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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에이뿔

  • 등록일
    2007/06/21 14:13
  • 수정일
    2007/06/21 14:13
거한님의 [에이뿔]에 관련된 글. 내가 쓴 [보고서]에 관련된 글. 하하 나도 에이뿔. 현재 다섯 과목 중에 두 과목 성적이 떴는데, 하나는 A+, 다른 하나는 A- 사상 최초의 A+이다. 그래도 A+은 받아보고 졸업하는구나.ㅋㅋ 그리고, 지난 10학기동안 받은 A의 갯수와 이번학기에 현재까지 받은 A의 갯수가 이미 같아졌다는 것.-_- A-를 받은 과목은 이번학기에 수업을 정시에 들어간 적은 한번도 없고, 지각 몇번에 나머지는 모두 결석이었는데.ㅋ 이럴 줄 알았으면, 수업 열심히 들어가는 거였는데 -_- A+을 받은 과목은 트랙백을 건, [보고서]에서 자뻑한 그 과목이었다죠. 그래서 보고서 전문을 살짝. 보고서의 제목은 "<브로크백마운틴>과 <로드무비>에서 동성애에 대한 묘사의 문화적 차이"에요. 그렇다면, 이 글은 두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ㅋㅋ 어쨌든...


동성애는 한국사회에서 아직까지 크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동성애자들의 커뮤니티는 오래전부터 비밀스럽게 존재해왔지만, 2000년에 있었던 연예인 홍석천씨의 커밍아웃 사건을 계기로 한국사회에서 동성애에 대한 공공연한 논의는 첫걸음을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동성애는 그 자체로 ‘불결한 것’으로 취급받기 십상이다. 요즘에는 한국의 대중매체에서도 동성애가 심심치 않게 주변적인 소재로 등장한다. 얼마 전에 종영한 MBC 드라마 ‘주몽’에서도 사용과 협보의 동성애관계가 주변적으로 다루어졌고, 가수 백지영의 5집 타이틀곡인 ‘사랑안해’의 뮤직비디오에서도 두 소녀의 사랑을 그린 내용을 담았다. 그만큼 동성애는 예전보다 이슈화되고 있고, 또 이슈화 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일이지만, 정작 그 안에 동성애자들의 시선과 진실된 목소리는 전혀 들어있지 않았다. 심지어 동성애 자체는 코미디의 소재로도 사용된다. 대체로 코미디에서는 동성애는 느끼함과 거북스러움의 이미지로 표현되고 있다. 그 거북스러움으로 희화화되고 있을 뿐이다. 이번 보고서는 동성애를 다룬 두 영화 <브로크백마운틴>과 <로드무비>에서 동성애에 대한 묘사의 문화적 차이에 대해서 논하는 것이다. 영화의 내용 자체는 이해하는 데에 그리 어렵지 않았으나, 문화적 차이를 심도 있게 논의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가지고 있던 동성애에 대한 편견을 끊임없이 깨뜨려야 했다. 두 영화는 공통적으로 관객에게 동성애를 긍정하는 시선을 제시하고 있다. 또, 동성애자인 주인공이 자신의 동성애를 바라보는 시선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동성애를 보는 시선이 이성애를 보는 시선과 다르지 않기를 희망하고 있다. 이성애는 우리 사회에서 이미 ‘보편적’(주석 1번)이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여성과 사랑하고, 대부분의 여성들은 남성과 사랑한다. 그렇게 사랑하면서, 섹스도 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키우게 될 것이다. 이성애가 보편적이라는 것은 두 사람이 느끼는 감정을 사랑으로 인정한다는 의미만이 아니다. 여기서의 보편성은 사회를 향해 그들의 사랑의 결과물을 당당하게 표현할 수 있는가의 여부도 포함되어 있는 의미다. 그리고 이성애가 보편적인 사회에서 우리가 길러져 왔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대체로, 사람들에게는 ‘아빠’라는 남성가족과 ‘엄마’라는 여성가족이 있지 않은가? 이성애가 보편적이라고 한다면, 그것과 반대의 위치에 있는 개념인 동성애는 전혀 보편적이지 않다. 누군가는 동성애를 ‘이성애의 특수한 변형’(주석 2번)으로 포섭하려고 한다. 또 누군가는 동성애의 유전적인 원인을 찾아내려고 한다. 또 누군가는 동성애의 ‘사회적 원인’(주석 3번)들을 찾아내려고 한다. 