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에 해당되는 글 84건

  1. 이제 우리는 모든 방향으로 공격할 수 있다 2009/05/14
  2. '착한소비'에 반대한다 2009/05/13
  3. ‘사유한다는 것은 인간의 조건’ 2009/05/12
  4. 우리의 병은 산업재해입니다. 2009/05/09
  5.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2009/05/05
  6. 달콤한 나의 도시 2009/05/02
  7. 이기적인 상담실 2009/05/02
  8. 기러기가 주는 교훈 2009/05/01
  9. 물밑에서 와일드하게 팔을 뻗어! 2009/04/26
  10. 그까이꺼 아나토미 2009/04/26

이제 우리는 모든 방향으로 공격할 수 있다

미 해병대에서 전설적인 인물로 평가 받는 체스티 풀러(Chesty Puller) 장군은 아군이 적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고립되었다는 보고를 받자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포위됐다. 덕분에 문제는 간단하다! 이제 우리는 모든 방향으로 공격할 수 있다. ’

'고객 가치 창조, 시각부터 교정하자' 중에서 (LG경제연구원, 2009.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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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4 16:59 2009/05/14 16:59

'착한소비'에 반대한다

사포님의 [] 에 관련된 글.

'착한소비'에 반대한다
추천

 

오늘 한겨레 신문 경제면에 '세계 공정무역의 날'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착한 커피, 착한 옷 그리고 착한 소비 - 최근 공정거래 무역제품이 등장하면서 함께 사용되는 용어들이다. 제품 생산과정의 투명함과 공정성을 감안한다 해도 엄연히 자본주의 시장속 상품에 '착한'이라는 선악이 대조되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적절한 것일까. 더군다니 '착한 소비'라니, 솔직히 기가 막히다. 그러면 그 외의  소비는 '나쁜 소비'이고 '나쁜 소비자'인가?

 

자칭 '착한 소비'는 그러나 경제적 빈곤층에겐 턱없는 일이다.  친환경이니 유기농이니 하는 것들은 값싼 원료를 사용한 저가 상품보다 한참 비싸다. 다른 것을 덜 소비하면 된다고? 결코 의지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 상품을 지불할 돈을 갖고 있는 자, 그가 결국 '착한 상품'의 주인공 즉 착한 소비자가 된다. 좋은 제품을 갖고 착하기까지 하다니, 너무 불공평하지 않은가? 거꾸로 말하면 불량한 제품을 구매하고 나쁜 소비자까지 되는 셈이다. 

 

나도 좋은 제품을 사고 싶다. 소위 친환경 제품들, 인간과 지구의 공존을 고려한 제품들 말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내 소비의 기준은 거의 '가장 값싼'  것들이다. 왜냐고? 저임금 노동자의 현실을 직시하라. 국경일도 쉬지 못하고 하루에 10시간 반을 일하지만 월급은 100만원에 불과하다. 그 돈으로 기본생계를 유지하고 대출금도 조금씩 갚아야 하고  아이가 좋아하는 태권도 학원도 보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최대한 아껴쓰고 대부분은 가장 저가의 상품들만 선택하게 된다. 몰라서가 아니다. 알고도 어쩔 수 없이 감수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되먹지않은(!) 윤리적 잣대에 화가 난다. 왜냐면 나보다 경제적으로 빈곤한 이들 역시 많을 테니까. 단지 그런 상품을 구매할 수 없다고 해서 '나쁜  소비자'로 몰리고 싶지는 않다. 자본주의 경제구조속에서 빈번하게 자행되는 아동, 여성등에 대한 노동착취 문제의 대안으로 제시된 세계 공정무역 또한 돈으로 도덕성까지 점수매기는 자본주의 방식까지 포기하지는 못한 걸까?     

 

'착한'이라는 표현에 반대한다. 모든 사람이 '돈'의 있음과 없음을 떠나 자유의지로 그런 상품을 선택할 수 있다면 그 때 '착한'이라는 이름을 붙여야 할 것이다. 그 전엔 현재의 공정거래무역제품 정도면 무난하겠다. 물론 생산부터 유통과정까지 얼마나 공정한지 자세히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이름에 걸맞는 공정한 상품이길 기대하며 혹시나 조금이라도 피흘리는 노동이 있지 않기를 바란다. 더불어 경제적 부담없이 자유롭게 나와 내 아이가 노동착취 없는 상품을 선택할 수 있는 세상이 이렇게 억울하게 욕먹기전에 빨리 오기를, 간절하게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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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3 07:52 2009/05/13 07:52

‘사유한다는 것은 인간의 조건’

 

○ 우리는 혹시 사회문제나 우리가 맞닥뜨린 삶의 문제들을 ‘다 그렇고 그런 거지’ ‘당연하지’하며 수긍하는 태도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근본적 물음이란 사유의 출발이고, 사유란 ‘삶에서 생각하기’. 자신의 삶의 현실에서 제기되는 문제적 현실을 깊이 들여다보며 더 나은 삶을 위해 돌아보며 스스로 생각하고,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답변을 구하는 과정이 사유의 과정이다. 그러므로 사유할 줄 알 때 우리에겐 ‘분별력’이라는 힘이 생긴다.


