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과 정의

잡기장

 

1. 지하철 두줄 서기

지하철 에스컬레이터 두 줄 서기 캠페인이 작년(2015년)으로 끝난 것을 얼마 전에 알았다. 한 줄 서기 캠페인이 2년만에 정착한 것에 비하면 8년간 했던 캠페인이 성공하지 못한 것에 대해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한 줄 서기 캠페인이 시작된지 얼마 후, 에스컬레이터를 정비하는 친구가 있어 얘기를 들었는데 과장이 섞였을 수 있지만 고장이 세 배로 늘었다고 했다. 일할 사람을 늘리지 않는데 일이 갑자기 많아지니 사람들이 힘들어 그만두고, 그래서 남아 있는 사람의 부담은 더 커졌다. 결국 그 친구도 직장을 옮기게 됐는데 그 후로 나는 한 줄이 비워진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기 보다는 (지금보다 기력도 넘쳤으니) 계단을 이용하는 편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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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줄 서기 캠페인이 시작된 초기를 기억한다. 한 줄 서기를 하자고 한 것이 잘못 되서 되돌린다는 인정과 사과는 없이 어느날 갑자기 "잘못된 이용문화 때문에 사고와 고장이 많이 나서 다른 사람이 피해봄"이라고 하는 것을 보고 화가 났었다. 그래도 지금이라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지금까지 수년간 지하철 두 줄 서기를 실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왼쪽에 서서 오곤 했다.

본래 어떤 외압에도 굴하지 않고 신념을 지키는 타입의 사람은 아닌지라 당연히 무언의 압박을 늘 느끼고 갈등했다. 대놓고 비난하는 것은 이제 거의 없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가끔 노인분들의 중얼거림을 듣곤 한다. 물론 젊은 사람이라고 전혀 안 그러는 것은 아니다. 그 불평과 비난은 결국 나 같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방해하는 "민폐"를 끼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비난을 받는 걸 못 견뎌서(비난받을 것을 두려워해서) 두 줄 서기 캠페인이 진행중임을 알았어도 오른쪽에 서는 것을 선택한다. 그래서 합정역 6호선 내리는 곳처럼 짧은 에스컬레이터라 모든 사람이 두 줄로 가면 금방 다 올라갈 거리를, 모두 오른쪽에 서기 위해 바글바글 하며 결국 0~2명만 빨리 오르고 모든 사람이 1/2의 속도로 다 같이 늦게 올라가는 광경을 수시로 보게 된다.

내 생각에 합리적인 방안은 출퇴근 시간대나 배차 간격이 길어서 차를 놓쳤을 때 타격이 상대적으로 큰 공항철도와 중앙선 환승하는 곳 등에 한 줄 서기를 시행하고, 그 밖의 시간과 장소에는 두 줄서기를 기본으로 하는 것이다. 한 줄 서기가 고장과 안전사고 증가와 인과관계가 입증된 적이 없다고 하지만 아마 그 반대의 증거가 있지도 않을 것이다. 결국 이 사회가 무엇을 더 중시하고 있는지의 문제인데, 두 줄 서기가 안 되는 가장 큰 이유는 한 줄 서기가 정말 전체적으로 편익을 증가시키고 안전과 고장과 무관해서가 아니라 빠른 것이 선이고 당당하며 느린 것이 악이고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게 하는 한국의 문화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한 줄 서기 문화가 기계보다 사람을 중시하는 것이고 "배려"라고 말한다. 그런데 궁금하다. 에스컬레이터가 고장날 요인을 조금이라도 줄여서 노약자가 계단을 힘들게 올라가야 하는 상황을 예방하는 것이 사람이 아닌 기계를 중시하는 것인가? 두 줄 서기를 더 선호할 만한 노약자가 자신이 폐가 될까봐 움츠려 들어 한쪽으로 비켜 서 상대적으로 건장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게 하는 것이 과연 '배려'일까? 그것보다는 느리게 걸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 안심하고 천천히 건널목을 건널 수 있도록 자동차 운전자가 기다려 주는 장면이 정말 '배려'란 표현에 어울린다. 전자는 한국 사회의 성장 신화가 약자에게 주입한 '죄의식'에 가깝다.

 

2. 자전거와 보행자

요즘은 거의 자전거도로와 보행도로가 구분되서 지어지는 것 같지만 오랫 동안 구분 없이 같이 이용을 해왔다. 나 외의 우리 가족 모두는 다 그런 도로에서 크고 작은 사고의 경험이 있다. 어머니는 고등학생이 자전거로 질주하는 것에 부딪혀 입원할 정도였으니. 그런 길을 산책하거나 자전거를 타다 보면 지금도 자주 보는 광경이 뒤에서 빠르게 다가오는 자전거가 빵빵 울려대고 신경질적으로 한 마디 하며 지나치는 것이다.

