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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채식은...

  • 등록일
    2007/02/18 01:50
  • 수정일
    2007/02/18 01:50

EM님의 [채식(주의)] 에 관련된 글.

내가 채식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듣고, 고민하기 시작했던 것은

작년 10월 1일에 인사동에서 진보블로거들을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이었다.

그때 만났던 블로거 중에, 지각생달군이 채식을 하고 있는 상태였는데,

우리가 1차로 갔던 곳은 무려 순대국집이었다. -_-

나는 그날 채식하는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았다는 문제로부터

(이게 바로 취향에 대한 존중의 문제)

채식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였고,

그 후로 그들이 채식을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점점 채식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전까지 나는 고기집을 자주 가던 사람이었는데,

블로거들을 만나기 시작하면서부터 고기집에 대한 혐오감이 들기 시작했고,

점점 가지 않게 되었다.

 

그 때의 나는 누군가의 집에 얹혀 살고 있던 터라,

집에서의 요리를 내가 주도적으로 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당장은 시작하기 어렵다는 생각, 그러나 언젠가는 시작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내가 채식을 시작하게 된 데에는 연애의 영향이 컸다.

어쨌든 연애를 시작하고 난 뒤에, 그렇게 '선언'하지는 않았지만,

점점 채식메뉴만을 고집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으니까...

그리고 지금 독립을 하고 난 뒤에는 계속적으로 요리를 연습하고 있다.

여태까지 요리라고는 라면밖에 할 줄 모르던 녀석이었는데,

이제 슬슬 하나씩 배워나가고 있고, 나는 아예 요리를 모르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채식으로만 요리를 익히는 거라서 좋다.

나는 채식을 이어가는 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대안적인 먹거리를 창출해 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내가 먹고 있는 한끼 한끼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행동에 집중하고 있다.

 

채식을 시작한 지 두달이 넘었는데, 여전히 나는 개인적이다.

(그러나, 미안하게도 내가 이렇게 자조적으로 말하는 것과

다른 사람이 내가 하는 채식을 개인적인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한다.)

당장은 사람들의 앞에 서서 채식을 해야한다고 주장, 또는 선동할 생각도 없다.

그리고 나는 내가 채식을 한다고 타인의 앞에서 선언하는 것조차 부담스럽다.

밥 먹을 때 싸우기 싫은 심정도 아직 좀 남아 있고,

또 어느정도는 내가 생각하는 채식을 내가 스스로 다 표현하기도 전에,

자기들이 생각하는 채식으로 치환해 버리는 그 이상한 풍경이 싫기 때문이기도 하다.

 



바로 도살의 문제다. 그동안 내가 먹고 있던 것은 시체일 뿐이다.

문제는 우리가 먹는 것들은 모조리 생명이었다는 것.

 

그렇다면, 식물도 생명이 아니겠느냐고? 맞다. 식물도 생명이다.

채식을 한다는 것도 식물을 죽이는 것이 될 것이고,

그렇다면 도살의 문제를 확대해서 생각하여,

채식이냐 육식이냐의 문제는 죽일 대상을 선택하는 문제지,

죽이는 행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라고 한다.

그런 건 다 인정한다. 나라고 그걸 생각하지 않아서 채식을 시작했을까?

 

나는 이런 문제에 있어서 채식만이 대안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단 한번도 없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도살의 문제에 대하여,

내가 나 자신과 관계된 일을 어디까지 전복시키면서 (내가) 생존할 수 있느냐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단계적으로 봐야하는 문제라는 거다.

고기를 먹는 행위를 하지 않을 수 있고, 계란을 먹는 행위도 하지 않을 수 있다.

생선을 먹지 않을 수도 있고, 우유도 먹지 않을 수도 있다.

또, 지금 내가 먹고 있는 다른 무엇들도 언젠가는 먹지 않게 될 수도 있다.

나는 이제 겨우 고기와 계란과 바다동물과 우유를 먹지 않는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런 부분에서 수위가 다를 수 있다.)

그런 나의 먹지 않는 '행동', 혹은 먹지 않는다고 하는 '선언'이

어떻게 그것과는 다른 것(채소, 과일 등등)을 먹는다는 이유로,

무려 고기를 먹는 사람에게 그건 '운동'이 아니라고 비판받을 수 있을까?