○ ‘사유한다는 것은 인간의 조건’이라고 할 만큼 ‘사유’는 우리에게 중요하다. 이러한 ‘사유’의 중요성을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 알아보자.

   ‘악의 평범성’/‘생각 없이 행동하는’ 무사유/‘말하기, 생각하기, 타인의 처지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세 가지의 무능성이 ‘악’, 즉 비인간적 행위를 만들어내는 것/‘우리 모두의 안에 아이히만’


 

○ 부당한 것을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억울한 생각이 치밀면서도 그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면서 체념하고 견디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태도는 과연 그 자신이 나약하기 때문일까? 삶의 의지가 끓어 넘치는 젊디젊은 시기에 조차 자신의 삶을 체념하도록, 나의 삶을 찍어 누르는 대상에 대해 굴종하도록 한 것은 무엇일까?


○ 노동자에게서 철학을 빼앗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

   - 생각할 여유도 없이 살아가게 하는 것,

   - 지금 일어나는 일이 그저 당연한 것으로 여기도록 하는 것,

   - 자신이 당한 부당한 일들도 그저 제 탓으로 여기게 하는 것, 인간적 모멸감에 분노의 주먹을 그러쥐어질 때조차 무력감에 고개를 떨구게 하는 것, 무엇보다도 스스로 자신이 인간임을 부정하게 하는 것!


 

“불만이 인간의 시작이며 사유 없는 삶은 인간의 부정이다.”


 

‘왜’라는 비판적 질문이 사라지고 ‘예’라는 무조건적 긍정만이 남을 때 현재의 문제적 상황들을 해결할 수 있는 인식과 실천은 기대할 수 없다.

 

우리가 어떤 사물 또는 현상을 이해하고자 할 때 반드시 그것을 다른 사물 또는 현상과의 연관 속에서 고찰하여야 하며 구체적인 시간, 공간과 조건 속에서 고찰하여야 한다.

 

   “만약 당신이 나를 도우러 여기 오셨다면 당신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여기 온 이유가 당신의 해방이 나의 해방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라면, 그렇다면 함께 일해봅시다”- 멕시코 치아파스타 원주민


 

새로운 질적 변화(발전)를 원한다면 꾸준히 사물내부에서 양적인 축적과정을 거쳐야만 새로운 질적 단계로 도약이 가능한 것이다.

 

부정은 새로운 질의 발생과 함께 오래된 사물의 질을 함께 보존하는 측면도 가지고 있다. 이때 부정에 의하여 새롭게 만들어지는 새로운 사물에 보존되는 것은 낡아 사라지는 사물의 적극적이고 진보적인 요소이다.

 

저마다 개인적으로 인식하지만, 그것은 사회적으로 형성된 인식들을 바탕으로 해서만 생겨난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형성된 인식이란, 앞선 세대 누군가가 직접적인 실천을 통해 터득한 인식들의 총합이다.

 

철학이 우리 삶의 나침반의 역할을 한다면 나침반의 효력은 새로운 것을 찾아 길을 떠난 사람에게만 나타날 수 있다. 나침반은 그것을 이용하여 새로운 것을 발견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그 실효성이 검증되고 문제점이 발견됨으로써 보다 완전한 것으로 발전할 수 있다. 결국 실천을 통해 철학도 변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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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2 16:33 2009/05/12 16:33

우리의 병은 산업재해입니다.

청원하러가기 http://agora.media.daum.net/petition/view?id=71218

 

 

근로복지공단에 바랍니다 우리의 병은 산업재해입니다.
  • 발의: 2009년 04월 29일
  • 마감: 2009년 05월 31일
  • 서명목표 10000명
  • 현재 서명인원 502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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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하고, 깨끗하게만 보이는 반도체. 우리는 삼성반도체에서 일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내 동료, 그리고 나의 몸이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병원에 가니 큰 병원으로 가라하고 큰 병원에서는 부모님을, 아내를 데려오라더니 백혈병이라고 말했습니다.
삼성에서는 우리의 병에 대해 '개인의 문제'라 말하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비슷하게 아픈 것에 대해 '우연의 일치'라고 말합니다. 정말 그런가요....?

옛날 석면 광산에서 일했던 사람들은 폐에 석면이 쌓여 서서히 죽어가게 되었는데 기침을 쿨럭이며 병원에 가면 회사 소속 의사들은 감기, 결핵이라며 결핵약을 주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꼭 우리 얘기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석면광산의 광부들이 감기나 결핵에 걸린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 얻은 우리의 병은 개인의 문제도, 우연의 일치도 아닙니다.

우리는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를 신청했습니다. 치료비에, 생활비에 허덕거리고 있지만 근로복지공단에서는 잘 모르겠다며 산업안전보건공단으로, 산업안전보건공단에서는 다시 근로복지공단으로 결정을 넘기며 우리는 짧게 1년에서, 길게는 2년을 이렇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근로복지공단의 산업재해 승인을 통해,
반도체 공장에서 병을 얻게된 노동자들이 마음 놓고 치료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삼성 반도체에서도 아픈 노동자들이 더 이상 생겨나지 않도록 노력하지 않을까요? 우리의 병은 산업재해 이며 근로복지공단은 이제 산업재해를 인정할 때입니다."

여러분들의 힘을 모아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승인을 요구하고자 합니다.