자전거와 걷는 사람만의 문제는 아니다. 자전거와 자전거 간에도 느린 것이 어디 나와서 짜증나게 하느냐는 말풍선이 어울리는 표정과 태도로 추월해 가는 경우는 제법 있다. 그럼 한창 자전거를 타며 더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고 있던 나는 10대의 마음으로 다시 그 사람을 추월해주면서 '지나가겠습니다'라고 공손하게 말해주는 것으로 되갚아 주기도 한다.

자동차 운전은 안하지만 자동차 도로에도 비슷한 상황은 자주 겪는 것 같다. 천천히 운전하는 자동차 옆을 지나가며 "집에 가서 애나 보라"고 차별적으로 욕하는 장면은 TV에도 종종 나온다. 길에서 다양하게 일어나는 분노와 짜증은 역시나 비슷한 맥락이다. 느린 것은 사회적으로 손실을 입히는 죄이며, 빠른 것에게 언제나 양보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길을 걷는 사람의 권리, 천천히 자전거를 탈 자유, 안전 수칙을 지키며 운전하는 마음가짐은 지금 더 빨리 갈 수 있는 (그가 꼭 "빨리 가야 하는"것인지는 검증할 수 없지만) 사람에게 양보해야 한다는 제일 원칙보다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된다.

자전거가 뒤에서 빵빵 거리면 앞에 걷던 사람들은 대개 놀라서 얼른 몸을 피한다. 이것은 사고의 위험을 감지해서 그러는 것과는 조금 다른 심리적 요인이 작용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 내가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고 있었구나 살피지 못한 내 잘못이다."

 

3. 민주적 토론과 조직 운영

회의에 관해서는 몇차례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사람들이 모여 회의와 토론을 하다 보면 언제나 두 가지 이상의 그룹으로 나눠진다.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며 다른 사람의 주장도 금방 캐치해서 바로 이어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 바로 이해되지 않거나 곱씹고 싶은 게 많아서 자신의 주장을 말하는 기회는 적극적으로 잡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이번 회의에서 말을 많이 안 한 사람이 충분히 생각을 한 다음 다음 회의에서는 많은 의견 개진을 하고, 서로 돌아가며 이런 분위기가 반복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회의가 반복되다보면 역시나 "늘 적극적인 사람"과 "늘 뭔가 생각만 하는 사람"으로 나눠지는 경우가 많다.

만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중요하고 좋은 얘기 같아 깊이 함께 하고픈데, 내가 배경 지식이나 사전 고민이 부족해서 이해가 충분치 않고 뭔가 놓치는 것 같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조금 쉬었다 하자고 하거나 다시 설명해 달라고 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얘길 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쉬기 보다 빨리 하고 끝내자", 이해가 안 되서 궁금해하면 "나중에 잘 설명해줄게, 나랑 얘기합시다" 이런 상황이 더 많을 것이다.(그래 놓고 나중에 따로 얘기 안해준다)

다른 글에서 썼듯이 "반대하지 않으면 동의"로 간주하고 적극적으로 의견 개진을 하는 소수의 사람들의 얘기를 정리해서 회의를 효율적으로 빨리 하려는 문화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이런 문화에서 다른 사람들이 막힘 없이 서로 얘기하고 있으면 "내가 잘 몰라서" "평소에 고민을 안해서"라고 자책하며 중간에 질문이나 쉬자는 얘기를 하는 것을 흐름을 방해하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 수평적이고 민주적인 의사소통을 다른 무엇보다 중시하는 곳도 조금만 방심하면 그런 양상으로 흐르는 일은 잦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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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상황을 바꾸기 위해 별도의 진행자를 둬서 적절한 휴식과 주제 환기로 흐름을 조절하거나, 말을 많이 안 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생각하세요?" 식으로 발언을 권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흐름을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을 정도로 이해와 생각, 표현 속도가 빠르지 않은 사람은 항상 "내가 말을 해도 되나?"라는 고민을 안게 되기 쉬운데, 진행자가 발언을 요청하는 것은 그런 고민이 없어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게 얻은 기회로 "사실 나는 아까.." 하면서 뒤늦게 한 얘기가 함께 나누던 이야기의 본질을 건드리거나 이면을 생각하게 하며 중요한 가치를 상기시키는 경우도 상당하다.

 

죄책감 없이 당당하기 위해

한국 사회가 짧은 기간 동안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면서 빨리빨리 문화가 깊이 뿌리내렸다는 것은 이미 대부분의 한국인이 문제 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속도만을 중시해 여러 가지 부실을 낳은 것도 문제이지만, 힘이 없어 충분히 빠를 수 없는 대다수의 사람에게 일상적으로 죄책감을 계속 느끼게 하는 것이 더 큰 폐해이다.

