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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리퍼

  • 등록일
    2006/08/10 15:04
  • 수정일
    2006/08/10 15:04

나는 여름만 되면 어디를 가든 격식이 필요하지 않은 곳이라면 슬리퍼를 신고 다닌다.

시중에서 흔히 2~3천원이면 살 수 있는

덮는 부분에 흰색으로 된 가로방향의 줄무늬가 있는 슬리퍼가 있다.

 

어제 저녁에 후배 한 녀석이랑 삼계탕을 먹고, '괴물'을 보러 가려다가,

방향을 바꿔서 포항건설노조 상경투쟁중에 촛불집회 같은 것이 있다길래

그쪽으로 갔다.

 

가는 도중 버스 안에서 창밖을 보니,

어떤 사람이 내가 신고 있는 것과 똑같은 슬리퍼를 신고 있었는데,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슬리퍼의 한쪽 옆구리가 터져버렸다.

(즉, 덮는 부분과 바닥부분 사이의 접착부분이 더이상 그 역할을 하지 못하여,

신고 다닐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사람은 신발을 바닥에 붙인채로 질질 끌면서 겨우 횡단보도를 건넜다.

그걸 보고 나는 깔깔거리면서, "같은 신발 신는 입장에서 저런걸 보면 부끄럽다"는 식의

농담을 날리기도 했다.

 



 

어제 촛불집회 같은 것에 갔고, '괴물'을 봤고, 같이 갔던 후배네 집에서 잤다.

그리고 오늘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후배와 헤어지고 나서, 잠시 KT전화국에 들려야 하는 일이 있어서 그리로 걸어가던 중에

내가 신고 있던 슬리퍼도 어제 그 사람의 그것과 똑같은 운명을 맞이하였다.

아직 걸어가야 할 거리도 많이 남았고, 또 걸어서 전화국에 도착해도,

다시 돌아오는데 걸어가야 할 거리도 많았다.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마침 나의 슬리퍼에게도 사고가 발생한 지점, 그 바로 앞에는 구두를 수선하는 가게가 있었다.

혹시 그 곳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물어봤으나,

못질을 해도 소용없고, 본드로 붙여도 소용없단다.

결국 나는 가던 길에서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가장 가까운 신발가게를 찾아냈고,

(이것도 한참 걸렸다. 꼭 당장 필요한 가게들은 주변에 없다니까...)

그곳에서 3천원을 주고 똑같은 슬리퍼를 사서 신고 말았다.

신발가게는 어이없게도 내가 처음에 가려던 전화국보다 더 멀리 있었다.

 

 

신발가게를 찾는 동안 사람들이 다 나를 이상하게 보던 걸 돌이켜보면 끔찍하다.

내가 어제 그 사람을 보면서 깔깔댔던게, 괜히 후회가 되고, 미안해지고,

그 웃음이, 그 농담이, 다 나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다.

내가 그런 것을 당하고 나니까, 느끼는 건데, 길을 걷다보면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는 거고,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해서, 그게 웃음거리가 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어.

머 잘못한 것도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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