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서비스지회를 응원하며

비영리단체 IT지원

훌륭한 분들의, 의미있는 활동에 작게 나마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은 큰 보람이다. 2018년 한국에서 삼성의 무노조 경영을 깨뜨리는 것만큼 찬사를 받을 만한 일도 드물텐데, 그것을 위해 얼마나 힘들게 지금껏 싸워왔을 지 짐작조차 어렵다.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과 지속적으로 연대한 많은 분들께 깊은 경의를 표한다. 

요즘엔 어제 일도 기록을 안하면 잘 기억이 안나다 보니 정확히 언제였는지, 내가 뭘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노동조합과 시민사회단체에 컴퓨터 정비와 홈페이지 제작 등을 해주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금속노조의 당시 홍보부장(?)이 연락을 주셨다. 노동조합이 만들어지는 것은 주변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화려하게 되는 경우는 드물고, 온갖 방해공작과 위협 속에서 비밀리에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역시나 삼성전자서비스지회도 보안 속에 설립을 준비중이었다. 내가 받은 요청은 지회의 홈페이지를 만들어 줄 수 있냐는 것이었다. 

IT산업 분야의, 더구나 무노조 경영의 삼성계열에서 노동조합을 만든다고 하니 바로 응낙을 했다. 문제는 제작비용이 없고 (얼마를 제시했었는지 기억은 안나는데 제시했다고 해도 아마 안 받는 거나 다름 없는 수준이었을거다) 시간도 촉박한 것. 제안을 받기 1년 전쯤 어떤 마트에서도 노동조합을 설립중이었는데, 역시나 회사의 공작이 심해 비밀리에 홈페이지 제작 의뢰를 받고 준비하다 결국 조합 설립이 좌절되어 엎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퀄리티 높은 홈페이지를 만들기 보다는, 삼성 계열의 노조가 받을 사회적관심이라던지, 지원하는 곳들의 욕심 같은 건 1도 생각지 않고, 무료 도구를 이용해 하루 이틀 만에 뚝딱 만들어 일단 쓰고, 실제로 조합이 성공적으로 설립되고 움직임을 공개적으로 하게 될 때 사이트를 제대로 개편하자고 제안했다. 

금속노조의 위상은 한국에서는 노동조합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뭔가 두려워할 정도였기에 홈페이지 제작에 필요한 인프라는 말 한마디면 금방 제공될 줄 알았다. 하지만 역시나 그런 큰 조직도 어떤 인프라 자원이 넉넉하거나 장기적 안목으로 기술 인프라를 준비해두고, 공동체정신에 입각해 신생 노조를 전폭적으로 지원해 줄만한 마인드를 유지하긴 어려워서 결국 도메인과 호스팅 신청부터 XE(예전 활동가들도 제로보드라고 하면 들어봤을 텐데, 그 후속이다) 설치와 구성, 샘플 데이터 게시까지 모두 해서 지회에 전해줬다. 언젠가 나중에 제대로 개편해서 활용하길 바라며.

그러고 나서 2년인가 3년인가 다시 지회의 홈페이지를 검색했는데 그 때까지도 그 홈페이지를 그대로 쓰고 있었다. 지금은 새롭게 개편을 해서 내가 작업해준 흔적은 안 남아 있지만, 이틀 만에 만든 홈페이지치고는 내 애정이 담겨 있어서 그랬는지 ^^; 꽤나 오래 활용한 것이다. 그때 뭘 했던지 바쁠 때라 만들고 몇 가지 후속 설정을 해주고 나서는 큰 탈이 없길래 잊어 버리고 있었고, 아마 당시에 내게 의뢰한 홍보부장님도 내 존재를 포함해 모두 잊어버리지 않았을까 싶다. 즉 이 글을 쓰지 않으면 삼성전자서비스지회라는 자랑스러운 노동조합의 초기 설립과정에 내가 소소한 도움을 준 것은 아무도 모를 일이다. 돈도 안 받고 계약 따위도 없었으니 공식적인 기록도 안 남아 있을 것이니 말이다.

스스로 칭찬하려는 취지로 시작한 글이지만 이 이야기를 언젠가 쓰겠다는 생각은 전부터 했다. 바로 '하루 만에 만들어준 홈페이지로 수 년동안 쓰며 초기 떡잎 역할을 잘했다'는 사실을 통해 내가 평소에 얘기해 왔던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사회의 변화는 많은 사람들의 의지와 구체적 행동과 함께 '그 운동을 통해 변화될 사회를 지탱해줄 기술'이 적시에 제공되어야 한다. 이상적인 제도를 고안했지만 기존의 방식으로 그걸 유지하는데 품이 너무 들어간다면 결국 그 제도는 사회에 안착하기 어렵다.

