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분들의, 의미있는 활동에 작게 나마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은 큰 보람이다. 2018년 한국에서 삼성의 무노조 경영을 깨뜨리는 것만큼 찬사를 받을 만한 일도 드물텐데, 그것을 위해 얼마나 힘들게 지금껏 싸워왔을 지 짐작조차 어렵다.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과 지속적으로 연대한 많은 분들께 깊은 경의를 표한다.
요즘엔 어제 일도 기록을 안하면 잘 기억이 안나다 보니 정확히 언제였는지, 내가 뭘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노동조합과 시민사회단체에 컴퓨터 정비와 홈페이지 제작 등을 해주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금속노조의 당시 홍보부장(?)이 연락을 주셨다. 노동조합이 만들어지는 것은 주변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화려하게 되는 경우는 드물고, 온갖 방해공작과 위협 속에서 비밀리에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역시나 삼성전자서비스지회도 보안 속에 설립을 준비중이었다. 내가 받은 요청은 지회의 홈페이지를 만들어 줄 수 있냐는 것이었다.
IT산업 분야의, 더구나 무노조 경영의 삼성계열에서 노동조합을 만든다고 하니 바로 응낙을 했다. 문제는 제작비용이 없고 (얼마를 제시했었는지 기억은 안나는데 제시했다고 해도 아마 안 받는 거나 다름 없는 수준이었을거다) 시간도 촉박한 것. 제안을 받기 1년 전쯤 어떤 마트에서도 노동조합을 설립중이었는데, 역시나 회사의 공작이 심해 비밀리에 홈페이지 제작 의뢰를 받고 준비하다 결국 조합 설립이 좌절되어 엎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퀄리티 높은 홈페이지를 만들기 보다는, 삼성 계열의 노조가 받을 사회적관심이라던지, 지원하는 곳들의 욕심 같은 건 1도 생각지 않고, 무료 도구를 이용해 하루 이틀 만에 뚝딱 만들어 일단 쓰고, 실제로 조합이 성공적으로 설립되고 움직임을 공개적으로 하게 될 때 사이트를 제대로 개편하자고 제안했다.
금속노조의 위상은 한국에서는 노동조합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뭔가 두려워할 정도였기에 홈페이지 제작에 필요한 인프라는 말 한마디면 금방 제공될 줄 알았다. 하지만 역시나 그런 큰 조직도 어떤 인프라 자원이 넉넉하거나 장기적 안목으로 기술 인프라를 준비해두고, 공동체정신에 입각해 신생 노조를 전폭적으로 지원해 줄만한 마인드를 유지하긴 어려워서 결국 도메인과 호스팅 신청부터 XE(예전 활동가들도 제로보드라고 하면 들어봤을 텐데, 그 후속이다) 설치와 구성, 샘플 데이터 게시까지 모두 해서 지회에 전해줬다. 언젠가 나중에 제대로 개편해서 활용하길 바라며.
그러고 나서 2년인가 3년인가 다시 지회의 홈페이지를 검색했는데 그 때까지도 그 홈페이지를 그대로 쓰고 있었다. 지금은 새롭게 개편을 해서 내가 작업해준 흔적은 안 남아 있지만, 이틀 만에 만든 홈페이지치고는 내 애정이 담겨 있어서 그랬는지 ^^; 꽤나 오래 활용한 것이다. 그때 뭘 했던지 바쁠 때라 만들고 몇 가지 후속 설정을 해주고 나서는 큰 탈이 없길래 잊어 버리고 있었고, 아마 당시에 내게 의뢰한 홍보부장님도 내 존재를 포함해 모두 잊어버리지 않았을까 싶다. 즉 이 글을 쓰지 않으면 삼성전자서비스지회라는 자랑스러운 노동조합의 초기 설립과정에 내가 소소한 도움을 준 것은 아무도 모를 일이다. 돈도 안 받고 계약 따위도 없었으니 공식적인 기록도 안 남아 있을 것이니 말이다.
스스로 칭찬하려는 취지로 시작한 글이지만 이 이야기를 언젠가 쓰겠다는 생각은 전부터 했다. 바로 '하루 만에 만들어준 홈페이지로 수 년동안 쓰며 초기 떡잎 역할을 잘했다'는 사실을 통해 내가 평소에 얘기해 왔던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사회의 변화는 많은 사람들의 의지와 구체적 행동과 함께 '그 운동을 통해 변화될 사회를 지탱해줄 기술'이 적시에 제공되어야 한다. 이상적인 제도를 고안했지만 기존의 방식으로 그걸 유지하는데 품이 너무 들어간다면 결국 그 제도는 사회에 안착하기 어렵다.