이런 시도들은 모두 동성애는 보편적이지 않고, 특수한 것으로만 치부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그리고 동성애에 대한 편견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출발한다. <브로크백마운틴>과 <로드무비>에서는 공통적으로 이런 방식의 편견에 대하여 거부하는 시선이 존재한다. 두 영화 모두 편견 자체에 대해서 날카롭게 파고들어 비판하고 있지는 않지만, 동성애에 대한 편견을 조장하려는, 또는 조장하게 될 지도 모르는 묘사는 전혀 하지 않는다. 설령 동성애에 대한 이성애주의적인 편견이 영화 속 어딘가에 존재할 수 있을 지라도, 결코 관객의 시선이 되지는 못하게 만들고 있다. 동성애에 대한 편견은 때로는 억압을 낳고, 때로는 경멸을 낳는다.(주석 4번) 동성애에 대한 편견 역시 동성애를 부정하는 논리가 되어 동성애자를 억압하고 경멸하게 만든다. 두 영화 모두 동성애, 혹은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한다. <브로크백마운틴>에서는 에니스의 아버지, <로드무비>에서는 주인공인 석원, 이렇게 동성애에 대한 편견을 가진 인물들은 동성애를 억압하고 경멸한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두 영화는 본격적인 차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브로크백마운틴>에서 편견은 억압의 형태로 자신을 드러냈고, <로드무비>에서 편견은 경멸의 형태로 자신을 드러냈다. <브로크백마운틴>에서의 주요한 줄거리는 긴 시간동안 두 남성, 에니스와 잭이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브로크백마운틴>에서 줄거리의 전개는 시간의 진행을 기준으로 하여 일어난다. 두 사람은 브로크백의 양떼 방목장에서 같이 일하면서 만나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두 사람은 오랜 친구처럼 마음을 터놓는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은 육체적 관계로부터 시작한다. 양떼 방목장에서 일하는 동안, 그들은 행복하게 사랑을 나누었으나, 양떼 방목이 끝난 후, 두 사람은 그곳을 각자의 길로 떠났다. 그리고, 각자 여성과 결혼을 한 후에 4년 만에 재회하게 된다. 두 사람은 그 후로 20년 동안 일 년에 한 두 번씩 브로크백에서 만난다. 잭은 에니스와의 관계에서 두 사람만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다. 그런데, 에니스는 다르다. 잭하고의 관계를 오랫동안 조심스럽게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 에니스는 어린 시절 에니스의 아버지가 동성애자를 어떻게 억압했는지 지켜봤다. 잭하고 에니스의 갈등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동성애자를 죽이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에니스에게 잭과의 새로운 시작은 한편으로는 간절했을지라도, 매우 위험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심지어 잭과의 관계 때문에 에니스는 부인과 갈등을 겪기 시작했고, 결국 이혼당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렇게 에니스는 다시 혼자가 되어서까지도,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보다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잭하고의 새로운 시작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에니스의 아버지가 어떤 동성애자를 죽이던 것은 결국 에니스 자신을 억압했고, 그 억압이 에니스로 하여금 잭과의 관계를 일 년에 한 두 번씩 만나는 것 이상으로 발전시키지 못하게 한다. 이런 이유로 발생한 갈등은 결국 잭에게도 억압이 되는 셈이다. 잭 역시 에니스가 겪은 억압으로 인해, 자신이 원하던 새로운 시작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하지 못한 채로 잭은 죽고 말았다. 잭이 죽고 나서 에니스가 찾아간 잭의 부모는 에니스를 잭이 사랑하던 사람으로 대우해준다. 