[※ 지금 삼성전자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린 5명을 비롯하여 림프종, 뇌종양 각 1명의 피해자들이 근로복지공단의 산재인정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http://cafe.daum.net/samsunglabor(반도체 노동자들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의 카페) 사이트에 오시면 아고라 청원메뉴에서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으실 수 있습니다!]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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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9 12:51 2009/05/09 12:51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정호승

 

그대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 견디는 일

공연히 오지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내리면 눈길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속을 걸어라

갈대 숲 속에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그대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가끔씩 부처님도 눈물을 흘리신다

공연히 오자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산 그림자도 외로움에 겨워 한번씩은 마을로 향하며

새들이 나뭇 가지에 앉자서 우는 것도

그대가 물가에 앉자 있는 것도

 

그대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 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

공연히 오지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그대 울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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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5 14:39 2009/05/05 14:39

달콤한 나의 도시

마음은 늘, 꼭 다시 돌아보는 거 같은데, 상대가 안 돌아볼 거 같으면, 나두 안 돌아 봐요.

 

 

한 번두 울지 않았다! 옛 애인의 결혼식날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어제의 나는 어른이 된 듯 뿌듯했다...왜 어른은 울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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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2 19:19 2009/05/02 19:19

이기적인 상담실

다시 말해 타협에는 두 가지가 있단 말입니다. 첫째는, 아무 노력도 행동도 일으키지 않으면서 그냥 상황 돌아가는 걸 멍하니 구경하면서 ‘어쩔 수 없잖아’로 정리해버리는 타협, 이건 타협이라고도 할 수 없고요, 스스로를 놔버리는 ‘포기’고요. 둘째는 문제의 핵심을 끝까지 추궁해서 어떤 발견을 하고 새로운 전개를 도출해내고 관점마저 변화시킬 수 있는, ‘결론적 선택’으로서의 타협입니다. 후자의 접근이라면 끝장을 볼 만큼 보고 내린 뒤끝 없는 결론이니 타당하고 납득할 만한 것이 되는 거지요.

 

 

약혼자를 심리적 벼랑 끝으로 내모는 걸 각오하고, 도리어 먼저 그에게 파혼당할 것도 각오하고 당신이 심각한 본질적 문제라고 확신하는 ‘감정의 허기’에 대해 충분한 의사소통이 과연 있었는지요. 아니면 이만하면 놓치기 아까운 상대라 파투 날까 겁나니까 내 타협이 적절한지 여부를 혼자서만 ‘내 마음가짐 문제’로 해결 보려고 애초부터 포기하고 있었나요. 말해 봤자 통할 리가 없고, ‘어차피 그 사람의 타고난 성격인데 바뀔 수 있겠어’라고 단정지으며 ‘이렇게 마음 안 통하는 남자랑 결혼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내 나이도 있고 내 불량한 상태 봐도 밑지는 장사는 결코 아니니 이 정도면 감지덕지일까?’ 싶다면 전 되레 그 남자분이 더 안쓰럽습니다. 평생 옆에 누워 자는 아내가 머릿속에서 ‘난 이 남자로 타협 봤어’라는 생각을 품고 잠들고 있다니, 어느날 갑자기 베개로 머리 짓눌리지 않을까 공포스럽지 않을까요?

 

 

이 대목에서 또 ‘어쩔 수 없잖아’라는 말이 울컥 안에서 항변하듯 치솟는다면, 본인 입장에서는 ‘하는 수 없이 타협한다’라며 자신의 처지를 연민을 가지고 바라볼지 모르지만 타인의 시각은 좀더 냉정할 수 있을 겁니다. ‘아냐, 그리 안타까워하지 마. 실은 이렇게 타협하는 결혼이 당신한테 딱 맞는 것일 수도 있어.’ 서른살이 넘어서도 자급자족 독립할 수 있는 기력과 태도, 그 이상으로 자신의 여린 마음을 추스를 수 있는 통제력을 포기한 당신의 나약함과 무기력함 앞에 결혼 상대가 가진 열정의 함량미달을 견주어 보십시오. 당신은 그의 가능성을 놔버리기 전에 이미 스스로를 놓아버리고 있다는 게 더 큰 문젭니다. 보통 나 자신이 못 미더울 때, 내 앞에 나타나는 상대들 역시도 못 미더울 경우가 많거든요. 그렇다고 대차게 버리지도 못하죠. 마음에 안 드는 자기 자신 역시 버리지도 못하고 그대로 붙들고 있듯이. 어쩌면 그 남자분도 ‘난 이 여자로 타협 봤어’라고 내심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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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2 19:08 2009/05/02 19:08

기러기가 주는 교훈

기러기가 주는 교훈

여러분은 간혹 기러기의 무리들을 실제로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들의 비행하는 모습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이런 의문을 품어 신적은 있습니까?

과연 이런 의문들,...


1) 기러기는 왜 무리를 지어서 비행을 할까 ?
 

2) 왜 저런 형태로 비행을 할까 ? 

3) 무리 중 맨 앞에 있는 기러기의 역할 은 무엇인가 ?

4) 비행하다 무리 중 부상자가 생긴다면 ? 

5) 비행하면서 대화는 하는 걸까 ? 


