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 대답을 찾던 이들은 학교라는 거대한 실체의 음습한 그림자를 발견하게 된다. 객관적이라는 환상 속에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던 학교의 담론들이 어떤 특정한 권력관계를 구성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이 비판적인 접근들은 우선 재생산 이론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형성하게 된다.


2. 재생산 이론

 

재생산 이론가들은 학교가 문화적 우수성, 가치 중립적인 지식, 그리고 객관적인 교수양식을 향상시키는 민주적 제도라는 가정을 거부한다. 대신 이 재생산 이론가들은 학교가 자본의 이익을 매개하기 위하여 권력에 의해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재생산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학교가 일정한 생산 관계를 재창출해낸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에 기반한 이론가들은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의 영향 관계 틀에서 학교라는 기관을 바라보려 했다. 상부구조의 일종인 학교의 담론들은 하부구조인 경제적 생산관계에 의해 직접, 간접적으로 결정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즉 교육이론과 실천에서 국가 또는 정치경제의 일차성과 결정적 성격을 강조함으로써, 재생산적 접근은 학교교육에 대한 자유주의적 관점뿐만 아니라 보수주의적 관점이 갖고 있는 중립성과, 사회이동의 역할 이면에 놓여 있는 이데올로기적 전제와 가정을 밝혀 내도록 하는데 의미 있는 역할을 했다. 학교가 일정한 사회관계를 반영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학교라는 기관이 가지는 영향력에 대해서는 상당부분 부각된 셈이다. 이러한 재생산 이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그 하나는 사회재생산이론이며 두 번째는 문화재생산이론이다.


1) 사회재생산 이론
사회재생산이론은, 학교가 자본주의 생산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사회 구성체를 재생산함에 있어서 주된 역할을 담당한다는 개념을 그 핵심적인 주제로 한다.  

① Althusser
상부구조가 하부구조에 의해 결정된다는 마르크스주의의 오랜 명제에 대해 나름대로의 비판점을 제공한 것이 바로 이 Althusser이다. 그는 "상부구조의 상대적 자율성"이라는 말을 하면서 기존의 생산체계와 권력기관의 유지가 단순히 물리력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측면 즉, 강제력의 사용과 이데올로기의 사용에 의존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의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국가기구도 두 가지 종류로 구분된다. 즉 강제력에 의해 통치되는 군대, 경찰, 감옥과 같은 "억압적 국가기구"와 합의를 통해 통치되고 있는 학교, 가정, 법적 구조, 대중 매체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 바로 이것이 그의 이론을 구성하는 주된 두 개의 중심축이다. 따라서 학교의 의미는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라는 맥락 안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는 경제질서의 단순한 반영이라는 마르크스주의적 학교교육 이론이 물러나고, 학교는 경제적 토대와 특정한 관계로 존재하는 그러나 동시에 그들 자신의 특정한 한계와 실천을 갖고 있는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제도"가 되는 것이다. 
그의 이론에서 한 가지 특이할 만한 것은 이 이데올로기의 작용에 관해서다. 우리는 흔히 이데올로기라고 하면 의식적으로 구성되는 신념체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Althusser는 그런 주장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그는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데올로기는 실로 표출체계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 표출체계들은 "의식"과는 관계가 없으며 보통 상상이며 종종 개념들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것은 "의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대다수 사람들에게 부과되는 구조로서이다. 그들은 지각·수용·경험된 문화적 대상물들이며 그것들을 벗어나려는 과정에서 인간에게 기능적으로 작용한다.