에니스의 아버지는 에니스가 자란 환경을 상징하고, 에니스의 가문을 상징하며, 남성혈통주의를 상징한다. 남성혈통주의는 혈통을 재생산하는 데에 방해가 되는 동성애에 대하여 끊임없이 억압하게 마련이다. 에니스가 자란 환경에서는 동성애는 끊임없이 억압당하는 대상이었다. 그에 비해 잭의 환경에는 에니스가 겪는 것 같은 억압은 없다. 잭은 부모에게 에니스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했었다고 한다. <브로크백마운틴>에서 갈등을 만들게 되는 근거들은 에니스의 것은 영화의 중반부에, 잭의 것은 영화의 후반부에 나타난다. 에니스가 겪은 억압은 동성애자들이 겪는 현실에 가깝고, 잭이 부모에게 했다는 에니스에 대한 이야기와 그에 대해 아끼고 기억해주는 부모는 동성애자들에게는 이상에 가깝다고 본다. 사랑하는 사람과 브로크백에서의 새로운 시작을 꿈꾸고 있다는 이야기를 부모에게, 자신의 혈통에게 말할 수 있는 것. 그것은 동성애가 남성혈통주의를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잭은 남성혈통주의를 넘어섰으나, 에니스는 그것을 넘어설 수 없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20년이라는 시간은, 잭과 에니스가 관계를 유지해 온 시간이자, 끊임없이 갈등하는 시간이고, 곧 남성혈통주의에 의한 억압의 크기를 상징한다. 잭이 죽게 되면서 갈등은 일단락되었다. 이제 더 이상 잭과 에니스의 관계가 유지되지 않는 상태에 이르렀고, 곧 시간이 끝났고, 억압이 끝났다. 에니스가 잭의 부모를 찾아가면서, 잭이 걸었던 길을 돌아보는 것이 에니스가 하게 되는 마지막 일이었다. 그제서야, 에니스도 잭이 가졌던 희망을 발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로드무비>에서의 주요한 줄거리는 ‘이미 동성애자인’ 대식과 ‘아직 동성애자는 아닌’ 석원, 이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다. 대식은 거리에서 살고 있다. 어느 날 거리에서, 술에 취해 쓰러져 괴로워하는 석원을 본다. 석원은 증권사의 펀드매니저였지만, 주가폭락으로 인하여 한순간에 거리로 내몰리게 되었다. 대식은 이렇게 절망하고 있는 석원을 돌봐 주고, 석원은 하루하루 대식에게 익숙해져 간다. 대식과 석원은 무작정 여행을 떠난다. <로드무비>에서의 사랑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로드무비>는 영화 전체의 줄거리가 석원이 대식의 사랑을 받아들이기까지의 과정이다. <로드무비>의 줄거리의 전개는 <브로크백마운틴>과 같이 시간의 진행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의 감정의 미묘한 변화와 외부요인의 등장에 따르고 있다. 두 사람은 여행에서 일주라는 여성을 만났다. 이제 셋이서 여행을 한다. 일주는 대식을 사랑하지만, 대식은 석원을 사랑한다. 석원은 자신이 몸담았던 공간이 복원되면, 자신은 정처없는 여행을 하는 대식과는 다른 처지가 될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석원에게 아내가 찾아온다. 석원이 바라던 아내는 자신을 데리고 떠나줄 구원자였겠지만, 실제의 아내는 석원에게 이혼을 요구하러 찾아온 것이었다. 그 시각에 대식은 카페 화장실에서 웨이터와 성관계를 갖는데 석원이 그 광경을 보게 된다. 석원은 대식이 자신에게 친절했던 것이 어떤 의미였는지 깨닫게 된다. 그리고는 대식에게 자신의 몸에 손대지 말라고 선언한다. 석원은 대식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대식을 경멸하게 된다. 여기서, 대식과 석원간의 갈등이 시작된다. 대식과 일주가 일을 하는 동안, 육체로 하는 일에 서툰 석원은 집에 틀어박혀서 약을 먹는다. 석원이 대식의 자신에 대한 사랑을 조롱하자, 대식은 석원을 때리고 만다. 석원은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대식을 경멸하면서도, 대식으로 인한 건지 자신의 희망이 사라진 것 때문인지 알 수 없는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다. 결국, 대식이 석원과 일주를 남겨두고 떠나게 되자, 석원은 일주를 홀로 두고, 차를 훔쳐 대식을 찾아 따라 나선다. 