빠른 것은 성실, 성공, 재미, 생존 등을 떠올리게 하고 느린 것은 나태, 실패, 지루, 도태 등을 떠올리게 한다. 느리게 사는 사람은 부끄러워하고 빠른 사람은 당당하게 "비켜 있어"라고 말하게 한다. 느리게 살자고 감히 얘기하는 사람은 배때지가 부른 사람 취급하거나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 취급을 한다. 노약자가 위험을 감수하고 건장한 사람에게 비켜주는 것을 배려라고 말하고, 다수가 1/2의 속도로 가며 언제 있을 지 모르는 소수의 사람이 2배의 속도로 가는 것이 사회의 편익을 증진시킨다고 말한다.

제도나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결국 실제 세상을 바꾸는 주체인 "힘없는 보통 사람"들이 죄책감을 느끼고 무기력해지는 상황이 바뀌지 않으면 큰 의미가 없다. 아무리 협동조합 등 좋은 사회적경제조직의 모델이 나와도 "충분히 느린 속도"로 의견을 얘기하는 것이 편안하지 않다면 실제적인 변화는 다시금 뒤로 미뤄질 수 있다. 특정한 나쁜 문화를 만든 것은 제도와 소수의 기득권이라 하더라도, 결국 그것을 좋은 문화로 바꾸는 것은 공익 캠페인을 하던 안하던 일상적으로 고민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진정한 배려는 느린 사람이 비켜서고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빠른 사람이 공존을 위해 멈추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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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7 23:31 2016/06/27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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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소비 사회적협동조합을 만들고 있습니다

비영리단체 IT지원

IT 단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사회단체와 활동가들에게 맞춤 홈페이지를 만들어주는 사회적기업만해도 여럿이며, 보안 전문가들의 단체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IT단체 하면 떠오르는 곳이 진보넷 정도였던 상황에 비하면 좋은 IT를 제공하려는 집단이 많아지는 지금의 추세는 아주 기쁘고 앞으로가 기대됩니다.

제 기억으로 IT에 대한 사회단체들의 기대는 90년대말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아주 뜨거웠습니다. 단체들의 IT활용 능력이 사회 일반적인 수준에 비해 그렇게 떨어지지 않으며 오히려 앞서가는 응용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IT가 점점 크고 복잡해지면서 단체들의 IT구매력과 정보력은 트렌드를 따라가기에는 많이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단체들의 상호협력과 결속력도 어떤 면에선 예전보다 못한 것 같고, 기술적으로 협력할 바탕도 없다보니 개별 단체가 외롭게 IT역량을 키워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즘의 사회단체들은 지금 있는 IT라도 잘 유지하며 우연한 계기로 IT역량을 발전시키려고 하는 다소 수동적인 태도가 보편화된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점차 늘어나는 "좋은 IT"의 공급을 사회단체들이 잘 받아들이고 다시 예전처럼 "뜨겁게 활동에 응용"할 수 있게 만들기 위해 단체들이 기술적으로 협력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들자는 제안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IT 소비 사회적협동조합

4년전 이맘때 IT단체를 만들자는 제안에 호응해주신 훌륭한 분들 덕에 2013년에 사단법인 비영리IT지원센터가 만들어졌습니다. Techsoup Korea가 되어 소프트웨어의 저렴한 공급이 가능해졌고, 공공 부문과 기업에서 더 많은 사회적 기여를 하도록 견인하는 역할 등을 잘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제가 두번째로 설립을 제안하는 IT단체는 "IT 소비 사회적협동조합"입니다. 사회단체들이 일방적으로 수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조합원으로서 서로 협력하며 주체적으로 IT실력을 키워가기 위한 기술공동체입니다.

관련글 : [비영리조직과 IT인]

대부분 공급자(생산자) 입장에서 사고하기 쉬운 것이 IT인데, 저처럼 소비자(이용자) 측면에서 바라보시는 시니어 IT자원활동가 두 분을 만난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됐습니다. 비영리IT지원센터의 조직적 지원을 받으며 준비 논의를 시작했고, 별일사무소, 공동육아와공동체교육, 빈마을, 흥사단, 정토회 등 여러 단체의 전/현직 활동가들이 이미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계십니다. 한여름이 되기 전인 5월 말이나 6월초에 발기인대회를 열어 공식화하고 설립동의인을 모아 이르면 8,9월에 창립총회를 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아래의 내용은 발기인대회 때 공유할 내용을 정리해 본 것입니다. 읽어보시고 마음에 드신다면 5월 27일(금)로 일단 예정하고 있는 발기인대회에 참여를 요청드립니다 :)

 

1. 설립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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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단체들이 IT를 잘 모르고 못쓴다고 구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단체 활동가들도 IT를 더 잘 활용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것에 대해 부끄러워합니다.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기술의 혜택을 누리는 것은 기본권에 해당합니다. 누군가 기술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면 그들은 정당한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사회 구조적인 얘길 시작하진 않겠습니다만, 지금 보편적인 중소규모의 단체들에게 필요한 것은 스스로 임계점을 넘어 발전할 수 있도록 해주는 밑바탕과 꾸준한 공공 지원, 그리고 효과적인 프로세스들입니다. 공급하는 측은 어느 정도 규모가 커지고 있으니 잘 받아 갈무리하고 활용할 수 있는, 그리고 정말 필요한 것을 요구할 수 있는 "이용자 중심"의 조직이 필요합니다. 이용자인 사회단체들이 모여 어느 정도의 규모를 이룬다면 사회단체를 위해 앱(App)을 제작하려는 IT기술인에게는 더 큰 동기 부여가 될 것이고 효과적인 기획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협력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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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협이 많이 활성화되었고, 훌륭한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이 생겨나면서 전통적이지 않은 소비자 협동조합 모델은 많은 분들이 이미 접하고 계실 것입니다. IT 소비 협동조합은 IT제품과 서비스 등을 안심하고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 것입니다.