번역문이라서 그런지 약간의 어색한 표현이 있기는 하지만 대략의 의미를 짐작해볼 수는 있다. 그가 지금 무어라고 말하고 있는가? 그는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인간을 무의식의 차원에서 구조로서 얽어매고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에게 구조주의자라는 표현이 주어진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학교에 적용된다고 생각해보자. 학생들은 지배 이데올로기의 영향력 하에서 의식을 형성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지배 이데올로기는 수동적으로 동의하게 하지도 않는다. 단지 그것은 학생들의 무의식을 구성하는 의미와 관념의 표출체계로서만 작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학교 현장이 너무나 무서운 곳이 되고 만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아니 아예 모른 채로 지배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어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무언가 그의 이론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너무나 인간을 수동적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다가 그의 이론이 지배 이데올로기에 노예들이 벌이는 지배체제 전복 운동을 설명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이르게 되면 그의 이론에서 뭔가 부족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2) Bowles와 Gintis
Bowles와 Gintis 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학교교육의 역할에 대한 Althusser의 기본개념을 공유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의 과도한 비중 대신에 대응원리(correspondence principle)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사회에서의 관계와 학교의 관계가 서로 대응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 그들의 중심생각이다. 즉 교육에서의 사회관계도 위계적인 노동분업의 형태와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한다. 특히 교육에서의 이러한 구조적인 관계는 단순히 나중에 일하게 될 작업장에서의 규율에만 익숙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작업장에서 필요한 사회적 정체감, 자기 이미지, 인간의 태도 유형들까지 형성시킨다는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이들의 이론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바로 이점인데 그들은 특정한 인성유형을 창출해내는 학교의 역할에 초점을 맞춤으로서 비인지(非認知)적 지배영역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Althusser와 마찬가지로 지배가 어떤 식으로 정교하게 이루어지는 지에 대한 언급만 있을 뿐 저항에 대한 어떠한 단초도 제시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들에 대한 문제제기로 남아 있다.


2) 문화재생산이론
문화재생산이론을 사회재생산이론과 구별하는 이유는 재생산의 대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회재생산이론의 경우 경제적, 물질적 관계를 재생산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비해 이 문화재생산이론가들은 경제적, 물질적 관계가 아니라 "문화"라는 대상의 재생산이 교육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살펴보고자 했다. 즉 학교가 갖는 문화국면의 구조와 전수의 기초가 되는 원리들에 대한 분석, 또는 학교문화가 어떻게 생성되고 선정되며 정당화되는가에 관한 질문에 대한 대답에 그들 연구가 집중되고 있다. 이중에서 Bourdieu와 Bernstein의 연구를 중심으로 살펴볼 수 있다.


① Bourdieu와 그의 동료들
Bourdieu와 그의 동료 Passeron은 학교를 사회의 단순한 반영으로 보는 환원주의적 설명을 거부한다. 학교는 보다 강력한 경제적, 정치적 제도들에 의해 간접적으로 영향받는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제도라고 주장한다. 얼핏 보면 위의 논의들과의 차이를 구별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에게 특별한 것은 학교가 경제적 제도의 단순한 반영이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상징적 제도 안에 포함되는 제도라고 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중요한 개념 중에서"문화자본"이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이 단어를 자세히 살펴보면 지금까지와는 무언가 조금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자본이라는 것이 경제적 관계뿐만 아니라 "문화"라는 관계에서도 창출될 수 있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이론에 의하게 되면 학교라는 곳은 이러한 문화자본들, 즉 상징재를 학생들에게 불평등하게 분배하는 성격을 지니게 된다. 문화자본이라는 것은 그들 가정의 계급적 배경에 의해 상속받는 상이한 언어적·문화적 능력체계이다. 각각의 학생들이 그들의 가정으로부터 상속받은 문화자본들, 혹은 상징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는 다양한 것이 있을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옷을 얼마나 잘입는가"도 하나의 문화자본이 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Bourdieu는 학교와 가정을 연결했다는 공로가 있다. 다음 인용하는 부분은 언어라는 상징재가 학교에서 어떻게 분배되는가에 대해서이다.