여행의 끝자락에서는 대식과 석원은 다시 광산에서 일하게 되는 데, 이 때에도 일에 미숙한 석원은 결국 집에서 놀게 된다. 대식은 괴로워하고 있는 석원을 더 두고보지 못하고, 결국 석원의 직장동료가 일 할 자리를 만들어 놨다는 연락이 왔었다는 이야기를 하게 된다. 다음날 아침 석원은 서울로 떠나고 대식은 광산에서 자살을 시도한다. 그러나 석원은 마음을 돌려 먹고 대식에게 돌아온다. 대식은 석원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석원도 그제서야 대식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곳에서 같이 잔다. <로드무비>에서의 석원과 대식의 갈등 요인은 석원이 동성애를 경멸하는 것에 기인한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석원 자신이 동성애의 대상이 되는 것을 경멸한 것이다. <브로크백마운틴>에서는 억압의 주체는 잭이나 에니스가 아니라, 에니스의 아버지로 표상되는 동성애를 부정하는 남성혈통주의였던 데에 비해서, <로드무비>에서는 경멸의 주체가 주인공 중에 하나인 석원 자신이다. 동성애에 대한 편견이 석원의 내면에 깊숙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대식의 사랑은 석원에게는 불쾌한 것이 인식되어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므로 갈등을 극복하는 과정은 석원 자신이 대식을 경멸하는 시선을 걷어버리는 것으로 그려지게 될 수밖에 없다. 석원은 직장동료로부터 연락이 왔던 자신의 일자리에 돌아가려다가 다시 대식에게로 왔다. 대식에 대한 사랑 때문에 예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한 것이다. 누구도 석원에게 결정적인 자극을 주지 않았지만, 석원은 스스로 생각을 바꾸었다. 내면화된 편견을 극복하는 것은 이렇게 어느 순간 갑자기 생각을 바꾸는 것으로 그려질 수밖에 없다. <브로크백마운틴>과 <로드무비>는 동성애를 이성애와 같은 수준의 사랑으로 인정하는 관객의 시선을 유도하고 있다. 두 영화의 제작 의도가 거의 여기에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이런 의도에 부합하기 위해, 두 영화에서는 각각 보편적으로 통할 수 있는 사랑방정식을 설정해 두고, 두 주인공의 관계를 그 방정식에 부합시키고 있다. 하지만, 두 영화에서 설정해 둔 사랑방정식은 현격한 차이가 있다. <브로크백마운틴>에서는 잭과 에니스의 육체적관계로 사랑을 시작한다. 그렇게 시작한 사랑은 오랜 시간동안 몇 단계에 걸쳐서 영화 속의 현실에게 심판받는다. 4년간 떨어져 있다가 다시 만났을 때, 서로에 대한 욕구가 남아있는 지를 확인한다. 그 뒤에 20년간 브로크백에서 일 년에 한 두 번씩 만나면서, 점점 만나기 어려워지는 현실을 주고, 그래도 욕구가 존재하는 지를 확인한다. 사랑은 처음에는 육체적 관계로 부각되었지만, 점점 정신적인 공감대의 부분이 부각되고 있다. 잭과 에니스의 관계를 사랑이라고 증명하는 방식은 육체적 관계에서 시작하여, 현실의 벽을 넘어 20년이 넘도록 변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음이 변하지 않은 20년의 시간에 대해서만큼은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20년의 시간은 잭과 에니스에게는 견뎌내야 하는 시간이었지만, 관객에게는 두 사람의 관계가 사랑임을 확인하게 만드는 시간이다. <브로크백마운틴>에서 육체적인 관계는 아주 잠깐 뿐인 욕망이고, 보편적으로 논할 수 있는 사랑은 매우 오랜 시간동안 다져져야 하는 것이다. <브로크백마운틴>은 미국에서 제작된 영화다. 성문화에 대해 상대적으로 개방적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에서 어떤 두 사람의 관계가 사랑임을 증명하는 데에 있어서는 육체적 욕망에서 출발하여, 좀더 정신적인 공감대를 형성해가는 방식은 너무나 당연한 선택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브로크백마운틴>을 미국사회에서 동성애를 사랑으로 입증하기 위한 영화로 규정한다면, 매우 적절한 사랑방정식을 채택한 영화로 평가할 수 있다. <브로크백마운틴>에서의 사랑은 ‘끝없이 누군가를 갈망하게 되는 욕구’에 있다. 한편 <로드무비>에서는 대식의 석원에 대한 친절로부터 사랑이 시작된다. 