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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보조인의 풍경 - 장애등급제 폐지를 두려워하는 사람들

오전. 장애인 이용자가 저녁에 친구와 약속이 있다고 했다. 요즘 바우처가 부족하니 저녁을 먹게 해주는 조건으로 퇴근기록을 하고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한다. 특별히 고기를 먹게 해주겠노라 한다. 고기는 좋지만, 돈도 안 받고 일하게 되는 이러한 상태. 과히 흔쾌하지 않다. 회식메뉴가 아무리 좋으면 뭐하나. 너와 얼굴 마주한 것 자체가 노동인 것을. 찝찝하나 저항하지는 않는 상태로 승낙한다.

일상적으로 반복하는 일은 모두 끝났다. 저녁 6시가 되어 단말기에 퇴근으로 기록하고, 이용자의 차를 타고 약속장소로 간다. 예전에도 한번 와봤다는 고깃집에서 친구를 기다린다. 이 집을 택한 이유는 별거 없다. 단지 아주머니들이 고기를 굽고 자르는 것까지 다 해주기 때문이다.

도착한 친구는 소아마비 장애인이다. 휠체어를 쓰기는 하나 양손을 잘 쓰고 근육량도 제법이다. 한마디로 몸짱. 장애인올림픽에 국가대표로 나간 적도 있다고 하니 그 활동량을 짐작할 수 있다. 나의 지금 이용자는 교통사고로 3번 경추를 다쳐 가슴 아래로는 감각이 없는 중도장애인이다. 손가락도 잘 움직이지 못하고 팔을 그저 움직이는 정도다. 이용자가 교통사고를 당하기 전에 봉사활동을 하면서 둘은 만났다고 한다. 친구를 들고 계단을 오르내리기도 했단다. 친구는 자신을 도와주던 이용자가 자기보다 더한 장애를 입었다고 말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끼 부리는 폭주족들을 보면 이용자 꼴 나겠다며 속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친구는 활동보조인을 둔 이용자가 내심 부러운 모양이다. 어디 멀리 여행이라도 좀 다니면서 즐기라고 말한다. 옆에 활동보조인도 있는데 좀 다니라고 말한다. 활동보조인이 절박한 일부 장애인들은 가끔 활동보조인만 있으면 뭐든 다 해결될 수 있는 듯이 말할 때가 있다. 하지만 활동보조인은 장애인이 활동하기 위한 조건 중의 일부일 뿐. 이용자는 돈도 없고 시간도 없다며 말끝을 흐린다.

그러고 보니 친구는 혼자 왔다. 활동보조인은 어디 갔느냐 물으니 없다고 한다. 왜 활동보조인이 없느냐고 물으니 처음부터 쓰지 않았다고 말한다. 옆에서 이용자가 한마디 톡 쏜다.

“처음 활동보조인 제도 생겼을 때, 제도 생겼다고 알려줬는데도 자기가 혼자 다니겠다고 신청 안 하고 뻐기다가 지금까지 왔지 뭐.”

말 마치기가 무섭게 친구는 국고를 축내는 ‘가짜 장애인’들을 흉보기 시작했다. 자기가 아는 사람은 할 일도 없으면서 활동보조인을 쓴단다. 남성 장애인이 일도 없으면서 젊은 여성 활동보조인을 데리고 매일 춘천에 꽃놀이를 간다고 흉본다. 그러니까 어지간하면 장애가 심해도 활동보조인 신청하지 말아야 한단다. 그러고는 갑자기 자기는 누가 같이 다니면 귀찮단다. 국고를 생각하는 애국심, 혼자서도 잘 다닐 수 있다는 자존심이 섞여 그는 활동보조 서비스를 신청하지 않았다.

“이제는 신청하려 해도 못 해.”

혼자의 힘으로도 자립을 해보려고 했던 그의 노력이 활동보조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족쇄가 될 줄은 몰랐단다. 활동지원제도가 생긴 지도 몇 년, 그 사이 제도가 변하기도 여러 번. 장애등급에 대한 심사의 엄격함은 아주 강해졌다. 활동지원제도가 생길 초기, 이용자와 이용자의 친구는 장애 1급을 아주 쉽게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재심사를 하면 활동보조인 지원을 못 받을 게 분명하다고 한다. 비싼 사진을 찍어 신경이 살아있는 것이 보이면 그 신체 부위는 그냥 움직이는 부위로 간주한단다. 예전에는 휠체어만 타면 1급이었는데, 팔 한쪽만 움직여도 비장애인 취급 할 정도로 심사가 엄격해졌단다. 이제 이용자의 친구는 활동지원을 신청할 수 없다. 이제 활동지원을 받으려면 재심사를 해야 하는데, 장애등급이 내려가 활동지원을 받는 것은 고사하고 이미 받고 있던 다른 혜택들도 못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나의 이용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팔을 조금 움직일 수 있는데 재심사를 받으면 분명 1급에서 떨어질 것이란다. 그래서 부족한 활동지원 서비스 시간을 더 요청하지 않는다고 했다. 시간을 더 받기 위해서는 분명 재심사받아야 할 텐데, 재심사를 받으면 기존의 혜택들이 사라질 것이 분명하니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자신은 장애등급제 폐지가 두렵다고 말했다. 장애등급제가 폐지되면 새로운 기준으로 활동지원 서비스 시간이 책정될 것이고, 그렇게 제도가 변화되면 자신은 재심사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이야 재심사를 피해 이미 받고 있는 서비스를 유지하며 받을 수 있지만, 장애등급제가 폐지되면 재심사는 불가피한 것이 된다. 이제는 조금 흥분한 듯 오히려 나에게 등급제가 왜 나쁘냐고 되묻는다. 1등급이라고 붙여놓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누가 알아보느냐며, 그게 그렇게 나쁜 거냐고 되묻는다.

“1등급 한우 취급이어도 좋아. 나한테 실질적으로 뭘 해주느냐가 중요하지.”

그에게 장애등급제 폐지는 중요한 주제가 아니었다. 장애등급제가 폐지되어도 어떤 점수표로든 공무원들이 장애인을 평가하는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활동보조 서비스를 얼마나 줄지에 대한 기준이 어떤 방식으로 정해지는지 여부와는 별개로, 공무원들은 예산에 맞추어 서비스를 받을 인원을 정한다. 예산에 넉넉하면 점수도 넉넉하게, 예산이 부족하면 점수도 짜게 줄 것이다. 장애등급제를 폐지하라는 주장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장애등급제 폐지를 넘어 국가가 권리를 받을 자격을 심사하는 것 자체를 문제시해야 할 것은 아닐까? 권리를 구걸해야 하는 현실이 문제시되어야 할 것은 아닐까? 하지만 나는 이용자에게 더 많이 싸워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하지는 못했다. 싸우러 광장에 나가기에 그에게는 지켜야 할 것들이 많았다.

시간은 흘러 집으로 갈 시간이 되었다. 이용자는 술을 마셨고, 나는 이용자의 차를 운전한다. 이용자를 집에 데려다 주고 시계를 보니 밤 10시 가까이 되었다. 집으로 오는 버스 안, 내 머릿속 계산기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4시간 해당하는 급여를 계산해본다. 내가 먹은 고깃값을 계산해본다. 대리운전 한 번 부를 때, 얼마를 써야 하는지를 생각해본다. 아무래도 밑지는 장사다. 이용자와 다시는 밥 먹으러 가지 않겠노라 결심해 보지만, 이 또한 잘 지켜지지 않을 것을 안다.

2014/06/16 02:07 2014/06/16 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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