 

 

나는 채식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채식을 하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냥 나 혼자 채식을 할 것이다.

다만 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도살의 문제에 대하여 계속적으로 고민하고 있고,

내가 무언가를 먹고 있는 행위가 (그것이 심지어 채식일지라도)

그 무언가를 어느시점에서 죽이는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 것임을 생각하고 있다고...

그리고 우리가 먹는 것을 통하여 얻는 생존이 이미 도살의 문제를 배제할 수 없다고 해도

나는 그게 어쩔 수 없다고 해도 그것에 대한 고민을 방기해서는 안된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물을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꼭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형태의 채식이 아니라도 좋다.

이런 고민을 이어갈 수 있는 그 어떤 행위라면...

당신의 입에 고기로 들어가기 위해, 죽어야만 하는

어떤 동물들을 생각해서라도 고기를 먹지 않을 수 있다.

당신의 입에 계란으로 들어가기 위해, 끊임없이 알을 낳아야만 하는

닭을 생각해서라도 계란을 먹지 않을 수 있다.

당신의 입에 우유로 들어가기 위해, 끊임없이 젖을 생산해야 하는

소를 생각해서라도 우유를 먹지 않을 수 있다.

등등등...

물론 여기에는 먹는 것 외에도 많은 이야기들을 할 수 있다.

내가 입고 있는 옷에 달려있는 털이 어떤 동물의 털인지,

내가 신은 신발에, 내가 가지고 있는 가방에 어떤 동물의 가죽이 들어갔는지...

가구를 만들기 위해, 종이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나무를 베어야 했는지...

누구도 도살의 문제에 대해서 완벽하게 도덕적일 수는 없지만,

그런 이유로 그 수많은 이야기들을 피하느냐 아니냐는 다른 문제다.

내가 채식을 생각한 것은 이런 이야기를 피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는데,

그게 어떤 사람들에게는 '취향'으로 보였나보다.

 

여기서 '취향'이라는 말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를 하자면,

채식은 결코 '취향'이 아니다. 취향이라고 할라면,

그건 고기와 채소중에 선택을 할 때 채소를 선호하는 것인데,

채식은 육식과의 단절을 의미하지, 채소를 특별히 선택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채식은 '취향'이 아니다.

그러므로, "채식을 '취향'으로 존중한다"는 말은 틀렸다.

나는 채식을 '취향'으로 왜곡하는 모든 담론에 대하여 반대한다.

 

채식은 '반자본주의운동'이 아니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채식은 채식이지, 그 자체로 반자본주의운동이 아니다. 굳이 그걸 설명해야 하는가?

물론 채식과 반자본주의운동이 연결이 될 수는 있다.

도살을 통하여 먹거리를 생산하는 것은 자본주의 이전부터 있어왔던 일이겠지만,

현재 그런 행위가 이루어지는 체제는 자본주의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관관계를 분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관관계일 뿐이지, "채식=반자본주의"로 논할 수는 없는 일이다.

 

채식이 '운동'이 될 수 없다고 한다. 소름이 끼친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평택에서 열심히 투쟁하고 있는 것을 '운동'이 아니라고 했고, 또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여성주의는 그 자체로 '운동'이 될 수 없다고도 했다. 내가 한때 열심히 무언가를 조직하려고 했던 것에 대하여, 또 다른 누군가는 그건 '운동'이 아니라고 했던 적도 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운동'을 '자신이 생각하는 혁명적인 어떤 것'으로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반자본주의 전선, 또 다른 어떤 중대한 전선과는 조금은 떨어져 있는 듯해 보이는 것들에 대하여 (실제로 그런 전선 자체를 왜곡하고 있지도 않음에도...), '운동'이 될 수 없다고 말한 것일 지도 모른다. 그걸 '운동'이라고 말하는 게 싫은가보다. 그러나, 어떤 것에 대하여, '운동'인가, 아닌가를 말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고민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 뿐이라고 생각한다. 남들이 고민하고, '운동'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일방적으로 '운동'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결코 '운동'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자세라고 생각한다. 채식은 이미 나에게는 운동이다. 그리고 그건 나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대한 쟁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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