이렇게 시작한 사랑을 심판하는 주체는 어떤 영화 속 장치들이 아니라, 처음에 사랑을 받기 시작한, 그리고 동성애에 대한 편견과 불쾌함으로 가득했던 석원이다. 대식은 끊임없이 친절하고, 석원은 대식의 그 사랑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다가 결말에 가서는 받아들이고 말았다. <로드무비>에서 관객에게 대식과 석원의 관계가 사랑이라고 증명하고 있는 방식은 간단하다. 대식이 석원을 사랑하는데, 석원이 그것을 받아들였으므로, 사랑이라는 결론이다. <로드무비>에서의 사랑방정식은 A가 B를 사랑하면, B가 A의 사랑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의 문제다. 관객은 여기에 집중해야 하고, 석원이 괴로워하다가 대식의 사랑을 받아들이면, 두 사람의 관계는 사랑이 된다. 그리고 관객들에게 문제의식을 던진다. “이래도 동성애를 사랑이 아니라고 할래?”라고. <브로크백마운틴>에서는 육체적 관계를 도입부에서 잠깐의 욕망으로 보여줬던 것과 비교하면, <로드무비>에서는 육체적 관계를 결말에서 사랑의 완성된 형태로 보여주고 있다. 미국에 비해서는 성문화가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사회에서의 육체적 관계는 곧 사랑을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에, 이런 설정은 한국사회에서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로드무비>에서는 한 가지 커다란 문제에 직면하고 말았다. 대식이 석원을 먼저 사랑한 후에 석원이 대식을 받아들이게 되는 줄거리에서, 석원의 마음의 변화는 어떻게든 관객에게 이해시킬 수 있다고 쳐도, 대식이 처음에 석원을 먼저 사랑하게 되는 부분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관객에게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로드무비>에서는 <브로크백마운틴>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방법을 사용했다. 대식을 게이라고 미리 설정해 둔 것이다. 영화를 시작할 때, 뒤의 줄거리와 전혀 연결이 되지 않는, 대식이 다른 남자와 섹스를 하는 장면을 굳이 보여준 것은 대식이 게이라는 설정이 없이는 줄거리가 개연성이 없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중간에 일주라는 캐릭터를 넣어서 대식이 게이라는 사실을 관객에게 보여준다.(주석 5번) 대식이 석원을 사랑하는 것은, 그냥 석원을 돌보고 있는 것으로는 그것조차 사랑이라고 하기에는 개연성이 부족하다고 판단되었을 것이다. 그렇게만 표현한다면, 석원이 대식의 감정에 의하여 영향을 받고 자신도 혼란을 느끼는 것을 납득하기 어려울 수 있다. 대식은 그냥 좋은 사람이었고, 그냥 석원에게 친절한 사람이었고, 친절함 자체에 몰두하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개연성이 있는 줄거리를 위해서는, 대식이 석원을 사랑하는 것은, 대식의 옆에 대식을 사랑하는 일주가 있음에도, 그런 일주를 부정하고, 석원을 특별히 더 아끼는 것이어야 했다. 대식은 이미 게이이기 때문에, 석원을 사랑하는 것이어야 했다. 이것은 <브로크백마운틴>에서는 잭과 에니스가 육체적 관계로부터 사랑을 시작했기 때문에, 잭과 에니스가 원래 게이였든지, 아니든지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었던 것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결국 <로드무비>에서는 동성애를 사랑이라고 입증하기 위해서, 동성애와 대립하는 이성애를 상정해야 했다. 그리고, 대식의 마음속에서 동성애와 대립하던 이성애는 동성애에게 무참하게 짓밟혀야 했다. 그렇게 하여, <브로크백마운틴>에서 잭과 에니스의 동성애와는 달리, <로드무비>에서의 대식의 동성애는 굳이 이성애가 아닌 동성애로 등장해야 했다. 미국사회에서 동성애자들에게 당면한 과제는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을 넘어서, 동성애, 혹은 동성애자들을 끊임없이 억압하는 남성혈통주의와 맞서는 것이다. <브로크백마운틴>에서는 동성애의 문제를 남성혈통주의와 같은 외부적 요인으로 인한 억압으로 분석하여, 이것으로 인한 갈등의 문제를 그리고 있다. 