역사 왜곡의 논란이 많은 '광해군과 대동법'이 한 예가 될 것 같은데, '광해군이 백성을 사랑하여 대동법을 시행하려 했다'는 믿음이 많은 사람들에게 퍼졌다가 '사실 광해군은 대동법 시행에 소극적이었다'는 연구가 나와 다시 바로잡히고 있다. 선조때부터 논의 되어 효종대에야 제대로 시행됐다고 하는 대동법은 사실상 쌀을 운송하는 '조운 기술'이 발전하면서 실효성을 갖게 되어 실제로 사회에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적용되었다는 해석이 있다. 광해군이 '옛사람들이 제도를 그렇게 안하는데는 이유가 있지 않았겠냐'고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는데, 그 이유라는 것이 부족한 기술때문에 광해군 전까지는 그 방식이 사회적 비용과 부작용이 더 크다고 판단되어 시행되지 않았던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기술의 발전 속도가 빨라지면서 현대는 기술의 변화가 사람들의 생각에 강한 영향을 주는 사회가 되었지만, 기술의 구현과 적용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기에 '정확히 필요한 그 때' 잘 준비되어 옆에서 대기하는 경우는 여전히 드물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기술의 외연적 성과가 사람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아도 결국 시간이 지나보면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들이 살아남아 소박하게 제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2000년대 중반의 웹2.0이 그 점을 잘 드러내줬다. 실험적인 것들이 앞서나갈 수 있지만 사회의 주류가 되는 기술은 대체로 사람들의 필요에 비해 '늦게 나타나고', 동시대에 두각을 드러내는 것은 대체로 거품이 껴 있는 경우가 많다. 

과학기술학에 대해 일반론을 얘기하는 것은 또다시 글이 길어질 것이고 (이미 길어진 감이 있지만), 내가 시민사회단체를 다니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아주 최신의 최첨단의 기술이 아니어도 그 즉시 적용되기만 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큰 이로움을 줄 수 있는 '보편적 기술'의 영역이 굉장히 넓은데, 실제로는 그런 영역이 사람들에게 잘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늦게라도 제대로 된 기술이 필요할 때가 있고, 완벽하진 않아도 바로 쓸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할 때가 있다. 처음부터 잘 준비된 것을 활용할 수 있으면 물론 좋지만, 기술 적용을 단계적으로 설계해서 가벼운 것부터 시작해 점차 전체적으로 완성해가는 것이 더 적절하고 오래 지속될 수 있는 측면도 있다. 삼성전자서비스지회 홈페이지의 경우처럼 처음에 잘 소통이 되어 현실적인 기획이 나오게 되면, 경력이 짧은 개발자라 하더라도 약간만 공부해서 바로 만들 수 있는 일들이 허다하다. 그리고 그런 작은 기여 활동이 어떤 이들에게는 정말 단비같은 역할을 한다. 

2000년대 말부터 2012년까지 IT자원활동가네트워크의 코디네이터 역할을 하며 많은 IT인들을 만나게 됐다. 이름 높은 실력자도 있었지만 단지 좋은 마음으로 조용히 참여하는 평범한 IT인이 많았다. 그때 알게 된 몇 분은 6년째 중고령 노동자를 위한 야간 컴퓨터교실에 무보수로 자원활동을 한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의 기초를 가르쳐 주는 것이라 높은 수준의 기술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모두 낯설어 했지만 사람을 존중하고 소통하려는 마음으로 지속하다보니 지역에서 높은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이어오고 있다. 

사회 공헌을 위해 조금씩 나서는 IT인들을 보면 대체로 스스로 높은 생산성을 갖는데 성공한 고수준의 기술자인 경우가 많아 보편적 기술을 적용하는 활동에는 큰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다. 당연히 높은 수준의 기술 서비스가 더 많이 시민사회단체와 비영리조직에 제공되어야 하므로 그런 분들의 역할은 크다. 20% 미만의 시민사회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20% 미만의 IT인 외에도 80% 이상의 시민사회가 혜택을 입을 수 있는 보편적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80% 이상의 IT인이 더 존재감을 갖고 시민사회와 지속적으로 만나 기술을 베풀며 서로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지길 바란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공동체IT사회적협동조합'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라며, 평범한 (예비)IT인이 더 많이 사회공헌에 참여할 수 있도록 노동조건이 개선되고, 시민사회의 기술공동체 문화가 복원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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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8 18:10 2018/04/18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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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수진 2018/06/26 19:41 URL EDIT REPLY
기사 검색하다가 우연히 읽게 되었습니다.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대외협력부장 황수진입니다. 당시 홈페이지 제작을 의뢰한 사람은 아마 홍명교 전 교육선전위원이었을 것 같네요. 이 글을 읽고 역시 많은 분들의 애정과 노고 덕분에 삼성전자서비스지회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에 언급하신 것처럼 지금은 개편했지만 첫 홈페이지에 노조 초반의 소중한 자료들이 축적되어 있어서 지금도 잘 이용하고 있습니다. 저희 지회를 도와주시고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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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단체의 "기술 빈곤" 해결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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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일어나는 일들

* 오늘 한 사무실에 갔더니 거기 계시던 분이 날 보자마자 "○○○님 아시죠? 지각생을 막 찾으시던데요?"라고 알려주셨다. 전화를 드려 보니 엑셀 문서가 열리지 않는다고 한다. 매크로 바이러스인가 했지만 얘기를 나눠보니 랜섬웨어(ransomware)에 걸린 것 같다. 확인해보니 랜섬웨어가 맞다며 눈물의 문자가 왔다. 랜섬웨어에 대해서는 비영리IT지원센터의 박준성, 김금진님이 좋은 안내글을 써주셨다. 