사회언어학의 법칙 가운데 하나는, 특정한 상황에서 사용되는 언어가 내재적 언어학이 생각하듯이 촘스키적 의미의 발화자의 언어 능력(competence)뿐만 아니라 내가 언어 시장이라고 명명하는 것에도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내가 제안한 모델에 의하면, 우리가 생산하는 담론은 발화자의 언어 능력과 그 담론이 유통되는 시장의 '결과'이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말하기는 단순히 발화 능력을 향상시키는 게 아니다. 교양 있는 자들을 위한 말하기 교육은 하류 계층 학생들에게는 결정적으로 불리할 것이 뻔하다. 이렇게 되면 "언어"라는 상징재는 학교 내에서 불평등한 방식으로 분배되고 있는 것이 된다. 이처럼 Bourdieu는 경제적 생산 관계뿐만 아니라 문화적 생산 관계에까지 그 재생산이론의 영역을 넓히고 있다. 또한 Bourdieu는 이 문화적 생산 관계들, 즉 사고의 구성틀에 새겨져 있는 계급에 기초된 기호·지식·행동의 사회적 문법을 아비투스(habitus)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Bourdieu에게도 재생산 이론 전반에 걸친 문제점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문화자본이나 아비투스라는 특수한 개념으로 지배 계급의 종속을 좀 더 세밀하게 포착하고 있을 뿐 그 저항성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학교에서 과연 일방적인 문화자본 전달만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그렇지는 않다. 학생들이 스스로 형성시켜 가는 대항문화자본들의 존재는 어떻게 볼 것인가? 그리고 학생들과 교사들의 문화가 충돌할 때 생기는 문제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요즘 학생들은 학교가 요구하는 문화자본과는 다른 척도들을 가지고 있다. 교양 있는 말 따위는 그들에게 먹혀들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그들만이 가지는 다른 문화자본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학교는 여러 수준의 문화자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충돌이 이루어지는 장소라고 볼 수 있게 된다. 학교가 일방적인 문화자본 재분배 공간은 아닌 것이다. 학교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들이 밝혀낸 바에 의하면 학교 내의 특권적인 입장과 교육혜택은 지역사회의 오랜 투쟁에서 얻어진 결과물이다.
그뿐만 아니라 문화자본 외에도 물적 조건이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음을 Bourdieu는 무시하고 있는 듯하다. 문화자본의 영향력이 상당한 것만은 사실이지만 실제적으로 경제적 조건이 미치는 영향력도 거의 결정적이라고 할만큼 중요하다. 그럼에도 그의 이론에는 이 점이 간과되고 있는 듯 하다.


② Basil Bernstein
Bernstein의 경우 교육은 경험을 구성하는 주된 힘이라고 설명하면서 교육과정, 교수법, 그리고 평가가 어떻게 메시지 체계를 구성하는 지를 설명하려한다. 그는 교육의 구조가 정체성과 경험을 어떻게 형성하는가에 관한 질문을 탐색함으로써, 학교는 교육코드를 구체화한다고 주장하게 된다. 코드라는 것은 권위와 권력이 학교경험의 모든 국면에서 매개되는 방식을 뜻하며, 이것은 다시 집합코드(collective code)와 통합코드(integrated code)로 나뉜다. 이 둘은 교사와 학생들의 교수관계에서 전수하고 전달받는 지식의 선정·조직·속도·시간조절에 대해 통제력을 갖는 정도에 의해 분류한 것이다. 집합코드는 교과의 엄격한 경계와 교사-학생 간의 강한 위계적인 관계에 의해 특성화되는 전통적인 교육과정 형태를 취하며, 통합코드는 교과목과 범주들이 보다 통합되고 교사-학생 간의 권위관계는 보다 협상적이며 변화에 대해 개방적인 교육과정을 표출한다. 물론 통합코드가 진보적인 교육학의 가능성을 더 많이 내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두 가지 코드 모두 사회재생산 양식과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서 Bernstein은 계급관계를 재생산하는 것으로서 학교와 생산양식을 연결하는 구조적 특성을 개념화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그의 연구는 사회통제의 원리들이 학교와 다른 사회제도들에 깊이 박혀 있는 메시지들을 형성하는 구조적 장치에 어떻게 부호화되어 있는가를 확인하는 데 특히 유용하다.


