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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 하는 것은 나뿐입니까] 혹은, [집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집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혹은,  [이런 생각 하는 것은 나뿐입니까]

 

그리고 나의 넓적다리에 애무가 구른다.

존재는 무르다. 그것은 구르고 허우적거린다.

나는 집들 틈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 사르트르 [구토] 

 

새벽 두시까지 일하고 터벅터벅 집으로 걸었다. 여섯시 반 기차를 타려고 새벽 다섯시 사십분에 일어났다. 거울 속 파리한 얼굴의 내가 사랑스럽다. 표는 입석이다. 나름의 명당 자리에 자리를 잡고 짐정리를 하고 있으려니, 「내년에는 표 구하지 뭐.」 라고 또 다른 입석 승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을 미끼삼아, 나의 머릿속에는 추석 표를 사려고 줄을 길게 늘어선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모두가 표를 사려 애를 썼을 것이다. 그러나 올해도 나는 표를 구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저 너무 늦지않을 정도만 느즈막히 역에 가서 남아있는 입석표 중에서 적당한 것을 골랐을 뿐이다. 경쟁에 대한 특별한 감수성이 있어서라서기 보다 그저 게을렀기 때문이다. 사실 표 따위에 신경쓸 정신를 남기지 않는 삶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차안에서 볼까하고 새벽 책장에서 꺼내온 책은 졸음에 취해 비틀거리는 머리로는 좀처럼 읽혀지지 않는다. 책을 덥고, 그럼 무엇을 할까, 잠이나 청해볼까, 하고 목적없이 책의 제목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정체성의 정치에서 횡단의 정치로' 이게 책의 요진가보다. 정체성의 정치에서 횡단의 정치로 가자는 것. 횡단의 정치란 뚜렷한 경계없이 다양한 가치가 어울릴 수 있는 정치일게다. 그건 확실히 감이 온다. 그러면 정체성의 정치는 뭐냐. 아니, 정체성의 정치가 아닌 정치는 뭐냐. 답이 나오지 않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계속해서 나는 나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그러다가 나는 그동안 내가 분노한다 말해왔던 것과 내가 지향해오던 것들이 실은 같은 맥락안에서 숨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의 막연한 분노. 그것은 정체성을 요구하며 나에게 너의 성적 취향과 너의 좌우파적 성향과 너의 사회적 지위를 한 단어 안에 우겨넣어 너의 정체성을 표현하라던 사회에게 가졌던 분노였다. 나는 그것에 대해 거부했던가? 아니, 그러지 못하고 또한 그것에 갇힌 채 또 다른 무언가를 좇았던 것 같다. 그 어떤 것에도 나는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으리라. 나는 자신의 정체성 찾기에 집착하고 있었다, 정체성이라는 것이 존재하며 무언가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라고, 마치 자신이 좋아하는 색깔로 공허한 면을 채우려고 노력하는 어린 아이처럼, 그렇게 그것을 좇았다. 그래? 그것은 정말 공허하기만 한 것이었나? 이것은 나의 해체적 감성의 발동이다. 애초에 이런 생각을 시작하도록 빌미를 제공했던 '정체성의 정치에서 횡단의 정치로'는 이런 나의 생각의 흐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나는 답 없는 질문을 계속 한다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일인지 알고 있다. 뭐 어떠랴. 제멋대로 걸어가는 생각은 비틀거리면서도 즐겁다.

 

한달전쯤 민족주의에 관한 글을 쓰면서 '내셔널리즘에 대한 나의 고민은 실제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내셔널리즘은 종종 우리의 실생활과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거대한 맥락안에서 말해지곤 하지만, 이것에 대한 나의 고민은 나 스스로의 정체성에 관한 고민과 맞닿아있다.'고 썼다. 이것을 쓰고 나서 나는 퍽 만족해 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떤 거대한 문제를 개인 자신의 작은 문제로 가지고 왔을 때 그 문제는 더욱 진지해지고, 살아 숨쉬는 것이 된다고 나는 생각했던 것이다. 그것은 거대한 것에 겁부터 먹곤 하는 나를 위한 배려였다. 그러나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나는 민족이라는 주어진 정체성을 아무 생각없이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비판을 하고 싶었던 것인가? 아니면, 갑자기 등장한 새로운 질문, 사람에게 진정 정체성이란 필요한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규정하려 애쓰는 이 인간 사유의 역사는 얼마나 오래된 것인가, 하는. 이 질문은. 이것은 어쩌면 내셔널리즘 그 자체보다 더 깊은 핵을 겨냥하는 질문은 아닌가. 집단과 집단 사이의 경계를 만드는 원리에서 시작된 것이 내셔널리즘이라면, 나와 너를 분리하고 특별한 어떤 것을 부여하는 것을 정체성이라 한다. 그러면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개성을 말소하고 그저 뭉뚱그려 하나의 집단만 남겨두는 파시즘적 어떤 것을 그리워하는 것일까. 아니, 아니다. 적어도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는 개인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데 앞서 집단의 정체성도 부정하고 싶어하니, 파시즘과는 방향이 다르다. 그렇게 말하고 나니 조금 위로가 되는 것도 같다. 나를 나로 있게 하는 그 모든 것을 버려버려라! 그러나 그렇게 내쳐버린다고 해도,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딱딱한 바닥에 닿은 말랑말랑한 내 엉덩이의 불편함 같은 것에서 오는, 이곳에 내가 있다. 라는 생각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갑자기 피로감이 엄습한다. 이것이든, 저것이든, 다 쓸모없다. 익숙한 손짓으로 스마트폰 안의 게임을 찾아 그것을 실행시켰다. 피곤한데 잠이 오지 않는 것은 괴롭다. 그리고, 괴로움과 고통 만큼 내 존재를 생생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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