 

3. 기대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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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경험상 단체들이 홈페이지를 만들 때, 가장 먼저 알고 싶어하는 답답한 점은 "우리 홈페이지를 만들기 위해 얼마를 들이면 되는지"였습니다. 이 정도를 요구하기 위해 최소한 얼마 정도를 준비해야 홈페이지 제작업체를 불쾌하게 안하고 얘기를 꺼내볼 수 있을지 알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 기준을 알아내면 어떻게든 그만큼을 만들어보려고 애를 씁니다만 시간이 많이 걸려 결국 연기하는 경우가 꽤 되지요. (지금도 정말 사정이 딱하거나 그 단체에 대한 강한 지원 의지로 손해 봐가며 아주 저렴하게 홈페이지를 만들어주는 훌륭한 웹 제작업체가 있습니다. 박수를 보냅니다)

무조건 싸게 해주는 것만이 아니라, 어렵게 얼마간 돈을 모았다면 그것 만큼의 결과를 성공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예산을 많이 못 모았다고 "그저 어떻게든 최소한으로 만들어주세요"라고 자신 없어 하다 보니 기획 단계에서 충분한 얘길 못해서 결과물이 나왔을 때 결국 양쪽이 다 불만족스러운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이것이 반복되면 단체들은 홈페이지 제작에 비용을 들이는 것을 더욱 소극적으로 하게 되고, 호의로 도와준 웹 제작업체는 "그냥 제값 받고 남들처럼 해주자"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IT소비협동조합이 되면 제작 기획단계부터 상담과 정보 제공을 통해 보다 성공률이 높은 프로젝트가 되도록 해 줄 수 있으며 사후 관리도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처음에는 돈을 많이 들이지 못하던 단체들도 들인 만큼의 성과를 내는 것이 반복되면 차후 새로운 기획을 하게 될 때 좀 더 적극적이 될 수 있고, 그 과정을 통해 단체들의 IT역량은 발전할 것입니다.

이 조합이 사회적협동조합이 되면, 소비자(이용자)인 조합원들의 평소 활동으로 축적한 공유 자산과 역량을 동원해 긴급한 이슈에 대응하는 활동가들에게 기본적인 IT인프라를 제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재원이 극히 부족한 신생단체에도 일시적 지원이 가능하겠죠. 제가 이 조합이 만들어지면 가장 바라는 점 중 하나입니다.

 

4. 조합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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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데이터 보존

지금도 많은 단체들에서 데이터들이 손실되고 있습니다. 이것만 생각하면 참 안타깝습니다. 데이터는 잘 보존되고 아카이빙되면 그 자체로 점점 큰 힘을 내게 됩니다만, 작은 단체들에서는 언제 사라지는지도 모르게 데이터들이 사라지거나 하드웨어 문제, 해킹 등으로 한번에 많은 것을 잃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일시적 이슈를 위해 데이터를 모아 둔 사이트가 더 이상 운영 주체가 없어서 방치했다가 변조되기도 하고, 단체가 해산하게 되면 누구도 돌보지 않아 소중한 자료들이 그냥 사라집니다.

이 협동조합이 만들어지고 조합원으로 가입하는 단체는 기본적으로 더 이상 데이터가 손실되지 않게 하는 것부터 할 것입니다. 빅 데이터 시대에 더욱 돋보이는 굿 데이터를 만들어내는 주요 원천인 사회단체의 힘을 보여주고 싶어요. 데이터가 있는 곳에 사람들이 모인다는 것은 오래된 명제이지요.

4-2. 웹 분석기 설치

조합원에게는 웹 분석기도 우선적으로 설치하도록 권유하고, 설치 과정을 지원할 것입니다. 통계가 어떻게 합리적인 의사결정에 기여할 수 있는지 가장 피부로 와닿을 수 있는 예가 아닐까 싶어요. 작년부터 홈페이지를 개편하고 있는 유명한 단체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사이트에 들어와 어떻게 머물다 가는지 세부적으로 알 수 있는 데이터가 없다보니 결국 전통적 방식으로 "첫 페이지에 노출시키기 위해" 소속 활동가들이 저마다 요구하게 되었고, 결국 이런 저런 요구들의 타협으로 특색 없는 사이트가 될 뻔 하였습니다. 다행히 주변 분들의 조언으로 방향을 다시 잡고 제대로 추진 중입니다. 늦었지만 구글 웹분석기도 설치해서 이번 달 중에 (2016년 5월) 결과를 보기로 했고요. 정책의 근거가 되는 데이터가 생기면 관습과 직관에 의한 결정을 줄일 수 있게 되고 좀 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반영할 수 있는 기초가 되겠지요.