3) 재생산이론을 넘어서
재생산이론의 전반적인 문제로 지적되는 것은 바로 저항의 문제다. 심하게 말해서 재생산이론은 학교 내에서 벌어지는 생산관계 재생산에 대해 좀 더 정치(精緻)한 해석을 덧붙여 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따라서 그 재생산의 고리가 치밀하면 치밀할수록 그 재생산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모습으로 비춰지게 된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들이 그 이후에 많이 이루어 졌다. 특히 신마르크스주의의 사회이론과 민속지 연구와 같은 실증적 접근을 통합하는 시도들이 대표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Willis와 같은 사람들은 학교의 내적 작용에 대해 단지 서술적인 설명만을 제공하는 온순한 방법을 따르지 않는다. 대신에 이들의 관점은 지배사회에 깊이 박혀 있는 결정적인 사회경제 구조들이 일상적 삶의 수준에서 학생들의 대항적인 삶의 경험을 형성할 때 계급과 문화라는 매개체를 통해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분석하려고 노력한다. 즉 교육과정을 지배관계에 기여하는 것으로서 뿐만 아니라 해방적 가능성에 관련된 관심들도 내포하는 복합적인 논의양식으로 분석하였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해방적 관심에 우선적인 지위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3. 실천의 이론

 

이론은 이론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이론이 현실과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그 이론의 가치는 결정된다. 그런데 교육에 대한 진보적인 이론들의 전개를 살펴보다 보면 그 방향이 현실 쪽으로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현실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한다.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의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들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현실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그들은 실천적인 교육사회학을 위한 진보적인 궤적을 그리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이런 탐색의 저변에는 그들 공통이 가진 인식이 있다. 그것은 이 교육현실이 단순히 합의에 의해 형성되어 있지는 않다는 믿음이다. 교육현장은 언제나 여러 계층의 갈등이 존재하며 그 갈등에 대한 대결의식을 견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입장은 우리의 무반성적인 인식에 대해 따끔한 일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전교조가 탄생하고 난 이후 교육현장에 불어닥친 진보적인 흐름은 면면히 이어져 현재에 이르러서는 현장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 우리의 교육 현실을 진보적이라고 말하기에는 여전히 너무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다. 다른 여러 가지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학교 안, 즉 교사들 간의, 혹은 교사와 학생간의 권위적인 관계는 우리 교육의 문제를 대변하는 아주 단적인 예이다. 이런 권위적인 관계는 우리 사회 전반의 권위성을 반영하는 것이면서도 그 권위성을 재생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권위적인 사회 구조를 바꾸어 나가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물론 교육사회학만의 역할은 아니겠지만 이 재생산의 사슬을 끊을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심각한 노력이 필요함을 물론이다.

 


참고문헌 :
헨리 지루, 『교육이론과 저항』, 성원사 (1990)
피에르 부르디외「말하기의 의미」, 『혼돈을 일으키는 과학』, 솔 (1994)
루이 알튀세르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아미엥에서의 주장』, 솔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씁쓸한 만남

요즘 경기가 워낙 좋지 않아서인지 군대에 남아있으려고 하는 사람이 많다. 옛날에는 억지로 말뚝을 박게 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요새는 나가라고 등을 떠밀었으면 떠밀었지 제대 말년의 장교나 부사관들을 남겨두려고 애쓰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 제대가 가까워 오면 사람들은 너도 나도 복무기한을 연장하려고 신청하며, 보다 더 길게 군 생활을 지속하기 위하여 장기복무를 신청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성공률은 날이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장기복무하기가 어려워졌다는 현상과 더불어 불경기로 인해 찾아온 또 한 가지 현상은 군에 입대하는 여성들의 숫자도 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군대의 민주화와 함께 남녀평등 바람이 군에도 불어와 차츰 군 내 여군의 숫자를 늘이는 추세도 추세지만, 여러 가지로 취업이 힘든 여성들은 장기적으로 일자리를 보장해줄 수 있는 군으로 눈을 돌리는것 같다. 사실 군인 또한 공무원이니 고용의 안정성 측면으로 따지면다를 점은 하나도 없다.