[ A TO Z ] 랜섬웨어에 감염됐어요~! 고칠 수 있나요?

지금도 전국 어디선가 어떤 활동가의 PC가 망가져가고 있을지 모르겠다. 

* 연말이 다가오니 단체 홈페이지를 연내에 만들기로 한 곳들이 급해진다. 시간이 부족한데 모은 돈도 없고 어떻게 기획을 해야 할지도 모르다보면 한 두 사람 거쳐 물어보거나 인터넷에서 가장 싸게 해주는 곳을 찾아 맡기기 쉽상이다. 그런데 무턱대고 싸게 하다보면 크게 후회하는 일이 종종 생긴다. 사회단체를 잘 알고 공익 활동의 의미로 싸게 해주는 업체라면 걱정이 없는데 그렇진 않고 가격만 싸게 부르는 곳은 반드시 그만한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얼마를 쓰던 반드시 후회하게 되므로 성급히 결정하기 전에 꼭 상담을 받아보시기 바라며( fosswithyou@gmail.com ), 1년이 더 지나더라도 "사회단체를 잘 아는 믿을만한 업체에게 조금 더 모은 돈으로 맡기는 것"을 추천한다. 

* PC는 더 이상 사회단체에게 중요한 이슈가 아닌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2년 전 한 사회적기업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두 대의 PC가 고장이 나서 유명한 PC정비업체를 불렀는데 동시에 고장이 났다는 이유로 디도스(DDOS)일 수 있다고 사무실에 있는 PC를 모두 수거해 갔다. 며칠 후에 돌아온 PC는 모두 하드디스크가 바뀌어 있었고 사용하던 프로그램과 파일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어찌된 일인지 물으니 디도스가 맞았다고 말하며 모든 데이터가 이미 손상을 입어 복구할 수 없었다는 소리를 하고 수리비 백만원을 지금 당장 입금하라고 했다. PC를 잘 모르다보니 그 동안 무슨 말을 해도 그런가보다 하며 넘어갈 수 밖에 없던 그 사회적기업에서 결국 도움을 청하다 내게 연락이 닿았다. 뜯어보니 하드는 모두 기존 것보다 저용량에 중고품이었고, 계산서를 보니 시중 부품 가격의 3~4배를 청구하고 있었다. 데이터도 없어진 것이 아니라 그 업체가 빼돌려 놓고 다른 복구 업체가 손을 대면 하드 자체가 손상되게 하는 방식으로 지금까지 악명이 높은 곳이었다. 내가 직접 겪지 않았다면 여러 곳의 얘기를 합쳐서 말하는 줄로 알았을 만큼 그 밖에도 부당한 일 투성이었는데, 나는 그 업체를 꼭 혼내주자고 얘기했지만 사회적기업 활동가들은 이미 너무 정신적으로 지쳐서 그냥 새로 PC를 셋팅해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결국 내가 새로 PC를 맞춰주고 데이터 백업 서버를 사무실 내에 만들어주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사회단체의 기술역량을 바라보는 관점

사회단체들이 대체 어떻게 하면 IT를 잘 쓸 수 있을까? 오랜 시간 동안 나 외에도 많은 IT인이 개인적 선행으로 몇몇 단체들을 지원해왔고, 기업은 CSR을 한다며 컴퓨터 구입 비용을 지원하고, 단체들도 나름 바쁘고 힘든 와중에도 개별적으로 많은 노력을 해왔다. 내가 사회운동에 IT를 잘 써보려고 근본 없는 활동을 시작한 것도 10년이 넘었는데, 내 이전에 기여를 해온 사람까지 합치면 정말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지금까지 있었지만 큰 성과를 내진 못하고 있다. 무엇이 부족했던 것일까? 어떤 것이 빠졌던 것일까? 

