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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장애인활동지원사 월급 천만 원
“장애인활동지원사가 돈을 많이 번다”는 발화의 이면
종종 활동지원사들이 돈을 많이 번다는 이야기를 듣는 일이 있다. 바로 얼마 전 보건복지부 공무원 면담을 하는데 노조 앞에서 담당 행정사무관이 이렇게 말했다. 장애인에게 24시간 서비스하면서 월 800만 원 소득을 얻는 분들은 다른 건 필요 없고 그냥 계속 그런 식으로 근무하길 원한다고 말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며 노동조합의 제도 개선 요구를 일축하고 있었다.
이런 종류의 발언은 현장에서도 많이 나온다. 연초다 보니 연말정산을 안내하는 전담인력은 활동지원사에게 이렇게 안내했다 한다. “월 천만 원씩 버시는 분들이 센터 여러 개 하시잖아요. 그러니까….” 설명의 요지는 간단하다. 직장이 여러 곳인 노동자는 원천징수 영수증을 사업장별로 각각 발급받아 제출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런 설명을 할 때도 “월 천만 원”이라는 금액이 그 앞에 붙는다.
우리 사회 일반의 노동 인식에는 기대가 없지만, 진보적 장애인 인권운동을 표방하는 이들조차 이런 발언을 쉽게 한다. 노동자들을 지원하면서 경악했던 사건 중 하나는 한 장애인 활동가가 우리 조합원이 일하는 장소에서 활동지원사의 노동을 폄훼해서 벌어진 갈등이었다. 그 활동가는 자신의 발언을 변호하기 위해 “밥 먹고 잠자면서도 돈 버는 거 아니냐”, “천만 원까지 벌 수 있다”, “장애인들이 얼마나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 준 거냐” 같은 이야기가 ‘장판(장애인 인권 운동판)’에서 농담처럼 나오는 이야기라고 주장하는 서신을 제출했다.
활동지원사의 수입이 월 천만 원이라는 말은 어떤 맥락 속에 있는 말이다. 연봉으로 치면 1억 2천. 이것은 그저 누군가가 선망하는 직종의 월수입에 대한 사실을 표현하는 말이 아니다. 그 말의 이면에는 장애인활동지원사 같이 별것도 하지 않는 일에서, 밥 먹고 잠을 자면서도 월 천만 원의 수입이 가능하니, 행정사무관의 태도처럼 정부에 감사하고 군소리를 말던가, 장애인 인권운동가의 태도처럼 그 제도 혹은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낸 진보적 장애인 인권운동에 감사하며 군소리를 말아야 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발화자들이 의식하건 의식하지 못하건 이는 우리 사회 일반에 만연한 젠더화된 노동 혹은 돌봄노동에 대한 저평가와 멸시를 반영한 발화이다.
장시간노동이 가능한 조건을 만든 이유가 뭔지 물어야
활동지원사 일반이 월평균 천만 원을 버는 직종은 당연히 아니다. 활동지원사의 월 근무시간은 편차가 크다. 일하는 시간만큼 급여가 발생하는 시간급제 노동자이고, 일할 수 있는 시간도 매칭되는 장애인에 따라 차이가 크다. 급여의 수준보다도 근무시간의 불안정성이 활동지원사에게는 더욱 큰 문제로 다가온다.
2020년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에서 발간한 “장애인활동지원사 노동·인권 실태 결과”에 의하면 설문에 응한 전업 활동지원사 월 근무시간의 최저값은 10시간이고 최대 597시간으로 편차가 심하다. 조사 당시의 전업 활동지원사 월평균 근무시간은 158.31시간이다. 2022년 수가 기준으로 평균 임금을 계산해보면 175만 원에 해당한다.