내가 맡고 있는 소대에도 여자 후보생이 몇 명 있다. 나는 그들을 담당하고 있다는 이유로 이런 저런 신상명세서를 들추어볼 권리를 가지고 있다.(물론 남자 후보생들의 신상명세서도 마찬가지의 운명을 겪는다) 나도 인간인지라 남들의 과거를 살펴보는 일에 흥미가 없을 리 없다. 흥미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소대원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으라는 유,무언의 압력이 들어오기 때문에 좋든 싫든 난 그네들에 대한 신상명세서 및 여러 가지 자료들을 뒤적거려야만 한다. 이번 차수에도 어김없이 난 신상명세서를 펼쳐보게 되었다. 그렇게 신상을 살피다 보면 가끔 생각지도 못한 인연들을 만나게 되는 수가 있다. 중학교 후배라거나, 혹은 내가 돈을 벌기 위해 나가던 학원의 학생을 발견하게 될 때, 난 아무튼 세상이 별로 넓지 않다는 삶의 관용구들을 떠올릴 수 있게 된다. 이번에도 또한 마찬가지 가냘픈 삶의 인연을 하나 발견했다. 근데 이번 인연은 약간은 씁쓸한 기분이 들게 하는 인연이었다.

 

난 기본적으로 교사가 되고 싶다는 희망을 마음 한켠에 가지고 사는 사람이다. 무작정 교사가 되는 것만이 내 희망은 아니다. 물론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다. 좋은 선생님이라고 하면 너무 막연하니까, 일종의 역할 모델을 하나 설정하고 살아야 한다. 그래서 나에게도 그런 역할 모델이 되는 좋은 선생님들이 몇 분 있었다. 그 중에서도 광동고등학교에 있는 송승훈 선생님, 즉 승훈이 형(^^)은 대학시절부터 쭉 비교적 가까이에서 지켜본 좋은 선생님이다. 대학 다닐 때는 선,후배 관계로 학회를 통해 이것저것 많이 배우며 살았고, 지금은 교직에 진출해서 승훈이 형이 펼친 다양한 활동들을 직,간접적으로 접하면서 나중에 나도 이러저러한 활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많은 도움을 얻고 있다. 학생들에게 책을 읽히고, 글을 쓰게 만들고, 그것을 통해 삶을 가꾸게 하는 형의 노력들은, 책을 좋아만 하고 그것을 어떻게 쓸 것인지에 대해 무지한 나에게 깨달음을 줄 때가 많다. 언젠가 학교 근처에 있는 형의 집에 놀러가서 그때 학생들이 쓴 글들을 읽어보고 감탄한 적도 있었다. 형이 끌어낸 학생들 마음 속의 숨은 말들이 날 놀라게 만들었다.  

 

이번에 여자 후보생 신상명세서를 뒤지다 보니 그 승훈이 형이 있던 광동고등학교 졸업생이 한 명 있음을 발견했다. 난 송승훈 선생님을 아느냐고 물었다.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한 40명 쯤 되는 인원의 모임에서는 어쨌거나 이런 식의 인연을 있기 마련이구나라고 난 생각하고 지나쳤다. 그런데 기분이 영 찜찜했다. 승훈이 형이 보다 넓게 사고하고, 모든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고 비판하며, 그것을 글로 표현하는 방법들을 가르쳤을텐데, 난 그와 반대로 모든 사고를 정지시키고, 복종하게 하며, 로봇처럼 움직이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 내 기분을 그렇게 다운시킨 것이다. 내가 이런 교육방식을 선호한다면 모르겠지만, 나 또한 누구보다도 자유롭게 사고하고,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능력을 길러주는 교사가 되고 싶기에 난 더욱 우울해졌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인연이 있겠지만 이런 식의 인연을 악연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물론 군대에서의 훈련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믿는다. 그리고 지금 내 모습을 보고, 좋아하고 따르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지금 연기하고 있는 역할로 만나고 있는 인연들은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아닌 듯 싶다. 그래서 이와 같은 인연은 나를 더욱 씁쓸하게 만든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전경린, <염소를 모는 여자>