4-3. 안심 A/S

이것에 대해서는 2년전 제가 겪은 황당한 사례를 얘기하겠습니다. 성북구에 있는 사회적기업인데요, 어느날 컴퓨터 두대가 고장나서 전에 이용한 적이 있는 정비 업체를 불렀습니다. 그 사람이 말하길 두 대가 동시에 고장난 것이 DDOS때문일 수 있으니 사무실에 있는 PC를 모두 가져가서 검사를 해봐야 한다고 했답니다. 그래서 며칠간 일을 못하다 컴퓨터들을 돌려받았는데 세상에 모든 PC들이 포맷되어 있고 데이터는 모두 사라져 있었습니다. 그 정비 업체 분은 이미 데이터는 손상됐으니 어서 수리비를 입금하지 않으면 곤란하게 만들겠다고 협박하며 100만원이 넘는 비용을 청구했습니다. 이 비용이 합당한 것인지 알고 싶은데 물어볼 데가 없다가 이 때 저랑 연락이 닿았습니다.

뭔가 얘기들이 이상해서 제가 찾아가보니 세상에 그 비용에 택도 없이 부족한 사양의 하드웨어로 바뀌어 있으며 그나마 모두 중고였습니다. 즉시 그 정비업체 본사에 항의하였는데 제대로 사과도 안하고 계속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응대를 했습니다. 바꿔치기 당한 하드디스크부터 모두 돌려받은 후 비영리IT지원센터의 이선규 이사님을 통해 평소에 데이터를 잘 복원해주신 분에게 가서 여쭤보니 다른 곳에서는 데이터를 복구 못하도록 해놓고(복구를 시도하면 스파크가 난답니다) 자신들이 빼돌려 둔 데이터를 추가 비용을 받아가며 복원해주는 상습적 악덕업체였습니다. 저는 그 사회적기업분들에게 악덕 업체를 제대로 혼내주자고 말씀드렸으나 그 동안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왔던 그 분들은 그저 다시 일할 수 있는 환경만 만들어달라고 하실 뿐이었습니다. PC를 다시 제대로 견적 내서 맞춰드린 후, 데이터를 백업 할 수 있는 서버를 만들어주는 것으로 마무리했습니다. 제가 직접 겪지 않았다면 과장했거나 여러 사례를 섞은 것으로 생각했을 만한 일이 일어나는게 현실입니다. IT소비 협동조합을 만들면 이런 곳이 아니라 제대로 신뢰할 수 있는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들을 연결하거나 대행해주려 합니다.

4-4. IT 완전 기초 교육

활동가를 위한 IT교육은 많이 늘어나긴 했습니다. 그런데 점점 갈수록 IT기초 원리, 개념들에 대한 교육은 찾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새로운 트렌드를 계속 습득하며 실험하기 어려운 사회단체들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트렌드가 나와도 어느 정도 기본 원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아주 오랫동안 이어져 오고 있는 IT 기술환경에 대한 이해, 개념 소개도 필요합니다. 이런 보편적 IT기술에 대한 교육은 강의하시는 분이 보람을 못 느끼시거나 필요가 없다고 느끼시는 것인지 하려고 하는 분이 많지 않은 듯 합니다.

예를 들어 요즘 홈페이지를 쉽게 만들어주는 여러 서비스들을 이용할 때, 다 만들어두고 주요 포탈에 등록하려고 하다 "도메인"과 "네임 서버"에 대한 기본 이해가 없다보니 홈페이지를 만드는 시간 만큼 혹은 그 이상 고생하다 결국 실패했던 사례도 봐왔습니다. FTP 접속 정보를 알려달라고 하면 무슨 말인지 모르기도 하지요. 협동조합이 만들어지고 조합원으로 가입하는 단체 활동가들에게는 이런 기초적인, 그러나 앞으로도 오래 갈 것들에 대한 기본 원리와 개념을 상시적으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싶습니다.

이 밖에도 힘이 모이면 제공 가능한 많은 서비스들이 있습니다. 그런 서비스들의 공통적인 흐름은 아래 그림처럼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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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조합원 IT역량 강화

조합에 가입한 지 일정 시간이 지난 단체들은 차근차근 IT활용 수준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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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단체들의 IT관련 손실을 예방하고 안심하고 지출을 하며 조금씩 자신감을 찾게 된다면, 정기적인 부가 서비스와 여러 기획 프로젝트를 통해 IT역량을 한 단계씩 발전시키는 활동을 할 것입니다.
잘 보존된 데이터와 통계 정보를 참고하여 지금 단체 여건에 맞는 IT 관련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함께 고민할 것이고, 단체의 활동 효과를 증폭시킬 수 있는 좋은 시스템을 개발할 수 있도록 함께 힘을 모을 것입니다.

