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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 콤플렉스, 주체의 욕망과 타자의 공포]
황병주의 강의를 듣고
푸른역사아카데미에서, 2013. 02. 20
왜 난 질문을 못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잔뜩, 아니 그것보다는 뭔가를 지껄이고 싶은 욕망이 부글부글 들끓고 있는데, 질문하자! 고 생각만 하면 벌써 손이 덜덜덜 떨려오기 시작한다. 예전에는 뻔뻔하다 싶을 정도로 나불대는 성격이었음으로, 이것은 아마도 최근에 찾아온 어떤 변화다. 그 변화의 원인을 지금 고민하기에는 글이 삼천포로 빠질 듯하다. 그저 질의응답시간이 너무 짧았기 때문에 나는 질문을 하지 못했다, 정도의 궁시렁으로 마치도록 하자.
사실 질문이라고 해도 묻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저 내가 제대로 알아먹었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내가 이해한 바는 이러하다. 우리나라 지식인 집단에는 대대로 어떤 콤플렉스가 내려오고 있다. 종류에 따라 다양하게 이름 붙일 수 있는 그 것은 근본적으로 ‘근대화 콤플렉스’라는 이름으로 묶여질 수 있다. 그 콤플렉스를 지식인 집단은 경제개발이라는 신념으로 극복해 냈다. 이것이 강의의 뼈대였다.
듣고 보니 꽤 그럴 듯 했다. 우선 ‘콤플렉스’라는 단어가 갑자기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애초에 나는 콤플렉스라는 단어를 외모에 한정시켜서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손에 콤플렉스가 있다든가, 다리에 콤플렉스가 있다든가. 오늘 강의는 나에게 한 단어의 확장을 보여주는 기여를 한 셈이다. 근대화와 콤플렉스가 합쳐져 이렇게 매력적인 의미를 갖게 되다니!
그나저나, 나 역시 근대화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탐구는 애초에 무의미한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나의 세상은 이미 근대화를 빨아들인, 그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빈약한 비유지만 강연에서 예로 들었던 ‘오렌지 주스’에 대한 김상환 스승(?)의 동경은 나에게 적용될 수 없다. 나는 이미 오렌지 주스를 물처럼 먹는 생활을 하고 있으니까. 오렌지 주스를 와인으로 바꾸면 어떨까? 사실, 와인도 적잖이 퍼 마신다. 와인이나 소주나 취하기 위함이라는 목적 안에서 같다. 동경 따위 없다. 뱅쇼(포도주과일끓인물, 태어나서 딱 두 번 마셔봤다)나, 모히또(라임과 민트가 민들레처럼 나지 않는 한국의 기후적 한계 때문에 비싸다. 또 비싼 돈 주고 사 마셔봤자 현지에서 먹는 것처럼 맛있지도 않다) 라면 모를까. 사실 그런 것들도 콤플렉스라고 말하긴 약하다. 그거 못 먹는다고 엄청난 정신적 타격을 받고 있진 않으니.
만약 나에게 근대화 콤플렉스가 없다면, 나는 ‘어떤’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을까. 내가 항상 골몰해서 도대체 벗어나지 못하는 수많은 생각들 속에 답이 있을 것 같았다. 삶이 낭비되고 있다는 불안감? 평범하고 싶지 않았는데 이미 평범해져 버린 일상에 대한 지겨움? 단순해져 버린 세상에 대한 증오? 그러니까, 돈과 물건의 교환이라는 이 단순한 법칙에 대한 증오? 이쯤하면 ‘콤플렉스’는 이곳저곳에 남발되어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하는 위기에 빠져버린다.