서른 살 무렵의 여자는 어떨까? 나는 아직 서른 살이 되지 못했고, 그리고 여자가 될 가능성은 더더욱 없기에 어쩌면 도저히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 될 듯도 싶다. 하지만 99년 말 2000년 초 쯤에 내 머릿 속을 온통 사로잡고 있던 질문은 황당하게도 위의 그 질문이었다.

뺀찌의 영향도 컸겠지만, 그 당시 읽고 있던 전경린이나 하성란과 같은 여성 작가들의 소설들은 여자가 살아간다는 것, 특히 서른 살 쯤 된 여자들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개인적인 경험이 오버랩되면서 그 질문은 부정적인 대답으로 되돌아 왔다. 탈출구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여자들은 결국 서른 즈음이 되면 일상의 틀 안으로 들어오고야 만다는 것.

여기서 말하는 서른이 정말 나이 서른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또 여자만 그런 것은 아닐테고... 흔히 말하는 사회로 들어가는 단계를 말할 거다. 철든다는 것, 그리고 세속적이 된다는 것, 그런거겠지.

하지만 전경린은 <염소를 모는 여자>에서 서른이 되어버린, 아이도 하나 있고, 남편도 있고, 그럴 듯한 집도 있고, 남편과의 불화도 있고, 우울증도 있고, 자기처럼 꿈을 잃어버린 친구들도 있는 그런 여자를 그려낸다. 그리고 그 여자가 어떻게 환한 감옥 속에서 환하게 갇혀 있는지를 말한다.

전경린은 말한다. 남편과 아이들이 떠난 오전의 아파트 단지를 생각해보라고. 각 방마다 여자들이 하나씩 있고, 그녀들은 조금씩 우울하고 거의 비슷한 일을 하며, 돌아올 남편과 아이들은 기다리는 그 장소.

"조용한 한낮에 아파트에서, 칸칸이 벽만 나누어진 닭장 같은 다른 집들을 바라보면, 그 어떤 기이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보다도 더 어처구니없는 기분에 사로잡히게 돼. 칸칸마다 한 명씩 성숙한 여자들이 들어 있고, 남자를 위해 밥을 하고, 청소를 하고, 밤에 남자가 들어오면 섹스에 응해주고, 남자의 집에 제사를 지내러 가고"

그런데 전경린의 그 여자는 그런 일상을 뚫고 들어온 염소 남자에 의해 자신의 일상성을 자각한다. 무턱대고 염소를 맡긴 남자. 그리고 도시와 염소의 불균형 속에서 그 전까지 미처 깨닫지 못하던 자신의 삶의 메마름을 그 여자(역설적이게도 이름이 "미소"이다.)는 느낀다. 그리고 과감하게 탈출을 시도한다. 작품의 마지막은 떠나는 여자의 뒷 모습을 그려낸다.

전경린은 이처럼 떠나는 여자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왜 그녀들이 떠날 수밖에 없음을 열정적인 어조로 밝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주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의 서른 살 여성들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그리고 서른 살 남성은 또 어떨까?

그녀의 소설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언제까지 벼랑 끝에 배를 붙이고 심연을 내려다보고 있을 수는 없다. 나아가기 위해서는 끊긴 길 앞에서 두 눈을 감고, 두 귀도 닫고 자신의 본질을 향해 어느 순간 뛰어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뛰어내려본 사람은 알게 될 것이다. 있는 것과 없는 사이의 심연 속에, 현실보다, 현실의 현실보다도 더 강한 구름의 다리가 있다는 것을. 자신의 숲을 향해 가는 구름처럼 가벼운 구름의 다리"

나는 이렇게 두 눈을 감고 훌쩍 뛰어내릴 수 있을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