이상은 조류 학자들이 의문을 재기한 내용 들이 엇습니다. 그리고 의문을 풀 여고 연구한 결과 놀라운 사실을 발견 했습니다.


1) 기러기는 왜 무리를 지어서 비행을 할까 ?

기러기는 겨울나기가 되면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인간의 속도로는 따라 잡을 수 없는 속도와 쉴 새 없는 날개 짓으로 수천 킬로를 날아갑니다. 그리고 비행은 혼자가 아닌 꼭 무리를 지어서 날아갑니다. 무리를 지어서 비행을 하면 혼자 비행 할 때보다 훨씬 먼 곳 까지 비행 할 수 있다고 합니다.


2) 왜 저런 형태로 비행을 할까 ?

기러기가 진행 방향을 V자 형태로 그려서 날아가는 모습을 우린 간혹 보게 됩니다. 

간 혹 아닙니다. 기러기는 이 형태를 유지하며 수천 킬로미터를 비행 하여 목적지에 도착 합니다. 왜 ? 그렇게 무리지어 비행하는 걸까요? 기러기 무리 행렬 하나하나 의 날개 짓 으로 바람을 거스르는 풍력을 일으켜 보다 멀리 날아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즉, 뒤에 있는 기러기들의 날개 짓 으로 바람에 힘을 싫어 앞의 기러기가 보다 멀리 날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지요. 기러기 무리들은 이러한 동력으로 여태껏 살아 갈수 있었습니다. 무리의 동력 그건 자율의 협력 심에 흐트러짐이 없기에 가능 했든 것 이라 봅니다. 무리중 하나가 나 혼자만 살겠다고 무리를 이탈 했다면 , 그 기러기는 영영 동료들과 볼 수 없는 것은 물론 이고,  추위와 배고픔에 목숨을 잃어 갈 것이 분명 하기 때문 입니다.


3) 무리 중 맨 앞에 있는 기러기의 역할 은 무엇인가 ? 

기러기 무리 중 맨 앞에서 날아가는 기러기는 리더 입니다.

하지만 리더가 한명이 아닙니다. 무리 중 어느 누군가가 될 수도 있습니다. 뒤 에서 바람을 싫어줘서 리더가 멀리 날아 갈 수 있지만 앞에 있다고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앞엔 공기의 저항이 만만치 않기 때문 입니다.즉, 오랜 비행 중 눈도 침침해 질 것 것이고 날개도 찢겨지는 고통을 감수 하고서 날아가니까요.

리더가 힘겨워 무리에서 치솟아 오르면 리더를 자진하는 무리 중 한마리가 치솟아 올라 리더의 자리를 차지하고 다른 맨 뒤에 기러기는 앞전 리더를 한 기러기에게 맨 뒷자리를 양보하면서, 빈자리를 채워 V자 형태를 계속 유지하며 목적지 까지 날아간다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놀랍지 않습니까?


4) 비행하다 무리 중 부상자가 생긴다면 ? 

기러기는 무리 중 한명이 부상하면 무리 중 2마리가 부상당한 1마리를 따라서 육지로 안착하고, 부상당한 1마리가 완케될 때 까지 기다리고 보살핀 다고 합니다.

 

그리고 완케 되면 3마리가 협력하여 날아간다고 합니다. 하지만 , 죽게 되면 다른 무리가 오도록 기다리고 있다가 다른 무리가 보이면, 합세하여 목적지 까지 날아갑니다. 머나먼 여행 중 무리들이 무사히 함께 도착 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나의 바램이 모두의 바램과 같기 때문 입니다. 우리 모두 도착지에 무사히 도착 할 것 이라는 것 !
나 하나라도 무리에 자그마한 힘이 되어야 한다는 것 !

이들은 공통의 목적을 품고서 날아가는 것 입니다. 도중에 힘이 들지만 주위엔 항상 동료들이 위안을 해주고 힘을 붇도다. 줍니다.

기러기의 리더는 무리를 보좌하는 역할 즉 코치의 역할을 한 것 입니다. 권력으로 대장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진 않습니다. 그리고 기러기 무리 에서 리더 는 한 사람이 아닙니다. 기러기 무리들은 자율적인 행동으로 서로를 보좌 하고 있음에 무리 그 자체가 리더 인 것 입니다. 

  리더는 내 동료 들이 바라는 뭔가를 알고 있어야 되고 이런 바램이 순조롭게 이뤄지도록 보조 해주는 것이 리더의 역할입니다. 리더는 경험으로 알고 있든 지식을 뽐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지식을 다른 누군가에게 전 달하여 그 사람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이 리더의 역할입니다. 그리고 받은 지식은 곧 지혜로 거듭 나는 것입니다.

 

5) 비행하면서 대화는 하는 걸까 ?  

기러기는 여행 중 대화를 합니다.

목적지가 어디야! 아이고 힘들어 ! 나 죽겠다 ! 하면서 대화를 진행한다면 이 무리가 목적지 까지 도착 할 수 있을까요 !

천만에 말씀 단 한 마디도 부정적인 말은 하지 않습니다. 우렁찬 목소리로 바람을 가르며 이렇게 말을 합니다.

" 자아~ 다들 힘내 우린 꼭 목적지 까지 도착 한다. 다들 힘내자고 ! " 
비행 중 대부분이 이러 한 대화를 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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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1 13:02 2009/05/01 13:02

물밑에서 와일드하게 팔을 뻗어!