답은 뻔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다 단체들이 돈이 없으니 그런거지", 분명한 큰 요소이긴 하지만 그것이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또 그렇다면 정말 뭘 해볼 것도 없고 말이다). 인과관계는 유기적이고 순환하는 것이 있어 오래 누적된 문제는 어느 한 가지만 해결하면 된다고 말하기 어렵다. IT의 부족은 경제적 빈곤 상태가 초래한 결과가 아니라 IT의 부족 자체를 "기술(적) 빈곤"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을 제안한다. 개별 주체들의 노력만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로 바라보고 함께 해결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예전에 비해 그나마 한국에서 나아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 빈곤을 100% 개인적 문제로만 보는 시각이 많이 약해진 것 같다는 점이다. 빈곤이 구조적으로 재생산되는 것이라는 생각은 어느 정도 확산된 것 같으며,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가난한 사람에게 뭔가 문제가 있어 가난해진 것이라고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전보다 줄어들었다. 10년전 노벨평화상을 받은 무하마드 유누스 그라민 은행 총재는 이렇게 말했다. "빈곤의 원인은 가난한 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조에 있습니다. 빈곤 퇴치를 위해서는 우리의 선입견과 사회구조의 개혁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 스스로 가난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와줘야만 빈곤을 퇴치할 수 있습니다".

"기술 빈곤"이라는 개념으로 사회단체의 IT활용을 바라보면 어떨까? 지금까지는 사회단체가 스스로 노력하지 않아 IT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부족하며, 변화를 받아들이는 노력이 부족하다고 비난하는 목소리가 강하다. 사회단체가 돈이 없는 것은 정치적 역사적 맥락이 있는 것인데 오직 운영을 비효율적으로 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사회단체가 IT를 못 쓰는 것을 "스스로 노력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다양한 사회구조의 문제로 바라보는 것이 진정 변화를 이끌어내는 시작일 것이다. 이를테면 사회단체가 활동하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IT환경을 갖추는 것을 의무가 아닌 권리(IT기본권)의 개념으로 바라보고. 자구노력을 뒷받침할 여러 공적, 사회적 지원체계를 구축하는 노력을 진행할 수 있다.

 

기술 문제를 구조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이유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회단체의 IT활용 부족을 빈곤(구조적)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 듯하다. 예를 들면

* IT를 생필품이 아닌 사치품으로 여기는 경향이 일부 있다. 있으면 아주 좋지만 없어도 살아갈 수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2016년의 한국에서는 동의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IT를 절박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 이 문제를 심각한 것으로 바라보게 하는 것을 막는다. 

* IT를 의지나 재능에 의존하는 문제로 여기는 것도 원인이다. "피해자 비난"과 연관되는 부분인데, IT를 적극적으로 쓰기 위해 필요한 제반 환경의 문제에 대해 고찰하기 보다는 "활동가들이 기술 공부를 안해서", "인문학 중심의 시민사회가 과학기술을 천대하거나 무지해서" IT 부족현상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회심리학 용어로 "행위자-관찰자 편향" 이라고 일컫는 현상이 있다. 자신의 행동의 동기는 환경적 요인에서 찾지만 타인의 행동의 동기는 그 사람의 내면적인 데서 찾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은 타인이 내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 꾸짖고 가르치지만 자신의 행동은 쉽게 합리화한다. 진정 타인의 변화를 원한다면 그 환경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메시지로 나는 이 현상을 해석하고 있다.

* 실제와 달리 IT의 공급이 많이 이뤄지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것도 원인이다. 지금 한국은 "IT과잉"이라고 여겨지는 여러 징후가 드러나고 있는데, 실제로는 여러 불균형에 의해 일부(특히 하드웨어)에 한해 과잉 공급이 이뤄지고 있지만, 인식의 오류로 인해 마치 전반적으로 모든 곳에 IT가 과잉 공급되는 것으로 여겨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도 있다. 

 

사회단체의 IT역량 문제를 빈곤의 문제로, 구조적으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를 심도 있게 살펴봐야 한다.

  • 지금의 상황을 초래한 다양하고 역사적인 원인들 (외적 요인)
  • 현 구조의 문제가 심화되고 자체 개선되지 않는 이유 (내적 요인)
  • "기술 빈곤"을 정의하기 위한 객관적 지표들
  •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도해볼 만한 대안들

이 주제들 각각은 별도의 글로 다룰 예정이다.

 

기술 빈곤을 해결하려는 노력

사회단체에 IT를 보급하는 활동을 하는 단체와 사람들은 90년대 중반부터 꾸준히 있었다. 진보넷부터 내가 속했던 노동넷과 그 전신인 노동정보화사업단 등의 시민사회단체가 있고, 단체들에 홈페이지를 만들고 유지보수하는 활동가 그룹(피스넷 등)과 개인사업자가 있으며, 2000년대에는 다음세대재단 등의 공익재단들이 생겨났다. 각각 다른 방식이지만 지금의 시민사회단체들의 IT역량은 이런 주체들의 노력이 만든 결과이다. 기존의 IT사회단체와 활동가그룹은 2016년 현재 진보넷 외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이며, 2013년에 설립한 비영리IT지원센터가 여러 공익IT활동가 그룹을 조직화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보안전문가들이 얼마 전에 만든 단체인 소셜정보안전센터가 그런 예이다.