잭도 에니스도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 동성애임을 애써 긍정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애써 부정하지도 않는다. 즉, 자신의 성적 정체성의 문제에 대해서는 <로드무비>의 석원에 비해서 크게 고민하지 않는다. 미국사회에서의 동성애의 문제가 논의되는 수준은 동성결혼의 합법화의 문제와 같이 첨예한 정치적 입장의 수준이다. 동성애를 느꼈을 때,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애써 부정해야 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아니다. 동성애에 대한 법제도가 완전히 갖추어지지 않았을 뿐이지, 동성애는 누구든 경험할 수 있는 개인의 취향임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브로크백마운틴>에서 보여주고 있는 동성애에 대한 갈등은 미국사회의 동성애에 대한 위와 같은 인식의 수준을 반영하고 있다. 영화 속의 갈등은 <로드무비>에서처럼 석원의 성적 정체성을 부정하는 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에니스를 억압하는 외부적 요인, 즉 남성혈통주의로 대변되는 에니스의 아버지의 폭력, 그리고 그에 대한 에니스의 공포에 의한 것일 뿐이다. 한편, 한국사회에서의 동성애에 대한 인식은 미국사회에 비하면 아직까지는 초보적인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는 동성애를 규정하는 것에서부터 혼란스럽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동성애적인 성향들을 그것이 동성애라는 이유만으로 애써 부정하고 있다. 즉, 한국사회에서 동성애자들에게 당면한 과제는 아직까지 성적 정체성을 규정하는 단계에 있다. <로드무비>의 석원은 대식의 사랑을 보고, 끊임없이 고뇌하고 혼란스러워하고, 심지어 경멸하기까지 하다가, 결말에서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깨닫게 되는, 또는 인정하게 되는 인물이다. <로드무비>에서의 동성애에 대한 갈등 역시 한국사회의 동성애에 대한 인식의 수준을 반영하고 있다. 석원에게는 어떠한 외부적인 억압이 없지만, 석원은 동성애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것이 바로 한국사회에서 동성애를 처음으로 느끼게 되는 많은 사람들이 겪는 혼란일 것이다. 그 혼란은 동성애를 경멸하는 정서에 기반을 두고 있다. 혼란의 끝에서는 자신이 느낀 동성애를 스스로 부정해버리는 경우와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다. 석원은 단지 그렇지 못한 경우에 해당되었을 뿐이었다. 지금까지 <브로크백마운틴>과 <로드무비>에서 그려진 동성애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분석하였다. 두 영화는 각각 미국사회와 한국사회에서의 동성애에 대한 보편적 인식의 수준에 적합한 영화가 되었다. <브로크백마운틴>의 초반에 잭과 에니스가 양떼를 방목하면서 사랑을 나누던 즐거운 시간들이, <로드무비>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장면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싶다. 그것은 두 영화에서의 결정적인 정서적인 차이가 되기도 하고, 곧 미국사회와 한국사회의 동성애에 대한 인식의 결정적인 차이가 되기도 한다. 간단히 말해서, 미국사회에서 한국사회에 비해서 동성애가 훨씬 더 양성화 되었고, 희망적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로드무비>는 매우 잘 만든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브로크백마운틴>에 비해서, 아쉬운 점이 몇 가지 남는다. 첫째,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대식은 영화의 시작부터 먼저 게이가 되어 있었어야 했다는 점은 매우 치명적이다.(주석 6번) 동성애는 이성애와 대립하지 않는다. 이성애주의와 대립할 뿐이다. 