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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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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스런 진보경제학계의 '사회학과 정치학'

펌: http://blog.naver.com/leng70/110016149471

 

끔찍스러운 진보경제학계의 ‘사회학과 정치학’ (댓글:14, 추천:8)
에로이카() 2006-03-22 16:11

내 책상 위에는 지금 세 권의 책이 있다. 윤소영의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개론] (2006, 공감), 정성진의 [마르크스와 한국경제] (2005, 책갈피), 그리고 김수행, 김공회의 [한국의 좌파 경제학자들] (2005, 서울대학교 출판부). 이 페이퍼는 위 책의 내용들과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다. 그냥 방금 윤소영의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개론]을 다 읽고 서평을 쓸까 하다가, 서평에 쓰기도 뭐한 문제고  하지만, 아무래도 짚고 넘어가야 서평에서 말이 꼬이지 않을 것 같아 따로 몇 자 적어두기로 한다.

 

10명의 경제학자들을 선정해서 다루는 [한국의 좌파 경제학자들]의 저자들은 논란거리를 피하기 위해 애초부터 이 10명의 선정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라고 한 수 접고 시작한다(iv). 그러나 이 열 명에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을 통해 종속심화-독점강화 테제를 들고나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윤소영이 들어 있지 않은 것에 의구심을 품은 이가 비단 나 뿐이었을까? 윤소영의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개론]은 이 의구심을 심증으로, 그리고 정성진의 [마르크스와 한국경제]는 이 심증을 확신으로 바꾸어 놓았다.

 

 

윤소영-김수행

 

윤소영은 자신이 관계하고 있는 과천연구실의 어떤 대학원생이 김수행 교수에게 박사논문을 제출했는데, 논문 주제의 유일한 전공자였던 정운영 교수를 김수행 교수가 기피했다는 일화를 들면서 다음과 같이 쓴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전통이 단절된 것이 반드시 부르주아 경제학 탓인지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안병직 교수에 이어 김수행 교수도 만만찮은 기여를 했거든요. 진보경제학계의 사회학과 정치학은 정말 끔찍스럽습니다” (윤소영 2006: 105). 이 때까지만 해도 이게 앞서도 몇번 나온 김수행 교수에 대한 지은이의 유감 표명(65, 81)의 연장이려니 했다. 그러다 책의 맨 뒤에 실린 정운영 선생 추도문을 보면서 이 끔찍한 사회학과 정치학이 더욱 궁금해졌다. 403쪽에서 지은이가 언급한 [민중언론 참세상]에 실린 김수행 교수의 글("이 못난 사람아! 왜 먼저 죽어!")은 이번에 처음 보았는데, 중앙일보로 옮긴 뒤 정운영 교수의 논조를 못 마땅해 하는 나였지만, 정운영 교수들 두고 당신은 경제학자보다는 신문기자에 더 적성과 소질이 맞다고 계속 생각해왔다는 그 이상한 추도사는 나를 아연실색케 하였다. 정운영 교수와의 옛 정이나, 글솜씨나 감수성에 대한 칭찬, 변절에 대한 책망, 그리고 먼저 떠난 이에 대한 원망 등이 뒤엉켜 있는 이 글의 형편없는 글솜씨는 충격이 컸거나 시간이 없기 때문이었으리라 좋게 생각한다 해도 글에는 드러나지 않은 무언가가 있었다. 뭔지 모르겠으나, 김수행 교수가 정운영 교수에 대해 어떤 미안함이나 컴플렉스 같은 것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여간 김수행 교수의 이 글에 충격을 받은 윤소영 교수는 [밥자유평등평화] (http://bob.jinbo.net) 자유게시판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다.

 

김수행 교수처럼 정 선생을 추모한답시고 변절 운운하는 것은 김 교수의 생각(저는 김 교수가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이나 두 분의 관계(자신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자이고 정 선생은 저널리스트일 따름이라는 단정은 명예훼손급의 망언입니다)를 잘 알고 있는 저로서는 정말이지 어처구니 없는 짓입니다.