다음세대재단은 해마다 개최하는 "체인지온" 컨퍼런스를 통해 시민사회단체들의 IT리더십을 함양하는데 큰 공헌을 하고 있다. 특히 컨퍼런스때 발표하는 <비영리 미디어 실태조사>는 비영리/시민사회의 IT역량을 가늠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최근의 자료인 2015년 조사결과는 SNS등 미디어 활용실태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조금 더 넓게 IT활용 실태를 파악하고 싶다면 2014년 실태조사를 읽어볼 것을 추천한다.

이런 노력들은 실제로 많은 반향을 일으켜, 다양한 기술과 생각을 접한 활동가들이 단체로 돌아가면 새로운 프로젝트를 추진하려는 의욕을 보이기도 한다. 현재 겉으로 드러나는 성과나, IT에 대해 얘기하는 일반적인 활동가들의 표정들을 보면 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사회단체 활동가들에게 IT에 대한 관심과 의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외부에서 주어지는 훌륭한 인사이트와 기술정보들이 있어도, 그것을 조직 내 프로세스와 활동 양식에 녹여내지 못하는 구조적 한계들이 있고, 장기간 동안 극복이 되지 않아 피로가 누적되어 있을 뿐이다.

늘어나는 외부의 "공급"에도 불구하고 그에 비례하는 성과를 내지 못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들 수 있다.

* 기본 체력 부족

  사회단체의 IT역량 부족 상태(빈곤상태)는 대체로 오래 지속되어 왔다. 끊임 없이 발생하는 사회이슈를 대응하는 것조차 버거운 활동가들은 스스로 IT를 깊게 공부하기 어려우며, 설령 IT를 잘 알던 사람도 몇 년 동안 단체 고유의 활동을 하다 보면 최근의 흐름을 따라가기 힘들어한다. 새롭게 들어온 활동가는 IT에 대해 잘 알더라도 조직의 상황을 충분히 알지 못해 IT를 조직내 프로세스(IT거버넌스)와 활동에 접목시키는 것이 어렵다. (여기서 IT거버넌스는 IT에 관한 의사결정, IT를 통한 의사결정 모두를 포함하는 용어입니다) 대체로 어느 시점에서 가장 흔한 IT교육은 그 시기의 트렌드에 맞춘 것이다. 시민사회단체를 위한 IT교육은 최신의 트렌드를 따라가는 것보다는 "오랜 기간 보편적으로 널리 쓰인 기술"을 쉬운 말로 풀어 설명하는 것이 효과가 좋다. 대부분의 활동가들이 IT인이 아니라는 점은 당연히 고려되어야 한다.

* 피로 누적

 많은 단체들이 이 글 맨위에 언급한 것과 같은 사례를 직접 체험한다. 신뢰할 수 있는 IT업체와 성공적인 프로젝트를 수행한 경험보다는 그 반대의 경우가 훨씬 많기 때문에, 많은 단체에 있어 IT는 불안하고, 피곤한 것으로 인식된다. 사회단체 활동가에게 IT관련한 제안을 하고 싶다면 "좋은 것이 있어" 정도에서 멈추지 않고 그것이 실제로 적용 가능하다는 확신을 주며 안심시킬 필요가 있다.

* 사상의 빈곤

 과학기술이 가치중립적이며 사회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사상이다. 한국은 과학기술학STS의 전통이 단절됐다고 생각될 정도로 과학기술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담론이 부족하다. "기술결정론"이 지배적이어서 좋은 품질의 과학기술은 무조건 공급을 늘리면 된다고 생각한다. 시민사회단체의 현실을 먼저 이해하고 실제 수요자에 맞춰 출발하는 정신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까닭에, 결국 제공자만 만족하는 기술지원 사업이 대부분이다.

* 지속되는 관계 부족

 기술 도입이 성공하는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여러 요인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조직 구성원 모두가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꾸준한 노력이 이어져야 한다. 외부의 제안이나 기여로 새로운 IT 시스템을 도입할 수 있지만, 그것을 단체의 상황에 맞게 커스터마이징하고 유지보수하는 노력이 이어지지 않으면 많은 경우 실패한다. 기업에서 빠르게 파일롯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실시하는 해커톤 방식이 비영리/시민사회를 위해서도 실시된 적이 있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물은 대부분 오래 가지 않아 쓸 수없게 되었다. 시민사회단체에는 신뢰할 수 있고 상당 기간 동안 긴밀하게 피드백을 주고 받으며 필요할 때 기술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관계가 필요하다.

* 기술 수용/공유 용량 부족

단체에 필요한 IT기술은 저마다 종류와 수준이 다르며, 시기에 따라 변화한다. 만일 한 단체가 몇 년간 수행할 활동을 위해 필요한 IT기술을 모두 갖춰두려면 많은 투자가 필요할 것이다. 상황에 맞게 필요한 것만 갖추려고 하면 그때마다 구축을 위한 노력이 많이 투여되고, 실제 활동에 집중할 수 없을 것이다. 시기가 변해 지금 많이 쓰진 않지만 없앨 수 없는 보존 대상도 있다. 여러 이유로 한 단체가 자체 역량만으로 필요한 IT기술을 모두 수용해 두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비효율적이다.

