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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하류지향, 세련된 '이십대개새끼론'이거나, 세대를 위한 뼈있는 충고거나.

하류지향, 우치다 타츠루

 

세련된 ‘이십대 개새끼론’이거나, 세대를 위한 뼈있는 충고거나.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은 윗세대가 고정된 젊은이의 상을 가지고 이래라, 저래라 비판하는 세대론의 범주에 잘 들어맞는다. 스러져 가는 20대의 끝에서(아아..) 아무런 변론도 못한 채 쏟아지는 비판을 모두 수용했던 어릴 적과 다르게 나는 이러한 세대론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 책은 ‘요즘 애들은...’이라며 혀를 차는 세대론의 변주일까, 아니면 후세를 위한 진정성있는 충고일까?

 

저자는 “선생님 이걸 배우면 뭐가 좋아요?”라고 묻는 학생들과 세상과 단절해 방에 틀어박힌 일본의 니트를 문제시한다. ‘학습으로부터 도피’하고 ‘노동으로부터 도피’하고 있는 젊은 세대. 1950년에 태어난 저자가 독자에게 묻는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사고방식은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생겨나고 어떤 이데올로기에 의해 강화되어가고 있는가?”

 

저자는 ‘이것을 배우면 무엇에 도움이 되는지’라는 물음은 학습과 소비를 동일시하는 세대와 함께 태어났다고 말한다. 태어날 때부터 노동주체가 아닌 소비주체로서의 자아에 더 익숙해진 세대는 마치 학습을 소비의 변형처럼 생각한다. 학습이 소비에 비유될 때, 돈(화폐)에 해당하는 것은 짧지 않은 수업시간을 참아내는 고통이다. 소비자로서 고통이라는 돈을 지불했으니 무언가 마땅한 것을 받아야 한다. 때문에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내가 지불하는 이 고통을 대가로 선생님은 저에게 무엇을 주나요?”라고 묻는 것이 너무나 당연해지고 만다.

 

이렇게 만들어진 당돌한 세대는 ‘자기결정권이라는 이데올로기’를 통해 견고해진다. 아이들은 마치 학습을 소비와 같이 사도되거나 사지 않아도 괜찮은 것으로 인식하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소비자처럼 행동한다. 그리고 자신이 학습을 구매하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은 자기가 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인식한다. 이 지점에서 끼어드는 것이 바로 ‘자기결정의 옮음’이라는 이데올로기다. 저자는 최근 일본사회가 자기결정권을 강조하는 나머지, <모두가 자기결정을 하는 시대이니, 너도 자기결정을 해라. 그리고 그 자기결정은 언제나 좋다.> 라는 이데올로기에 빠졌다고 말한다. 배우지 않음과 노동하지 않음을 선택한 아이들은 내가 결정한 것이기에 옳다, 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학습과 노동을 소비자처럼 임하는 아이들과 자기결정의 옳음이라는 이데올로기 속에서 젊은 세대는 자발적으로 하류지향하게 된다는 것이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저자의 문제제기는 매우 신선하다. 단 한번도 ‘학습의 효용’에 대해 묻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해 본적 없는 나에게는 특히 그렇다. 우리는 저자와 같은 관찰자의 집요한 시선을 통하여서만 내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좋은 기회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또한,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

 

아이들이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묻는 이 장면을 보고 저자는 어린 세대가 ‘소비문화에 젖었음’을 한탄한다. 소비문화에 익숙해지고 그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온 어른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런 저자에게 묻고 싶다. 닭과 달걀 중 무엇이 먼저일까?

 

아이는 어른의 거울이다. 아이들이 하는 행동은 어른의 모습을 보고 그것을 따라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이것을 배우면 뭐가 좋아요?’라고 묻게 된 것은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공부를 하면 이게 좋다’라고 말해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저자가 말하는 소비주체로서의 자아만을 정립시켜버린 세대는 사실,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이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향해 ‘공부를 하면 좋은 학교에 들어갈 수 있고, 존경받는 지위에 이를 수 있고, 높은 연봉을 받고, 수준 높은 이성을 배우자로 맞을 수 있다(p46)’고 말했다. 아이들은 공부를 대가로 무언가를 받는 상황에 익숙해져버렸다. 그래서 새로운 학습을 시작하기 전에 어른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소비주체로서만이 자신을 생각할 수 있는 어른 세대로부터 태어난 아이 세대가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은 어른들의 보상에 설득당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린이, 청소년, 혹은 어떤 청년의 시각으로는 좋은 학교와 지위, 높은 연봉과 멋진 동반자가 매력적인 보상이 되지 않는 것이다. 아니면, 그들은 공부를 통해 그것을 얻을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것들을 거부한다. 때문에 저자는 아이들의 ‘왜 공부해야 해요?’라는 질문을 ‘내가 공부를 하면 뭘 얻을 수 있나요?’로 해석하고 있지만 나는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들은 이런 보상을 원하지 않아요!” 또는 “공부가 정말로 삶의 성공으로 이어지나요?”