 

게시판의 또 다른 글에서 윤소영 교수는 김수행 교수가 언제 단 한 번이라도 자신의 입장이라는 것이 있었는 지모르겠다는 말을 남기면서 격한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자신은 김수행 교수를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생각했던 적은 한 번도 없으며, 그가 언제 입장 같은 게 있었냐는 윤소영 교수의 댓글은 김수행 교수의 추도사 만큼이나 뒤에 무언가가 숨겨져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그 숨겨져 있는 무언가의 일단은 윤소영의 이 책에서도 나온다. 지은이에 따르면, 서사연 해산 이후, 이전의 한신경제과학연구소와 비슷한 성격의 연구소를 만들려는 흐름이 있었으나, 연구소 창립이 구체화되는 단계에서 김수행 교수가 참여를 거부하고, 다른 교수들(정운영, 김기원, 정성진, 김성구)도 시큰둥해 하자, 자신 혼자 과천연구실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65). 물론 이것말고 다른 일들도 많을 것이다.

 

어쨌든 정리하면, 김수행은 윤소영을 무시하고, 윤소영은 김수행을 물어뜯는다.

 

 

윤소영-정성진

 

김수행, 김공회의 [한국의 좌파 경제학자들]은 맨 마지막에 정성진을 다룬다 (122-137). 그 정성진 교수는 자신의 책에서 윤소영 교수에 대한 유감을 다음과 같이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정성진 2005: 221-222).

 

짜골로프의 [사회주의 정치경제학 교과서]를 선전하는 데 앞장섰던 윤소영도 얼마전부터 소련 국가자본주의론으로 개종했다. 비록 문제점투성이의 일국적소련 국가자본주의론이기는 하지만, 이는 일단 환영할 일이다. 그런데 윤소영 (2004)은 이 같은 자신의 이론적 입장의 수정 혹은 변화와 관련된 자기비판이나 해명 대신, 엉뚱하게도 지난 10여년 이상 소련을 일관되게 국가자본주의라고 비판해온 나와 트로츠키주의를 공격하는 것으로 자신의 과거의 오류를 은폐하려 하고 있다. 윤소영은 이미 14년 전부터 소련 국가자본주의 논쟁을 소개해온 나의 글들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정성진 교수는 마치 클리프 그룹이 국가자본주의론을 대표하는 것처럼 호도하지만 이는 무지의 소치일 따름이라는 등으로 비난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사실 호도이고 역사의 날조다. 게다가 윤소영 (2002)의 소련 국가자본주의론은 뒤죽박죽의 이론적 기회주의를 반영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역사를 잡식재단하면서 자신의 무지콤플렉스, ‘트로츠키주의 알레르기를 달래는 것은 자유이지만, 스탈린주의와 반공주의의 폭압과 개량주의의 포섭에 맞서 노동자계급 자기 해방에 헌신해 온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멋대로 왜곡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사실 정성진의 이러한 분노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개론]에서도 윤소영은 정성진 교수가 활동하고 있는 트로츠키주의 그룹 다함께에 대해 가소롭다는 반응을 보인다. 윤소영에 따르면, 트로츠키주의의 부활은 남한이나 그리스에서만 볼 수 있는 다소 특이한 현상이며, 이들의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는 식의 알리바이정말 기가 막히는 태도란다 (39).  더 나아가 윤소영은 정성진을 다음과 같이 약올린다. 아래에는 다함께라고 나오지만, 이는 사실 정성진이다.

 

“[역사적 마르크스주의]를 발표한 후에 제 생각에 공감하는 사람들도 늘어났지만, 그러나 다함께 같은 데서는 적대감이 더욱 심해졌는지 논쟁을 해보자고 덤벼들곤 하지요. 그런데 미안하지만 저는 그런 논쟁은 사절입니다. 완전히 시간 낭비일 따름이기 때문이에요. 모든 논쟁에는 동지적인 신뢰나 적어도 정직성과 분별력이 있어야 하는데, 다함께에게는 그런 것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사실 다함께는 아주 특이한 기질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다함께를 보면 한 손에는 코란 또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지하드에 나서는 이슬람 시아파 전사가 생각날 정도이지요. 게다가 제가 듣기로 다함께는 노동자의 힘과 만나도 늘 그렇게 으르렁댄다고 합니다. 무슨 시아파가 수니파와 싸우는 것 같아요. 제 말이 정 의심스러우시다면, [이론] 4호에 소개된 캘리니코스의 만델 비판을 한번 읽어보세요. 어떻게 같은 트로츠키주의자에게도 그렇게 적대적일 수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윤소영 2006: 344).