또한 단체들이 필요로 하는 기술들은 많은 경우 다른 단체와 공통적이다. 지금 이 단체에 필요한 기술(결과물 포함)이 다른 단체에는 필요치 않다가 특정 시기에는 반대가 될 수 있다. 개별 단체에서 IT에 동원할 여력도 부족하고, 수용해 둘 수 있는 기술의 양도 한계가 있으며 서로 공통된다면 가장 좋은 것은 여러 단체들이 기술(성과물)을 공유하는 것이다. 여러 단체가 공유하는 창고 같은 개념으로 기술공동체를 상정해서 IT자산과 역량을 유지한다면 개별 단체들의 부담을 낮출 뿐 아니라 지속적인 발전, 시너지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IT가 개인의 역량에 의존하는 현재 상태에서, 인적 순환이 많아 흔히 "좁은 바닥"이라고 말하는 비영리-시민사회에서는 이런 공용의 수용공간/시스템이 있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다.

 

어떻게 구조적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한국 사회단체의 기술 빈곤(tech-poor)상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방적인 공급량 증대만이 아닌 다양하고 꾸준한 시도가 필요하다. 90년대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있었던 기술공동체 문화를 복원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시민사회단체를 자선형식으로 꾸준히 돕는 주체들은 그 효과를 높이기 위해 조직화를 하거나, 자선형식을 넘어선 방식의 활동을 하기 위한 조직 결성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로 시도하고 있는 것을 소개하면, 2012년에 IT자원활동가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새로운 IT시민단체'를 만들자고 제안을 했고, 많은 분들이 호응해주셔서 2013년에 사단법인 비영리IT지원센터를 만들 수 있었다. 2015년 초까지 직접 상근활동을 하면서 느낀 것은 기존 방식의 IT공급을 계속 확대하는 것은 지금의 비영리IT지원센터로도 의미있는 활동을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정말 비영리/시민사회의 IT역량을 한층 한층 발전시키는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구조적으로 다르게 접근하는 노력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2012년 초의 흐름을 다시 살려 두번째로 새로운 조직을 만들고 있다. 시민사회단체가 조합원으로 가입해 꾸준히 기술 역량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기술공동체의 성격을 갖는 사회적협동조합이다.

이 조합은 3단계에 걸쳐 비영리/시민사회단체의 IT역량을 키워간다. 1단계는 IT에 관해 안심할 수 있게 하는 단계로 PC정비, 홈페이지 개/보수, 데이터 백업 등의 "인프라 유지보수" 사업을 수행한다. 2단계는 IT의 가능성을 재발견하는 단계로 각종 통계 리포트를 정기적으로 제공하고, 조합원 교육을 통해 기초 체력을 기르며, 단체 활동과 관련한 여러 자료를 온라인DB화 하는 과업들을 수행한다. 3단계는 IT를 활동에 접목시키는 단계로 IT를 긍정적으로 사고하며 여러 아이디어를 현실화하기 위한 시도를 실패 부담을 줄이며 실시한다.

이 기획은 사회단체들의 자구노력을 이어가고 그 성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것으로서 이 밖에도 공적 지원확대 등 구조적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 이것을 위해서는 IT가 그 자체로 여러 사회단체들에게 중요한 화두의 위치를 다시 회복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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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10 22:46 2016/10/10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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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과 정의

잡기장

 

1. 지하철 두줄 서기

지하철 에스컬레이터 두 줄 서기 캠페인이 작년(2015년)으로 끝난 것을 얼마 전에 알았다. 한 줄 서기 캠페인이 2년만에 정착한 것에 비하면 8년간 했던 캠페인이 성공하지 못한 것에 대해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한 줄 서기 캠페인이 시작된지 얼마 후, 에스컬레이터를 정비하는 친구가 있어 얘기를 들었는데 과장이 섞였을 수 있지만 고장이 세 배로 늘었다고 했다. 일할 사람을 늘리지 않는데 일이 갑자기 많아지니 사람들이 힘들어 그만두고, 그래서 남아 있는 사람의 부담은 더 커졌다. 결국 그 친구도 직장을 옮기게 됐는데 그 후로 나는 한 줄이 비워진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기 보다는 (지금보다 기력도 넘쳤으니) 계단을 이용하는 편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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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줄 서기 캠페인이 시작된 초기를 기억한다. 한 줄 서기를 하자고 한 것이 잘못 되서 되돌린다는 인정과 사과는 없이 어느날 갑자기 "잘못된 이용문화 때문에 사고와 고장이 많이 나서 다른 사람이 피해봄"이라고 하는 것을 보고 화가 났었다. 그래도 지금이라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지금까지 수년간 지하철 두 줄 서기를 실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왼쪽에 서서 오곤 했다.