나라는 ‘개인’을 뒤지는 대신, ‘세대’에서 그것을 찾아보면 어떨까? 나는 ‘빈곤의 발명’이라는 구절에 밑줄을 친다. 강사가 말했던 박정희 시대의 빈곤의 발명은 ‘민족의 역사적 가난’과 현재의 눈부신 성장을 대비시켜 근대화 콤플렉스로 인해 결핍되었던 자존심을 회복시켜주는 과정 정도로 보면 될까? 그러나 아마 My generation(좋아하는 노래 제목이다^^)의 빈곤의 발견이란 <빈곤의 대두, 빈곤의 부각, 빈곤의 돋을새김> 정도로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빈곤은 반복해서 대중에게 보여지고 부각되고 있다. ‘노년층과 편의점 알바자리를 두고 싸우는 88만원 세대’라는 기사는 편향되어 해석당하기 쉽고, 이러한 해석의 고착이 자주 읽힐 때마다 나는 불편한 기분을 느꼈었다. ‘사실’ 여부와, 또 그 기사들이 가지고 올 긍정적인 효과는 제쳐두고 이것 자체가 우리의 콤플렉스를 돋을새김하고 있는 것을 아닐까. 이것은 우리가 가진 콤플렉스의 ‘자기연민’ 쯤에 속하는 반동은 아닐까.
때문에 어째 이야기가 시시하게 축소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지만, 나는 ‘경제적인 것의 절대화’가 우리가 가진 콤플렉스라고 생각한다. 또다시 이 경제적인 것의 절대화, 곧 신자유주의란, 오늘 강의의 결론과 겹치고 만다. 근대화에 대한 치유의 욕망으로 끝없는 경제 개발을 선택했던 것이 이 집단이 내렸던 결론이었고 또한,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의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경제절대의 콤플렉스가 근대화의 콤플렉스와 전혀 동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씁쓸한 결론이다.
여기서 ‘가치’ 따지기 좋아하는 나는 또 이런 생각을 한다. 질의응답 시간에 나왔던 누군가의 질문처럼 근대화 콤플렉스는 ‘발전의 동력’이 되지 않았을까. 아니면 최소한 나는 이광수의 처량한 자기비하가 있었기 때문에, 또 그것을 이용한 박정희의 시대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 근대화 콤플렉스에 시달리지 않아도 좋으니 좋은 게 좋은 거 아닌가?
모범생처럼 반듯하게 곧추 허리를 세우고 말해보자면, 그건 또 이 책에서 저 책에서 아니라고 하더라. 경제라고 말하면 끝말잇기처럼 개발과 경쟁을 떠올려야 하는 우리 사는 세상이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지 잘난 인간들이 열심히 떠들어대고 있다. 나는 그 새끼들의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동감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을 신자유주의의 탓으로 돌려버릴 때마다 항상 왠지 모를 석연찮음이 남아버린다. 편하긴 하지만.
따라서 어떤 질문자 분이 ‘경제 개발의 완성’이라고 말했을 때, <경제 개발이 완성될 수 있는 것이면 진작에 되었겠지요. 이 병신아.>라고 속으로 곱씹을 정도는 되었지만, 강사분이 포틀래치와 하루에 일을 두 시간 밖에 안한다는 어느 부족의 이야기를 예로 들었을 때 희망에 부풀어 오를 정도로 낙관적이지는 않았다. ‘공동체도 유토피아는 아니잖아요.’라는 말처럼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없다.
마지막으로 강의를 들으면서 재미있었던 단어들을 적고 그만 자야지.
*근육질의 근대
*大한민국, 大일본제국, 大영제국 의 관계
*광개토대왕 -땅투기(ㅋㅋ 빵터짐)
*자기연민의 민족주의가 한국 민족주의의 기초
*풍경은 외부자의 시선에서만 보인다.
*근대화의 와쿠 안에서 본 ‘계약’의 의미
(저는 이 わく라는 단어가 특히 맘에 들었습니다.)
*자본주의적 인프라를 ‘깐다’
*4.19와 5.16은 문제설정이 기묘하게 연결되어 있다.
다음으로 앞으로 공부해 둘 것
*테일러리즘
자자. 잘자요.
PS. 그저 모든 것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시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인가? 아니면 원래 콤플렉스라는 것은 거울 두 개를 맞대어 놓은 것처럼 그저 계속해서 같은 결론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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