편차가 큰 근무시간 분포를 생각하면, 하루 24시간을 한 달 내도록 일하면 월 천만 원의 수입도 가능하긴 하다. 이렇게 근무하는 활동지원사들은 하루 24시간의 근무가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3개의 활동지원기관에 등록하여 근무해야 한다. 8시간의 근무는 A기관에서 근무한 것으로 기록하고, 다음 8시간은 B기관에서, 그 다음의 8시간은 C기관에서 근무한 것으로 기록하는 식이다.
이런 식의 노동형태가 개인의 차원에서도 제도적 차원에서도 추구할만할 노동형태는 아니다. 실제로 장시간 노동을 하는 조합원들은 결국 몸이 아파서 그런 노동을 유지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이런 노동형태에 대한 비난을 개별 노동자가 떠맡아야 할 문제일까? 나는 이런 식의 노동형태가 가능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따져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애초부터 이런 노동이 가능한 조건을 만들어둔 이유는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부와 기관의 공모, 노동자 권리의 소멸
활동지원사가 센터를 여러 개 등록하는 데에는 정부와 활동지원기관의 암묵적 공모가 있다. 제도 법제화 이전에 활동지원사는 1개의 사업장에만 속할 수 있었다. 활동지원사가 수행한 근무는 모두 한 명의 ‘사장님’ 밑에서 이루어진다. 근로기준법은 사업장을 기준으로 적용되고, 법률상 법정근무시간 8시간을 넘어가는 근무시간은 연장근무수당을 지급해야만 한다. 하지만 활동지원제도가 법제화되면서 활동지원사 또한 여러 기관에 등록할 수 있도록 정부가 규제를 풀었다. 정부의 핑계는 장애인이용자들의 선택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라고 말했지만, 사실 이런 식의 선택권 보장은 장애인이용자들이 기관을 선택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실현이 가능했다. 이러한 변화의 실체는 노동자의 권리를 찢어 없앨 수 있도록 길을 열어둔 것이다.
활동지원기관들은 소속 활동지원사들의 근무시간을 여러 기관으로 찢어 나누기 시작했다. 활동지원사는 같은 장애인 이용자에게 같은 서비스를 제공하면서도, 여러 곳(활동지원기관)의 소속이 되어야만 했다. 결국, 근무시간은 사업장의 개수만큼 나누어져 계산되었고, 노동자가 더 받아야만 할 법정수당도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기관들은 이러한 노동시간 찢기를 자신들과 친한 중개기관들끼리 서로 나누며 진행하였고, 그들은 이러한 연계를 통해 월 서비스 총 시간(곧 수익)은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조치들은 현재에도 활동지원기관들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다른 센터가 다른 노동자를 파견하면 활동지원사의 장시간노동도 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문제는 인력을 구하기도 힘들뿐더러 장애인이 원하는 수준의 서비스를 받기가 힘들다는 문제가 있다. 장애인의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익숙한 1명의 활동지원사가 계속 서비스해 주기를 바라는 경우들이 있다. 행정사무관도 이런 경우들을 언급했다. 하지만 나는 1명의 활동지원사만을 고집하는 장애인이용자들의 욕구가 인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 단 1명의 활동지원사가 아프거나 사고로 인해 근무할 수 없게 된다면, 그 활동지원사에게 의존되어 있던 장애인의 삶은 순식간에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립은 의존으로부터의 탈피가 아니라 의존의 선택이자 분산이라고 탈시설 자립생활운동 활동가들은 말한다. 1명의 익숙한 활동지원사가 아니라, 자신이 편안히 서비스 받을 수 있는 여러 명의 활동지원사가 확보되는 것이 장애인 삶의 안정성 측면에서도, 활동지원사의 건강권 측면에서도 올바르다. 다른 활동지원사가 와서 비슷한 수준의 서비스를 제공한다면 장애인이용자는 그 단 1명의 활동지원사를 고집할 이유가 없다.