 

물론 니트족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좋지 않은 방향으로 사회가 흘러가고 있으며, 또 문제화 될만 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것 처럼 니트족이 단순히 노동의 거부를 고집했기 때문에 틀어박혀버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노동함으로써 주어지는 그 모든 것의 거부는 아닐까? 다시 말해 그들은 저자처럼 자신을 소비주체로 생각해서 틀어박힌 것이 아니라 노동의 소비주체이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틀어박혔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무엇보다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은 저자가 젊은이들의 노동도피의 예로 소개한 두 가지 사례였다. 저자는 젊은이들의 ‘높은 자리에 오르려 하지 않음’, ‘돈과 지위를 얻는 것보다 여행과 음악을 좋아함’을 문제시하며 이런 사례를 소개한다.

 

내가 알고 지내는 회사 경영자로부터 들은 얘기다. 아르바이트생 수십 명을 고용하고 있는 그는 그 중에 아주 우수한 젊은이가 있어서 정사원이 되라고 권유했다가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그 이유는 아르바이트라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지만 정사원이 되면 그만두는 게 쉽지 않아서, 라는 것이었다. 또 다른 사례 역시 알고 지내는 젊은 회사원에 대한 얘기다. 그가 평소 일하는 솜씨를 높이 평가한 상사가 새 프로젝트의 책임자가 되어보라는 말에 그는 그 길로 회사를 그만두었다. 책임 있는 자리에 앉으면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즉, 직장을 빠져나와 음악회에 가지도 못하고 성수기에 유급휴가를 받아 여행을 가지 못하기 때문이란다. 이런 자유가 출세보다 더 중요하다고 그는 말한다. (P146, 2007년 출판본)

 

이들이 과연 노동으로부터 도피하는 사람들인가? 아니다. 이들은 노동으로부터 도피했다기보다 노동과 다른 가치를 선택한 사람들이다. 이러한 젊은이들의 모습이 어째서 ‘자기결정이라는 이데올로기에 함몰당한 것처럼 묘사되어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저자가 꼭 그렇다고 말한다면 나는 노동하기를 즐기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열심히 일하면 신에게 가까워질 수 있다는 기독교의 노동 이데올로기에 함몰당해서 노동하지 않으면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들”이라 말해버리겠다. 물론 이 주장 또한 옳지 않다. 이것은 전적인 가치관의 차이로, 스스로의 삶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는 것이다.

 

또 나는 ‘자기결정권’이 이데올로기화한 사회에 대한 비판 역시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일본사회는 ‘자기결정권을 맹신한 나머지 내가 결정한 것은 뭐든지 나에게 좋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사회에서조차 여전히 자기결정권은 매우 소중하며, 모든 사람은 선택의 기로에서 오로지 자신의 판단만으로 내 앞길을 결정하고 그에 책임을 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만약 자기결정이 이데올로기화되어 있다는 이유로 그것을 멸시하는 사회가 더 끔찍하게 느껴진다. 따라서 저자가 자기결정권의 부작용이라고 생각하는 니트족에서조차 그들이 진정 그것을 선택했다면 아무리 내가 잘못되었다고 느껴져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동을 비롯한 아무런 사회활동도 하지 않는 것이 스스로의 선택이었다면, 다시 사회 속에서의 자신을 찾아가려는 노력 역시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고서는 불가능 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그저 세련된 20대 개새끼론의 변형일 뿐일까? 그렇지만도 않다. 저자가 꼰대 인 것은 맞지만(잔소리한다는 의미에서^^;;) 분명 아래 세대가 자신이 느껴왔던 삶의 어떤 가치를 잃어버린 것이 안타까운, 저자의 진정성 있는 충고다. 아래는 내가 꼽는 이 책의 가장 감동적인 부분이다.

 

그렇다면 배움이란 무엇인가. 배움은 아이가 모국어를 습득하는 과정과 같다. 말을 배우는 데 있어서 아이는 ‘이것을 배우면 내가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라고 묻지 않으며 ‘이것을 배우면 내가 어떤 사람이 될까?’를 알지 못한다. 아이는 말을 순수하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배운다. (...) 나는 이것이 고등교육 자살의 한 징후라고 생각한다. 학생이 앞으로 무엇을 배울 것인가에 대해 미리 알고 있을 것을 전제로 해서는 배움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배움이란 자기가 배운 것의 의미와 가치를 이해할 수 있는 주체를 구축해가는 과정이다. 공부를 끝낼 시점이 되어야 비로소 무엇을 배웠는지를 이해하는 수준에 도달한다. 공부는 이런 역동적인 과정이다. 배우기 전과 후에 다른 사람이 되어 있지 않으면 공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 하지만 이 비합리성 안에 멘토의 교육적 기능이 있다. 지금은 의미를 알수 없는 말이지만 일단은 ‘뭔지 잘 모르는’ 채로 받아들이고, 언젠가는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성숙의 단계에 이르게 되기를 희망한다. 이러한 생성 과정에 몸을 던질 수 있는 자만이 배울 수 있는 것이다. P152

 

배우는 사람은 배움에 끝에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 책을 다 읽기 전에는 책의 결론이 어떨지 모른다. 여행을 마치기 전에는 이 여행이 나에게 무엇을 가르쳐줄지 모른다. 삶이 끝나기 전에 나는 삶에 대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일등만을 향해 삶을 바쳤던 윗세대든지 여전히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하류지향세대든지. 가슴 속에 품어야 하는 이 길이 끝나기 전에 이 길을 판단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 만으로 벅차게 아름답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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