 

정성진이 보는 윤소영은 은폐된 스탈린주의자이며, 사실을 호도하고, 역사를 날조하며, 이론적 기회주의자이며, “무지콤플렉스에 시달리는 넘이다. 반면, 윤소영에게 정성진은 나는 잘못한 게 없다고 오리발이나 내밀면서, 동지적 신뢰는 커녕 정직성과 분별력도 없고, 지들끼리도 껀수 잡아 싸우는 데 바쁜 한심하면서 질까지 안 좋은 넘이다. 정성진은 윤소영 한 번 걸리기만 해보라며 이를 빠득빠득 갈고 있고, 윤소영은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하는 식으로 실실 쪼개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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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바로 여기에서 눈여겨 봐야 할 것이 있다. 윤소영에게 시비를 걸고 있는 정성진은 바로 김수행에게 시비를 걸고 있는 윤소영의 모습이다. “본래 남성이란 밴댕이 소갈딱지라는 윤소영의 말(363)은 우리나라에서 난다긴다 하는 이 좌파경제학자들 김수행, 윤소영, 정성진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다라고 한다면 이들은 왜 자기가 거기 들어가야 하느냐고 하며 억울해 할까? 그 밴댕이 소갈딱지들 갖고 사회성격논쟁에 다시 불을 지피기는 상당 기간 동안은 힘들 것 같다. 우울한 현실이다.

 

사실 이 세 경제학자들은 남한의 좌파 경제학자들이 21세기에 어떻게 활동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각기 다른 전형들이다. 김수행 교수의 경우는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을 담당하고 있으며, [자본]의 국역자이다. 일단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비판에 관심을 갖게 되면, 제일 처음 접하게 되는 이름이고, 행여 그 부분을 전공으로 삼을라치면 거쳐야할 큰 스승의 위치에 있다.

 

물론 윤소영 교수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서울대의 학생은 일류이지만, 교수는 이류일 뿐이고, 비봉판 [자본]은 대학원생들 도움을 받아 개역을 했다고는 하지만, 북한판을 남한말로 옮긴 것에 지나지 않는다. 윤소영 교수는 80년 광주항쟁을 전후하여 마르크스주의로 전향한 이래, 자신의 입장을 갖고 PD론을 정초했으며, 절친했던 선배인 이병천이 중진국론에서 포스트마르크스주의로, 또 발전국가론으로 널뛰기를 하고 있을 때, 알튀세르-발리바르 계열의 마르크스주의의 한 길을 걸어왔다. 한신대라는 좌파 대학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현실 운동에서는 한 걸음 떨어져 과천연구실을 꾸리고 있다. 그는 87년 이후 선거에 참여하지 않고, (자신의 연구실에 나오는 후학들이 행여 선거에 참여하여 민주노동당이라도 찍을까봐) 과천연구실 MT 출발을 선거당일 아침 6시에 했다는 얘기를 저서에서 자랑스럽게 한다.

 

이런 윤소영은 정성진 교수에게는 파렴치한 스탈린주의자일 뿐이다. 정성진 교수 또한 경상대라는 좌파 대학 경제학과에 자리잡고 있고, 교수라는 점잖은 직책에도 불구하고 다함께라는 정치조직에 투신하고 있다. 트로츠키주의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면서도 동시에, 남한 마르크스주의 르네상스를 위해 학진의 후원을 받는 [마르크스주의 연구]라는 반년간 학술지의 편집장이기도 하다.

 

이들 말고도 다른 전형들을 들 수 있다. 민주노동당 부설 진보정치 연구소의 장상환, 참여연대나 대안연대에서 활동하는 교수들, 그리고 재야의 채만수 등등...

 

밖에서 보기엔 그 물이 그 물이고, 우리 힘 한 번 합해서 뭐 한 번 해봐야 하는데... 꼰대들이라 완전 콩가루다. 뭐 거창하게 단결투쟁을 하자는 것도 아니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고 제대로 된 토론문화 한 번 만들어 보는 게 그렇게 어려울까? 모두들 상대방만을 탓하고, 자기가 문제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은 애써 외면한다. 아니면 이제 연세들이 드셔서 거기까지는 생각이 못 미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선생들 밑에 있는 대학원생들은 어떨까? 그 사회도 줄을 서야 할텐데... "나는 바담풍 하더라도 너는 바람풍 해야 한다"고 가르칠 수 있을까? 또 이 양반들이 쓴 책을 사볼 어린 학생들이나 노동자들은 또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역시 우리 윤소영... 역시 우리 정성진... 이럴까? 또 그런다고 한들 공부하는 양반들인데, 그게 또 자기한테는 무슨 득이 되겠는가?

 

안 그래요? 선생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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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7

2002년 초등학교 5학년 짜리 아이가 자살하면서 남겼던 말은 "우리 부모님은 하루에 8시간을 일하시는데, 12살이 나는 왜 13시간을 공부해야하나, 물고기처럼 자유롭고 싶다"였다.

