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에 쓴 농담

어제 한 친구를 만났는데

내가 요새 가장 강하게 동조하는 정서가 억울함이라는 내용의 글이 내 블로그에 있다고 했다.

아무래도 그런 기억이 없었는데

아마 이금이 씨 책에 관한 글에서

'내가 가장 강하게 동조하는 정서가 억울함'

이라고 한 대목을 얘기한 것 같다.

 

하지만 이건 내가 '요새' 동조하는 정서는 아니고

내가 '원래' 가장 강하게 동조하는 정서다.

이걸 주제로 2004년쯤 글을 하나 쓴 게 있다.

문득 그 글이 생각나 퍼 온다.

 

-------------

 

정신없던 지난 한주를 보내고
이제 원래 하고 있었고 하려 했던 일들을 시작하려 한다.
특히 '정신분석'.
어제 드디어 따로 노트도 만들고 그린 책도 다시 읽기 시작했다.
당분간은 이거 정리하는 데 주로 힘을 쏟을 참이다.

그린 책을 다시 읽다 보니
'dead mother complex'라는 게 나온다.
죽 읽다가 이걸 '둘리 컴플렉스'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났다.

많은 이들이 기억하겠지만 둘리는
느닷없이 빙하기를 맞아 엄마 공룡과 이별한다.
이때 엄마 공룡은 급속냉동되어 얼음 속에 갇힌다.
즉 '매장'된 것이 아니라 살아 생전의 상태 그대로
그렇지만 차디차게 얼어 접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니 둘리에게 있어 엄마는 죽은 것도 그렇다고 산 것도 아니다.
이게 그린이 말하고자 하는 상황과 유사하지 않은가?

물론 이건 농담이다. 즉 진지하게 하는 얘기는 아니다.
따져 보면 사태에 적합한 개념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굳이 이런 농담을 하는 것은
내가 느끼기에 상황 면에서 좀 유사한 점이 있을 뿐만 아니라
둘리라는 단어를 통해
'dead mother complex'에 대한 나의 관계를
설정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어릴 때는 그렇게 눈물이 많았으면서
어느 시점 이후에는 전혀 울지 않게 된 후
난 그 사이에 내가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런 점이 있었겠지만
어릴 적 나를 울게 만들었던 이야기들을 떠올리면서
실제로는 내가 그렇게 많이 변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즉 나는 원래부터 '슬퍼서' 울어본 적은 거의 없다.
다만 '서러워서', '억울해서' 울었을 뿐이고,
그러니까 그런 상황을 당한 주인공과 동일화될 때만 울었다.
일종의 '(피해)망상'인 셈이다.

내 기억에 난 '둘리'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그 한 편 동안 세 번 이상을 울었고
다시 볼 때마다 또 울었다.
내가 이 애니메이션을 볼 때쯤엔
눈물이 많이 줄어들었음을 감안할 때 좀 이례적이다.
주로 둘리가 잘못한 게 아닌데 누명을 쓰고 쫓겨나는 장면
에서 울었는데, 이는 망상의 연장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둘리가 그런 상황을 겪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엄마와 그런 식으로 이별했기 때문이다.
그는 엄마와의 이별이 너무 갑작스러웠기 때문에
그리고 그 이별의 방식이 외양을 보존한 냉동이었기 때문에
엄마를 '애도'하지 못한다. 그는 항상 엄마가 살아 있다고 믿고,
자신이 납득할 수 없는 부당한 대우를 당할 때마다
'1억년전 옛날이 너무나 그리워 보고픈 엄마 찾아 모두 함께 떠나'
려고 한다. 즉 그는 '죽은 엄마'에게 사로잡혀 있다.

난 혹시 그런 둘리와 동일화했던 게 아닐까?
물론 이건 농담이다.
이 같은 둘리의 상태는 그린의 개념과도 많이 다르고
(일단 둘리는 엄마와의 '과거의 행복'을 기억하고 있지만
'dead mother complex'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엄마의 갑작스런 변화 때문에 과거 자체를 상실한다.
그/녀들은 엄마와 이별하면서 사랑의 능력과도 이별한다)
또 내가 둘리의 그런 상태와 동일화했다는 것도 미심쩍다.
(이건 그냥 과거 망상의 연장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도 이렇게 하는 것은
'재미'있기 때문이다. 아마 이 사실 자체가
내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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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8/12/08 21:21 2008/12/08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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