IT개발자들이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 공유했던 연장근로 시간 증명 앱 "야근시계"가 홈플러스 영업 노동자들의 야근 시간을 증명하는 법정 자료로 채택된 것처럼, 이미 나와 있는 것을 조금 조정하여 적용하거나 유사한 것을 새로 만들어 보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와 효과를 거둘 수 있으며, 단체의 활동 양상도 많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단체들의 IT 역량 발전은 자신의 상황을 진단한 후, 그에 적합한 행동들을 무리하지 않고 꾸준히 할 수 있도록 보조할 것입니다. 누적된 성공 경험으로, 단순하게 일상적 유지비용을 절감하는 수준이 아니라 기존의 활동들을 더욱 힘있게 하고 더 많은 시민들과 교류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에 IT를 응용하는 단계까지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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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합원에 대한 이야기와 조합 운영, 올해 말까지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와 내년 이후에 어떻게 진행해 나갈 것인지에 대한 얘기는 발기인대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설립동의인을 모은 후 합의를 거친 후에 공유하려고 합니다. 이번 달 마지막주 금요일 (2016년 5월 27일) 저녁 7시가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오실 수 있도록 최대한 조정하려고 합니다만 이 글을 보고 IT소비 사회적협동조합(준)에 대한 관심이 가는 분들은 일단 그 날의 일정을 비워주시길 간곡히 요청드립니다 ^^

그리고 참석 의사가 (이미) 있으신 분은 아래 설문을 통해 일정 잡는 것에 도움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ICT소비 사회적협동조합 발기인대회 일정 설문 (클릭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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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05 00:46 2016/05/05 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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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영리조직과 "직원"

분류없음

비영리IT지원센터라는 비영리단체를 만든지 3년째가 되었다. 그 동안 겪으며 풀어놓고 싶었던 얘기가 많지만 그때 그때 풀지 못하고 일만 하며 살다보니 바보가 되었고, 이야깃거리는 뒤엉키고 채색되어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좀처럼 모르겠다. 바보인데 성격까지 나빠지는 것 같으니 걱정이다.

바로 생각을 정리하고 표현하지 못해 이슈가 안 된 것, 그 중에 가장 답답하고 계속 마주하게 될 문제 중 하나는 "비영리단체/사회적경제조직에서 일하는 활동가 혹은 직원"에 대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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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영리조직에는 많은 직원들이 있다. "비영리조직"에 대한 개념 정의와 구분은 다양하고 계속 변해 혼란스럽지만 흔히 말해지는대로 "비영리단체"(제 3섹터 : NPO, NGO, CSO, 공동체 등 포함)와 "사회적기업"(제 4섹터 : 마을기업, 협동조합 등 포함)로만 구분하는게 나을 듯 하다. 전통적으로 "시민사회영역"이라 불려 온 비영리단체들에서 직원은 조직 규모와 역사, 활동 성격에 따르지만 대체로 "활동가"라고 불리는 경우가 많다. 외국에서 "활동가"란 표현은 한국의 그것보다 좀 더 과격한 의미를 갖는다고 들었는데, 내가 비영리IT지원센터를 만들기 전에 만나던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활동가"라는 자기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과격해서가 아니라 그 말이 의미하는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직원"이라는 말은 대체로 수동적이며, 비자발적으로 정해진 업무를 지시 받아 수행하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개인적으로 단체들을 다니며 IT지원을 하고 다닐 때에는 주로 작은 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만나왔는데 그들에게서 느낀 이미지는 그런 "수동적인 직원"과는 많이 달랐다. 한국에 있는 조직인만큼 권위주의적 문화가 완전히 없는 곳은 적었지만 대체로 자기 일을 스스로 결정하고 움직일 수 있으며 스스로 책임을 지며 활동하는 사람들이었다. 100%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의 진퇴는 납득할만한 과정을 통해 결정된다. 초안을 몇 시까지 보고하고, 이해할 수 없는 "상사"의 요구로 몇 차례 바꾸다가 결국 처음 생각대로 일이 진행되는, "직장인 웹툰"에서 단골 소재로 다뤄지는 상황은 적어도 내가 만난 비영리단체들에서는 많이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너무 많은 것을 고려하고 소수자를 배제하지 않기에 회의 시간이 길어지고 과감한 행동이 어려워지는 경우는 있어도, 누군가가 내 의지와 무관하게 자의적 판단으로 흔들어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그런 일이 일상적으로 일어났다가는 당장 뒤집어 질 수 있는 것이 내가 보아온 "전통적 비영리단체"의 모습이다. 