물밑에서 와일드하게 팔을 뻗어!
[매거진 Esc]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한겨레  
 
 
» 일러스트레이션 최수연.
 
Q 마흔살 독신 직장여성입니다, 혼자 노는 게 너무 싫어요

마흔살 독신 직장여성입니다. 만족스러운 직장생활을 하고 있으며,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이 없습니다. 책읽기와 여행이 취미입니다. 그런데 큰 고민이 하나 있습니다. 친구가 없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함께 여행을 떠나고 취미생활을 할 마음 맞는 친구가 없다는 것입니다. 함께 어울릴 직장동료·선후배·학교동창은 많지만 그냥 술친구거나 가정생활에 매여 외출을 못 나오죠. 운동도 함께하고, 산에도 같이 가고, 여행도 함께 떠날, 마음이 맞는 친구가 없어 너무 심심하고 답답합니다. 동호회 같은 데 가서 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쑥스럽고, 굳이 그래야 되나 싶고요. 한편, 저와 처지가 비슷한 직장동료이자 친한 친구가 한 명 있는데 문제는 저와 성격이 딴판이라는 겁니다. 휴일에는 집에서 편히 쉬는 것을 최고로 여기는 타입이라 억지로 함께 여행도 가고 이런저런 계획도 세워 봤지만, 어쩔 수 없이 좇아오는 친구도 불만이고, 저 역시 편치 않습니다. 열심히 일한 만큼 함께 재미나는 일을 계획하고 나눌 마음에 맞는 친구를 구할 수는 없을까요?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어요. 혼자 노는 것은 너무나 싫어요.

 

 

A 서점에 가면 오지여행이니 테마여행이니 하며 이런저런 잡다한 여행책이 많이 보입디다. 붐인가 봅니다. 나는 저런 책들이 갑자기 많아진 틈새적 이유가 실은 당신처럼 ‘여행갈 상황은 되는데, 같이 갈 인간이 마땅찮아서’가 아닐까 슬쩍 의심해 봅니다. ‘에라, 책이나 뚝딱 한 권 쓰자!’ 식의 이유있는 여행이면 혼자 용기내 들어간 식당에서도 밥 기다릴 동안 메모 끄적대는 흉내내면 왠지 좀 있어 보이고 외로움도 글빨로 승화되잖아요. 인세도 벌어 심지어 막 생산적이야. 어쨌든 나이 좀 잡수신 싱글녀 치고 만만한 여행친구 찾는 거 그거 누구에게나 보통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게다가 당신 같은 에너자이저 커리어우먼, 듣자하니 쉴 때도 만만치 않겠는데요? 일 좀 한다는 여자분들, 대략 두 타입이시죠. 평소에 ‘달리니까’ 여가에는 시체놀이하시는 분(그 직장동료처럼), 아니면 당신처럼 ‘이 아깝고 소중한 시간’을 최고로 의미있는 시간으로 만들고자 ‘일’처럼 뽕을 빼시는 분. 후자들이 오버하면 잰걸음으로 여기저기 ‘찍고’ 돌아다니는 건 기본이요, 시간별 동선 짜고 될수록 사이사이 셀카는 부지런히 찍으시지요. 여행계획 짜기 위해 기본 여행서 세 권은 비교분석해 줘야 직성도 풀리시죠. 퇴근 후, 재즈댄스 중급반 같은 곳에서 만났다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꼭 맨앞 중간 자리 사수하며 땀 뻘뻘 팔 훠이훠이 휘두르며 추실 그 분들이시죠. 팔 닿을까봐 옆 사람 더 저리 비키라고 눈치주고 …. 본인들은 그저 열심일 따름이지만 옆사람 좀 피곤하겠죠?

그렇다고, 보아하니 당신 좀 피곤한 스타일 같은데, 대충 그 나이면 혼자 알아서 좀 놀아, 이 말을 “현대의 성숙한 여성은 혼자 여행하는 것이 스타일리시하다”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하고 싶진 않습니다. 동반자 없이도 너끈히 활개치며 잘 살 것 같은 이런 분들이 실은 타인을, 혹은 관객을 더더욱 필요로 하니깐요. 다만 그 진심을 보이는 것에 인색할 뿐 - 잘난 내가 초라해 보이는 게 싫거든요.

사실 ‘여가친구 찾기’의 가능성은 널려 있지만 일일이 가능성 타진하는 게 치사하고 번거로워서 못해먹는 겁니다. 절박하게 정을 구걸하는 것처럼 보일까봐,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거절당할까봐 두려운 거지요. 꼭 올드미스라서 그런 게 아니라 이건 우리 모두의 딜레마. 평소엔 혼자서도 멀쩡하다가 꼭 무슨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이브나 휴가 같은 특별할 때만 사람 찾는 공황발작을 일으키지요. 당신이 처음부터 가능성을 배제한 그 직장동료·동창·선후배들에게도 엇비슷한 경우가 존재할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종종 묻지 않고 지나가기에 그냥 늘 나 빼고 남들은 즐겁게, 바쁘게 보낸다고 착각하며 지레 토라지곤 합니다. 그간 당신을 동반해 준 그 직장동료도 조금만 그녀의 취향을 반영해 본다면 창의적인 절충안 나올 수 있습니다. 동호회요? 오프라인에서 잘 자리잡으신 분들, 굳이 수평적 관계를 가장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태생도 모르는 연하 것들에게 ‘님’자 붙여가며 맞춰주는 거 솔직히 짜증나죠. 그렇다면 아예 직접 동호회나 클럽을 만들어서 본인 위주로 하우스룰을 설정해서 이기적으로 운영해 볼 수 있잖아요! 당신과 유사한 에너자이저 골드미스 언니들(더불어 운 좋으면 골드미스터들), 오프라인으로 서로 접점 찾기가 힘들어 곳곳에 안쓰럽게 센 척 서식하고 있으니 평소의 업무 추진력으로 단결시켜 볼 만합니다.