장애인이 1명의 활동지원사가 계속 서비스를 제공해 주길 바라는 이면에는 장애인 이용자가 바라는 최소 수준의 서비스 정도를 보장할 수 없는 활동지원서비스의 불안정성, 교육시스템의 부재가 바탕하고 있다. 그리고 그 외에도, 24시간 서비스를 제공하는 활동지원사들의 경우 다른 활동지원사들은 엄두 낼 수 없는 압도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경우가 많은데, 특장차를 구매하여 장애인에게 차량서비스를 제공하거나(운수사업법 위반), 석션(의료법 위반) 등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장애인이 이런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활동지원사를 구하는 것은 당연히 어렵고, 대체불가능한 지위에 있는 활동지원사는 장시간노동이 불가피해진다. 이런 경우들도 이동권이 보장되지 않는 현실과 일상적 의료서비스가 제공되지 않는 현실이 바탕하는 것이다.
종합해 보자면 인력을 구할 수 없는 장애인의 필요와 법정수당 지급을 회피하고자 하는 활동지원기관의 이해, 생활에 필요한 임금을 충당하고자 장시간노동을 선택하는 노동자의 결정, 거기에 인력수급 안정성 확보와 교육시스템 구축이라는 과제를 회피하고자 하는 정부의 의지 속에서 월 천만 원 수익의 활동지원사가 가능하게 된다. 이 천만 원의 수익도 사실은 노동자로서는 삭제된 권리의 결과물이다. 장시간노동을 하고 돈을 많이 벌고자 하는 노동자의 선택은 이 전체 과정에서 얼마만큼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을까.
이러한 조건들을 무시한 채 돈을 많이 버니까 입을 다물고 있으라는 식의 발화를 받아들일 수는 없다. 무엇보다 정부와 행정관료가 이런 식의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정말 그것이 문제라면 여타의 정부 일자리 사업처럼 노동자는 1개의 일자리 사업에만 참여할 수 있도록 제한하면 된다. 하지만 왜 그렇게 하지 않을까? 어떤 난리가 날지 눈에 뻔하기 때문이다.
노동혐오 장애혐오
하는 일 없이 돈을 번다는 인식의 매개에는 심야 서비스에 대한 인식이 끼어있다. 사람이 잠을 자지 않고 일을 할 수는 없으며, 장애인이 잠자는 동안에 일하지 않으면서도 돈을 번다는 인식이다.
이런 인식은 정부나 사회보장정보원 부정수급 방지 교육자료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사회보장정보원 교육자료에는 사회서비스 사업별 주요 이상 결제 유형으로 모든 서비스에서 심야결제를 꼽고 있다. 밤에 서비스한다고 보고하는 노동자는 부정수급 의혹을 받고 이와 함께 밤에 서비스 받는 장애인은 상시로 부정수급 의혹을 받으며 정부의 감시 대상이 된다. 복지 수급권이 권리가 아니라 낙인이 되는 데에는 이런 논리들이 작동한다.
달리 말하면 ‘장애인이 잠을 자는데 일을 할 리가 없잖아’는 ‘잠자는 시간에 서비스 받을 리가 없잖아’와 한 쌍의 인식이다. 이를 보면서 서비스 대상자에 대한 인식과 노동자에 대한 인식의 연결고리를 본다. “유전병자 한 명이 60살까지 살기 위해 평균 5만 마르크의 비용이 듭니다.”라는 나치의 발화와 장애인 권리 예산을 깎아내리는 정부의 인식이 다르지 않다고 장애인 인권운동은 말한다. “장애인활동지원사가 1년 버는 돈이 1억 2천입니다”라는 발화는 장애인에게 투여되는 국가 예산이 그를 웃돈다는 것을 함의하기도 한다.
활동지원사노동자와 장애인당사자가 이런 논리에 동조해야 할까? 일반적-통계적 사실에 부합하지도 않을뿐더러,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도 적절한 인식은 아니다. 예산 논리에 매몰된 정부 관료가 이런 발언을 하면 차라리 규탄을 할 수 있지만,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농담으로 한다는 사실은 견디기 힘들다. 이런 이야기 농담으로라도 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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