지난 해에 자살한 초등학생이 남긴 유서는 “나의 가장 큰 결점은 공부를 못한다는 것이다. 내가 잊고 싶은 두려움은 이번에 친 시험점수다. 언제가 나는 공부를 제일 잘하는 OO를 이기고 싶다.”

“저는요, 학원에서 시험보면 영어는 항상 100점 맞아요. 근데 수학은 꼭 한 개나 두 개 틀려서 속상해요. 아파트 12층에서 뛰어내리려고 했는데 엄마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동영상에서 초등학교 2학년 예영(가명)이가 한 말이다. 이 동영상은 요즘 초등학생들의 성적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한지 웅변하고 있다.

서울지역 4~6학년 초등학생 1,000명을 대상으로 얼마 전 교육커뮤니티 ‘즐거운 학교’가 스트레스 지수를 조사한 결과 ‘과외’가 초등학생의 스트레스 원인 1위로 꼽혔다. 초등학생 10명 중 9명이 과외를 하고 과외 과목은 평균 3.13개, 과외 시간은 하루 평균 2시간 37분이라는 것이다.

조사 결과에는 27%의 초등 학생들이 자살 충동을 느낀 적이 있고, 그 이유가 바로 ‘성적’ 때문이라는 결론도 나와있다.

실제로 지난 2월 인천에서 초등학교 6학년 어린이가 방학숙제를 하다가 방에서 목을 매 자살을 했다. “학원을 조금만 다녔으면 좋겠다.” 자살한 아이가 자주 하던 말이다. (ebs 지식채널 "대한민국에서 초딩으로 산다는 것")

 

0. 들어가며.

 

 낯설게 본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당신은 한국의 입시제도와 "미친교육"에 얼마나 분노하며 사는가? 모순적인 사회를 뒤집겠다고 나서는 좌파들조차, 분신하신 노동자 한분의 죽음에는 그토록 슬퍼하면서도, 한해에 200명의 아이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한국의 교육에 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그 어떤 노동착취보다 광범위하고 대규모로 벌어지는 현상임에도, 좌파들의 교육제도, 특히 대학의 서열에 대한 문제의식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실천으로 보여주는 행동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지않을까?

 나는 적어도 한국사회에서 대학서열 철폐운동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휴머니즘적인, 혹은 인권의 관점에서 교육문제만을 해결하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과 능력'에 관한 이데올로기 저항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능력없는 인간은 한달에 100만원을 채 못받는 비정규직이 되어도 싸다는 것은 중학교때 실업계와 인문계를 나누어 실업계 학생들을 '똥통' 취급하는 중학교의 분위기로부터 만들어진다. 아이들은 아주 어려서부터 타인과 함께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시험에서 상대방을 이기는 방법을 먼저 배운다. 한국의 중등 교육기관은 그 존재 목적이 무엇인가? 문서에 적혀져 있는 전인교육은 간데 없고 고등학교는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도구로서 존재한다. 그래서 그토록 많은 외고생들이 불리한 내신을 포기하려고 학교를 자퇴한다, 세상에. 

 이번 10월 고려대 수시 2학기 고교등급제 논란은 나로 하여금 한국의 모든 교육제도의 문제는 '학벌'에서부터 유래하였으며, 서열을 혁파할 수 없다면 이와 같은 류의 문제는 어떤 형태로든 끊임없이 재생산될 것임을 확신하게 만들었다. 노무현 정권의 3불정책과 수능등급제가 사교육비 절감과 대체 무슨 관계를 가질 수 있단 말인가. 대학 서열이 남아있는 한, 그것도 지금과 같은 형태로 1등부터 꼴등까지 '네임벨류'로 서울의 대학들이 줄세워질 수 있는 시스템에서는, 가장 우수한 '성적'의 학생들은 서울대에 진학하려 들기 마련이고, 입시형태가 어떻게 변하든 아이와 학부모는 온갖 돈을 들여 그 기준에 맞추려 들것이다. 사교육과 공교육 정상화를 그토록 외치던 이해찬의 교육정책 이후로 사교육비가 더욱 증가했던 것은 예정된 결과였다.

 

1. 학벌의 정의.

 김상봉씨의 논의를 가져오겠다.

2. 한국사회에서의 학벌.

 

3. 왜 대학서열철폐만이 문제의 답인가?

4. 대학 평준화의 조건.

5. 대학 평준화의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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