번거로워 보이나요? 인간관계, 그거 원래 좀 번거롭습니다. 혹시나 해서 주변의 마흔 전후 싱글 언니들에게 휴가여행에 대해 물어보니 죄다 번거로워서 ‘걍 혼자 갔다’고 토로하더군요. 다만 덜 초라해 보이려고 이 언니들 꾀 써서 일거리를 일부러 만들어 ‘출장’으로 둔갑시켜 휴가갔다 합디다. 저에겐 이런 꼼수가 훨씬 더 번거로워 보입니다.

현대인들의 특징은 내가 남들을 먼저 소외시켜 놓고서는 내가 외롭다고 징징대는 거지요. 외롭다는 그 말도 대부분 직접 못하고 기껏해야 엄한 개인홈피에서나 불특정 다수에게 어리광을 부려보며 누가 내 마음을 알아주고 나에게 맞춰주길 바라지요. 원스톱 효율성(이거 순전 당신의 직업병)으로 운동·등산·여행의 팔방미인 짝궁이 돼 주면서도 내 입맞에 맞는 사람이라니! 당신이 예의 적극성을 발휘해 먼저 팔을 뻗어본다면 가능성이 없진 않겠죠? ‘사람찾기’도 ‘노는 것’처럼 해 보시길. 겉으로 우아해 보이려면 물밑에선 더 와일드하게 들이대야 하는 겁니다.

임경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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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6 23:53 2009/04/26 23:53

그까이꺼 아나토미

그러니 이 땅에서 어떻게 살 건지는 스스로 깨치는 수밖에 없다. 그러자면 가장 먼저 필요한 게 자신이 무엇으로 만들어진 인간인지부터 아는 거다. 언제 기쁘고 언제 슬픈지. 무엇에 감동하고 무엇에 분노하는지. 뭘 견딜 수 있고 뭘 견딜 수 없는지. 세상의 규범에 어디까지 장단 맞춰줄 의사가 있고 어디서부턴 콧방귀도 안 뀔 건지. 그렇게 자신의 등고선과 임계점을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윤곽과 경계가 파악된 자신 중, 추하고 못나고 인정하기 싫은 부분까지, 나의 일부로,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전혀 멋지지 않은 나도 방어기제의 필터링 없이 고스란히 받아들이게 되는 지점, 그런 지점을 지나게 되면 이제 한 마리 동물로서 자신이 생겨먹은 대로의 경향성, 그런 경향성의 지도가 만들어진다.

 
거기서부턴 더이상 자신에 대해 관심이 없어진다. 더이상 자기합리화나 삶에 대한 하찮은 변명 따위에 에너지 소모하는 일, 없어진단 이야기다. 그리고 그때부터 모든 에너지는 생겨먹은 대로의 나를 세상 속에서 구현하는 것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된다. 더이상 눈치 보거나 두리번거리지 않고. 그 다음부턴 쉽다. 꿈이니 야망이니 거창한 단어에 주눅 들거나 현혹되거나 지배당하지 말고, 그저 자신이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것들, 가보고 싶은 곳들, 만나보고 싶은 자들 따위 리스트를 만들라. 그리고 그 리스트를 하나씩 지워가라. 사람이 왜 사느냐. 그 리스트를 지워가며 삶의 코너 코너에서 닥쳐오는 놀라움과 즐거움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최대한 만끽하려 산다. 최소한 나는 그렇다. 건투를 빈다.

 

물론 부모 욕망에 응답코자 하는 건 모든 아이의 숙명이다. 그리고 거기 부응치 못한 자책감으로부터 완벽히 자유로운 자도 없고. 거기까진 정상이다. 사실 인간은 평생을 그렇게 누군가의 욕망에 호응하느라 부산하다. 삶 자체가 인정 투쟁이라고. 하지만 모든 건 결국 밸런스의 문제다.
  
우리나라엔 남의 욕망에 복무하는 데 삶 전체를 다 쓰고 마는 사람들, 자기 공간은 텅텅 빈 사람들, 너무나 많다. 당신만의 노선을 찾고 그리고 거기서 자존감, 되찾으시라. 시간이 오래 걸릴지도 모른다. 쉽지도 않다. 하지만 그 길은 당신 스스로 찾는 수밖에 없다. 다만, 결코 친절해지진 말라는 거. 오히려 이제부턴 차근차근, 남의 기대를 저버리는 연습을 하라는 거. 남의 기대를 저버린다고 당신, 하찮은 사람 되는 거 아니다. 반대다. 그렇게 제 욕망의 주인이 되시라. 어느 날, 삶의 자유가, 당신 것이 될지니.