비영리IT지원센터에서 상근활동을 겸하면서 같이 일하는 사람을 지칭할때 나는 꼭 "상근활동가" 혹은 "활동가"라는 명칭을 써왔다. 직책은 있었지만 별명만을 불렀고, 내가 갖고 있는 약간의 권한이 있었지만 같이 일하는 사람이 어느 정도 이상 납득했다는 신호가 오지 않으면 일을 진행하지 않았다. 물론 정말 급한 상황에서는 "아 좀 일단 해봐"라고 말했지만 이후 회의에서는 그렇게 밀어붙인 이유에 대해 꼭 밝히고 납득시키고 비판을 받고 진행했다. 이것은 내 신념이라기보단 그동안 만나왔던 "훌륭한 활동가"들의 모습을 보고 그냥 자연스럽게 형성된 이미지대로 해온 것이다.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미리 한 것이 아니라 "비영리단체는 원래 이러하다"고 여겨왔기에 같이 일하는 사람에게 내 방식대로 다 같이 하자고 말하진 않고(그럴 수도 없었다), 좋아보이면 다 같이 따라할 것이라 생각해서 내가 속한 팀 안에서만 꾸준히 그렇게 해왔다. 그렇지만 내가 하는 방식을 분명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 방식이 비영리IT지원센터의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방식으로 자리잡히진 않았다. 내가 상근활동을 그만두는 시점까지도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과 서로의 정체성을 "활동가"보다는 "직원"으로 여겼던 것 같다.

 

내가 비영리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직원"으로 불리는 것에 대해 민감한 이유는 그것이 비영리조직내 권위주의 문화의 척도일 수 있으며, 비영리조직의 가치와 사회적기업의 방식이라는 이상적인 결합이 아니라 사회적기업의 가치(이윤)와 비영리조직의 방식이라는 아주 부정적인 결합이 지금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 때문이다. 

1. 한국의 중대규모의 비영리단체와 보통의 사회적기업은 소수의 대표급에 많은 권한이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오래 활동하며 척박한 환경에서 "기업"을 일으켰다는 존중의 의미를 더해 대표급 혹은 "사회적 명사"들에게 모든 관심과 성취가 돌아가고,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겠다는 기업 리더의 숭고한 의지를 강조한다는 명목하에 마치 몇 사람의 선택과 결정이 모든 것을 이뤄내는 것처럼 비춰지는 듯한 문화가 지금 한국의 비영리단체-사회적경제조직 네트워크에서 감지된다. 실제로 존경할 만한 행보를 걸어왔고 위험을 무릅쓰고 통찰을 발휘한 사람들이 많지만, "그 밖의 사람들"은 시류에 따라 흘러왔다 사라지는 사람처럼 여기는 것은 조직 내 의사결정권을 분산시키지 않고 집중하는 경향을 강화하게 되며, 이것은 권력이 분산되기를 바라는 현대의 보편적 흐름과 맞지 않는 것이다.

2. 사회적기업으로 대표되는 제 4섹터가 가장 빛나는 장면은 기존의 1~3섹터가 각자의 노력과 서로의 분쟁을 통해 타협을 도출하지 못해 방치되는 부분들에 대한 새로운 해법을 내놓을 때이다. 브라질의 호사는 가난한 농촌에 전기를 공급하여 농민들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킨 대표적인 사회적기업가인데, 이 배경에는 그것을 요청해 온 시민단체와 정부의 갈등이 장기화, 고착화되어 앞으로 나가지 못하던 상황이 있었다. 비영리단체가 올바른 가치를 제시해 왔으나 적절한 해법을 찾지 못하던 일에 대해 영리기업의 방식을 적용해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한 이 사례는 내가 사회적기업에 대해 마음을 열고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 사례를 접한 지 2년 후 비영리IT지원센터라는 비영리단체를 만든 이래 일단 비영리단체보다는 사회적기업에 더 포커스를 두며 IT지원사업을 해왔는데, 한국에서 많은 사회적기업들이 "가치를 독점"하고 여러 지원에 기대며 정작 운영은 비효율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는 느낌을 받게 됐다. 이런 사회적기업에 대해 보통 깊이 없이 처방으로 제시되는 것은 "영리기업의 효율적 경영방식"을 더욱 강조하는 것인데, 이 기업이 사실상 비영리단체의 성격을 많이 갖는 곳의 경우, "직원"들이 사이에 끼게 된다. 자발성과 존중, 책임감보다는 영리기업의 "직원"처럼 의무와 대가성에 의해 일하게 되면서도 정작 급여나 복지 수준은 "비영리단체다운"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대표급들이 독점하던 명예와 보람을 왜 직원들은 느끼지 못하냐며 은근히 헌신을 바라는 경향에 바탕을 둔 것이 요즘 문제가 많은 "열정페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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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영리단체이던 사회적기업이던 "좋은 일을 하겠다"고 모인 사람은 돈을 이미 벌어두었던 아니던 그 이상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시작한다. 그 가치는 자신이 하나의 장기말처럼 치부되고 소모되면서 이루고자 하는 저 위의 숭고한 가치만은 아니다. 대체로 그 과정에 자신의 만족과 완성도 함께 바라게 되는데, "숭고한 가치"보다 "자신의 완성"을 더 강조하는 경향이 그 전에는 잘 드러나지 않던 것이라 요즘에 비영리단체/사회적기업에서 일하는 "직원"들에게는 개인적 목적을 위해 일한다는 혐의가 씌워진다. 반면 보다 숭고하고 근본적인 가치를 지키는 것은 대표급, 오래 해온 활동가,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 수행한다고 여기게 된다.