하지만, 대식이 먼저 게이가 되어 있어야 했다는 것은 이성애와 대립하지 않고서는 동성애를 말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둘째, <브로크백마운틴>에서는 즐겁게 사랑하는 시간이 있었던 것에 비해서, <로드무비>에서 그려진 동성애는 처음부터 끝까지 어둡고 음험한 것이었다. 동성애도 사랑이기 때문에, 때로는 즐거울 수 있어야 하는 일이다. 셋째, <브로크백마운틴>에서는 잭과 에니스의 관계가 매우 동등한데 비해, <로드무비>에서 대식과 석원의 관계는 대식이 석원을 일방적으로 돌보는 관계라는 점이다.(주석 7번) 육체노동에 있어서 석원은 대식에 비해 매우 무능력하다는 설정이 석원을 돌봄의 대상으로 느껴지도록 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석원의 고뇌가 <로드무비>에서의 핵심적인 소재이기 때문에, 그것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긴 했다. <로드무비>가 이런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논의들을 종합하여 고려해보면, 한국사회가 가진 동성애에 대한 인식의 수준이 미국사회의 수준에 비해, 이런 식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성애자, 이성애자의 흑백구분(주석 8번)을 통하여, 한국사회는 종종 동성애에 대한 혐오를 드러낸다. 연예인 홍석천씨의 커밍아웃 사건 때도 그랬고, 고(故) 장국영의 동성애 논란 때도 그랬다. 또 한국사회에서의 동성애를 혐오하는 시선 때문에,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공개하는 것은 많은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고, 동성애는 끊임없이 숨겨야 하는 일이 되어 버린다. 마지막으로는 동성애를 여전히 정신병과 같이 취급하려는 생각들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동성애는 이미 동성애자인 사람들이 동성애자가 아닌 사람들을 물들어버리게 하는 몹쓸 병처럼 다루어진다. 이렇게 동성애에 물들어버리게 하는 데에는 두 사람 사이의 권력관계가 영향을 미친다. 동성애에 대한 고뇌는 동성애에 대한 편견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동성애에 대한 고뇌가 동성애자를 한국사회에서 정신병자로 몰아넣고 있다. <로드무비>에서 대식과 석원의 일정한 권력관계의 존재는 한국사회에서 동성애를 전염병처럼 취급하는 시선들에 대하여 정면으로 반박하기 위하여, 고의적으로 부각시킨 것이 아닐까하는 추측을 한다. 대식과 석원 사이의 권력관계가 존재해도 석원의 사랑은 권력관계에 의해서 규정되지 않는, 석원의 마음에서 규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브로크백마운틴>과 <로드무비>, 두 영화 모두 각자의 사회에서 동성애에 대한 인식을 좀 더 긍정적으로 바꾸는 데에 기여를 하고 있다고 평가하겠다. 두 영화에서의 동성애에 대한 묘사의 차이는 결국 미국사회와 한국사회에서의 동성애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즉, 영화가 사회를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나는 동성애를 바라보는 시선이 이성애에 대한 그것과 다르지 않기를 희망한다. 아직까지 미국사회와 한국사회는 모두 동성애에 대한 차별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이런 시각에 맞서는 멋진 두 영화를 본 것에 감사한다. 그리고 두 영화를 통하여, 한국사회에서 가지고 있는 동성애에 대한 시각의 수준을 분석할 수 있었고, 한국사회에서 동성애에 대하여 어떤 운동을 펼쳐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다. 나는 한국사회도 앞으로 동성애에 대한 시각을 좀 더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한국사회를 긍정적으로 만들 수 있도록 나도 많은 사람들과 함께 노력할 것임을 다짐한다. 그리하여, 언젠가 한국사회에서도 <로드무비>와 같은 영화가 필요한 게 아니라 <브로크백마운틴>과 같은 영화가 필요해지길 바란다. 