 

덧붙임- 사람이 나이 들어 가장 허망해질 땐, 하나도 이룬 게 없을 때가 아니라 이룬다고 이룬 것들이 자신이 원했던 게 아니란 걸, 깨달았을 때다.

 

존재에 대한 예의란 게 친절하고 상냥하다고 지켜지는 게 아니다. 아무리 무뚝뚝하고 불친절해도 각자에겐 고유한 삶에 대한 배타적 권리가 있으며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그 경로를 최종 선택하는 것이란 걸 온전히 존중하는 것, 그게 바로 인간에 대한 예의다. 가족의 간섭과 제재는, 아니 사실은 애정까지도, 그 선을 넘어선 안 되는 법이다. 그 어떤 자격도 그 선을 넘을 권리는 없다. 가족 사이엔 아예 선이 없단 착각은 그래서 그 자체로 폭력이다.

 

이런 인간들, 고민상담 안한다. 사람들이 자기 고충을 털어 놓는 건 문제를 대신 해결해달라는 게 아니라, 자신의 처지를 동정하고 공감해 달라는, 일종의 투정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 그러는 거 엄살이라 여긴다. 하여 이런 자들, 혼자 간다. 동지로 든든하다. 인장강도 대단하니까. 근데 당신은 바로 그게 야속하다. 연인이라면, 주요한 삶의 결정들과 자신에 대한 애정은 결코 별개일 수 없다고 믿으니까. 그녀가 중요한 결정을 혼자 했다는 데서 소외감과 배신감을 느끼는 건 그래서다. 연인의 삶이 나와 별개로 진행된다는 건 사랑이 온전하지 않다는 방증이니까. 그래서 당신은 신뢰와 존중을 거론한다. 그러나 그렇게 다그쳐봐야 그녀는 그런 말을 할 필요의 유무와 타이밍의 적절성에 대해 논증할 게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긋난 거냐. 당신이 그녀의 문제해결방식을, 당신에 대한 본질적 애정과 연결해버린 지점부터. 그랬다는 건, 당신은 그녀가 그렇게 생겨먹었단 자체를, 당신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했다는 소리다. 듣고 보니 웃기지 않나. 근데 당신 같은 사람, 적지 않다. 왜 그런 구린 오판들을 하는 걸까.

 

인간들이 그만큼 사랑의 합일성과 완전성을 신화화해온 덕이다. 그래서 사랑한다면 둘 사이에 어떤 ‘별개’도 존재해선 안 되고, 사랑한다는 자신의 감정은 만유인력에 필적할 무슨 우주적 정당성이라도 되는 줄 아는 거다. 하지만 오해는 풀고 가자. 사랑한다는 자신의 감정은 그저 다른 모두의 감정만큼만, 딱 그만큼만 중요할 뿐이다. 게다가 완전하기는커녕 가장 불완전한 감정이 바로 사랑이다. 그러니 사랑한다고 제발 유난 좀 떨지 마시라. 사랑이 때때로 위대해지는 건 완전해질 때가 아니라, 서로 불완전한 걸 당연한 걸로 받아들일 때니까.

 

결혼, 그 사람이 아니라, 아차 그 사람인 줄 안 자와 하는 거다. 제 욕망이 영사한 홀로그램에 지가 넘어가는 거지. 하여 사기당했단 결혼 후 원망은 애초 자신의 착시에 그 본원적 귀책사유 있는 거다. 기실 따지고 보면 그런 쌍방 오판 없인 결혼의 성사 빈도 자체가 현격히 낮아질 게다. 불완전한 인간이 제한된 정보와 시간 안에 다른 불완전한 인간 하나를 평생 동지로 간택하는 일대 도박을 감행하는 데 그 정도 착시조차 없다면 대체 어느 간 큰 인간이 결혼을 하겠나. (그 맥락에서 이 착오는 그저 실수가 아니라 어쩌면 종의 보존을 위해 전략적으로 진화된 인간 심리의 능동적 자기기만일지도 모른다.) 결국 제 수용한계 안에 있는 착시였냐 하는 문제만 남는 거다.

 

우리가 온전히 통제할 수 있는 건 상대가 아니라 상대에 대한 자신의 대응뿐이다.

 

첫째, 연애는, 능력이다. 저절로 주어지는 게 아니다. 습득하고 연마해 획득하는 능력이라고. 그러니 닥치는 대로 연애하시라. 왕자가 우박이냐. 하늘에서 떨어지게. 모집단을 확대하시라.
둘째, 연애는, 연애 자체가 목적이다. 두근대는 기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긴장, 사랑받고 있단 포만, 뜻대로 안 될 때의 탄식, 섹스하는 격동…. 그 모든 걸 오감으로 누리는 거다. 그 외는 다 잡소리.
셋째, 결혼은 운명이 아니라 제도다. 당신, 재산세 내러 태어난 게 아닌 것처럼 결혼하러 태어난 게 아니라고. 관계의 목표가 결혼인 자들, 기껏 결혼밖에 못한다. 대다수가 결혼하고서야 그걸 깨닫는다만.