역사 왜곡의 논란이 많은 '광해군과 대동법'이 한 예가 될 것 같은데, '광해군이 백성을 사랑하여 대동법을 시행하려 했다'는 믿음이 많은 사람들에게 퍼졌다가 '사실 광해군은 대동법 시행에 소극적이었다'는 연구가 나와 다시 바로잡히고 있다. 선조때부터 논의 되어 효종대에야 제대로 시행됐다고 하는 대동법은 사실상 쌀을 운송하는 '조운 기술'이 발전하면서 실효성을 갖게 되어 실제로 사회에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적용되었다는 해석이 있다. 광해군이 '옛사람들이 제도를 그렇게 안하는데는 이유가 있지 않았겠냐'고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는데, 그 이유라는 것이 부족한 기술때문에 광해군 전까지는 그 방식이 사회적 비용과 부작용이 더 크다고 판단되어 시행되지 않았던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기술의 발전 속도가 빨라지면서 현대는 기술의 변화가 사람들의 생각에 강한 영향을 주는 사회가 되었지만, 기술의 구현과 적용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기에 '정확히 필요한 그 때' 잘 준비되어 옆에서 대기하는 경우는 여전히 드물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기술의 외연적 성과가 사람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아도 결국 시간이 지나보면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들이 살아남아 소박하게 제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2000년대 중반의 웹2.0이 그 점을 잘 드러내줬다. 실험적인 것들이 앞서나갈 수 있지만 사회의 주류가 되는 기술은 대체로 사람들의 필요에 비해 '늦게 나타나고', 동시대에 두각을 드러내는 것은 대체로 거품이 껴 있는 경우가 많다.
과학기술학에 대해 일반론을 얘기하는 것은 또다시 글이 길어질 것이고 (이미 길어진 감이 있지만), 내가 시민사회단체를 다니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아주 최신의 최첨단의 기술이 아니어도 그 즉시 적용되기만 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큰 이로움을 줄 수 있는 '보편적 기술'의 영역이 굉장히 넓은데, 실제로는 그런 영역이 사람들에게 잘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늦게라도 제대로 된 기술이 필요할 때가 있고, 완벽하진 않아도 바로 쓸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할 때가 있다. 처음부터 잘 준비된 것을 활용할 수 있으면 물론 좋지만, 기술 적용을 단계적으로 설계해서 가벼운 것부터 시작해 점차 전체적으로 완성해가는 것이 더 적절하고 오래 지속될 수 있는 측면도 있다. 삼성전자서비스지회 홈페이지의 경우처럼 처음에 잘 소통이 되어 현실적인 기획이 나오게 되면, 경력이 짧은 개발자라 하더라도 약간만 공부해서 바로 만들 수 있는 일들이 허다하다. 그리고 그런 작은 기여 활동이 어떤 이들에게는 정말 단비같은 역할을 한다.
2000년대 말부터 2012년까지 IT자원활동가네트워크의 코디네이터 역할을 하며 많은 IT인들을 만나게 됐다. 이름 높은 실력자도 있었지만 단지 좋은 마음으로 조용히 참여하는 평범한 IT인이 많았다. 그때 알게 된 몇 분은 6년째 중고령 노동자를 위한 야간 컴퓨터교실에 무보수로 자원활동을 한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의 기초를 가르쳐 주는 것이라 높은 수준의 기술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모두 낯설어 했지만 사람을 존중하고 소통하려는 마음으로 지속하다보니 지역에서 높은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이어오고 있다.
사회 공헌을 위해 조금씩 나서는 IT인들을 보면 대체로 스스로 높은 생산성을 갖는데 성공한 고수준의 기술자인 경우가 많아 보편적 기술을 적용하는 활동에는 큰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다. 당연히 높은 수준의 기술 서비스가 더 많이 시민사회단체와 비영리조직에 제공되어야 하므로 그런 분들의 역할은 크다. 20% 미만의 시민사회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20% 미만의 IT인 외에도 80% 이상의 시민사회가 혜택을 입을 수 있는 보편적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80% 이상의 IT인이 더 존재감을 갖고 시민사회와 지속적으로 만나 기술을 베풀며 서로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지길 바란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공동체IT사회적협동조합'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라며, 평범한 (예비)IT인이 더 많이 사회공헌에 참여할 수 있도록 노동조건이 개선되고, 시민사회의 기술공동체 문화가 복원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