또 <브로크백마운틴>을 넘어서는 더욱 멋진 영화를 만들 수 있는 한국사회의 좀 더 좋은 동성애에 대한 토양을 기대해본다. <브로크백마운틴>과 <로드무비>, 두 영화 모두에게 박수를 보내며, 글을 맺는다. ------------------------------------------------- 주석 1) ‘보편’이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될 수 있는데, 여기서는 사전적인 ‘널리 두루 통한다’라는 의미로부터 출발하여, ‘지배적’이라는 의미로 확장하여 생각할 수 있다. 2) 동성애 관계에 있는 두 사람의 경우, 한 명이 남성의 역할, 한 명이 여성의 역할을 하게 된다고 분석하는 방법을 의미한다. 이렇게 분석하는 것은 자신과 다른 성의 역할 - 게이일때 여성의 역할, 또는 레즈비언일때 남성의 역할 - 을 맡게 되는 사람이 관계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고 분석되곤 한다. 그 사람이 먼저 동성애자였고, 그래서 그 사람이 먼저 다가갔고, 그 사람이 아니었으면, 나머지 한 사람에게는 애초에 동성애는 성립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 된다. 3) 동성애의 사회적인 원인으로 성행위에 대한 과도한 금기, 혹은 이성에 대한 두려움을 꼽기도 한다. 이런 관점은 동성애를 이성애의 결핍에서 오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4) 억압은 외부로부터 동성애가 ‘금지되는 것’을 의미하고, 경멸은 동성애를 ‘업신여기는 시선’을 의미한다. 억압의 경우 대체로 억압의 주체는 타인이 되지만, 경멸의 주체는 타인이 될 수도 있고, 동성애를 하고 있는 자기 자신이 될 수도 있다. 자신이 자신의 사랑을 경멸할 수 있다는 의미다. 5) 4월 30일에 조모임에서 토론했을 때, <로드무비>에서 일주가 또 한명의 주인공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나는 이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일주는 대식이 게이임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한 인물이다. 석원이 대식이 게이임을 알아차리고 난 후에는 주요한 갈등은 석원과 대식과의 관계에 있었고, 대식이 석원과 일주를 두고 떠났을 때, 석원이 일주에게서 벗어나 대식을 찾아 나선 장면 이후로는 일주는 영화에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이제 더 이상 관객에게 대식이 게이임을 설명할 필요가 없어졌고, 이것은 곧 일주가 영화에 더 이상 등장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주의 영화 속 역할은 대식의 성적 정체성을 규정하는 수단이었다. 6) 물론 대식의 성적 정체성에 대한 과거의 고민은 중간에 대식이 찾아간 대식의 전 부인와 아들을 보여주면서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영화의 전체적인 줄거리와는 약간 동떨어진 것일 뿐이고, 대식의 성적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이미 과거의 것으로 치부되어버렸다. 7) 2006년에 개봉한 이송희일 감독의 <후회하지 않아>라는 영화에서도 동일한 구도를 발견할 수 있다. 물론 <후회하지 않아>에서는 돌봄의 관계는 아니었으나, 한 명은 기업의 경영자이고, 한명은 호스트였다는 점에서 두 남성 주인공 사이에서 일정한 권력관계가 형성된다. 이 경우에도 기업의 경영자였던 사람은 영화를 시작할 때부터 이미 게이였고, 호스트였던 사람은 게이의 고백에 자신의 성적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크게 하고 있는 상태가 되었다. 8) ‘양성애자’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동성애자’, ‘이성애자’의 구분으로 규정을 시작하였을 때, 그 어느쪽의 범주에도 쉽게 포함되지 않는 사람들을 규정하는 말로, 흑백구분에 대해 보완하는 성격을 가진 단어일 뿐이다. ‘양성애자’라는 말이 ‘동성애자’, ‘이성애자’의 구분을 본질적으로 깨뜨리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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