 

 

자신감은 사실 동전의 양면처럼 패배의식을 동반한다. 외부에서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조건이 제시되면 무너질 수밖에 없으니까. 예를 들어 공부 잘해 남에게 인정받아 만들어진 자신감은 나보다 공부 잘하는 놈 앞에서 무너지게 되어 있다. 하지만 스스로 구축한 자존감은 남의 승인이 필요 없다. 물론 남이 날 좋게 봐 줬으면 하는 거야 누구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아니어도 자존감이 튼튼하면 나는 그대로다.

 

 

컴퓨터의 세계는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다. 이진수 0과 1 사이엔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인간은, 디지털이 아니다. 자연의 인간은 그렇게 단속적일 수가 없다. 인간 자체가 유전적 연속성의 산물이다. 0과 1 사이에도, 무수한 관계, 촘촘히 실재한다. 그저 그 사이 존재하는 관계들에 각각의 제목이, 따로 존재하지 않을 뿐이다. 왜? 무서우니까. 내 연인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다른 누군가에 남다른 관심 주는 자와의 관계, 불확실하다. 그러니 두렵다. 그러다 상처 받으면 어쩌고 나만 손해 보면 어떡해. 그렇게 보호본능에 본전의식으로, 인간들, 0과 1에만 제목 달아뒀다. 제목 달지 않음으로써 그러한 위협 자체를 부정하고, 넉넉한 안전거리를 확보해두자 했다. 그렇게 탄생한 배타적 단어, 연인, 실제 사고 자체를 그리 속박하는 힘, 분명 있다. 모든 애정 관계는 모름지기 연인이거나 연인이 아니거나, 그 확고한 이분의 범주 내에 있는 게 마땅하다 믿게 하는 힘, 그렇게 제목의 유무로부터 시작된다.


문제는 제목을 달지 않았다 해서, 그렇게 외면해버린다 해서, 그런 속성의 관계까지 자동 소멸해버리는 건 아니라는 데서 비롯된다. 따로 정해진 항목이 없어 대략 0.64짜리 연인이라 해야 할 관계, 세상에 실재한단 말이지. 서로 아끼고 때론 섹스 하지만 1짜리 연인은 딱히 아닌 관계, 혹은 섹스는 없되 연인 이상 소통 연대하는, 결코 0이 아닌 관계, 존재한단 말이지. 실재하는데, 이거 대체 어쩔 거냐고.


기실 이거, 단순한 연애의 문제, 아니다. 삶의 불확실성 앞에 나를 얼마나 열어둘 것인가, 그 위험 앞에서 나를 얼마나 잠글 것인가. 그렇게 삶의 공포와 대면하는 근본적인 삶의 태도 문제인 게다. 그리고 그 태도에는, 옳고 그름 따윈 없는 거다. 0과 1로만 한정해도, 틀렸다 말할 권리, 누구에게도 없다. 그 리스크를 누가 대신 감당해 줄 건가. 그리고 바로 같은 이유로 해서 0.64도, 스스로 그 비용을 감당해 가는 한, 그저 제목 없단 이유만으로, 틀렸다 말할 권리, 누구에게도 없는 거다. 그 관계로 향유할 수 있었던 환희와 탄식, 기쁨과 절망, 그 삶의 풍성함은 누가 보상해줄 건가


하여, 두 사례에 대한 내 생각은 그렇다. 그 관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관계가 제 나름의 생명력으로 자라가는 데까지, 한번 따라가 보라고. 제목이 없단 건, 사람들에게 그 관계를 설명할 방도, 찾기 어렵단 소리다. 있는 제목에 욱여넣으란 사회 압력도 작용한다. 쉽지 않단 말이다. 허나 익숙하지 않을 뿐, 0.64도 그 나름의 엄연한 관계규범 가진, 1짜리만큼이나 온전한, 하나의 관계다. 애초부터 출발이 잘못된 게 아니라고. 1짜리로 시작해 결혼으로 끝맺는 게 유일하게 유의미한, 관계의 방정식 아니라고. 누구 맘대로 그걸 정하나.


그러니 그 불안, 누구에게도 떠넘기지 않고 스스로 감당할 요량이라면, 가 보는 거다. 그렇게 가다 보면, 어느 순간 0과 1 사이 어딘가에서, 듣도 보도 못한 관계의 궤도를, 둘이서만 돌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럼 그 관계는 나름의 내적 완성 이룬 거다. 그리고 그로 인한 즐거움은, 1짜리에, 뒤지지 않는다. 당연하다. 이름을 모른다고, 꽃이 절로 못생겨지더냐.

 

스킨십 없지만 연인 이상으로 소통 연대 집착하는 관계, 있을 수 있다. 반대도 가능하다. 그런데 우린 그런 관계, 연인이거나 혹은 연인이 아니거나, 양단간에 하나로만 판정하려는 조바심 있다 했다. 왜. 적확한 제목, 명료히 안 떠오르니까. 불편해서. 두려워서. 그러나 그렇게 낯설다 해서 관계가 실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 그리고 그 이유만으로 그 관계가 불완전하거나 비정상이 되는 건 더욱 아니다. ‘제목 없는 관계’는, 그저 제목만 없을 뿐, 그 나름의 내재적 논리와 생명 가진 하나의 완성된 관계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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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6 22:52 2009/04/26 2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