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적 아나키즘 비판의 쟁점

퀜틴 스키너의 책을 읽다가 이 문제에 관한 생각을 연장해 본다.

 

<과연 고대 공화국과 같은 민중 국가의 신민들만이 자유롭고 왕국의 신민들은 모두 노예일까? 홉스의 자유론은 바로 이 물음에 대한 답이었다. 앞서 보았듯이 홉스에 의하면, 인간이 신민이 된다는 것은 국가 주권에 의해 제정된 법에 의해 안전을 보장받으면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하면 국가의 신민으로 산다는 것은 법에 종속해서 산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유는 간섭과 방해의 부재를 뜻하는데 법도 인간의 행동을 간섭하고 방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민의 자유라는 것은 법이 간섭하지 않고 방해하지 않는 것을 하는 것뿐이다. 즉 신민의 자유에 대해서 논한다는 것은 바로 법의 침묵에 대해서 논하는 것일 뿐이다.>

- 조승래, 「노예의 자유를 넘어서」, pp. 41~42 (퀜틴 스키너, 『퀜틴 스키너의 자유주의 이전의 자유』, 푸른역사, 2007 수록 논문)

 

자유와 법(따라서 국가)의 관계는 무엇인가?

홉스(를 읽는 스키너를 읽는 조승래)에 따르면 이 문제를 사고하기 위해선

자유 개념을 분할해야 한다. 여기서 이사이아 벌린이 말한 저 유명한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의 구별이 등장한다.

전자가 '~으로부터의 자유'라면, 후자는 '~에 대한 자유'다.

 

주지하듯 홉스는 자연 상태와 시민/사회 상태를 구별한다.

전자에서 인간은 자유롭지만 그만큼 위험하다.

이 때문에 자연 상태에서 누리던 자유의 일부를 양도하고 국가(의 법)에 신민으로 종속되면서

그 대가로 안전을 얻는 것, 그것이 바로 시민/사회 상태다.

후자에서 인간은 덜 자유롭지만 그만큼 더 안전하고,

이로써 국가라는 필요악에게 양도한 자유 이외의 나머지 자유를

국가의 보호 아래서 안전하게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이

바로 홉스의 기획이다.

 

홉스가 볼 때 자연 상태가 끝난 상황에서 적극적 자유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소극적 자유일 뿐이며,

국가(의 법)에 대한 인간의 관계는 말의 강한 의미에서 복종적 관계다.

대신 국가(의 법)이 간섭하지 않고 침묵하는 곳에서 우리는

정말로 안전하게 소극적 자유, 곧 '국가(의 법)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홉스의 이론이, 아마도 그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말의 강한 의미에서 '이론적 아나키즘'으로 전유될 수 있음을 발견한다.

예컨대, 국가를 '필요악'으로 받아들이면서, 그러나 소극적 자유의 공간을 확대하기 위해,

국가를 최소화하자는 자유주의적 기획은

홉스의 문제설정 안에서 정당한 권리를 갖고 전개될 수 있는 하나의 선택지다.

또, 국가를 '필요악'으로조차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국가가 존재하는 한 우리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역설하며

(이는 주로 소극적 자유 개념을 발본화하는 것이다)

국가의 폐지를 주장하는 정치적 아나키즘적 기획 역시

홉스와 정반대의 결론에 이르는 것이긴 하지만 마찬가지로 동일한 문제설정 안에서

전개될 수 있는 또 하나의 선택지인 것이다.

 

과연 맑스주의는 이 같은 이론적 아나키즘의 변종들과 다른

정치적 기획을 제시했는가? 나는 발리바르의 질문을 이렇게 이해한다.

예컨대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은 정말 자유주의와 구별되는가?

또 다양한 꼬뮌/평의회 개념은 어떤 점에서 정치적 아나키즘과 구별되는가?

혹 맑스주의는 정치적 아나키즘에 대해서는 자유주의적 비판을,

그리고 자유주의에 대해서는 정치적 아나키즘에 따른 비판을 수행하면서

끊임없이 동요하지 않았는가?

 

물론 이 동요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이는 자유주의와 아나키즘으로 환원되지 않는 자신의 정치적 거점을 찾아 내려는

필사적인 노력일 수 있으니까. 그렇다고는 해도

그 거점을 확보하지 않는 한 맑스주의가 어느 한 쪽으로 끌려갈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우리는 그 동안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잘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런 것들 외 어떤 이론적/정치적 자원이 필요할까?

그 중 하나가 '공화주의'일 수 있다는 것이 요즘 나의 생각이다.

물론 공화주의 역시 극히 다양한 판본을 갖기 때문에

이는 즉각 많은 오해를 낳을 수 있다.

예컨대 칸트는 민주주의에 대한 '테르미도르적' 대안으로 공화주의를 정의했고

남한의 공화주의는 최장집을 필두로 한 공화주의 우파의 헤게모니 아래 있다.

대부분의 공화주의자들은 '인간의 자의적 지배'의 대안으로 '법치'를 강조한다.

 

그렇기는 하지만

발본적 비판을 전제로 한 공화주의의 좌익적 전유 쪽에

나는 많은 가능성이 있다고 점점 확신하게 되었다.

발리바르가 헤겔을, 아렌트를, 또한 마키아벨리와 스피노자를,

비판을 전제로 점점 더 많이 얘기하는 것을 나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어쨌든 이들은 (이런 표현을 쓸 수 있다면) '정치주의'의 전통에 서 있으며

그 곳을 우리가 좀 더 탐색해야 한다는 것이 지금 나의 잠정적 결론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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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8/11/29 14:58 2008/11/29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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