그래서 요즘 비영리단체와 사회적기업은 그 규모와 성격과 무관하게 "일반 직원"들을 그냥 스쳐갈 수 있는 사람으로 여기고 충분한 권한을 주지 않으며 "기업 경영"이라는 명목하에 해고, 전보 등을 해도 괜찮다는 의식을 갖는 경향이 보인다. 여기에 한국에서 "노동자"에 대해 씌워진 부정적 인식을 덧붙여서 비영리단체/사회적기업의 "직원"들에 대한 암묵적인 배제와 차별, 제한을 합리화하기도 한다. 대표-이사-사회적명사 들이 "경영권"을 갖고, 일반 직원들을 "노동자"로 여기며 정작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할 때는 "활동가"로서의 정체성을 슬쩍 요구하는 경향이 일부의 모습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확대 강화되는 것 같아 걱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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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한 가지 더하면, 한국에서 "비영리단체"(제3섹터)와 "사회적기업"(제4섹터)의 구분이 모호하고 바람직한 상호관계가 형성되지 않는 것도 원인일 것 같다. 비영리단체가 규모와 분야, 성격에 따라 아주 상이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데, 영리쪽에서 비영리로 영역을 넓힌지 얼마 안되거나, 오래되고 규모가 큰 비영리단체를 먼저 만난 사람들은 흔히 비영리단체와 사회적기업이 서로 다르지 않은 것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영리기업->사회적기업->비영리단체로 같은 지식과 노하우가 그대로 전파될 수 있다는 생각에 비영리단체의 성격을 많이 가지고 있는 협동조합에 초빙된 사람들이 경영효율화 조치라는 명목으로 노동자를 착취하는 일이 지금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런 일이 발생하면 대체로 그런 협동조합을 창립하는데 기여한 "전통적 비영리조직 활동가"들에게 비판이 가해지기도 하는데, 그들의 대응을 들으면 갸우뚱거리게 된다.

전통적 비영리단체에서 "활동가"는 대표와 회원 혹은 수혜자 사이를 단순 중개하거나 대리로 일을 수행하는 사람이 아니다. 조직 내 위계가 있더라도 결국엔 모든 활동가가 자신의 가치에 기반한 관점으로 활동을 기획해내고, (형식적일지라도) 민주적 의사결정과정을 통해 조직의 활동/사업으로 채택한다. 전통적/보편적인 중소규모 비영리단체에서는 일하는 사람들이 대표급의 결정을 그냥 "어떻게든 알아서" 수행해내는 사람이 아니기에 수동적인 의미를 갖는 "직원"이란 말은 적절치 않다. 특히 회원기반조직의 경우는 설사 대표급이라하더라도 권한을 위임받은 사람에 지나지 않으며, 그 대표가 얼마나 조직에 기여했는가와 무관하게 자신에게 부여된 권한을 적절하게 행사할 책무를 가진다. 대표급은 각각의 활동가가 자신의 소신대로 회원들의 바람을 현실화하기 위해 활동하도록 지원하면서, 오랜 경험과 축적된 사회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각 활동가의 자율적 활동을 외부의 충격과 위험으로부터 지켜주는데서 자연스러운 권위를 획득해야 한다. 그렇지만 기부 문화나 사회적 인식등 한국의 제반 여건이 좋은 편이 아니기에 비영리단체 내부의 권위주의는 비판하기엔 이르거나 그것이 유용한 측면이 있어서 유지된 면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새롭게 형성, 발전되는 사회적경제조직네트워크로도 자연스럽게 확산되는 것 같다.

 

지금 오래 글을 쓸 상황이 아닌데 앞으로 꼭 이 문제를 제기할 일이 있을 것 같아서 정리하려고 쏟아내고 있지만 역시 이 정도로 멈춰야겠다. 내가 원하는 것은 "좋은 일을 하는 조직"내의 권위주의적 방식들이 좀 더 드러나 현대적으로 극복되고, 비영리단체/사회적기업 내 노동자인 "직원"이 좀 더 존중 받는 것이다. 이사회와 사무국이 상하관계가 아니라 다른 역할을 하는 분립된 기구처럼 여겨지면 좋겠고, 직원으로 대하면서 "활동가"이길 바라지 않으면 좋겠다. 사회적경제조직을 이끄는 "훌륭한 사람"들에 대한 존중과 더불어 시민사회의 적절한 비판과 감시가 함께 있어야 정말 사회적경제조직이 질적으로 성숙,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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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29 16:58 2015/07/29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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