본래 어떤 외압에도 굴하지 않고 신념을 지키는 타입의 사람은 아닌지라 당연히 무언의 압박을 늘 느끼고 갈등했다. 대놓고 비난하는 것은 이제 거의 없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가끔 노인분들의 중얼거림을 듣곤 한다. 물론 젊은 사람이라고 전혀 안 그러는 것은 아니다. 그 불평과 비난은 결국 나 같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방해하는 "민폐"를 끼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비난을 받는 걸 못 견뎌서(비난받을 것을 두려워해서) 두 줄 서기 캠페인이 진행중임을 알았어도 오른쪽에 서는 것을 선택한다. 그래서 합정역 6호선 내리는 곳처럼 짧은 에스컬레이터라 모든 사람이 두 줄로 가면 금방 다 올라갈 거리를, 모두 오른쪽에 서기 위해 바글바글 하며 결국 0~2명만 빨리 오르고 모든 사람이 1/2의 속도로 다 같이 늦게 올라가는 광경을 수시로 보게 된다.

내 생각에 합리적인 방안은 출퇴근 시간대나 배차 간격이 길어서 차를 놓쳤을 때 타격이 상대적으로 큰 공항철도와 중앙선 환승하는 곳 등에 한 줄 서기를 시행하고, 그 밖의 시간과 장소에는 두 줄서기를 기본으로 하는 것이다. 한 줄 서기가 고장과 안전사고 증가와 인과관계가 입증된 적이 없다고 하지만 아마 그 반대의 증거가 있지도 않을 것이다. 결국 이 사회가 무엇을 더 중시하고 있는지의 문제인데, 두 줄 서기가 안 되는 가장 큰 이유는 한 줄 서기가 정말 전체적으로 편익을 증가시키고 안전과 고장과 무관해서가 아니라 빠른 것이 선이고 당당하며 느린 것이 악이고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게 하는 한국의 문화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한 줄 서기 문화가 기계보다 사람을 중시하는 것이고 "배려"라고 말한다. 그런데 궁금하다. 에스컬레이터가 고장날 요인을 조금이라도 줄여서 노약자가 계단을 힘들게 올라가야 하는 상황을 예방하는 것이 사람이 아닌 기계를 중시하는 것인가? 두 줄 서기를 더 선호할 만한 노약자가 자신이 폐가 될까봐 움츠려 들어 한쪽으로 비켜 서 상대적으로 건장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게 하는 것이 과연 '배려'일까? 그것보다는 느리게 걸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 안심하고 천천히 건널목을 건널 수 있도록 자동차 운전자가 기다려 주는 장면이 정말 '배려'란 표현에 어울린다. 전자는 한국 사회의 성장 신화가 약자에게 주입한 '죄의식'에 가깝다.

 

2. 자전거와 보행자

요즘은 거의 자전거도로와 보행도로가 구분되서 지어지는 것 같지만 오랫 동안 구분 없이 같이 이용을 해왔다. 나 외의 우리 가족 모두는 다 그런 도로에서 크고 작은 사고의 경험이 있다. 어머니는 고등학생이 자전거로 질주하는 것에 부딪혀 입원할 정도였으니. 그런 길을 산책하거나 자전거를 타다 보면 지금도 자주 보는 광경이 뒤에서 빠르게 다가오는 자전거가 빵빵 울려대고 신경질적으로 한 마디 하며 지나치는 것이다.

자전거와 걷는 사람만의 문제는 아니다. 자전거와 자전거 간에도 느린 것이 어디 나와서 짜증나게 하느냐는 말풍선이 어울리는 표정과 태도로 추월해 가는 경우는 제법 있다. 그럼 한창 자전거를 타며 더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고 있던 나는 10대의 마음으로 다시 그 사람을 추월해주면서 '지나가겠습니다'라고 공손하게 말해주는 것으로 되갚아 주기도 한다.

자동차 운전은 안하지만 자동차 도로에도 비슷한 상황은 자주 겪는 것 같다. 천천히 운전하는 자동차 옆을 지나가며 "집에 가서 애나 보라"고 차별적으로 욕하는 장면은 TV에도 종종 나온다. 길에서 다양하게 일어나는 분노와 짜증은 역시나 비슷한 맥락이다. 느린 것은 사회적으로 손실을 입히는 죄이며, 빠른 것에게 언제나 양보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길을 걷는 사람의 권리, 천천히 자전거를 탈 자유, 안전 수칙을 지키며 운전하는 마음가짐은 지금 더 빨리 갈 수 있는 (그가 꼭 "빨리 가야 하는"것인지는 검증할 수 없지만) 사람에게 양보해야 한다는 제일 원칙보다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된다.

자전거가 뒤에서 빵빵 거리면 앞에 걷던 사람들은 대개 놀라서 얼른 몸을 피한다. 이것은 사고의 위험을 감지해서 그러는 것과는 조금 다른 심리적 요인이 작용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 내가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고 있었구나 살피지 못한 내 잘못이다."

 

3. 민주적 토론과 조직 운영

회의에 관해서는 몇차례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사람들이 모여 회의와 토론을 하다 보면 언제나 두 가지 이상의 그룹으로 나눠진다.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며 다른 사람의 주장도 금방 캐치해서 바로 이어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 바로 이해되지 않거나 곱씹고 싶은 게 많아서 자신의 주장을 말하는 기회는 적극적으로 잡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이번 회의에서 말을 많이 안 한 사람이 충분히 생각을 한 다음 다음 회의에서는 많은 의견 개진을 하고, 서로 돌아가며 이런 분위기가 반복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회의가 반복되다보면 역시나 "늘 적극적인 사람"과 "늘 뭔가 생각만 하는 사람"으로 나눠지는 경우가 많다.

만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중요하고 좋은 얘기 같아 깊이 함께 하고픈데, 내가 배경 지식이나 사전 고민이 부족해서 이해가 충분치 않고 뭔가 놓치는 것 같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조금 쉬었다 하자고 하거나 다시 설명해 달라고 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얘길 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쉬기 보다 빨리 하고 끝내자", 이해가 안 되서 궁금해하면 "나중에 잘 설명해줄게, 나랑 얘기합시다" 이런 상황이 더 많을 것이다.(그래 놓고 나중에 따로 얘기 안해준다)

다른 글에서 썼듯이 "반대하지 않으면 동의"로 간주하고 적극적으로 의견 개진을 하는 소수의 사람들의 얘기를 정리해서 회의를 효율적으로 빨리 하려는 문화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이런 문화에서 다른 사람들이 막힘 없이 서로 얘기하고 있으면 "내가 잘 몰라서" "평소에 고민을 안해서"라고 자책하며 중간에 질문이나 쉬자는 얘기를 하는 것을 흐름을 방해하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 수평적이고 민주적인 의사소통을 다른 무엇보다 중시하는 곳도 조금만 방심하면 그런 양상으로 흐르는 일은 잦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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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상황을 바꾸기 위해 별도의 진행자를 둬서 적절한 휴식과 주제 환기로 흐름을 조절하거나, 말을 많이 안 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생각하세요?" 식으로 발언을 권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흐름을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을 정도로 이해와 생각, 표현 속도가 빠르지 않은 사람은 항상 "내가 말을 해도 되나?"라는 고민을 안게 되기 쉬운데, 진행자가 발언을 요청하는 것은 그런 고민이 없어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게 얻은 기회로 "사실 나는 아까.." 하면서 뒤늦게 한 얘기가 함께 나누던 이야기의 본질을 건드리거나 이면을 생각하게 하며 중요한 가치를 상기시키는 경우도 상당하다.

 

죄책감 없이 당당하기 위해

한국 사회가 짧은 기간 동안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면서 빨리빨리 문화가 깊이 뿌리내렸다는 것은 이미 대부분의 한국인이 문제 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속도만을 중시해 여러 가지 부실을 낳은 것도 문제이지만, 힘이 없어 충분히 빠를 수 없는 대다수의 사람에게 일상적으로 죄책감을 계속 느끼게 하는 것이 더 큰 폐해이다.

빠른 것은 성실, 성공, 재미, 생존 등을 떠올리게 하고 느린 것은 나태, 실패, 지루, 도태 등을 떠올리게 한다. 느리게 사는 사람은 부끄러워하고 빠른 사람은 당당하게 "비켜 있어"라고 말하게 한다. 느리게 살자고 감히 얘기하는 사람은 배때지가 부른 사람 취급하거나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 취급을 한다. 노약자가 위험을 감수하고 건장한 사람에게 비켜주는 것을 배려라고 말하고, 다수가 1/2의 속도로 가며 언제 있을 지 모르는 소수의 사람이 2배의 속도로 가는 것이 사회의 편익을 증진시킨다고 말한다.

제도나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결국 실제 세상을 바꾸는 주체인 "힘없는 보통 사람"들이 죄책감을 느끼고 무기력해지는 상황이 바뀌지 않으면 큰 의미가 없다. 아무리 협동조합 등 좋은 사회적경제조직의 모델이 나와도 "충분히 느린 속도"로 의견을 얘기하는 것이 편안하지 않다면 실제적인 변화는 다시금 뒤로 미뤄질 수 있다. 특정한 나쁜 문화를 만든 것은 제도와 소수의 기득권이라 하더라도, 결국 그것을 좋은 문화로 바꾸는 것은 공익 캠페인을 하던 안하던 일상적으로 고민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진정한 배려는 느린 사람이 비켜서고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빠른 사람이 공존을 위해 멈추는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6/06/27 23:31 2016/06/27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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